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곡유아 (3)
검제는 그렇게 다소 허망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질린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그 반응이 의아했던 나는 그저 담담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검제는 그런 내 태도에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선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무초에서 시작되었으니 검의 한계가 없······ 아니, 원래라면 그 결을 만들어내기도 버거웠을 터. 그렇다면··· 경계를 무너트리는 심공은 처음부터 그런······ 아.”
“······.”
“······하나 물어보마. 넌 처음 검을 휘두른 5살 무렵부터, 절정에 이를 때까지 9년간 그 과정을 하루에 얼마나 반복해온 것이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표정은 그걸 되물어보면서도 무척 떨떠름해 보였다. 하지만 난 담담히 그 물음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9년간 하루의 반은 그리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체력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했기에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긴 하였으나, 모두 합치면 매일 그 정도는 검을 휘두른 듯합니다.”
“허··· 그렇다면 네 말처럼 체력. 육신의 소모는 어떻게 감당하였더냐? 아무리 휴식을 취한다 한들, 어린 시절의 활력이 좋다 한들, 그런 어린 나이부터 그 정도로 수련을 시키면 몸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터인데?”
물론 나도 처음엔 그걸 걱정하긴 했었다.
내게는 현대에서의 지식과 경험이 있었던 만큼 무작정 계속 그리 생활했다가는 오히려 몸이 상하거나, 추후 성장에 무리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으니, 내 눈에 어찌 그 생활이 정상으로 보였겠는가?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그와 동시에 무림다운 방법으로 그런 걱정을 단번에 종식시켰다.
“예. 그걸 예방하기 위해 스승님께서는 매일 밤 저의 몸을 내기로써 풀어주셨습니다.”
“······뭐?”
“그때 당시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으나, 아마도 스승님께서는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통해 육신에 기를 불어넣어 혈을 자극하고, 다시 제 몸의 피로를 풀어주셨던 듯합니다.”
“······.”
“또한 가끔 무언가 약초 같은 것도 섭취하긴 했는데, 영약은 아니었으나 아마도 그런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영약도 한 번 먹어보기는 했었다.
물론, 이전의 에테리얼 크리스탈을 받았을 때 놀랐던 이유가 있듯이 자연상의 영약은 세간의 인식보다 더 귀하고, 귀한 귀물이었기에 내 신분으로도 그 한 번이 전부였을 뿐.
하지만 영약을 섭취하지 못했을 뿐이지 영약 급에 도달하지 못한- 적당히 귀한 약재들은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접했었다.
100년산은 못 되어도 30년산 하수오라든가, 설삼이라든가, 이상하게 생긴 약초라든가. 뭐 그런 수준의 약재는 자주 먹게 하였으니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이따금 그 씁쓸한 끝 맛이 함께 떠오르곤 했을 정도.
“무작정은······ 아니었단 말이로군. 허.”
그런데 검제에게는 내가 지나쳐온 일천검결의 습득과정이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졌던 걸까? 물론 일반적인 무학과는 그 궤가 다르다는 건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건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울 뿐이지 생각보다 다른 방법에 비해 무척이나 직관적이면서도, 동시에 확실하게 모든 검로를 이해하고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저, 개개인의 자질에 따라 배움의 속도 정도는 차이가 날 수 있을 뿐.
하지만- 그렇게 검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릴지언정, 그 이후는 분명 일반적인 방식으로 검을 익힌 자들보다 빠르고 안정적으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갈수록 큰 효과를 보게 될 터.
초식을 배우지 않고 기본적인 그릇을 마련한 뒤, 다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각 검의 묘리를 체득한다면 검격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 초식이 될 수 있을 테니- 그 과정을 거친다면 더 많은 가능성을 갖출 수 있었다.
그저 그러한 과정을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게 지난하고 어려울 뿐이지.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해보마.”
나는 검제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가 궁금하였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무공을 통해 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검의 모든 것을 체득시키고 거기서 스스로 식을 만든다라··· 무초無招와 무의無意. 그것이 일천검결이 지향하는 결이더냐? 아니, 결이라 말하기도 뭐하겠군.”
“예. 그것이 바로 일천검결입니다.”
“하지만 정작 사문은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었을 뿐이고, 그 깨달음과 수양은 개인에게 맡겨두었다는 말인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검을 밑바닥에서부터 저 혼자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게 계속해서 그 방향을 제시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정신 나간 무문 같으니.”
생각보다 정확히 이해한 듯하여 대답을 돌려주었더니 검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고, 그렇게 검제는 조금 전의 표정들을 다시 한번 더 지어 보이더니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야 도대체 무엇을 배웠다는 거지? 그건 사실상··· 네 스스로 검결을 만들어냈다는 것 아니더냐? 아니, 묘리를 배워 온전히 체득시켰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닐 터. 너희 선대들 또한 다 너와 같은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긴 합니다.”
