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검지로 (4)
경지와 실력이 맞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건네진 말속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물론 나로서도 그가 어떤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는 이해가 갔지만 충분하진 않았고, 그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검제는 이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너의 기량은 경지보다 더 뛰어나더구나.”
“······그렇습니까?”
“뭘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더냐? 네 놈도 그걸 아니까 그런 말을 했을 터인데.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너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건 좀 미묘한 부분이기도 했다.
애초에 무학의 경지라 해봤자 그저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발휘되는 실력- 즉 기량이란 개념은 단순히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경지의 차이는 그저 그곳에 일정한 디딤대를 만들어줄 뿐.
육체와 정신, 내력, 마음가짐, 경험, 감각.
그 무수한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진 총체를 바로 기량이라 할 수 있었으니, 객관적인 요소에서도, 주관적인 요소에서도 나는 다른 이들보다는 분명 어느 정도 앞선 편이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유천하. 네 녀석은 통찰력이 뛰어나다.”
내게는 이 ‘눈’이 존재하였고 말이다.
“물론 경지 자체도 훌륭하긴 하다만, 내가 보기엔 네 놈의 장점은 그 육체의 빠르기나 검의 기예만큼이나 통찰력이다. 네 특성도 그러하니 원래부터 눈이 좋은 놈이었겠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허. 그래. 원래 네 정도라면 내게 6합이나 간신히 버티는 게 전부였겠지만, 너는 실로 10합을 버텨낼 자신이 있기에 그리 말했던 거였겠지. 그리고 그 기준은 당연히 너의 스승과 대련을 하면서 느꼈던 간극이었을 터.”
틀리더냐?- 뻔하다는 듯 쳐다보는 검제의 표정에도 나는 딱히 돌려줄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검혈마제로부터 느꼈던 간극과 아버지로부터 느꼈던 간극을 모두 비교해 도출해낸 값이었지만, 어찌 됐든 내가 직접 보고 겪었던 경험을 기준으로 역량을 판단해 내린 결과가 맞았으니 말이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상대해본 경험이 없다면 그리 정확히 파악해낼 순 없었을 테니, 다시 그것이 아까 전 너의 스승이 초절정의 고수였다는 걸 짐작하게 된 사유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그걸 그렇게 정확히 파악하긴 힘든 법이지. 그래서 대련을 지켜보고, 네가 했던 말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어느 정도 그 배경이 이해되더구나.”
───────────────!!!
어느덧 2km 가까이까지 다가온 마수의 외침에 순간 주변에 미약하게나마 바람이 불어왔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검제는 그런건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딱히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만, 황혼급이 괜히 황혼급은 아니기에 그 마력을 생각한다면 너무 태연하단 느낌은 있었다.
“너는 분명 뛰어나다. 너의 무론도, 무극의 허상을 꿰뚫었으며 너의 눈 또한 너의 경지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해주고 있겠지.”
“······.”
“그렇게 네겐 실력 이상의 세계마저 정확히 가늠해낼 수 있는 눈이 존재하고, 그 감각이 내린 판단을 따라 줄 수 있는 육체가 존재하며, 그것을 움직일 정신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 모든 것을 망라해 재능이라 칭할 터.”
도대체 검제는 내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길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점점 가까워지는 마수의 존재에 내가 입을 열려던 순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걸 깨닫고 나니 너의 재능이 오히려 네게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독?”
“그래. 독.”
검제는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건네왔다.
“네 녀석은 다른 놈들에 비해 눈이 너무 높다. 필히 너의 재능이 그렇게 만들었겠지.”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된다. 네 놈에게 실력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해주는 게 어찌 문제가 아니겠느냐? 원래라면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한들 받쳐줄 토양이 없어 현실에 기준이 맞춰졌을 텐데, 너희 무문은 너의 지반을 다져주었더구나.”
검제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무리 무맥이 쌓아온 업이 대단하다 한들 재능이 부족했으면 너는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기에도 벅찼을 것이다. 허나, 그 재능이 있기에 너는 그 말도 안 되는 무극의 너머마저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지 않더냐?”
