헌팅시즌 (1)
남미- 페루에 위치한 한 허름한 도시.
아마존 중심부에 위치한 심연의 영향을 받아 거대한 침식지대가 되어버린 영역을 앞에 두고, 세로데파스코라 불리는 그 버려진 도시는 오랫동안 헌터와 공략자들이 정비를 거치는 거점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렇다 보니 접경지의 난민들이 살아가는 세로데파스코의 도심 속에는 공략을 위해 방문한 초인들의 열의 또한 뒤섞여 있었고, 다시 마석을 캐다 팔기 위한 헌터들의 거친 숨결까지도 함께 섞여 있었으니- 그곳은 공략자도, 헌터도, 빈민도, 혹은 다른 누군가도 제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누군가는 침식에 맞서기 위한 전장으로.
누군가는 재화를 얻기 위한 사냥터로서.
그리고 또한.
누군가는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로서.
“시발···! 대체 저 새끼는 뭐야?!”
처음 버려진 이후- 수십 년의 세월에 거쳐 수많은 인파의 발길이 닿으며, 도시는 유령도시가 아닌 나름 거대한 규모의 도시로 발전했으니. 그 덕분에 세로데파스코는 마인들에게도 최적에 가까운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법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이자, 그러면서도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일체의 관심을 갖지 않는 곳.
상당히 넓은 범위의 도심지가 형성되어 있으면서도, 그 모든 곳에 침식이 스며들어 그림자를 감지하는데 혼선이 빚어지는 곳.
온갖 초인과 빈민들이 뒤섞여 있는 곳.
“갑자기 어떻게 알고 대체···!!”
그러므로- 그곳에는 당연 마인을 사냥하기 위한 블랙리스트 헌터도, 집행기관의 집행자들도 수시로 방문하는 편이었지만 어지간해서는 마인들이 발각당하는 일은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외형이 등재된 인물이라면 모를까, 지금 거리를 내달리고 있는 마인처럼 태어날 때부터 접경지에서 살아와 신원이 존재하지 않는 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기에.
──────────────!!
“크······ 크아아악···!! 씨이발!!”
난데없이 저를 향해 쏘아진 빛의 탄환은 마인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을 따름이니, 마인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에선 침식의 탐지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텐데 지금 자신을 공격하는 저 망할 새끼는 어떻게 저를 감지해냈다는 말인가?!
자금을 모으기 위해 마석을 팔러 나왔다가 위험에 처하게 된 그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
칙칙한 빛깔의 로브 코트를 착용한 채, 그대로 후드까지 푹 눌러쓴 남자의 모습은 육안으로는 제대로 엿보이지도 않았으니 마인은 그 모습에 제 입술을 깨물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인지 왜곡까지 걸린 비싼 후드를 뒤집어쓴 채, 접경지에서 마인을 사냥하는 놈들은 오직 단 한 부류뿐이었으니 말이다.
“이··· 이 개 같은 집행자 새끼들!!”
“닥쳐. 머저리.”
븨잉-!! 마인이 욕설을 내뱉음과 동시에 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 줄기 빛과 함께 마인의 어깨를 꿰뚫었고,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그 몸에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크윽··· 크악!!”
마치 찐득한 먹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침식에 물든 마인은 그림자를 토해냈다.
“네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다. 아는 것을 뱉고 깔끔하게 죽을지, 아니면······ 이대로 천천히 너의 한심함을 되새기며 죽어갈지.”
“큭, 크윽···!! 뱉긴 뭘 뱉어 이 개······!!”
“그림자 교단. 접선했다고 하지 않았나?”
“뭐? 그걸······.”
그 말에 마인은 순간 고통마저 잊고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얼굴을 확인한 집행자- 진시우는 다시금 마력을 쏘아 보냈다.
“자, 잠··· 크윽!! 크아아아악!!”
마인의 입에서 다시금 비명이 토해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진시우는 그에 개의치 않고 우선 녀석의 팔다리부터 묵묵히 불태워나갔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블랙마켓에서 그림자 교단에 대해 떠들었던 녀석이 맞는듯했기에, 놈을 심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무력화시키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마인은 다짜고짜 그림자 교단을 언급하고는 제 팔다리를 망가트리는 진시우의 행동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 그는 고통 속에서도 상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고는 제 마지막을 실감하게 되었다.
단순한 헌터나 공략자라면 어떻게든 파고들 구석이 있겠지만, 저 백정 놈들에게는 그런 잔수작따위가 먹힐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큭!! 그, 그만!! 마··· 마, 말할게!!”
“······.”
추잡하더라도 삶을 연명하고 싶었기에 마인이 되었던 만큼, 마인은 다시금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제 본모습을 내비쳤다.
