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곡유아 (1)
어느새 햇살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아침이 왔음을 느끼고선 천천히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상을 하며 새벽을 지새운 것 까진 좋았지만, 이미 며칠째 수면시간을 최소로 하고 있는 만큼 괜히 이걸 들켜봤자 잔소리만 더 듣지 않겠는가.
그건 우리가 있는 곳이 침식 영역 사이의 틈새였던 만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잿빛탑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 빈틈이기에 이렇듯 침식을 걱정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림자 마수는 물론이고 수호자급 마수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지역인지라 검제는 내가 컨디션을 조절하지 않고 몰두하는 걸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는 부분.
‘······역시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어.’
며칠 전 검제가 내게 보여줬던 검격- 벌써 그 극상의 기예를 본지도 시간이 얼추 지나갔고, 이미 열 번에 가깝게 시연을 목도하였지만 그럼에도 역시 아직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원리는 이해될지언정 그것을 내가 똑같이 따라 하는 게 지난할 따름.
‘무형검이라··· 실로 어울리긴 한데.’
무형검無形劍- 검제는 그날 내 앞에서 펼쳐 보였던 자신의 검격을 그렇게 칭하였다.
내기와 의념의 경계마저 허물어트려, 다시 검의 물질적인 한계를 벗어나 펼쳐진 검격. 그것은 마음의 검은 아니었으되, 분명 마음으로 휘둘러진 검이었다. 실존하지 않는 힘을 벼려내 구체화 되는 검. 보이지 않는 기와 마음을 그러모아 현실을 지나쳐 뻗어낸 검.
그것은 과연 검제가 그리 자신있게 심검으로 향하는 길이라 칭할만했던 기예였다.
수중무검手中無劍은 아니었으되, 심기를 통해 버려낸 검격은 심즉살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지 심중유검心中有劍에 이르렀다. 그러니 어찌 심검과 무관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을 뿐.
“······그걸 그렇게 응용할 줄이야.”
무형지기無形之氣와 격공隔空의 기氣.
검제가 펼쳐낸 무형검은 분명 그 두 가지의 절학을 하나로 엮어내, 각각의 요소만으로는 자아낼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의지로서 기를 사역하고, 다시 그러함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벗어던진다. 물리에 구애받지 않는 검격을 공간의 한계마저 격하고 일순간에 원하는 곳에 그대로 펼쳐낸다. 그것은 분명 마음의 검에 닿아있는 기예였다.
심검이란 벽 앞에 가로막힌 검제가 저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친 하나의 결과.
그것은 분명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심검에 도달해있었던 아버지께선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검이었으나, 그 결과를 자아낸 두 개의 상승절학만큼은 아버지나 다른 초절정의 고수들도 쉬이 펼쳐내고, 구사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절학을 검제처럼 펼쳐내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렇게 완벽하게 엮어내어, 새로운 기술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건 내게도 충격적인 검이었다.
-무형검이라 칭하긴 했으나, 이것은 사실 내가 심검에 도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다.
-마음만으로 세계를 베어낼 수 없다면, 검에 마음을 담아 베어내는 것부터 시작하고자 하였고, 그렇게 검의 한계를 벗겨낼 수 있었지. 그러니 이것은 나의 실패로되, 다시 실패에서 발견한 심검으로 향하는 단초였다.
-허니 너는 정상 너머가 아닌, 우선 네 눈앞에 놓인 길부터 제대로 따라와 보거라.
과연 그것을 누가 실패라 칭할 수 있을까.
그 기예의 완성도는 둘째치고서라도 그건 모르는 이가 보면 심검이란 말이 절로 나올만한 것이었으니, 의념만 봐도 심검을 외쳤던 이하린이라면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심검이라 믿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그 묘리만 생각해봐도 그건 분명 일종의 심검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내게는 지난했을 뿐.
‘역시··· 우선은 하사도를 깨우쳐야 해.’
이기어검도, 무형지기도, 격공의 기도.
또한 검제의 무형검과 이후의 심검도.
모두가 별개의 기예이고 경지라 생각될지언정 이제껏 그러한 상승 무학의 경지를 모두 몇 번씩 지켜봤던 내게는 그 모든 건 하나의 흐름 속에 이어지는 길로만 느껴졌다.
사실 그 세부적인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두 무학의 영역을 마음의 권역에 들여놓아야만 했으니, 나는 무형검을 봄으로서 그걸 더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내가 심검에 닿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금의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를 깨우치고, 검에 마음을 실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그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원리는 알겠는데, 펼쳐낼 수 없다니.’