“그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허. 무엇이 문제이긴. 산을 오른다고 누가 멍청이처럼 정상만을 바라보고 간단 말이냐? 제 발밑에 돌도 확인하고, 눈앞의 고지를 바라보고, 길이 어떻게 나있는지 확인하면서 올라야지 하늘만 바라보고 걷다간 굴러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게다 이 녀석아.”
무언가 알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말- 나는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네 재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지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었지. 그 무공의 깊이가 그것을 다시 뒷받침해 주었을 테고.”
“······.”
“그러나 그건 결코 빠른 길이 되지 않아. 아니, 안정적인 길 또한 되지 않을 게다.”
그렇게 사방에서 다가오는 마수의 무리 한가운데서, 그리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거대한 마수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였고, 나는 지금 들려온 검제의 말에서 빠르게 타당성을 되짚어보았다.
허나 그렇다 한들 이해는 되지 않았다.
내게는 고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존재하고, 나아갈 길이 존재하거늘 그게 무엇이 문제라는 것일까? 그리고, 애초에 나는 정상만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 저편마저 같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바로 앞의 경지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저 말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하지만 그런 내 의문을 검제 또한 이해했는지,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덧붙였다.
“네 녀석. 위타극과 싸울 때는 녀석에 비해 한 수 뒤처졌다 들었다. 허나 싸움 끝에 그 간격을 따라잡았고, 결국 놈을 꺾어냈다지?”
“······그렇습니다.”
“그건 무식하리만치 아슬아슬한 격전이었겠지만, 네겐 그게 당연한 일에 불과했을 터. 위타극과의 교전도, 승천제에서의 싸움도, 그리고 조금 전의 비무에서도, 네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훤히 보이더구나.”
“······.”
“하니, 네게 하나 묻도록 하마.”
그리고는 이내.
“넌 싸울 때마다 생사를 가늠하느냐?”
“······.”
내게 무척이나 당연한 질문을 건네왔다. 그것도 내게 있어선, 아니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당혹스러워할 만한 질문을 말이다.
“그건 무인에겐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허. 그게 무엇이 당연하겠느냐? 그럴 각오를 하고 싸움에 임하는 것과, 실제로 죽을 확률이 높은 싸움조차 마다하지 않고 내딛는 것 사이엔 분명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니.”
───────────────!!!
“네가 말한 열합도 그런 의미였을 터.”
“······.”
“그건 한 번이라도 네 판단이 어긋나는 순간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가야만 가능한 간합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어느덧 마수의 위치도 1km 가까이 다가왔고, 주변을 둘러싼 마수들도 하울링을 토해내며 우리의 바로 근처까지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 순간 검제가 내게 건네고 있는 말들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실수한다면 그리되겠지만, 제겐 그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아닙니다.”
“해서 네 재능이 독이라는 거다 이 놈아.”
“······.”
그 말과 함께 검제는 제 허리춤에 있던 검을 서서히 뽑아냈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범인이었으면 진작에 죽어 나갔을 시야와 마음가짐을 갖고 있음에도, 그 말도 안 되는 재능이 계속해서 위험한 줄타기를 성공시키고 있으니 그게 어찌 독이 되지 않을까?”
“······.”
“네 재능이 그러하기에 네게 기대를 걸러 왔던 것이지만, 네 녀석의 재능은 그런 도박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안정적이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터. 하물며 너의 배경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이 말을 반드시 해줘야겠다.”
그와 동시에- 검제는 그 말을 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육안으로도 한눈에 엿보일 만큼 다가온 마수를 향해 걸어가며, 그대로 뒤돈 채로 내게 말을 건넸다.
“너는 무극이란 허상을 바라보느냐?”
“······예.”
“그렇기에 그곳에 닿고자 나아갔더냐?”
“······예.”
나는 검제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다시 내 재능이 뛰어나기에 독이 된다면, 그렇다면 내 눈높이를 어떻게 그가 맞춰줄 생각이라는 건지 의아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의문에 검제는 대답했다.
