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조류 (1)
탁- 게이트를 나서자 발에 맞닿는 지면. 어느덧 시간이 자정을 넘기고 있었기에 게이트 관리소에는 직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한산한 분위기를 느끼며 며칠 만에 등천회랑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에 물건 하나 받아오겠다고 무련으로 떠나서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는 기분.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시간이었기에 나는 관리소에서 나오며 지난 며칠간의 일들을 하나씩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2학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이다.
‘우선······ 얻은 것은 암야.’
비록 받자마자 검제와의 일이 있었기에 아직까진 크게 활용을 못 했지만, 사실 암야의 기능만큼은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침식 영역에서 보낸 지난 며칠간- 자유자재로 형상을 변화시킬 수 있던 암야는 확실히 쓸모가 많았다. 업륜을 활용하면 변화되는 형질의 폭 또한 넓어졌기에 암야는 사실상 의복으로서의 용도만이 아닌 일종의 간이 침구류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했을 정도.
세세한 성능과 활용은 실전을 거치면서 천천히 적응해야겠지만, 솔직히 형상 변화와 자가수복만으로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또한.
‘생각해봐야 할 건 무형검의 단초.’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그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당겨올 이정표가 생겼다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결과였다. 원래대로라면 그저 혼자 고민하며 나아갔어야 했을 테니까.
물론 어차피 벽을 넘어 초절정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했다면 무형지기든 격공이든 어검이든 깨우치게 됐을 테지만, 적어도 그것을 엮어 심검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는 건 내게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내기와 의념의 경계를 허물어트린 세계.
그곳에 검의를 새겨 마음으로 휘두른다.
온전히 마음의 검을 베어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으로 검을 휘두르다 보면 언젠가는 그 머나먼 세계에도 도달할 수 있을 터. 그저 하나씩 궁리하며 나아가는 것 보다는 당연히 이정표가 있는게 편하지 않겠는가?
일단은 무언가의 단서를 얻은 기분이었다.
“······검의劍意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약간 묘하기는 했다.
낮에 검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검제는 내게 무형검을 한 번 더 시연해주고서는 그대로 다시 승천자 검제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지난 며칠간 검제와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 고민해보고, 혼자서 무형지기를 시도해보기 위해 조금 더 침식 영역에 남아 수련하다 보니 이 시간이 되어서야 회랑으로 돌아오게 되긴 했지만- 확실히 검제와 나눴던 대화는 내게도 도움이 되었을 따름.
특히 마지막에 검제가 내비쳤던 반응은 내게도 다시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내가 지나쳐온 길에 대해서도,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시조께선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였을지. 아버지는 과연 무슨 선택 끝에 지금 그러한 여정을 걷고 계시는지.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떻게 나아가게 될지까지- 이래저래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물론 검제에게도 말했듯이 내가 지나쳐온 여정도, 나아갈 여정도 나는 만족스러웠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겪었기에 나는 변화할 수 있었고, 아직 가지 못한 길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기에 그곳에 닿고자 하는 열망을 불태우며 충실한 나날을 보내왔다.
굳이 불만이 있다면 처음부터 내게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미 검혈마제에게 대가를 돌려줄 수 있었겠단 생각이 드는 정도.
하지만 이 또한 흘러가는 여정이었다.
“······.”
평온을 버렸던 내가 이러한 평화로운 일상에 던져졌기에 나는 번민 끝에 나를 온전히 비워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다시 스스로를 새롭게 채워나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계속 무림에 남아 있었다면 나는 이 순간 벽 앞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소교주로서의 의무를 받아들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다시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두름으로써 이곳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비워낸 끝에, 다시금 새로운 생각을 채워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내 일상에 자리한 이런 것들로부터.
[몸조심하시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나는 한 시간 전에 수신했던 메시지를 한 번 더 확인하곤 그대로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하린은 어찌 보면 이 세계에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원작과 귀환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고서라도,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 마주한 인간이면서도 다른 누구보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람.
신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 순수한 호의와 관심은 내게 낯선 기분과 번민을 안겨주었고, 그것은 다시 나를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녀를 도와주고자 내디뎠던 발걸음은 결국 나를 이 벽 앞으로 올라서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제게······ 너무나 소중하신 분이니까요.
내게도 이하린은 분명 새로운 파문이었다.
‘······이하린뿐만은 아니긴 하지만.’
물론 나라는 호수에 새롭게 조약돌을 던지며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와 무림의 분위기가 달랐기에, 환경이 다르기에 다른 모든 것이 그러했다.
