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검지로 (2)
대전에서의 비무가 모두 끝나고 난 뒤, 검제는 내게 벽을 넘어서고 싶냐 물어보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뜬금없었던 말.
하지만 그 말을 꺼낸 대상이 대상이었던 만큼 나는 흥미를 느껴 그렇다고 대답했고, 검제는 내 대답을 듣고서는 이내 내게 여러 질문을 건넨 뒤- 그러니까 조금은 길었던 문답 끝에 잠시 고민을 하는듯하더니 자신과 함께 침식 영역에 들어가잔 말을 건네왔다.
내게 무언가를 보여줘야겠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걸 내가 승낙하자마자 일은 바로 이렇게 진행되었으니. 지금 우리는 달빛을 벗 삼아 어두컴컴한 하늘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침식영역을 내달리는 중이었다.
무련에서 나와 게이트를 타고 접경지로, 접경지에서 다시 쉴 새 없이 지면을 박차며 침식영역으로. 뭐가 이리 급한가 싶을 정도로 검제는 막힘없이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 순간 검제가 때마침 그 부분을 언급해왔다.
“내가 왜 이리 급하게 구는 줄 아느냐?”
정말 난데없는 물음- 무련에서 출발한 뒤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들려온 말이 바로 이것이었으나 나는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어차피 그 성정부터가 상당히 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참 전형적인 고수의 표본이었다.
“시간이 아깝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한시가 아깝기는 하지. 원래부터 네 녀석을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긴 하나 이래서야 며칠은 더 날리게 생겼으니······.”
“하면 그냥 가시면 되시지 않습니까.”
“허. 당돌한 녀석이로다. 네게 부족한 구석이 보이지만 않았어도 그냥 갔을 게다, 이 녀석아. 며칠 마수를 썰어대는 것보다 네 녀석한테 투자하는 게 더 인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하는 짓이니 감사히 여기거라.”
“······.”
그 말에 나는 말 없이 계속 대지를 박찼고, 검제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음. 이것은 결국 투자이니라.”
왠지 나한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검제는 무인이면서도 다시 승천의 업에 오른 이였기에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승천자들의 성향을 생각해보자면 대부분은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걸 남들보다도 더 극적으로 싫어할 테니 말이다.
애초에 그런 성향을 지니고, 그걸 감당할 능력이 있는 이들이기에 승천자라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하는 투자입니까?”
“무엇을 기대하냐고······? 네가 강해지면 그만큼 인류에게 도움이 될 것 아니겠느냐?”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이유였으면 이렇게 하진 않았을 터.
조금 전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검제의 말속에서 무언가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걸 증명하듯 검제는 한시가 급하다는 듯 나를 데리고 이렇게 침식 영역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말 단순히 그런 이유였다면 내가 성장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그냥 저가 직접 마수를 썰어대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초절정의 벽을 넘어서는 건 그저 누군가가 가르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게 가능했다면 검제는 지금 온라인으로 무공을 강의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런 생각 속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검제는 이내 혀를 차더니 알겠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어왔다.
“쯧쯧. 하여간 맹랑한 녀석 같으니.”
“······.”
“그래. 말해주마.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있으나 내 미천한 재능으론 닿지 못할 것 같으니, 네 발랑 까진 재능에 걸어볼 생각이다.”
“보고 싶은 것···?”
이건 또 상당히 의외인 소리.
“그래서 이리 다급하게 구는 게지. 네 말을 듣다 보니 나에 대한 인상이 흐려지기 전에, 너에게 보여줘야 할 광경을 깨달았으니까.”
“······.”
“허니. 너는 반드시 이뤄내 갚도록 해라.”
하지만 검제는 상당히 진중한 목소리로 그리 대답했고, 나는 지금의 말이 내게 이런 제안을 건넨 진짜 이유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보고 싶다는 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도대체 초절정의 세계에 도달해있는 고수가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까부터 말하고 있는 내게 보여주어야 할 광경이 무엇인지. 대체 내게서 무엇을 봤길래 저 올곧은 승천자가 굳이 나를 보려고 무련에 와 있었다는 건 지 모두 의아해졌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을 베어내는 것.”
“······.”
탁- 검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간단한 대답에 나는 그 즉시 그대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나는 검제에게 이전까지와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큰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와버린 탓.
난데없이 심검心劍을 입에 올린다니?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검제도 그와 동시에 나와 같이 발을 멈추더니 이내 옅은 코웃음과 함께 내게 물어왔다.
“왜. 네게도 허황된 소리로만 들리느냐?”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그에 나는 단호히 대답을 돌려주었을 뿐.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대체 어떻게 그걸 허황된 말로 여길 수 있겠는가? 그것은 어떻게 보면 나의 이상향이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검을 들고 있는 이유였다.
심검- 그곳은 내가 닿고 싶은 무의 저편.
