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검지로 (3)
내 말이 끝나고 난 뒤- 이곳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주변에선 마수들의 울음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검제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잠시 얼어붙었을 뿐.
허나 나는 그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전에 이하린에게 심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을 땐 반응이 다소 미묘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원작에선 심검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제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나 이곳에 심검에 도달한 이는 없었던 모양.
그러니- 검제에겐 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가 사실은 이미 오래전 누군가의 손에 증명되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만약 내가 이제껏 보여준 모습이 아니었다면 믿는 것조차 힘들었겠지.
하지만 검제는 내 무학의 배경마저도 짐작해내었고, 내 실력을 알고 저 또한 기대를 건다고 했으니 이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을 터.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로군.”
이 순간- 검제의 입이 열리며 그 속에서 허탈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걸 믿지 않아서야 이제껏 내 말을 허황된 소리로 여긴 놈들하고 다를 바 없겠지.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렇다면 정녕 그곳은 이미 오래전 선대의 누군가가 도달했던 길이란 말인가?”
“······.”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고지가 아니라 이미 깃발이 놓여진 곳이었다라······ 허.”
나한테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저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읊조린 검제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너희··· 조사께선 무극을 말씀하셨더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니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이들을 절정고수라 칭하고, 그것을 타파한 이들을 초절정의 고수라 칭하듯이 그 명칭을 명명하지 않는다면야 다음에는 다시 다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하나의 길일 뿐이겠지요.”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시조께서도, 아버지께서도 모두 제 경지 너머로 나아가셨던 것이니 말이다.
“또한 저희에게도 조사님의 행적은 말년에 이르러선 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조사님께선 후에 세상을 떠돌기 위해 본문을 떠나셨다 하니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무엇을 보셨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 부분은 있었다.
“저희에게는 그저 기록이 남아있었을 뿐입니다. 떠나시기 전의 이야기가 말이지요.”
“······뭐라, 뭐라 남아있었더냐? 도대체?”
“젊은 시절 일수에 하늘을 베어냈음에도 조사께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아갔다고. 마지막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저희에게 남겨진 기록엔 그리 적혀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시조께서 정확히 어떤 경지에 서 계셨는지, 어딘가를 바라보고 계셨는지는 우리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시조 이후로는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던 이가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그 한 명- 당대의 천마셨던 아버지께서는 심검에 이르렀음에도 저의 부족함을 느끼시곤 천마신공의 한계 너머로 나아가셨다.
그리고 그 나아감의 결과는 다시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기에, 어찌 보면 나는 그렇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 따름.
“······그래서 너의 무극이 그러하였군. 그래서 너는 심검의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게야.”
“예. 저 또한 그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 말에 검제는 잠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그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제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열어왔다.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돼. 그것이 너의 인과였더냐? 재능을 받쳐줄 토양이 그리 방대하였으니 너 또한 그곳에서 계속 뿌리를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거지. 재능도, 성정도, 배경도 모두 모였기에 세간의 상식을 넘어섰으니··· 어찌 보면 인과가 낳은 기연이로다.”
“······.”
“그러한 경지에 이른 이가 존재하였다는 것도, 그러한 무문이 이제껏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지닌 곳의 명맥을 너 같은 재능을 지닌 이가 이었다는 것도. 모든 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니.”
거기까지 말한 검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렇군. 하면··· 너희 무문의 명맥은 어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냐? 일인 전승인듯하나 너의 스승님은 어디 계시는 게지?”
“······.”
“그만한 무맥을 잇고, 초절정에 다다른 고수라면 혹여··· 심검을 바라보고 계시는가?”
이건 진실도, 거짓도 어느 쪽이든 말하기 조금 미묘한 질문이었다. 그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내게도 조금 씁쓸한 물음이었기에.
허나 이미 이 세계에 와서도 밝힌 부분이 있었으니 나는 그냥 솔직히 대답해주었다. 물론 전부 이야기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느 정도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말이다.
“······스승님은 이젠 만날 수 없는 곳에 계십니다. 그분께서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진하셨고, 결국은 벽에 가로막히셨지요.”
“벽이라고···? 설마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주화입마에 걸렸단 말이냐? 그런 경지에 이른 무인이?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
뚝- 그런 느낌으로 말이 끊긴 검제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그대로 얼어붙었고, 동요를 숨기지도 못한 채 표정을 제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어왔다.