이하린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기질을 따라 성정이 부드러워지는 경향이 있었고, 아리엘과 대화를 나눌 때면 다시 마찬가지로 그녀의 태도처럼 이따금 장난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찾아오곤 했다.
그건 다른 이들을 대할 때도 똑같았다.
리베르테나 마르네 같은 아이들을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조금은 마음 가는 대로 녀석들을 대하게 되고, 사카타나 진시우 같은 이들을 대할 때면 나 또한 같이 차분해진다.
나는 누군가에겐 예의를 갖췄고, 누군가에겐 스스럼없어졌으며, 또 누군가에겐 그저 평소와 같은 태도로만 대하게 되고 있었다.
내게 전해지는 만큼, 나 또한 마찬가지로.
“······.”
신교에서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존중하거나, 혹은 배척하거나.
내게 존중과 선망의 시선을 보내오는 이들에게 나는 소교주 유천하였을 테지만, 내게 두려움과 경계의 시선을 보내오는 이들에게 나는 소천마 유천하로서 존재했을 터였다.
그렇게- 이제껏 지나간 내 삶은 그 두 가지의 파문 속에서 단조 되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러지 아니했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부터, 같이 회랑에서 생도로서 생활하는 이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나를 제각각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은 대체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의아함이 들 정도로, 다채롭게 말이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나는 이곳에서 나는 새롭게 단조 되어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러한 두들김이 나를 더 예리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줄지, 아니면 너무 과해서 나를 무디게 만들게 될지, 그것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분명 무림에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이전보다도 더 많은 변화를 겪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니- 이러한 여정 또한 나쁘진 않았을 뿐.
한곳에 정체되는 것은 결국 멈춰 섬을 의미했고, 그 끝에 찾아올 결과가 무섭다고 걷는 것을 포기할 순 없지 않겠는가? 내가 끝내 어떻게 변화하든 그것 또한 나아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나아가고자 한다.
그 여정의 끝에서 내게 어떠한 길이 제시될지는 모를지언정. 독각의 부처일지, 번뇌의 마라일지. 천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벽 앞에서 멈춰 쓰러지게 될지, 그 모든 것이 고민이 될지언정 분명 그러했다.
그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었으니까.
“······.”
어째, 다시금 혼자가 되어 일상으로 되돌아오니 번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느낌.
검제와 무학의 견해를 나누며 검의를 찾고자 했을 때는 미뤄두었던 생각들이 저 밤하늘의 별처럼 하나씩 떠오르고, 다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피곤하군.’
지금만큼은 조금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생각도 같이 떠올랐다. 아마도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무학에 대해 고민했던 탓이지 않을까?
심경이 복잡해지니 다시 그녀가 생각난다.
이하린은 그 인상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를 뭉그러트리는 재주가 있어서, 그 옆에 있다 보면 그녀의 기질을 따라 많은 것이 둥그스름 변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민도, 상념도, 무거웠던 기분마저도 말이다.
지금도 이하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옆에서 약간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할 걸 생각해보면 작게나마 웃음이 나올 것 같았으니, 참으로 이하린은 이하린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 속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같은 시기에 화이트라인에 올라왔던 만큼 그녀와 내 숙소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고, 숙소를 향해 돌아가고 있는 내 시야에는 어느덧 내 숙소도, 이하린의 숙소도 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물론 평소 이하린의 생활방식을 생각해보자면, 특히나 요즘 들어 더 심해진 열의를 생각해보자면 이제 막 자정을 넘긴 만큼 아직 수련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렇기에- 그저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
“······.”
바로 그 순간- 나는 창문 너머에서 커튼을 치려던 이하린과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웬일로 이 시간에 숙소에 들어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할당된 백색의 집 안에서 그녀는 막 세수를 하고 나온 모양인지 헤어밴드로 이마를 깐 채 그대로 커튼을 부여잡고선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 천하 씨?!
촤르륵-! 무언가 반가움이 깃든 음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와 반대로 빠르게 창문에 커튼이 쳐졌고 그 암막 너머에서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빠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이하린을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절묘하게 마주칠 줄은 몰랐고, 그녀의 반응도 조금 당황스러웠기에 나는 그대로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을 따름.
순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기는 했지만, 부산스러운 인기척만으로도 그녀가 왠지 밖으로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나는 그대로 그녀의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천하 씨!”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다소 편해 보이는 복장을 한 이하린이 나를 부르며 뛰쳐나왔다.
“어, 언제 돌아오셨어요?!”