“그래. 14살에 절정이라. 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지. 하면 보통은 어느 정도더냐?”
“보통은 성인이 되기 전에 절정에 오른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검결을 체화시키는 것은 대부분 조금 더 걸린다고 듣긴 했습니다.”
“조금···? 겨우······ 조금?”
검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읊조렸다.
“검을 올곧게 그어내는 것조차 못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거늘, 그것을 마치고 검의 묘리를 전부 이해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더냐? 그걸 기질에 맞게 정리하는 것은?”
“······.”
“그것은 하나의 검공을 창안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 건 소수의 천재들이기에 그런 자들을 종사라 칭하는 것이다.”
“······.”
“하니, 너희는 사실상 모든 전승자에게 종사의 자질을 요구하는 것이란 말이로군. 허.”
무언가 대꾸를 하고 싶긴 했지만 나로서도 딱히 돌려줄 말이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우선 천마신공의 계승자에게 종사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은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질을 요구한다기보단 신공의 수련자는 신교의 중심을 지킬 수 있어야 했기에 실제로 신교의 종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을 따름.
아, 물론 아무리 유전이 있다 한들 사람의 자질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기에 선조들의 재능 또한 차등이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란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쌓아온 것이 다시 무의 업이었으니, 천마신공은 분명 그것을 받쳐줄 수 있는 희대의 절학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구나. 아무리 재능이 있어 보이는 이를 데리고 와 무문을 잇는다 한들, 그렇게 재능이 있는 이들을 꾸준히 발견해 이어올 순 없었을 터.”
마침- 검제 또한 그 부분을 언급하였다.
“하물며 아무리 옆에서 고수가 지도해준다 한들, 그저 검을 휘두르는 과정만으로 묘리가 이해가 간다면 초식이란 개념이 생겨나진 않았을 게다. 묘리를 가르치고, 그걸 따라 하는 과정에서 어찌 이해가 가능했더냐?”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면 됩니다.”
“그것이 어찌 가능하냐 묻는 것이다. 아무리 검을 보여주고, 설명해주고, 다시 이해한다 한들 그것을 따라 하는 건 별개의 문제.”
“······.”
그에 나는 말 없이 검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역시 그 심공. 의식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건 그것을 위해 존재했구나.”
하지만- 확실히 지난 며칠간 내 무공에 대해서도, 무론에 대해서도 담론을 나눠보았기 때문인지 검제는 빠르게 답에 가까워졌다.
“내 짐작이 틀리더냐?”
“···틀리진 않습니다.”
물론 원인과 결과가 조금 순서가 달라진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 본질이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일 뿐이지 기본적으로 천마신공의 토대는 그것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과연······ 오만하고, 오만한 무문이로다.”
“오만하다기보단··· 그저 무공이 창안된 순간 목표로 했던 부분이 달랐을 뿐입니다.”
“자신의 영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운이라 칭하지. 사람의 자질 또한 어찌 보면 그 영역 안에 들어있을 터. 허나, 그것을 너의 사문은 사람의 손으로서 지워나갔으니, 재능과 업을 합일시켜 자질마저 바꿔버린다는 점이 어찌 오만하지 않겠느냐?”
내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건지 모호한 어조로 그 말을 내뱉은 검제의 입에선 이내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허··· 그래. 의식과 무의식을 합일시키면 자연스레 모든 것이 일념이 될 수 있겠지. 걷는 순간부터 검과 어울려 하나가 되면 사람 자체가 검이라 할 수 있으니, 합일된 의식이라면 당연히 매일같이 반복되는 제 행동의 모든 것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게 될 터.”
“······.”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전수받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다시 그 재능마저 허덕여 할 영역을 무공으로써 보완하여, 다시 뛰어난 스승이 그것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끎으로써 너희는 진정 무극의 너머를 바라보았구나.”
스스로 되뇌듯 흘러나온 검제의 목소리.
검제는 그 말과 함께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그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검제는 우리의 무학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터무니없이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하다 여기는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초절정의 너머를 바라보며 시작되었기에, 그 무학의 배경을 짐작해낸 그에게는 내가 걸어온 길이 분명 복잡하게 다가왔을 터였다.
검제는 심검에 닿고자 해도, 저 자신의 재능으로는 부족하다 말한 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허나 역시··· 정도의 무공은 아니로다.”
“······.”
그 입에선 내 예상과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고, 검제는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린 시절부터 기초를 다지며 진원을 자극해 정精을 수양하였고, 사문의 심공을 통해 의식의 한계를 무너트려 스스로 깨우쳤으니 그것은 신神을 수양한 것일 터.”