“······설마. 설마 그렇다면?”
차마 끝까지 내뱉어지지 못하는 말.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담담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예. 이미 도달하셨었습니다.”
“······!!”
비록 주어는 생략되었을지언정 이 대화에서 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고, 검제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이는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검제는 되물어왔다.
“······정말. 정말 사실이더냐 그게? 그렇다면 넌 본 적이 있다는 게냐? 마음의 검을?”
“예. 베어져 나가던 하늘을 보았습니다.”
내 말에 거세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스승님께선 겨울을 베어내셨습니다.’
“······허.”
그렇게 나는 당연한 대답을 돌려주었으니, 그와 동시에 검제의 입에선 날숨이 토해져나왔고, 그 기세마저도 한순간에 깊게 가라앉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로 무척 고요하게 말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 연이어진 이야기에 여러 번 충격을 받은 검제는 제 동요를 숨기지 않은 채 그대로 생각에 잠겨 들어갔으니,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마수들의 기척이 아니었다면 정말 시간이 멈췄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크륵··· 크르륵···!!
-키히익··· 캬하악!
그리고- 그렇게 멈춰있는 우리를 향해 다시 마수들이 살며시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검제는 그제서야 심력을 회복했는지 한번 호흡을 고르고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군. 믿을 수 없어. 허나 그러지 않고서야 너를 이해할 수 없으니, 네 말은 사실일 터. 허나 그러하기엔 내게는 이 모든 게 믿기지 않는구나. 도대체 이게······.”
이 순간 그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속에는 허탈함 감정이 깊이 배어있었으니, 그는 탈력감을 느끼고 있는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로 충격을 받았다는 듯한 모습.
저만한 경지에 이른 무인이 내비치는 동요라기엔 실로 감정적이었으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누군가 내게 막연히 상상하고만 있던 어떤 경지를 이야기하고, 다시 그곳에 도달한 이가 있었다 이야기한다면,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 또한 평소처럼 평정을 유지하긴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무인에게 무의 세계란 본디 그러한 것.
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는, 분명 때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체면보다, 목숨보다, 신념보다도 더 중요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면··· 너의 사문에서는 심검이란 경지가 그리도 흔한 것이더냐? 초절정의 세계를 당연시하듯, 그 세계마저도 당연시할 정도로?”
그런데 아무래도 충격이 과했던 모양.
“결코 아닙니다. 사문의 역사에서도 그곳에 도달한 이는 오로지 두 분. 시조님과 스승님뿐이었고, 그렇기에 그분께서도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여 그리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 아.”
다소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까 봐 말을 덧붙여주었더니 내 말을 들은 검제는 이제서야 아까 내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고, 그리고는 이내 사과를 건네왔다.
“내가··· 실례했군.”
“······괜찮습니다.”
저건 고인을 떠올리게 해서 실례했다는 것이겠지만, 사실 당연히 아버지는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그저 무림에 대해서도, 차원 이동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일부로 두리뭉실하게 말했던 것뿐.
하지만 그래서인지 약간 씁쓸하긴 했다.
이미 처음 이 배경을 설정했던 순간부터 느꼈던 씁쓸함이긴 하나 사실상 이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고, 하물며 무림으로 되돌아간다 한들 과연 무사히 계실지는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물론 2년 동안 깨어나시지 않았던 만큼, 그리고 그 천마라는 이름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만큼 교인들의 민심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아버지께 해를 끼치진 않았을 것 같으나- 만약 아버지가 주화입마를 떨쳐내고 깨어나시려 한다면 그 순간 검혈마제는 명분을 버리더라도 아버지를 죽이려 할 터였다.
그것도 아버지가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그러하니 나로서는 내가 되돌아가기 전까지는 아버지께서 깨어나시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고, 무사를 바라면서도 다시 그런 걸 바라고 있단 사실이 착잡할 따름이었다.
“······.”
“······.”
그렇게 나는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신교의 일을 되새기며 잠시 말을 아끼었고, 마찬가지로 검제 또한 내게 들었던 말을 되새기고 있는지 침묵 속에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순간 검제는 멍하니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치 심검의 풍경을 떠올려보겠다는 듯이.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건 어려운 법.”
