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68화 (168/205)

인과조류 (3)

회귀回歸- 그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크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회귀자’라는 단어에 담긴 맥락은, 분명 난데없었을지언정 유천하에게만큼은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생轉生, 빙의憑依, 환생還生······ 회귀.’

회귀라는 그 원어가 가진 뜻은 둘째치고서라도 유천하가 이제껏 겪어온, 그리고 마주쳐온 수많은 비현실의 요소와 그 사이에는 일련의 흐름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삶을 얻어 이곳에 온 그에게.

소설 속 세계에 들어온 이하린에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진시우에게.

비록 유천하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건 오직 저에게 일어났던 새로운 삶뿐이었지만, 그 새로운 삶에 드리운 종막 속에서 그는 만상세계에 부름을 통해 이곳에 도달하였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만상세계와 이 세계에 자리한 수많은 정보를 통해 그는 원작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저 나름대로는 조심하려고 하지만 주의 깊게 지켜보면 항상 엉성했던 이하린을 바라보며 소설 속에 들어온 빙의자를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그렇게 알게 된 정보를 토대로 그는 원작에 존재했던 또 다른 이레귤러의 존재를 인식하였고, 그걸 확신할 순 없을지언정 만상의 눈은 이질감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강렬하고, 거대한 존재감을 내비치는 진시우의 영혼과 그곳에 새겨져 있는 다획의 원을 관측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회귀라면······ 무엇으로부터 말입니까?”

환생의 존재는 유천하 자신이 증명하고, 빙의의 존재는 이 소설 속 세계와 이하린의 행동이 증명하고, 전생의 존재는 진시우의 영혼이 증명한다면······ 그렇다면 회귀는?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만큼, 그건 그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허나, 지금 아크샤에게서 흘러나왔던 회귀라는 말이,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맥락으로 사용된 게 맞았다면 그걸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천하는 한순간에 휘몰아친 생각의 홍수 속에서 조용히 되물어보았다.

그리고.

“시간. 시간에서 되돌아왔냐는 말입니다.”

“······.”

아크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유천하는 자신의 생각한 맥락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동시에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생각했다.

아크샤가 말한 ‘회귀자’의 존재는 실존하는 건가? 아니면 일종의 가설인가? 혹은 원작에 회귀자가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아예 원작에 존재하지 않았던 요소인 걸까? 유천하의 사고가 빠른 속도로 기억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세상에는 인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저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표정 위로 내비치고 있는 유천하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크샤의 입이 열리더니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건지, 아니면 사실을 들켜서 당황한 거지 알 수 없는 유천하의 반응에 그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으니, 아크샤는 나직이 읊조렸다.

“하지만 세계에는 수많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일개 개인이 그 인과의 흐름을 느끼기란 무척이나 지난한 일입니다. 어지간해서는 알 수 없는, 그런 부류의 것이니까요.”

“······.”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에 정명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 생명의 수가 수십억이 넘어가니, 과연 이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러한 영향이 닿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알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 말과 함께 아크샤는 제 손을 들어 올렸고, 손은 가볍게 곡선을 그려냈다.

“저는 천운을 통해 시간이라는 관념에 닿을 수 있었고, 그것을 나침반 삼아 다른 분들은 볼 수 없는 세계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물 흐르듯 허공에 나부낀 가벼운 손짓.

우웅-! 그러나 그 손짓이 흔들릴 때마다 주변의 풍경에 무언가의 형상, 정확히는 반투명한 노이즈가 겹쳐지기 시작했으니 유천하는 당혹스러운 가운데 그것을 바라보았다.

평온해 보이는 거실의 어둠 속에 겹쳐지는 반파된 아까의 난장판을. 아무도 없이 텅 빈 낮의 풍경을. 창문 바깥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며 힐끗거리는 이하린과 아리엘의 모습을. 그리고 사카타와 다른 아이들이 모두 모여 시끄럽게 굴었던 어느 날의 풍경까지도.

키기기긱-!!

선명한 풍경 위에 겹쳐진 불투명한 색채, 그 모습들은 그의 기억에 있는 풍경이기도 했고,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천하는 이 광경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그렇게 교차했다.