“······.”
“너희의 사문이 불가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그 무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 또한 불가의 깨달음과 상통하느냐?”
나는 검제가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건지는 이해가 안 갔지만, 딱히 곤란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번뇌를 빗겨 ‘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대답에 검제는 다시 대답했다.
“그렇더냐? 하지만··· 내게는 그게 온전한 불가의 길처럼 느껴지진 않는구나. 몸의 정을 단련하여 다시 마음의 신을 합일시키니. 그 과정에서 기는 정신의 비틀림에 영향을 받을 테지. 그러하기에 심공이 되었을 테고.”
“······.”
“그러나 네 삶에서 스스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다른 것이 배제되었으니, 선도仙道의 관점에서 보면 너의 무문은 어린 시절부터 네게 연정화기煉精化氣와 연기화신鍊氣化神을 거쳐 연신환허鍊神還虛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선도수행을 시켜온 것만 같구나.”
“······선도수행?”
나는 그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눈으로 검제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검제는 짙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이들보다 감정의 폭이 많이 무뎌지지 않았더냐?”
그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걸 당연히 여기게 되었을 터.”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사라졌기에 언제든 이성적으로 자신을 관조할 수 있을 테고, 삶의 전부를 검을 휘두르기 위해 보냈기에 너의 정기신精氣神은 무로 귀결되었겠지. 그것이 정기신의 단련이 되었든, 심신心身의 단련이 되었든, 아니면 불가의 개념이든, 도교의 개념이든, 내게는 너희 무문이 도달하고자 하는 길이 묘하게 느껴지는구나.”
“······그렇습니까?”
“물론 무인으로서는 이상적일 것이다. 밑바닥부터 제 손으로 단단한 지반을 다지고 올라가 끝내 하늘까지 닿을 수 있도록 모든 잡념을 배제한 채 갈고닦은 길일 테니······.”
하지만- 검제는 그 말과 함께 다소 씁쓸함이 느껴지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게는 솔직히 말해서 그게 너무나도 차가운 방식으로 느껴지는구나. 아니, 고고하다고 봐야겠지. 개인을 하나의 주체로서가 아닌, 이상적인 무언가로 보는 것만 같기에.”
“······.”
“물론 그것이 너희 무문이 바라는 목적지일 테지. 불가에서 시작되었다니 어찌 보면 너희는 무를 수양함으로써 사람의 몸으로 부처가 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수많은 길에서도 독각獨覺을 추구했겠지.”
허나-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모두 실로 시조와 신교가 그려온 맥을 관통하고 있었기에 나는 말없이 검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역시 너희 무문이 오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겠다. 시작부터 초절정의 세계를 전제로 하나, 개인의 삶을 지워내면서까지 그곳에 이르는 가장 합리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으니······ 넌 정말 괜찮은 게냐?”
시야에 걱정이 담긴 눈빛이 들어왔다.
“지금은 네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으나,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을 터. 너는 지나온 과정이··· 원망스럽진 않더냐?”
그리고 여기까지 듣고 나니, 나 또한 검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 이야기는 아까 학대라는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던 것과는 별개로 단순히 시대상의 차이라기보단, 어쩌면 추구하는 길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말하는 것을 듣자 하니 검제의 무공은 도가 계열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테고, 나의 무공은 불가를 바탕으로 하나- 분명 온전한 불가의 가르침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도의 길을 걷는 이에게 내가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불행처럼 보였을 수도 있을 터.
허나- 그렇다고 정말 그러한 건 아니었다.
“예. 저는 딱히 상관없습니다.”
“이제까지의 네 삶에서 무와 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비워져 왔음에도 말이더냐?”
“무인에겐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
“저는 제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계속해서 비워왔을 뿐이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 다시 소교주의 의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찌 보면 그건 이전의 ‘나’를 탈피하고, 새롭게 바로 서는 데 필요했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온정도, 인의도, 평온도, 마음도.
생生의 집착도, 사死의 두려움도.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최대한 버리고, 다시 나아감으로써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비워낸 끝에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 나가려 하고 있었고,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결국 하나의 여정이었을 뿐이었으니 나는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마음에 들었다.
“말씀하신 내용을 모두 이해하진 못하겠으나, 저희의 무도武途가 모든 것을 비워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모든 것에서 번뇌를 느끼고, 부수면서 새롭게 변화해 나가는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변화?”
“예. 사람은 변화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만물이 변화하며, 달라지듯이. 제가 겪는 괴로움과 번민 또한 다시 저를 변화시키는 요인에 불과합니다. 비워냄도, 채워냄도 모두 하나의 과정이고. 흘러감 속에 지워진 부분이 있다면 새롭게 덧그리면 그만일 테지요.”
나는 이 삶을 진실로 그리 생각하였다.