그 순간-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검제의 입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아가고자 하여 그리 되었다라··· 그래. 허상과도 같은 저편에 발을 내딛는 건 설령 초절정의 고수라 할지언정 힘든 노릇이지.”
헌데 진중하게 가라앉은 검제의 목소리가 영 심상치 않았기에 나도 이내 몰아치던 상념을 빠르게 밀어 넣고 그 말을 경청하였다.
“헌데 그것을 아느냐? 나도 이따금 그러한 기분을 느꼈었다. 정진하여 다음으로 나아가도, 다시 다음이 존재하고, 다시 다음, 다음, 다음이 있으니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막연해지는 순간이 가끔 찾아오곤 하더군.”
“······그렇습니까?”
“그래. 모든 게 그저 까마득한 신기루와도 같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너머가 허상인가 두려워지기에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었지.”
“······.”
“이제껏 많은 걸 깨우쳤기에 무지를 깨달았고, 그렇기에 확신할 수 없는 너머를 보고자 하여 너에게 판돈을 올려보려 하였거늘 이래서야··· 걸기도 전에 답을 들어버렸군.”
검제는 그 말과 함께 아까보다는 다소 차분해진 표정을 지으며 내 눈을 마주해왔다.
그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녕. 하늘은 벨 수 있는 것이었더냐?”
“······예. 분명히 가능합니다. 그저 너무나도 멀기에 쉽게 갈 수는 없는 길일뿐이지요.”
그 순간 내 대답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은 약간 허탈해 보이면서도, 다시 조금은 시원해 보이는 그러한 웃음이었으니 나는 요동치던 그의 기세가 어느새 무척 차분해진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 네게 가르침을 주려 하였거늘, 이래서야 내가 네게 이정표를 받아버린 셈이로다.”
“······.”
검제는 내 말에 과연 무엇을 느꼈던 걸까.
처음 내게 걸어왔던 말과 지금의 대화를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검제는 나를 통해 심검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었던것 같았다. 자신이 내딛기엔 그 길이 제대로 된 길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결국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가능성을 내가 증명해주기를 기대했다는 말.
도대체 내가 그곳에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알고 그랬을까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긴 시간 동안 벽에 막혀있었던 입장이라면 만약의 가능성에 며칠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긴 했다.
다른 누군가가 끊임없이 벽을 넘어 나아갈 동안에도, 그 자질에 따라 누군가는 평생동안 절정의 벽 하나를 넘지 못하고 좌절할 수도 있는 게 바로 무武의 세계였으니 말이다.
무武는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허나- 그렇기에 벽 앞에서 좌절할 바엔 차라리 발버둥을 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벽을 깨트리고 넘어갈 방법을 생각하는 이들만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검제는 돌아서라도 길을 찾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가 결국 답을 알게 된 모양.
물론 깨달음을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저 저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는 의심하고 있던 심검의 세계를 내 말로 하여금 확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 분명 앞으로 정진하는데는 그것만해도 큰 도움이 되긴 할 터.
“그러시다면 다행이로군요.”
그러니 나로서도 환영해줄 만한 일이었다.
검제가 내게 기대를 걸었듯, 나 또한 그가 심검에 닿는다면 얼마든지 축하해줄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앞서나가는 것보다는 내가 그곳에 도달하는 게 중요했으니, 내게도 앞서 나간 이의 발자취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요소였으니 말이다.
하물며 내게는 이전보다 더 뛰어난 상태로 개화한 눈이 존재했고, 만약 그 머나먼 이상향을 다시금 내 시야- 만상의 눈에 고스란히 담아볼 수 있다면 나 또한 심검으로 향하는 여정을 단축할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관측하고, 궁구하고, 체득한다.
그것이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이었으며, 내게 있어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으니, 길을 보여줄 이가 나타난다면야 환영할 수밖에.
그런데 그 순간.
“다행? 허. 이래선 셈이 안 맞을 터인데 어찌 다행이란 말이냐?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신경을 기울여도 부족할 지경인데도.”
“······?”
“하니 이번엔 내가 이정표를 마련해주마.”