“아··· 지금 막 왔습니다.”
비록 마주쳤던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그것도 기억 못 할 만큼 내 시각이 떨어지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하린이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단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모습은 부끄러웠던 걸까?
30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음에도 이하린은 언제 자기가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냐는 둥 앞머리를 깔끔히 정돈한 채, 다시 뭔가 푹신해 보이던 잠옷도 다소 평범한 반팔과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온 상태였다. 평상시의 이하린이라기엔 참으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신경 쓰였으면 그냥 가볍게 창안에서 인사를 건네고 메시지를 보내지 왜 저리 급하게 나왔을까 싶긴 했지만, 상대가 이하린이었던 만큼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하린이 말을 걸어왔다.
“도, 돌아오실 거면 연락부터 해주시지···!”
“······아직 평소처럼 수련을 하고 계실 것 같아서 그냥 내일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
그에 이하린은 너무하다는 듯 입을 오물거리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동안 내 복귀에 관심이 정말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어 잠시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승천제의 영향이 그녀에게 남아있었던 만큼, 근래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이하린스러운 상태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건 나와 아리엘에게만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약간 서운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태도에 잠시 생각을 해보았고, 이내 적당한 주제로 화제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방금 자려고 하신 거였나요?”
“······넵.”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돌아오셨나보군요. 원래는 매번 새벽까지 수련하시더니······.”
“······!”
그러자 내 말에 약간 움츠러드는 그녀.
나는 그냥 궁금해서 건넨 말이었는데 이하린에게는 어떻게 들렸던 걸까? 조금 작아진 그녀가 소심한 목소리로 내게 대꾸했다.
“······그래도 수, 수련은 열심히 했어요. 천하 씨 없는 동안에도 혼자 열심히 했어요!”
“아···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대답과 함께 작게 웃어보였다.
마치 자습을 한다고 했다가 노는 걸 들킨 아이처럼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이 다소 웃기기도 했고, 참 그녀답게 느껴진 탓이었다.
“요즘 열심히 하셨던 만큼, 혹시나 오늘은 몸이 어디 안 좋아서 그러신 건가 해서요.”
“······아.”
이하린이 천천히 두 눈을 깜빡거린다.
“거,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앙···!”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 밑에 자리한 다크서클을 볼 수 있었으니, 방금의 말은 괜히 꺼냈던 게 아니었다. 이하린은 그 새하얀 피부색 때문에 더 그런 모습이 대비되어 수면시간이 줄어들기라도 하면 항상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다시 멀쩡해지면 금방 원래대로 되돌아오기도 했으니, 아무래도 이하린의 얼굴은 본인처럼 참 솔직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닌가요?”
“······넵!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넵.”
-바로 지금의 저 표정처럼 말이다.
이하린은 저렇게 대답하면서도 살며시 내 시선을 피하였고, 그에 나는 만상의 눈을 통해 가볍게 그녀의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호흡은 이상이 없고, 심장박동은 빠름. 따로 부상을 입었다거나 몸에 불편한 구석이 있어보이진 않았고, 마력 또한 이상이 없었다. 대신 다소 움츠러든 모습이었으나 그건 평소의 이하린이었기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 기세가 다소 흐리멍텅했을 뿐.
“요새 기운이 별로 없으신가요?”
“······!”
이하린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무련으로 떠나기 직전까진 크게 문제 없어 보였던 그녀를 생각해보고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심리적인 요인일 터인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테니··· 짐작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근래 상태가 상태였으니 말이다.
“아, 아니에요···! 그냥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일찍 온 거지. 벼, 별로 문제없었어요!”
하지만 이하린은 정말 괜찮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제 양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대답에 잠시 고민해보았으나 이내 알겠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정말 별거 아닌 문제라면 금방 다시 괜찮아질 테고, 갑작스럽게 내가 장기간 자리를 비워서 심리가 불안해졌던 거였다 해도 이제 다시 멀쩡해질 테니 괜찮을 터. 만약 계속 기운이 없다면 또 신경을 써봐야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점점 활력이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 그것보다···! 처, 천하 씨는 검제님께 많이 배우고 오셨나요? 그··· 좋은 거요!”
“아···. 확실히 좋은 걸 배우긴 했습니다.”
“와! 정말요? 뭔지 저도 보고 싶어요···!”
이하린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조금 더 일부러 활기차게 말을 걸어온다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관심이 있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여주기는 힘들었을 뿐.