쯧- 그렇게 나는 상념 속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차버렸고, 복잡해진 생각을 털어내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풀어보았다. 새벽을 명상으로 보낸 만큼 어느 정도 몸이 뻐근하기도 했고, 머릿속을 비워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천천히 몸을 풀고 있자니 문득 시야 한구석에 엿보이는 워치. 안 그래도 명상 중에 워치가 몇 번 울렸었기에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간단히 워치를 확인해보았다.
그러자 떠 있는 건 역시나 익숙한 이름들.
[혹시 오늘도 안 돌아오세요? 그래도 밥은 먹고 다니시죠? 언제 돌아오세요···?]
[침식 영역에 오래 있으면 안 좋은데···.]
[아빠가 나한테 사진 보냈당 (*ノ▽ノ)]
[사진]
[다음 주 주말. 페루. 가능하면 답신.]
이하린이야 으레 그랬듯 일어나자마자 걱정이 담긴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고, 아리엘은 다소 뜬금없는 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확인해보니 루타텔이 보낸 메시지까지 내게 첨부한 모양이었는데, 그저 길가에 핀 꽃사진과 미묘한 덕담을 함께 보낸 걸 저리 좋아하는 것도 참 미묘했고, 저걸 나한테 저렇게 자랑까지 한다는게 조금 웃긴다는 느낌. 그래도 아예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두 사람보다는 진시우가 보낸 메시지의 내용을 유심히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의뢰를 받아들일 건가?
그날 녀석이 내게 건넸었던 제안에 나는 우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며 응하겠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비정기적으로 응하겠다고 대답했었다.
거기엔 무련의 일도 있긴 했고, 이면순례자에 대한 생각도, 다시 진시우 자체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담겨있는 답변이었을 뿐.
그러니 지금 이것도 내가 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바로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실전이 괜찮지.’
그저 이제껏 자라온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실제로 생사가 오가는 실전에 들어가면 상념이 빠르게 정리되는 편이었고, 이 세계에서 그것을 체감할 수 있는 건 끽해야 마수나, 침식마인을 사냥할 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나 또한 그림자 교단을 찾아서 미리 토벌해놓긴 해야 하니, 겸사겸사 녀석의 제안에 응한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날짜도 문제 될 건 없었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며 이하린과 아리엘에게도 간단히 답장을 돌려줬다. 아리엘에게는 적당한 호응을, 이하린에게는 조만간 끝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이것도 얼마 안 가 끝나긴 할 테니까.’
애초에 검제는 처음부터 나를 보러 침식영역에서 빠져나온 것이었고, 내게 가르침이 필요하다 느껴 며칠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여기서 문답을 나누고, 무형검을 보여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탁-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것을 뒷받침해주듯이 나는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검제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빠르게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려는 걸까? 어느덧 완연해진 햇살 아래로 나온 검제는 나를 쓱- 보더니 다짜고짜 혀를 찼다.
“쯧. 꼴을 보아하니 또 밤을 지새웠더냐?”
“지샌 건 아니고, 일찍 일어났습니다.”
“꼭두새벽에 잠들고, 꼭두새벽에 일어났으면 그게 지샌 거지 참 말을 안 듣는구나.”
안 들킨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
“······피곤하진 않으니 괜찮습니다.”
“다 늙어봐야 저가 무리하는 것을 알겠지. 위태롭게 굴지 말라고 이리 시간을 투자하는 것인데, 정작 목적지를 제공해주니 하루라도 빨리 가려고 안달이 나 있구나. 아주.”
검제는 그리 말하면서도 한쪽에 놓여있던 작은 곽을 뒤적거리더니 내게 무언가를 던져주었는데, 그건 역시나 지난 며칠 동안 질리도록 보고 있는 고열량 프로틴 바였다.
누가 승천자 아니랄까 봐 특이한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에 저걸 잔뜩 넣고 다니는 모양이었지만, 확실히 맛으로 먹을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과 보관이 더 효율적이었을 뿐.
그리고.
“그래도 나태한 것보단 나을 테니, 오늘도 어디 한 번 해보자꾸나. 갈 길이 태산이다.”
그것을 내게 던져준 의미는 바로 저것이었으니, 검제는 불만이 어린 목소리로 내게 핀잔을 건네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불필요한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빨리 본론에 들어가자는 듯. 이럴 시간에 어서 끼니를 대충 때우고 어제에 이어서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자는 듯이. 그렇게 말이다.