“그게 내가 급하게 나온 이유였다. 나라는 존재가 네게 강렬한 첫인상을 준듯하니. 그 충격이 시간이 지나 흐려지기 전에 다시 너에게 하나의 화인火印을 남겨주고 싶었다.”
“화인을··· 말입니까?”
“그래. 올라설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정상만을 바라보는 네게 눈앞의 언덕을 보여줄 계획이었다. 다음으로 나아가려면 우선은 그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를 봐야 할 테니.”
“······.”
“허나 바라보고 있던 게 심검이었더냐?”
쿠구구구-!! 그와 동시에 피어나는 기세.
검제의 몸에서 터져 나온 기파가 한순간에 예리하게 다듬어져 갔고, 그를 중심으로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움직임에 화답을 해주듯이. 이 공간에 오로지 그 검만이 존재하는 듯이.
마치 세계가 그를 주시하는 것 마냥.
“그렇다면 내가 보여줘야 할 언덕 또한 어지간한 거로는 부족할 터니, 제대로 된 이정표가 되어주려면 역시 이게 적당하겠구나.”
“······.”
“허니 너는 이 검을 똑똑히 지켜보거라.”
그렇게 검제는 한순간에 하나의 염이 되었고, 다시 자연이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 세계에 벼려진 하나의 검신으로 화하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살벌하게 벼려진 검이.
───────────────!!!
어느덧 시야를 가득 메우며 다가오던 마수마저 그 기세를 느끼고선 흉포한 포효를 토해내며 멈춰 섰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수들 또한 그에 맞춰 다시금 하울링을 흘려내며 그 반경 너머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제의 기세는 그렇게 벼려진 상태로도 점점 한점으로 수렴되었으니, 그 기세가 줄어드는 상태에 따라 마수들 또한 이내 울음소리를 그륵거리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나는 재능이 없다. 베기를 이해하는데도 한세월이 걸렸고, 간신히 그것을 끝마치니 다른 걸 이해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지.”
“······.”
“하지만 내 검은 단순히 수양을 위해 벼려진 게 아니었기에 나는 그 베기 하나로 세상에 나왔고, 그렇게 나는 시간이 흘러 천중무련의 검제이자 승천자 백리명혼이 되었다.”
“······.”
“나는 검치에 더 가깝다고 봐야할 터.”
드드드-!! 다시금 발을 내딛는 수십 미터의 거체. 마수가 내딛는 걸음에 지면이 떨려왔고, 잿빛의 세계가 그림자로 덮여나갔다.
고작 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서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는 마수의 모습에 우선은 심상의 매듭을 풀어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심상치 않은 검제의 기세에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허나 하늘을 베어내지 못할지언정, 재능이 없을지언정. 내 검이 무딘 것은 아니니 이것이 네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
그 포효와 동시에 마수가 지면을 박찬다.
콰앙-!! 거대한 질량이 대지를 울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고, 그에 맞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작은 마수들마저도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으나- 나는 그런 마수들의 행동 속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마음의 검을 휘두르지는 못한다.”
검제의 검이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갔다.
퀴잉- 내 시야로도 순간 움직임을 놓칠 뻔했을 만큼 압도적인 속도로, 마치 중간에 움직임을 생략이라도 한 것처럼 검제는 순식간에 저를 중심으로 하나의 원을 그려냈다.
완벽하게 그어진 하나의 베기.
──────────────······
하지만, 당연히 원을 그려낸 그 궤적의 방향에는 옆에 서 있던 나 또한 들어가 있었고, 아무것도 뻗어져 나오지 않은 검제의 검격에도 나는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저 고요함이 내겐 마수의 포효소리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졌기에, 이 순간 마음을 놓으면 한순간에 베여나갈 것만 같았기에.
나는 그렇게 저도 모르게 새롭게 얻어낸 암야마저 몸에 두르며 심상의 매듭을 모조리 풀어냈고, 한순간에 달아오른 감각 속에 만상의 눈으로 그 검이 자아낸 광경을 지켜봤다. 무언가의 선이 사라지는 광경을 말이다.