“시간이란 관념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기에 저는 그 어설픈 잣대를 틀어낼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단순히 흔적을 관측해내는 것 정도라면 큰 인과의 부담 없이 생각보다는··· 쉽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덕분에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아크샤의 손이 한 번 더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냈고, 이내 어떠한 허상이 떠오른다.

반투명한 푸른색의 구형- 지구.

하지만 작게 떠오른 원형의 허상 위로 노이즈가 낀 무언가가 덧씌워졌고, 한 번 더 불투명한 색채가 덧씌워졌다. 그리고 다시 또 한 번. 계속해서 겹쳐지고 겹쳐진 형상은 어느새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또렷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노이즈가 끼어 일그러진 모습으로 말이다.

“······이건?”

갑작스러운 광경에 유천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아크샤를 바라보았고, 그에 아크샤는 유천하의 눈을 유심히 마주 보며 약간은 착잡함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돌려주었다.

“이것은 제가 추측해낸 예시일 뿐입니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겹쳐지는 시간의 흔적을 건져 올릴수록 확신이 들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계속 덮어씌워 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흔적이 만들어낸 불협화음이 갈수록 또렷해진다는 것을.”

특히- 아크샤의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허공에 떠올라있던 형상이 펼쳐졌다.

저 우주에서 바라보는 듯했던 지구의 형상에서, 점점 내려가고 내려가 대륙의 모습을 펼쳐냈고, 그 속에 있는 나라의 모습을 만들어냈으며, 다시 한 도시의 풍경을 넘어 거리의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이 순간.

“그중에도 눈에 띄는 비틀림이, 시간선에서 벗어난 인과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그 말을 제게 하는 이유는.”

“그 비틀림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유천하는 제 앞에 펼쳐진 거리의 풍경. 그곳에서 유일하게 노이즈가 끼어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말없이 아크샤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비밀에,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가깝게 다가왔다는 사실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아크샤가 한 말이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을 해보면서. 눈 앞에 펼쳐진 허상 속에서 수많은 이들에게는 불투명한 형상이 몇 개씩 겹쳐져 있었지만, 그 자신에게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러니까- 스처지나가는 진시우와 이하린의 모습 속에도 그러한 노이즈가 있었기에.

유천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은 분명 인과의 특이점입니다.”

하지만 아크샤는 그런 유천하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겹쳐지는 시간 속에 겹쳐짐이 드러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이전의 시간선과는 일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또렷합니다.”

“······.”

“원래대로 흘러갔을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순간에도, 동시에 다른 시간선에 일어났을 일들과 똑같은 부분에서도, 당신은 계속해서 또렷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으니······.”

“잠시.”

유천하는 우선 그의 말을 끊어냈다.

그건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황에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까부터 아크샤의 말 속에서 무언가의 맥락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회귀자, 시간선, 인과의 특이점.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내용이 유천하의 기억 속 정보들과 맞물려 거세게 휘몰아쳤다.

아크샤가 시간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들, 그곳에서 관측한 비틀림이 회귀자라는 존재로 이어지게 된 까닭을. 그리고 아크샤는 왜 자신을 회귀자라 추측하고 있는 것인지를. 그러면서도 그러한 아크샤의 추측- 그 맨 밑바닥에 깔린 맥락을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천하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겹쳐지는 시간선이라면······ 설마?”

유천하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그답지 않게 잘게 흔들렸고, 제가 처음 입을 열었던 순간부터 계속되고 있는 유천하의 모습에 아크샤는 잠시 입을 다물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 태도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이 판단이 이 세계에서 무척이나 중요하단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

“······.”

하지만 단순한 태도만으로 봐선 과연 무엇이 정답인지를 알 수 없었고, 만약 유천하가 저가 찾던 특이점이 맞는지를 깨닫는다 한들 그 뒤의 선택 또한 불투명한 미래였기에 아크샤로서도 이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단편적인 것 뿐이었고, 만약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면 지푸라기도 잡아봐야 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예. 생각하고 계신 게 맞을 겁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대체?”

“근거라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아크샤는 흔들리는 유천하의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제 판단의 근거를 들려주었다.