“나중에 제가 쓸 수 있게 되면 그때 보여드리겠습니다. 당장 보여드릴 건 아니라서요.”
“······? 앗, 넵! 나중에 보여주셔도 돼요!”
내 말에 이하린이 잠깐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맞춰 검은 암막이 그녀의 볼을 뒤덮은 채 달라붙는다.
“천하 씨가 편하실 때 보여주세요···!”
아무래도 로션인지 에센스인지를 바르고 바로 나왔던 모양이었는데, 그녀는 제 하얀 볼에 머리카락이 약간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나를 향해 알겠다는 듯 해맑게 웃어 보였다.
역시나 참으로 둥그스름하다는 느낌.
하지만 조금 간지러워 보이는 모양새였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떼어내 주었다. 물론 직접 닿지는 않게 적당히 그곳에 바람을 흘려보냄으로써 그런 것이지만, 그 점을 떠올리는 게 다소 늦었기에 손끝이 그녀의 피부를 살짝 스쳤다.
“······?!”
그러자 내 손이 다가오는 줄 알고 순간 움찔했던 이하린은 이내 제 볼을 스치는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눈을 깜빡거렸고,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지금 뭐 한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
하지만 나도 방금의 행동은 딱히 크게 의식하고 했던 게 아니었던 만큼 저 표정에 뭐라 대답을 돌려주기는 조금 그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 조금 민망하단 느낌이었기에 그녀의 표정을 무시하고는 가볍게 다른 곳으로 대화를 돌려보았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방금 주무시려고 했다면, 제가 괜히 방해를 해버린 느낌이로군요.”
“네? 아니, 그, 그건 아닌데··· 방금······.”
“피곤하셨다 하니 이만 들어가 보시지요.”
“네? 아니, 갑자기··· 괘, 괜찮은데······.”
“인사는 나눴으니 내일 보면 되니까요. 저도 지금은 조금 피곤해서 가봐야겠습니다.”
“아, 아니··· 아······ 네, 네엡.”
이하린은 무언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피곤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러면서도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붙잡아 그 얼굴과 귓가를 빠르게 가려버렸다.
그 모습에 내 머릿속에는 또 머리카락이 달라붙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바로 숙소에 들어간다면 상관없었을 따름.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네! 내일 봐요!”
나는 빠르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네에. 천하 씨도요.”
그리고는- 그렇게 등 뒤로 들려오는 이하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기감 속에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꼼지락거리는 이하린의 인기척이 그대로 전해져왔을 따름이었다.
물론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가자 계속 그곳에 서 있던 그녀도 얼마 안 가 다시 숙소로 되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곤 잠시 생각해보았다.
“······.”
한창 복잡한 고민을 하다가 저런 상황을 겪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의식이 약간 분리되었던 모양.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상념이 어느새 상당히 가벼워진 듯 했다.
어째 생각보다 다급하게 나왔다는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하린은 이하린.
그 잠깐 사이에 내 상념을 흐트러트렸다.
‘······.’
나는 그렇게 다소 이상 미묘한 생각을 하며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허나 그 와중에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한눈에 들어왔으니, 아까까지는 별만 가득해 보이던 하늘에 놓인 그 달이 갑자기 참으로 동그랗게 다가왔다.
비록 반 토막 난 원이었지만 참 동그랬다.
지난 며칠간 잿빛의 세계에 있다 와서 더욱더 그 달이 눈에 들어온다는 느낌이었고, 한번 인지하고 나니 드는 엉뚱한 생각에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젓고선 바로 문을 열었다.
‘······너무 풀어져 버렸어.’
딸칵- 돌아가는 문고리. 그렇게 나는 다소 가벼워진 기분 속에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려보았고, 그와 동시에 며칠 만에 침식 영역의 폐허가 아닌 내 숙소에 돌아오게 되었다.
아직 남아있는 상념을 구석으로 밀어내며.
동시에 조금 전의 이하린을 생각해보며.
그리고 그렇게.
“······.”
다소 풀어진 상태로 숙소에 발을 들였던 내 시야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으니.
바로 그 순간.
“당신이 유천하··· 맞습니까?”
불 꺼진 실내- 그 어둠 속에 서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일곱 갈래의 매듭을 풀어냈다.
내 기감에도 감지되지 않는 흐릿한 무언가를 향해 검을 뽑아 들며, 그러면서도 내 감각을 한순간에 자극해오는 그 존재감을 실감하면서, 만상의 눈에 엿보이는 그 무수한 형상을 꿰뚫고 그 너머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그것은 다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