“하면 오늘은 무엇을 논하실 겁니까?”
“기예는 확인했고, 심공도 들었으며, 무론은 질릴 정도로 알게 됐으니 이제는······.”
그러므로 나는 가볍게 프로틴 바를 뜯으며 검제에게 되물었고, 그는 이리 대답했으니.
“슬슬 검의劍意에 대해 논해봐야겠다.”
그건 마침 내가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
“가장 중요한 건 너의 검을 찾는 것이다.”
───────────────!!!
그렇게 우리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오늘의 담론을 시작하였다. 이건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일과였지만, 확실히 제대로 무학에 관해 토론해보려니 며칠 정도는 빠르게 흘러갔다.
“의념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처럼, 검에 제대로 된 의를 실어서 그 너머까지 영향을 끼치기 위해선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 말씀은··· 검을 이해하라는 말입니까?”
“비슷하다. 하지만 정획히 말하자면 이건 너의 심상을 온전히 바로 세우라는 것이지.”
나의 심상을 바로 세운다- 그건 내가 승천제를 거치며 느꼈던 8성의 단초와 비슷했기에 나는 조금 더 진지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설명을 덧붙여주마. 너는 자연에 자리한 기氣가 물질과 같은 요소라고 생각하느냐?”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물론 다르겠지만, 저는 그 둘이 온전히 별개의 요소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주관을 떠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손등으로 암야를 툭툭 건드리며 검제를 바라보았고, 검제는 내 행동을 이해했는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더냐? 그래··· 어찌 보면 기도 물질도 모두 삼라만상의 갈래라 할 수 있겠지.”
“······.”
“하지만 나는 기란 관념에 더 가까운 무언가라 생각한다. 자연 만물 모든 곳에 깃들고, 다시 그것을 생명의 의지로써 다루게 되니, 분명 이 세계에서 의意는 무척 중요하다.”
검제는 그 말과 함께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비록 호흡을 통해 육체에 기를 쌓아감으로써 무를 수양하지만, 근본적인 뼈대는 자신의 의지. 그러하니 이건 어쩌면 세상에 간섭하는 하나의 관념이라 할 수도 있을 게다.”
“세상에 간섭하는 관념···.”
“그래. 그리고 그런 의식을 토대로 마음만으로 온전히 기를 사역하고, 의념과 내기의 경계마저 무너트려 무형의 힘을 다루는 것.”
그리고는 그 손을 가볍게 휘저었는데, 나는 그러한 검제의 손짓에 따라 퍼져 나가는 무형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의념의 파장과도 같고, 다시 무인의 기세와도 같은 무언가.
“그것이 바로 무형지기라 할 수 있겠지.”
콰곽-!! 은밀하게 흘러나간 검제의 예기는 그렇게 육안 속에서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한 구석에 있던 벽을 허물어트렸지만, 바로 만상의 눈으로 전환한 나는 그 무형의 기세가 흘러나간 투로를 그대로 쫒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본질은 이해될지언정 실제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부분이었다.
나는 검제가 보여준 것을 따라, 그리고 어렸을 때 보았던 광경까지 되새겨보며 한번 의념과 기를 같이 움직여봤지만, 서로 상호작용을 할지언정 하나가 되지는 못했을 뿐.
애초에 그건 서로의 갈래가 다르니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그걸 해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테니 조금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 시도를 가만히 지켜보던 검제는 이제는 익숙해진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는 심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선 그러한 무형지기가 극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트려 피워낸 힘이니, 그것을 검처럼 휘두를 수만 있다면야 그것이 마음의 검이지 않겠느냐?”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하지만 다시 그것을 파고들자니 도저히 감이 오질 않더구나. 대체 어찌 이 본질조차 허망한 기예를 극한까지 펼쳐낼 수 있을까. 이것을 어찌 그 멀리까지 떨쳐낼까. 그것이 내게는 몹시 고민되는 부분이었지.”
“······.”
“그래서 나는 우선 검을 계속 휘둘렀다.”
검제는 제 허리춤에 있는 검을 그대로 뽑아 들었고, 그곳에 이내 햇빛을 비춰보았다.
“내 검에 담긴 의지가 내 육신을 떠나서라도, 공간을 넘어 그어지더라도 그대로 그 예기를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아득한 너머까지 계속해서 뻗어 나갈 때까지 말이다.”