그리고- 이내 나는 깨닫게 되었다.
“······.”
“······.”
어느새 주변에 적막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포효를 외치며 달려들었던 마수들이 모두 시간이 멈춘 것마냥 제자리에 얼어붙었고,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던 하울링 또한 모두 다 사라져 소름 끼치는 공백을 만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마저, 전부 다.
하지만 그 침묵의 사이에서 검제는 담담히 제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고, 그대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마치-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것 마냥.
“허나 검에 마음을 담아 현실을 베어내는 것까진 어떻게든 도달할 수 있었으니. 너 또한 우선은 이곳에 먼저 발을 들이거라.”
“······.”
“마음으로 하늘을 베어내고 싶다면, 검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걸음이 될 테니.”
하지만 나는 지금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아직 그 궤적이 현실에 구체화되지도 않았건만, 극한까지 개방되었던 감각과 만상의 눈은 그대로 검제의 검이 자아낸 광경을 쫒아갈 수 있었으니- 나는 이 순간 검제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공간을 뛰어넘고 가로지른 푸른 검기를.
“그러니 너는 기억하거라. 너의 아슬아슬함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정상을 바라보고 싶다면 우선은 이 고지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너는 이 검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다 자신할 때까진 우선 이곳을 바라보거라.”
“······.”
“그렇게 나를 지나쳐 뛰어넘고, 다시 너의 스승이 서 있던 곳까지 도달해 보아라. 마음의 예기를 세우기 위한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멀어서, 제대로 내딛지 않는다면 그 여정을 시작조차 하기 힘들 터. 그러니 내가 너를 위한 이정표가 되어 너를 받쳐주도록 하마.”
“······.”
“네가 나를 뛰어넘고서, 이 일 검을 다시 열 번을 받아낼 수 있다 자신하였을 때. 그때 비로소 그곳에 도전할 자격이 생길 터니.”
검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목소리.
“하니 그 모두를 뛰어넘어 마침내 네가 보았던 그 풍경을 내게 보여주거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바라는 소망이자, 바람이니라.”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금 검제가 펼쳐낸 한 수가. 내가 알고 있는 기술처럼 엿보였기에, 허나 그러면서도 그것만큼은 내가 이제껏 보았던 그 누구의 기예보다 더 완벽한 모습으로 펼쳐졌기에.
그리고 이 순간.
카득··· 콰아아아아앙-!!!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게- 말 그대로 모든 게 전부 반으로 갈라지며 터져나갔고, 공간을 뛰어넘고 그려진 푸른 원형은 달빛을 머금고 그대로 수십 미터에 이르던 마수도, 수백에 이르던 마수들도, 모두 한순간에 한줄기 그림자의 파동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방에서 그림자의 마력이 터져 나온다.
다시 그 가운데서 푸른 빛이 일렁거린다.
───────────────!!
비록 마음의 검은 아닐지언정, 물리적인 경계를 뛰어넘고, 다시 실질적인 거리마저 뛰어넘어- 그렇게 펼쳐진 극상의 기예.
무형지기와 격공의 기가 만남으로서, 두 상승의 절학이 만나 빚어진 하나의 검격.
그렇기에.
“무형검.”
검제의 검에서 뻗어 나갔던 궤적을.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사라졌던 푸른 선을. 수십 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구체화된 아름다운 일념의 검격을. 끝없이 뇌리에 각인시키며.
“이것이 바로 네가 심검에 도달하기 위해선 우선으로 거쳐 가야 할 길이로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았다.
***
남미- 그곳에 위치한 인적 없는 폐허.
한때는 포르투벨류라 불리었던 그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림자에 완전히 사로잡힌 뒤였고, 지금 이 순간 어둠과 적막에 잠겨있는 폐허의 사이- 그 도시를 거니는 존재는 오로지 이지 없는 잿빛의 마수들뿐이었다.
물론 단 한 마인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그걸 교주께서 명하셨는가?”