그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무극으로 향하기 위한, 내가 목표로 할 수 있는 가장 찬란한 이정표였다. 다시 지금도 이따금 떠오를 정도로 강렬히 남아있는 어린 날의 기억이며, 그 사이에서 베어졌던 겨울의 하늘이었다. 제 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번민하던 내게 펼쳐진 하나의 길목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날이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그곳에 닿고 싶다는 마음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걸 가벼이 여길 수 있을까.
하물며 지금 이 세계에선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처음으로 입을 올리는 이가 나타났으니, 나로서는 그 배경을 떠나서라도 저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그렇기에 나는 한순간에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그러면서도 조금 거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그를 마주했고, 그런 내 시선에 검제 또한 진지하게 정제된 눈빛으로 내 눈을 마주해왔을 따름이었다.
정말로 그러하냐는 듯한 물음을 담아.
내 대답의 진의를 파악하겠다는 듯이.
그리고는 이내.
“······그렇군. 역시 그러했어.”
그 입가 위로 짙은 미소를 띠어 보였다.
쿠구구구-!! 그와 동시에 검제의 몸에선 살벌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겉으로도 한눈에 엿보일 정도로 흥분한 검제는 세차게 일렁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크르륵··· 크라아아!!
-키햐악··· 캬하아악!!
그러자 가만히 멈춰 선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마수들마저도 그 기세에 한순간에 화들짝 놀라며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림자 마수가 피할 정도로 검제의 기세는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사방에 퍼져나갔다.
분명히 대기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의 기세.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저건 분노했다거나 누군가를 위협하려고 내뿜는 기세가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는 억눌러놨던 기세가 저도 모르게 풀려나온, 한마디로 평정을 유지했던 심경이 요동친 결과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이 순간 검제의 얼굴 위로는 명백한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이 대답이 그리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물론 검제가 왜 저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는지는 딱히 이해가 안 갔지만 말이다.
그러자 내 말에 검제도 이내 제 상태를 깨달았는지 빠르게 기세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그 예리한 단상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입가에 떠오른 미소 또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허나 검제는 상관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까. 이제껏 무학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내 말을 그러려니 여기는 게 전부였고, 무를 궁구하는 이들은 모두 내 말을 허황된 소리로만 받들었으니 이게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끽해야 악가놈을 제외하고선 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거늘, 너는 지금 내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리 대답한 것이지 않더냐?”
“말씀하신 게 심검이 맞다면 그렇습니다.”
“역시 알고 있었군! 예상이 맞았도다!!”
하하-! 내 말에 검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그르륵 거리는 마수들의 울음소리와 뒤섞여 잿빛의 대지에 울려 퍼졌으니, 그러한 모습이 내겐 실로 기묘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러건 말건, 검제는 그저 흥분한 목소리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건네왔다.
“그러하면. 너는 내가 왜 네게 이런 제안을 건넨지 이해하겠느냐? 왜 다른 놈들이 아니라 너를 콕 집어 기대를 걸겠다고 하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나는 여러모로 조금 당황스러웠다.
검제가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래 봤자 끽해야 위타극을 처단하고, 승천제 때 방송으로 송출된 모습들뿐. 그런데 저 사람은 그것만 보고도 내게 흥미를 느꼈다면서 시기를 맞춰 나를 직접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하물며 낮에 대련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그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만 보더니, 그것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내게 다가와선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왔다. 초절정의 벽- 그 앞에 놓인 심경에 대해, 무련을 보며 느꼈던 심경에 대해, 다시 검의 의미에 대해, 또한 위타극과 싸웠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
약간은 두서없으면서도 무학에 관한 일련의 흐름이 느껴지는 질문을 몇 시간에 걸쳐 건넨 검제는 그 모든 걸 듣고 나서야 내게 제안을 건네왔고,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우선 초절정 고수라는 점에 흥미가 있기에 따라오긴 했다만 왜 그가 굳이 나를 데리고 가르침을 주겠다며 이러고 있는 건지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심검을 기대한다면야 더욱더.
“도대체 제게 무엇을 보고 심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그곳에 도달할 거라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을 전혀 상관없는 이의 입에서 이렇게 듣게 된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딱히 그 배경에 대해 짐작 가는 이유도 크게 없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고, 그런 내 대답에 검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펼쳐보았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세 가지나 말입니까?”
“그래! 우선 네게 흥미를 느끼게 된 첫 이유는 바로 나르화리얀 녀석 때문이었지.”
나르화리얀?- 뜻밖의 이름이 되돌아왔다.
“만상세계가 너를 주시한다고 했더냐?”
“아··· 예. 그렇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승천자라면 전부 네게 관심을 보일 게다. 하물며 나르화리얀도, 루타텔 그놈도 모두 너를 인정하였고, 저 아크샤마저도 4월부터 네 놈을 주시하고 있었지.”
“······.”
나르화리얀, 루타텔, 검제······ 아크샤.
모두 등천의 구도자에 소속되거나 협력을 맺어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었으니, 나는 검제의 말속에서 어느 정도 맥락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전에 들은 대로 그들의 회의에서는 내 이름이 여러 번 나왔던 모양.
하지만 나는 그 아크샤가 4월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부분이 조금 신경 쓰였다.