죽음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고, 삶은 좆같을지언정 누릴 수 있는 게 많았으니 그는 아직 죽음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 살려만 주면··· 다······ 크악!!”
“쯧. 꽝이었군.”
“크아아악!! 왜, 왜···!! 크으윽···!!”
──────────────!!
마인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진시우는 혀를 찼고, 그대로 영혼에 다획의 원을 그려내며 빠르게 마력을 증폭시켰다.
어지간한 공략자나 마수라고 해도 기겁할 만큼 방대한 규모로 증폭된 마력은 한순간에 빛의 마력으로 화해 마인을 내리찍었으니, 수호자급 마수도, 타천자도 아니었던 일개 마인이 그것에 버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므로- 단 30초.
카득··· 퍼엉-!!
그것이 비명을 토해내던 마인이 잿빛의 물결이 되어 터져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물론 마인은 그순간까지도 억울함과 분노가 휘몰아치는 표정으로 진시우를 노려보았으나, 그림자교단과 진정으로 얽힌 놈이었다면 저리 쉽게 말을 내뱉는다 할 순 없었기에 진시우는 망설임 없이 녀석을 토벌했다.
그로선 아무래도 제 몸값을 올리기위해 사기를 치고 다녔을거라 추측해볼 따름이었다.
“······괜히 시간만 날렸군.”
쯧- 진시우는 그 말과 함께 마력을 거둬들이곤, 그대로 일념혼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비록 이런 곳에서 주목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기에 마력을 증폭시켰으나, 지금도 주변에 자리한 허름한 흙벽 너머에선 겁먹고 몸을 숨긴 이들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난민들일 터.
진시우는 그 점을 상기하며 마력이 폭주하지 않게 천천히 상태를 조율했다. 혹시라도 만약의 사태가 생기면 안될 테니 말이다.
‘역시 불편해.’
비록 유천하의 대답이 미적지근했기에 우선은 혼자서 추적에 나섰지만, 그의 능력은 이런 데에서 전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괜히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혹은 제힘으로 온전히 감당하기 힘든 거물과 맞닥트렸다간 진시우로서도 여러 희생을 강제당하게 될 터였기에 그는 이런 곳에서의 교전을 대비해 유천하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것이었다.
유천하 정도의 실력자라면 주변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앟고 어지간한 놈들은 쉽게 제압하고, 사살하는 게 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
하지만 유천하가 갑자기 시간을 더 달라고 했던 만큼, 이제 와서 아쉬워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삶 또한 익숙해진 그는 마력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도 여전히 제 삶에 대해 생각할수록 밀려오는 짜증을 체감하면서.
마음 같아서는 전부 내던지고 싶긴 했다.
허나- 이 지긋지긋한 삶이 수시로 짜증을 불러일으킬지언정, 윤회의 굴레를 끊을 방법을 찾지 못한 이상 그는 죽을 수 없었다.
이 삶이 자신은 원하지 않는 것이었든, 이 이후의 삶 또한 자신은 원하지 않을지언정- 그는 죽음 뒤에 찾아올 새로운 ‘자신’에게 이 거지 같은 삶을 넘겨주고 싶진 않았다. 강제로 넘겨받게 된 전생의 기억이 그의 삶을 어떻게 망가트렸는지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죽지 못해 사는 삶이라면 어린 날의 원죄라도 사하기 위해 불태우는 수밖에.
“······좆같아 아주.”
진시우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새로운 마인을 찾아내기 위해 도심지를 향해 걸어갔다.
이 병신같은 전생의 기억이 그의 삶을 휘저어버렸을지언정, 적어도 영혼을 판별하는 것에서만큼은 도움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진시우는 이 침식에 잠겨가는 도시에서도 유일하게 마인을 구별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는 최대한 찾아볼 생각이었다.
유천하의 협조를 받아낸 이상, 그가 합류하기 전까지 최대한 그림자 교단의 꼬리를 찾아놓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꼬리를 타고 올라가고 올라가, 멸화급 주교까지 잡아 놈들에게 확실한 피해를 입히고 싶었다.
그날의 사건에 관계된 녀석들에게 그 대가를 돌려주는 것 또한 진시우 자신이 그날 죽었던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속죄였으니까.
그의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
“천하 너··· 요즘 좀 이상하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그 말에 나는 책을 바라보는 척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블릿을 두들기며 공부하고 있던 아리엘이 어느새 나를 향해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고, 갑자기 울려 퍼진 아리엘의 목소리에 옆에서 열심히 워치를 두들기고 있던 이하린도 그에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공감한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맞아요···! 요새 조금 이상하세요!”
“······제가 말인가요?”
“네! 저번 주부터 쭉 이상하세요···!”