“침식은 사람의 인과와는 동떨어진 무언가입니다. 덕분에 저는 심연에 자리함으로써 원래라면 볼 수 없었을, 이미 현재의 세계에서 벗어난 인과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조금 전 보여드린 광경입니다.”

“······.”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라면 달라지지 않았을 갈래가, 현세에서 벗어난 인과 속에 일그러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 생각하십니까? 분명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멀쩡히 생활하는 도시에 멸망한 폐허의 모습이 겹쳐진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그러면서도 무언가의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는 그리 되물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말은··· 그렇다면······.”

“예. 그게 회귀자를 찾는 이유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아크샤는 유천하에게 저가 알아낸 진실을 들려주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관측함으로써 알아낸 충격적인 사실을.

“제가 관측할 수 있는 횟수만 해도 최소 3번. 몇 번의 실패를 겪어, 몇 번의 멸망을 되풀이함으로써 세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차가워진 목소리로 그렇게.

“세계는 이미 여러 번 되돌아갔습니다.”

그 말 속에 담겨있는 무게 만큼이나,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유천하를 바라보면서- 아크샤는 담담히 지나간 멸망을 읊조렸다.

***

아크샤는 시간이라도 멈춰버린 듯 얼어붙은 유천하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 자신은 이곳에 찾아와 이 말을 내뱉기까지 수없이 고민했었다. 과연 유천하가 저 자신이 찾는 특이점이 맞는지에 대해서, 동시에 그렇다면 이 선택이 옳은가에 대해서.

하지만 그가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사실은 이 세계에는 그 특이점- 회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고, 저 자신은 이미 다회차에 걸쳐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판단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아크샤로서는 그저 세계 곳곳에 자리한 일그러진 흔적들을 통해 지난 시간선의 일들을 추측해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자신이라면 이걸 알아낸 즉시 그걸 막기 위해 노력했을 거란 사실만을 짐작해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상세계가 저에게 들려준 목소리가 있었기에, 시간을 나침반 삼아 바라본 세계에서 엿보이는 풍경이 있었기에 이제 와선 아크샤도 그러한 추측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래서 저는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던 세계 속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엿보이는 존재가 당신이기에, 거기서 인과의 비틀림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관측되는 유일한 이레귤러. 유천하만이 그가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는 사실을 되뇌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

이 모든 게 유천하에겐 정말 난데없는 이야기로 들려왔고, 그러면서도 아크샤의 말을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를 깨달았기에 그는 한 번 더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당신이 보았다던 그 광경들이 과거의 장면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제 능력은 미시적이지만 시간에 닿아있습니다. 세계의 회귀 같은 거창한 일은 할 수 없을지언정, 제 능력은 시간의 흔적조차 구분 못 할 만큼 부족하진 않습니다.”

그 말을 하며 아크샤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그러자 주변에 다시 허상이 펼쳐졌다.

그것도 모든 게 부스러진 폐허의 풍경이.

“시간의 편린을 엿보면 엿볼수록 사람들에겐 몇 번에 걸친 삶이 겹쳐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딜 가든 그림자에 뒤덮인 세계의 풍경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

“······.”

“제 능력이 시간에 기반하고, 흘러간 과거와 이어지는 미래의 조각들이 끊임없이 엿보이니······ 그러면서도 그게 현재와 들어맞지 않는 흐름이라면 그걸 뭐라 해야겠습니까?”

아크샤의 말에 유천하는 이 공간에 겹쳐 있는 수많은 허상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이곳에서 생활했던 모습과 이곳에 겹쳐진 다른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에 겹쳐진 여러 겹의 허상. 마지막으로 폐허가 되어있는 주변의 풍경까지도.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제가 회귀자의 존재를 확신하는 명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만상세계. 제가 승천할 당시 세계는 제게 그리 속삭였습니다. 앞으로 찾아올 미래에서 세계를 되돌리는 자를 찾아야 이 침식의 멸망을 온전히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아크샤의 말까지 모두 듣고 나자, 유천하로서도 더 이상은 회귀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힘들었을 따름이었다.

비록 그게 믿기지 않을지언정, 분명 아크샤라는 인물과 그가 아는 원작을 조합해본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어떠한 가능성을 생각해본다면- 이건 그 자신으로서도 생각해볼 필요성이 충분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므로.