[그렇습니다. 존귀한 그림자시여. 현재 승천자의 절반가량이 심연지대를 떠나있는 상태이니, 그들의 행적이 확인될 때까지 당분간은 뒤틀림을 만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그 비루먹은 놈들이 자리를 비웠다라···.”
그 말을 읊조리며 그녀- 타천자 오스벨런은 텅 빈 거리를 걸어 나갔다. 저 자신의 옆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의 형체를 바라보며, 다시 그 허상이 전해온 소식을 되새겨보며.
그리고는 이내- 작게 읇조려보았다.
“······아쉽게 되었어.”
분명 그녀는 승천제에서 제 교단의 신실한 사도들을 멋대로 농락한 무지몽매한 공략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줄 생각이었지만, 위대한 그림자께서 그것을 금한 이상 오스벨런은 세워두었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영면에 든 순례자들의 껍데기를 마음대로 갖고 논 놈들의 행태는 역겨웠으나, 그림자 교단의 멸화급 주교 오스벨런은 저 위대한 그림자- 교주의 말을 받들어야만 했다.
그분야말로 이 비틀린 세계 속에 찾아올 유일한 진리- 심연의 대리자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오스벨런은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불쾌한 기분마저 모두 떨쳐버리고선, 위대한 그림자를 생각하며 짧게 기도를 올렸고 이내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되물어보았다.
“하면, 행적이 파악된 이들은 누구이지?”
[용제와 권황, 환귀가 아프리카에, 트리스탄과 프리앙이 유럽에, 루타텔이 바로 주교께서 계신 남미에서 행적을 드러냈습니다.]
“과연 아크샤 그놈이 사라진 탓인가.”
그에 그녀는 교주의 판단을 이해하였다.
물론 다른 승천자들도 교주를 제외하고선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강대한 불신자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멸천자 휴네 리들러와 성신 아크샤만큼은 더 주의해야만 했다.
그나마 전자가 이면순례자의 수장으로서 항시 행적을 숨기며 그들을 사냥하기 때문이라면, 다시 후자는 그 존재 자체 때문이었으니- 성신이라 칭송받는 그 인과의 비틀림은 분명 그림자 교단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녀석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대마도사.
아크샤가 사역하는 권능의 방향과 규모는 교주가 부여한 권능마저도 무시하였으니, 그녀가 알기론 지난 백 년의 세월 동안 그자의 손에 죽은 주교의 숫자만 해도 50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교주께서 전력의 손실을 염려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바.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교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건 그 불신자의 폭거가 아니며, 위대한 그림자께선 현재 인과의 비틀림을 찾고 있으니 불필요한 변수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틀림을?”
되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예. 그분께선 근래 인과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 있을 테니 그것을 찾고자 하십니다.]
“······.”
[그 모든 게 위대한 심연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니, 존귀하신 그림자께선 당분간 행적을 숨기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렇군.”
그 말에 오스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녀는 교주께서 말하는 인과도, 인과의 비틀림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심연의 도래를 위해서는 교주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는 것 또한 그 위대한 어둠이 이 부조리한 세계를 뒤덮는 것이었으니 잠깐의 침묵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하지만.
“우선은 유예를 하겠다 말씀드리거라.”
[유예 말씀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침묵의 끝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은 더욱더 짙게 울려 퍼질 터이니, 그녀는 그때까지 가만히 몸을 숨기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근래에 들어 격해진 이면 순례자의 움직임도,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잡다한 벌레들의 움직임도, 밝은 미래를 꿈꾸며 열광하고 있는 평온한 인류의 모습도. 모두 그녀의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오스벨런은 그들 모두에게 거대한 선물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저들이 축제에서 심연의 기둥을 부서트리며 희망을 깨우쳤다면, 다시 그들에게 심연의 기둥을 내리꽂음으로써 절망을 줘야겠지.
마인은 그 순간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우웅- 제 손에 들려있는 거대한 잿빛의 근원석을 바라보며, 다시 그 속에서 일렁거리는 막대한 그림자와 마력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잿빛의 대지에선 그림자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