이하린이 무언가 걱정이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처음 말을 꺼냈던 아리엘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가락으로 나- 정확히는 내 손을 가리켜보았다.
“천하 너, 지금 스터디 시작하고 한 페이지도 안 넘긴 거 알아? 계속 멍때리고 있었지?”
“······.”
“저번에 무련에 갔다 온 뒤부터 계속 수업 시간에도, 수련할 때도 멍때리는 것 같아 너. 맨날 무서운 표정으로 하린이만 쳐다보고.”
“······네?! 저, 저를요?”
그 말에 이하린이 언제 그랬냐는 듯 소스라치듯 놀라 하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나와 아리엘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아리엘은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마지막은 농담이야!”
“······매, 맨날 놀리시구.”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아리엘의 표정에 이하린이 뭔가 억울한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그래도 진짜가 아니라는데 안심한 듯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리엘의 말은 사실이 맞았다.
나는 요즘 이따금 차오르는 고민에 이하린을 바라볼 때가 이전보다 잦아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게 티가 많이 났던 모양.
“어쨌든! 처음에는 기말고사가 코앞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너 시험은 관심도 없지?”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아니긴 뭘. 그래서 뭐가 그렇게 고민돼?”
아리엘은 다 안다는 듯, 동시에 들어주겠다는 듯 작은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제게 말해보라는 듯 말을 건네왔다.
물론 그 옆에 있던 이하린도 아리엘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는 듯 눈을 빛내왔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으니까 공부나 해.”
아무리 그렇다 한들 저 둘에게 그 승천자 아크샤가 나를 찾아와선, 세계가 몇 번이나 멸망했으니 회귀자를 찾아달라며 업륜까지 하나 넘겨주고 갔다 말하면 어떻게 될까?
회귀와 관련된 건 둘째치고서라도, 업륜과 아크샤에 대한 부분만 이야기하더라도 두 사람이 어찌 반응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게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것입니다.
그 날의 기억은 내게도 분명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운 기억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이하린에게 회귀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던 것 까닭은,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서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한번 이야기를 시작해버린다면 지금까지 유지해온 이 관계에도 큰 변화를 생길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하린이 그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분명 그렇게 될 게 분명했다.
이하린은 자신이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흔쾌히 위험 속으로 뛰어들만한 순백의 선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러니 나는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크샤가 말한 시간으로도, 내가 아는 원작상으로도 시간은 충분했으니- 조금만 더 이하린과의 관계도, 그녀의 마음도 지금보다는 더 단단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3년, 아니 이제는 2년에 더 가까워진 남은 시간 속에서 나는 흐름을 만들고 싶었다.
흐름에 이끌리기보단, 내가 선택함으로써.
만상세계라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던져준 기회 속에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복잡하게 뒤엉킨 흐름을 어떻게든 온전히 나의 목표를 위해 뒤틀어 나갈 생각이었다.
우선 초절정에 오른 뒤- 심검의 단초를 잡아 나 자신의 무력을 바로 세우고, 가장 확실한 방법을 통해 귀환의 방법을 마련한다.
내 대전제는 처음부터 쭉 그대로였다.
그저 난데없었던 아크샤의 방문도, 그 끝에 돌아온 갑작스러운 부탁과 기대도, 예기치 못했던 선물까지도- 모두 심상치 않은 것이었으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 뿐.
지난 일주일간 들었던 충동은 그저 그 와중에 가장 위험하지만 빠른 길을 선택하고 싶단 생각이 이따금 들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생각할 부분이 많을 뿐이지, 딱히 심적으로 피로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 너 거짓말 잘못하는 거 알아?”
“맞아요! 천하 씨는 거짓말할 때마다 눈을 두 번 깜빡거리세요! 이제는 다 알아요!”
“······응? 진짜?”
“네! 아마··· 도 그럴걸요? 아, 아마두?”
두 사람에겐 그런 느낌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걱정된다는 듯 말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퉁퉁 튀는 대화의 어조에 나는 가볍게 호흡을 내쉬곤 그녀에게 말을 건네보았다.
“······하린 씨까지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하린 씨까지···? 나는 무슨 취급이야?”
그러자 이하린이 아닌 아리엘이 엉뚱한 부분에서 반응했고, 나는 마찬가지로 답했다.
“너는 원래부터 이상한 소리 잘하잖아.”
“······너무해!”
물론 아리엘은 충격을 받았다는 듯 과장되게 입을 틀어막더니, 그리고는 이내 오랜만에 사방에다가 마력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한데- 그 모습이 신나 보였다면 착각일까?
[차별이다! 사람을 차별한다! ヽ ⋋_⋌ ノ]
[속보! 등천자 유천하 막말 논란? 동급생 아리엘 ‘큰 충격을 받았다’ 심경을 토로······.]