“······아득한 너머?”
“그래. 나의 의지를 통해 벼려진 힘이니 나를 벗어나는 순간 단 한치의 거리마저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더구나. 잠깐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그대로 허스라질 것만 같았지.”
아- 그 말을 듣고 나자 나 또한 검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었다.
어찌 보면 저건 탄기공을 이루는 핵심이랑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육신에서 시작된 기의 결집을 육신을 떠나, 육신의 연장인 검극에서도 떠나보내 저 멀리까지 그어내려면 단순한 기를 응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의지의 각인이었을 뿐.
그리고 그러한 의지가 흐트러지는 순간 뻗어 나가던 검기는 그대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야 마니, 다른 아이들이 나를 보며 놀랐던 이유가 그것이었을 터. 의념을 바로 세우지 못한 이에게는 단 1m의 거리마저도 너무나도 머나먼 거리로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연이어 흘러나온 검제의 말은 그러한 내 생각을 어느 정도 긍정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검을 휘둘렀다는 게다.”
“······.”
“이 검에 온전히 의지를 담아 세계에 내 뜻을 주장할 수 있도록. 내 육신을 떠나가도 그 날카로움을 잃지 않도록. 검을 이해하고, 휘두를 수 있도록 끝없이 검에 대해 궁구했지. 그런데 계속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심상이 또렷하게 떠오르더구나.”
“의지가··· 말입니까?”
“그래. 내게 이 검은 그저 날붙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휘두르면 나는 내 앞에 있는 모든 걸 베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제는 그 말과 함께 가볍게 허공을 향해 검을 그어냈다. 그저 간단한 횡베기였다.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그어내도 검제의 자세와 기세는 내 눈으로 바라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똑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미약한 변화는 생기는 게 정상이건만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훙- 검제가 옆으로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다른 자세로, 다른 방향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더니, 이번에는 오히려 그 기세가 한눈에 흐트러져 갔다. 그와 같은 고수가 펼쳐낸다기엔 너무나도 불안정해보이는 느낌으로.
“물론 이렇듯 재능이 일천하여 베기밖에 못 하는 몸이긴 하지만, 적어도 베기를 할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상의 풍경이 뚜렷해졌고, 그렇게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
“베어내는 것. 그게 나의 검의劍義란 걸.”
나는 잠시 말없이 검제를 바라보았다.
저 재능이 일천하다는 소리도 며칠째 듣고 있으니 참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실제로 검제는 분명 재능이 별로 없긴 했다.
물론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도달해 있는 만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하겠지만, 검제의 자질을 논하자면 천재는 고사하고 수재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이였을 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검제는 초절정에 이른, 그것도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검객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데에는 아마도 저러한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터.
검제는 저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저가 할 수 있는 부분만을 끊임없이 갈고닦아온 달인이었고, 재능이 아닌 집념과 노력만으로 벽을 베어내 넘어선 자였다.
그렇지만.
“물론 너는 이런 방식으로 검의를 깨우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는 나와 다르게 이미 만검의 갈래에 닿은 자질을 갖고 있기에, 나처럼 하나를 고집하는 건 독이 될 테니.”
“예. 그것은 제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검제의 베기 정도는 참고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검제의 검이 그려내는 풍경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저것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더 빠른 속도로 초절정의 벽을 넘어설 순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내가 원하는 무극의 허상을 걸어가기는 더욱더 어려워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검제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내게 이리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하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단 하나뿐이다. 너의 검의를 그 심상에 새기라는 것.”
검제가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 세계에서 검을 들고 살아감으로써 하고자 하는, 너의 가장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그 뜻을 너의 심상의 중심에 박아넣거라. 의념의 기둥을 세울 수 있도록.”
“······근원적인 목적을 말입니까?”
내 대답에 검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무형의 세계도, 어검의 세계도, 그리고 아직 우리가 닿지 못한 심검의 세계도 모두 그러한 축이 없다면 나아가지 못할 터.”
“······.”
“아득한 너머, 모든 게 바스러질 너머에서도 너의 의지를 검으로써 뽑아내기 위해선 너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너의 의지가 너의 육신을 떠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도 그 뜻을 잊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막연한 이적이 아닌 온전한 너의 의지로서 펼쳐낼 수 있도록. 또렷하게.”
“······.”
“그것이 다른 모든 걸 충족시킨 지금의 네게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