환생자 유천하도, 소교주 유천하도, 생도 유천하도, 각성자 유천하도 전부 다 나였다.
사람을 베어내는 게 두려워 미혹에 시달리던 어린 날의 나 또한 나였고, 아무렇지 않게 생명을 베어내며 의무를 다하던 것도 다시 나였다. 평온에 번민을 느꼈던 것도, 초콜릿에 씁쓸함을 느꼈던 것도, 누군가를 지키고자 검을 휘둘렀던 것도. 모두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타자의 눈에 내 삶이 삭막하게 느껴질지언정, 아니 실제로 그러한 삶을 지나쳐왔을지언정 나는 분명 만족스러웠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니까.
“하니,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나 말씀하신 내용은 저 또한 인지하고 있던 부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추구하는 끝은, 생각하시는 것처럼 삭막하고 차갑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니 별로 심려친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렇게 담담히 검제에게 내 생각을 들려주었고, 그런 내 대답에 검제는 잠시 말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실로··· 검과도 같이 올곧구나.”
이내 허탈한 웃음과 함께 그리 말해왔다.
“그것이 네 생각이라면 내가 괜히 오지랖을 부린 셈이니··· 실례했다. 너는 벌써 연신환허鍊神還虛를 앞에 두고 있었으니, 이미 너의 길은 새롭게 나아가고 있었구나··· 허.”
“예. 표현은 달라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그게 지난번 위타극을 꺽으며, 새롭게 초극에 오르며 네가 느꼈던 깨달음이더냐?”
“그건··· 아마도 반반인듯합니다. 마음가짐이라면 원래부터 이러긴 했으니 말입니다.”
나는 그리 대답하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비록 상관없는 소리이긴 했으나, 검제는 어느 정도 내 사정을 꿰뚫어 보고 나름 염려해준 것이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호의에는 호의로, 악의에는 악의로.
그것 또한 내가 살아온 길이었으니.
“······.”
“······.”
그렇게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잠시 그러고 있자니 나는 처음 봤을 때보다 검제의 기세가 부드러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적응을 한 것인지, 아니면 검제가 나를 대하는 기질이 조금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아하니 첫날의 그가 왜 그리 급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뇌리에 강렬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면 그때의 인상이 유효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내가 잠시 그런 미묘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검제가 이내 다시 입을 열어왔다.
“······너의 생각이 그러하고, 휘둘러온 검이 그러하니. 너의 검의劍意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 해줄 말이 없겠구나. 네게 검은 이미 하나의 삶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으니.”
“······.”
“어쩌면 넌 검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구나.”
이제서야 본론으로 되돌아온 이야기.
하지만 저 말을 듣자 하니 어찌 보면 성과가 없었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로서도 이것을 이야기한다고 바로 답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게 검은 하나의 삶과도 같다는 말. 그 말이 생각보다 인상적으로 들려왔을 뿐.
“너의 심공이 의식의 경계를 허물어트렸고, 너의 검결이 검형의 경계를 무너트렸으니. 어찌 보면 네겐 모든 생각이 진의가 담긴 일념이 될 수 있을 테고, 훗날 만검 속에 그러한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로군요.”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너는 아무렇지 않게 너의 마음으로 세계를 베어낼 수 있겠지.”
검제는 계속해서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천천히 나아가거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겠구나.”
“······천천히 말입니까?”
“그래. 네가 나아가는 길과 너의 무공이 추구하는 길 끝에서, 네가 무엇이 될지는 그간 걸어온 길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질 듯하니. 중요한 건 빠름이 아닌 방향이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러면서도 검제는 한구석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짐을 들어 올렸고, 무척이나 인자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녕 네 무학이 시작되었던 뜻대로 독각의 붓다가 될지, 아니면 무심의 끝에서 마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부처가 되고자 하면 최소한 그 근처엔 도착하겠지.”
“······.”
“물론 보아하니 네 성정상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깨달음은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 난 네가 한 말대로 너 자신이 추구해 걸어간 끝이 너무 차갑고 삭막하지는 않았으면 할 따름이다.”
검제는 그 말과 함께 작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의 내 길을 격려해주듯이, 그러면서도 기대 또한 걸어본다는 듯이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예. 감사합니다.”
내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미소를 지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으니, 나는 방금 검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던 탓이었다.
붓다佛陀와 마라魔羅
그 두 말은 분명 상반된 말이었지만, 돈오 속에 해탈을 앞두었던 시조께서 직접 선택한 길이 길이었으니, 나는 검제의 말속에서 다소 미묘한 느낌을 받았을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마라를 일컫는 또 다른 말.
“그곳까지 길을 잃지 않고, 제가 가고자 하는 길로 올곧게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마天魔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