[진심 어린 사과가 없을 시 전쟁까지······.]
후웅-! 그에 나는 한순간에 허공에서 조형되는 마력 문자를 가볍게 흩어버린 뒤, 아리엘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을 뿐.
“아, 아직 덜 만들었는데···!”
승천제 때 한계 이상의 마력을 제어해봐서 그런지, 어째 이전보다 속도와 정밀도가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났다는 느낌이었지만 그걸 드러내는 게 이런 순간뿐이었으니 이것 또한 어찌 보면 참 아리엘답다고 할 수 있었다.
그저 딱히 받아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천하가 나 무시해···!”
“네? 아, 그, 그··· 아.”
장난을 안 받아주자 아리엘이 이하린을 껴안고선 나를 노려보았지만, 조금 전 내 말이 민망했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졌던 이하린은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만을 뻐금거렸다.
물론 아리엘도 딱히 무슨 대답을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었는지 이하린이 대답을 하든 말든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의 주제를 잊고 이하린을 괴롭히는 거로 신경이 넘어갔다는 말이었다.
“하린인 자기 일 아니라고 모른 체하구!”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그···.”
“내가,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데!”
“아, 아니 무, 무슨 말씀이세요···?!”
뭐라고 해야 할까··· 참 바보 같은 풍경.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멸망이니, 회귀니 뭐니를 고민하고 있다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어째 신경이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저런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크샤에게 들었던 말들이 더 대비가 되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원작’과 원작, 그리고 현재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레 어떠한 생각도 같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만약, 정말 세계가 멸망한 후 시간이 되돌아온게 맞다면······ 그 세계선에서의 이 아이들은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신경이 다시 조여진다.
“······.”
나는 왼손에 새겨진 업륜, 마력으로 모습을 숨겨놓은 걸 만상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른손의 새겨진 2획, 왼손에 새겨진 1획.
비록 내 행동의 결과로 새겨진 오른손의 2획과는 다르게 왼손의 업륜은 아크샤를 통해 인도받았지만, 왼손에 새겨진 업륜 또한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내 것이 되었다.
그 순간 들려왔던 만상세계의 목소리를 생각해보자면, 이건 이 세계의 상식을 생각해보자면 그건 분명 일어나기 힘든- 일종의 오류에 가까운 현상이었겠지만 아크샤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 내게 이것을 양도해주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 들려온 만상세계의 목소리가 왠지 그 상황을, 아크샤가 내게 부탁한 내용을 긍정하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회귀자를 찾아야 한다라.’
회귀자의 존재가 도대체 어떻게 세계의 멸망과 직결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떠오르는 미래를 막기 위해서도, 내가 무사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알 수 없는 변수는 사전에 최대한 치워두긴 해야 했다.
그러나.
‘회귀자, 원작, 만상세계······ 무림.’
아크샤에게 들었던 말들과 그가 내게 남기고 간 말. 그리고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하린에 대한 생각과 무림에 대한 고민. 그 모든 생각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초절정의 경지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애초에 이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나는 회귀자를 찾을 방법 따윈 몰랐고, 내가 아는 건 내가 더 강해져야만 한다는 것.
상대가 마수가 되었든, 마인이 되었든, 언젠가 도래할 심연이 되었든, 정체 모를 회귀자가 되었든, 결국 최종적으로는 나 자신이 더 강해져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초절정에 이르는 것만이 아니라, 추후 무림에 돌아가 무사히 검혈마제를 베어낼 수 있을 만큼, 그걸 위해 심연이 도래하는 세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쟁취할 만큼, 어떠한 변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그러니- 이것 또한 만류귀종이었다.
수없이 갈라진 고민의 줄기와 물결은 그렇게 나 자신의 정진으로 귀결되었으니까.
결국에는 그런 것이었다. 내가 강해지고, 강해져서 해결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돌아갈 방법을 알게 되어도, 이하린이 보내온 호의에 대가로 심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해결해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면 이렇게 쓸데없는 고민 속에 속을 썩일 이유가 있겠는가?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다 하였으니, 고민할 시간에 칼이나 한 번 더 휘둘러야지.
그러므로.
우웅- 나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진동. 이제는 익숙해진 상대에게서 온 메시지의 내용을 살펴보며, 이번엔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림자 교단의 꼬리가 발견되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시작해도 상관없어- 전송을 누르며, 동시에 아직도 내 앞에서 둥그스름한 소리를 하며 장난을 치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일주일간의 고민을 일단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회귀자를 찾을 수 없다면, 우선 알고 있는 변수부터 제거하면 그만이었고- 빠르게 다음 경지로 올라서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8성과 무형검. 우선 그곳부터.’
나는 그렇게 다음의 고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