“······.”

유천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 얼떨떨한 정신을 빠르게 수습하고는, 이내 제 머릿속에 자리한 정보들을 모두 조합해나갔다.

저 자신이 이제껏 겪어왔던 일과 원작의 기억. 거기에 만상세계의 목소리와 아크샤가 보여주고 들려준 말까지 모두 합쳐보면서.

“그러니 다시금 묻겠습니다.”

“······.”

최소 3번의 멸망과 회귀, 만상세계.

아크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천하의 머릿속엔 무언가의 가능성이 떠올랐었다. 그리고 그건 만상세계라는 단어와 합쳐지면서 그가 이제껏 궁구해왔던 의문과 이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 모든 게 시작되었던 순간, 만상세계의 초대를 받았던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유천하는 이 세계가 현실임을 인지하였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만상세계는 무엇일까. 왜 자신을 이곳에 초대한 걸까. 왜 소설 속의 세계로 자신을 불러들인 걸까. 만상세계는 왜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걸까. 바로 그러한 의문점을 느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 필요로 했던 거라면?’

정말로 세계가 몇 번의 실패를 되풀이했다면, 그 인과가 자신에게 이어진 것이라면.

만약, 아주 만약 이하린이 저 자신이 쓴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원작 속으로 다시 자신이 들어오게 된 것에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건 과연 무엇이라 해야 할까.

그렇다면- 최초의 세계선에서 누군가가 실패했고, 그것이 실패했기에 이하린이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이라 가정한다면 어떠할까.

다시 그렇다면, 그렇다면 만약.

이하린마저 결국 실패했기에 만상세계는 새로운 가능성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에 유천하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 가정한다면······?

“유천하. 당신은 회귀자가 아닙니까?”

“······.”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전부 비약적인 가정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그저 제 손에 들어온 퍼즐을 억지로 짜 맞추려고 한 결과에 불과했고, 유천하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하린이 썼다던 ‘원작’과 자신이 읽은 ‘소설 속 주인공’, 그것을 읽은 자신이 들어와 있는 지금의 세계의······ 이 시간선.

유천하는 그걸 가볍게 여기기가 힘들었다.

전생자 진시우는 아무것도 모를 테고, 빙의자 이하린은 전생자와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사실 만큼은 이 세계에선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을 테니까- 이것만큼은 회귀자를 언급한 아크샤도, 소설 속에 들어온 이하린도 모르는 것일 테니까.

유천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을지언정,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아크샤로부터 무척이나 중요한 무언가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물론.

“저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 또한 그들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모든 것을 밝히고 공유하기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았지만, 반대로 이건 단순히 전부 숨기기만 해선 안 되는 변수였다.

유천하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존재한다면,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이 필요해질 터. 하물며 그게 이하린과 같은 존재가 아닌, 전혀 모르는 변수라면야?

이건 이하린에게도 따로 접근해봐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유천하는 그렇게 판단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제 추측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시간의 흔적과 인과의 흐름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당신이 회귀자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왜 당신의 인과가 비틀려있다는 말인가요.”

그러므로 유천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아크샤의 눈을 마주 보며, 이 상황에서 최소한의 신뢰를 사면서도 만약을 대비할 수 있는 기준이 어디일지를 생각해보면서- 유천하는 고민했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한 가지 사실을 지금 밝히기로 결정하였다.

“그건···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그게 무엇입니까?”

어차피 이미 아크샤는 자신의 행적에서 비틀림을 감지해냈다. 하지만 승천자인 아크샤라면 경계할 이유가 없었고, 또한 여기서라면 이 사실 정도는 밝혀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유천하는 빠르게 리스크를 판단하였다.

이곳은 그의 세계가 아니었고,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야 할 세계에 불과했으니까.

그렇다면 그로서도 거짓을 말하지 않고도 아크샤를 납득시켜 회귀자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이 세계기에 밝힐 수 없는 부분은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그 부분만큼은, 차라리 이하린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쪽이 더 합리적이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제가 환생자이기 때문입니다.”

유천하는 새로운 삶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그 사실을 제 입에 올려보았다. 자신의 삶에 얽힌 진실을, 그러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또 하나의 진실은 그 속에 감춰두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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