내 반응에 불만이 서린 대답을 되돌려준 검제는 자신이 언제 동요했냐는 듯 날카롭게 벼려진 기세를 다시 펼쳐 보이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리고 지금 우리의 주변에는 조금 전 멈춰 섰을 때부터 슬금슬금 다가오던 마수들의 무리가 어느새 빙 포위를 하듯 가득 메워져 있었으니, 그르륵 거리면서도 다가오지 못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그는 혀를 찼을 뿐.
그리고는 이내.
쿠구구구구구-!!!
사방을 향해 살벌한 기세를 내뿜었다.
“쯧. 아직은 적당한 놈이 안 보이는군.”
“뭐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생각에 잠긴 사이 냄새를 맡고 몰려든 녀석들이 많으니, 하나쯤은 쓸만한 녀석도 나타나지 않겠느냐? 지금 마음 같아선 멸화급이 달려와도 상관없겠다는 기분이로구나.”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검제의 행동에 잠시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검제는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내게 뜬금없는 말을 건네왔다.
“내가 처음에 했던 말이 기억나느냐?”
“······어떤 말씀 말입니까?”
“내가 왜 이리 급하게 구는지 알겠냐 물었던 말. 그리고 그에 대답해주었던 말.”
나는 검제의 말에 잠시 되새겨보았다.
“시간이 아깝다 하셨던 말씀 말입니까?”
“아니, 나는 아까 네 말을 듣다 보니 나에 대한 인상이 흐려지기 전에 너에게 보여줘야 할 광경을 깨달았다 말했었다. 기억나느냐?”
“아······ 예. 기억납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그저 바로 다음에 심검을 이야기했기에 내 관심에서 자연스레 묻히게 되었을 뿐이지, 저것도 나름대로 내겐 의아한 말이긴 했다.
내게 보고 싶다는 건 심검이라 쳐도, 내게 보여주고 싶다는 건 과연 뭐란 말인가? 나는 갑작스러운 검제의 말에 다시금 그 부분을 떠올렸고, 이내 그에게 말을 건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건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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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저 멀리서 들려온 강렬한 외침. 수호자급 마수의 포효 소리만 아니었다면야.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만상의 눈을 전개해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고, 나와 마찬가지로 검제 또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가 터져 나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짐승형상의 마수였으니, 그 잿빛의 언덕은 일그러진 하울링을 토해내며 순식간에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또한 그런 녀석의 마력에 영향을 받았는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수들마저도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다가오기 시작했을 정도.
“흠···? 왔군. 보자··· 황혼급인가?”
“예. 황혼급이군요. 대형종입니다.”
물론 몇 시간을 달려왔던 만큼 우리가 있는 곳은 침식영역의 안쪽. 그러니 수호자급이 나타나는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질리도록 있을 테고 말이다.
또한 나도, 검제도 황혼급 마수 정도에 위협을 느낄 수준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수 킬로미터 미터 너머에서 달려오는 마수의 존재를 인지하였음에도 그저 제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녀석이 이곳에 다가오면 그때 베어내서 죽이면 그만이니 그저 당연한 일.
나 혼자였다면야 마력 방벽을 깎아내기 위해 고생을 좀 했겠지만, 옆에 있는 이가 명색이 승천자인 만큼 달밤의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순간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아하긴 했다.
“그래서··· 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기에 기세를 뿌려 마수를 불러오신 겁니까?”
“무엇이긴. 말했지 않느냐? 내 너에게 처음부터 이정표를 마련해줄 생각이었다고.”
“저는 그게 대체 무엇인지 묻는 겁니다.”
조금 전 내게 심검을 기대한다고 하였으나, 검제는 심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내게 기대를 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저런 말을 한 것일까- 나는 지금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물론 훌륭한 한 수를 보여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영감을 줄 순 있겠지만, 그게 과연 이정표라 말하기에 적당한가 싶었을 따름.
그러하여 의아한 심경을 담아 검제를 바라보았더니, 검제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황혼급 마수와 주변에서 주춤거리는 마수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옅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는 내게 열합의 간극을 이야기했지.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너를 오만하다 여겼으나, 실제로 네 놈이 싸우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니 너의 판단이 맞았더구나.”
“······.”
“한데 처음에는 왜 착각했는지 아느냐?”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른 건 없었기에 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내저었고, 그런 내 행동에 검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네 경지와 실력이 맞지 않았으니까.”
다소 미묘한 말을 내게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