물론 위타극을 토벌한 게 인상이 깊었을 수도 있으나, 이 세계에서 가장 드높은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원작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그의 이름이 의외로 내게는 꾸준히 들려오고 있다는 게 묘하게 거슬릴 뿐.
허나 승천자를, 그것도 아크샤 정도의 인물을 경계하는 것도 웃긴 노릇이었기에 나는 일단 그 부분을 머릿속에 기억만 해두었다.
이타심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신경써봤자 나 혼자만 피곤해질 테니 말이다.
“거기에 나르화리얀 녀석이 내게 승천제 때의 기억을 던져주었으니, 그걸 보고 났더니 네 검에 무척이나 흥미가 생기더구나.”
“······그렇군요.”
“해서 그것이 다시 두 번째 이유였다.”
내가 그렇게 납득하고 있으니 이내 검제는 두 번째 손가락을 펼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아이들과 모의전을 치를 때 수많은 변화를 그 검에 담아내었지. 무초의 사이에서 유초를 펼쳐내니, 그것은 필시 검을 이해하고 휘두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예로다.”
“······.”
“만검의 변화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펼쳐내는 것. 너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더냐?”
나는 그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까 낮에 대련을 하면서 다른 이들도 그 정도는 대부분 파악했을 테니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성을 못 느낀 탓이었다. 검제 정도의 인물이라면 내가 그저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란 걸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의아하더구나. 도대체 어떻게 그런 나이에 만검의 갈래에 닿았는지. 어떻게 검의 흐름을 꿰뚫는 눈을 가졌는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 마음대로 검을 펼쳐낼 지반을 다졌는지가 나는 무척이나 의아해졌다.”
“······열심히 정진한 덕분입니다.”
“당연한 소리! 허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천재적인 재능과 무수한 노력. 그것은 필수적인 요소지만 전부는 아니지. 너의 재材는 분명 그 뿌리를 내릴 지반이 필요했을 터.”
“······.”
“그래서 그것이 다시 세 번째 이유였다.”
나는 이어진 검제의 말에 다소 묘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저 말속에는 단순히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뜻만 담겨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으니- 검제는 내 예상을 긍정하듯 몇 가지 말을 더 덧붙였다.
“앞의 이유로 네게 흥미를 갖고, 너를 실제로 만나보니 참 많은 부분이 궁금해졌지.”
“······.”
“처음 만나자마자 보였던 태도도, 싸우면서 보여준 모습도, 무련의 가운데서 당당히 이야기했던 무극을 바라보는 해석마저도. 모두··· 마지막 이유를 가리키고 있었으니.”
“······.”
“과연 유천하 너를 가르친 게 누구일까. 바로 그러한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르더구나.”
그것도 상당히 예리하게 피어난 의문을.
“하니 네게 직접 물어보마.”
검제는 칼처럼 벼려내 내게 겨누었다.
“너는 초절정의 고수에게 검을 배웠더냐?”
***
날카로운 질문- 나는 그 말에 빠르게 생각을 해보았다. 저 말에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 그 대답이 어떤 의문으로 이어질지. 그렇게 여러 요소를 고민하고, 고민해본 결과.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사실대로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그건 이제껏 내 경지를 숨기지 않았던 것처럼 이것에도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다시 내가 아무리 사실을 얘기한다 한들 어차피 저 차원 너머에 위치한 신교에 대해선 알 리가 없었던 탓이었다.
무림과 이곳의 역사는 당연히 달랐고, 이곳 그 어디에도 신교의 흔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내가 이제껏 보여준 모습이 있는 이상,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저런 고수의 눈을 가리려 해봤자 오히려 그쪽이 더 의심을 살 거란 판단도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검제의 대답은 내 판단을 긍정했다.
“하! 역시! 예상했다만 당연한 이야기군. 청출어람도 정도가 있는 게다, 이 녀석아.”
“······.”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이라 할지언정 저 혼자 무無에서 무武를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한 법이지. 무란 업業이다. 사람의 손으로 한계를 넘기 위해 쌓아온 공들인 탑이자, 선대가 풀지 못한 번민을 후대에 양도하는 세월의 길이니. 아무리 씨앗이 좋다 한들 싹을 심어놓을 토양이 없다면 어찌 피어나겠느냐?”
“······.”
“너의 검기劍伎. 무도武途. 처음부터 한계를 그어놓지 않고 경계를 없애는 것부터 시작했다는 게 느껴졌으니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네 무공은 시작부터 초절정의 세계에 당연히 들어갈 것을 전제로 한 느낌이었다.”
과연 초절정의 경지는 허명이 아니었던가.
검제의 말은 천마신공과 일천검결의 핵심을 단번에 꿰뚫고 있었으니, 그의 말대로 천마신공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물어 번민을 통해 마음의 한계를 깨트리는 데에서 시작되었고, 일천검결 또한 처음부터 만검의 갈래에 닿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무학과 비교했을 땐 확실히 이질적인 구석이 많았고, 그렇기에 다시 정도가 되지 못한 외도였으니- 어찌 보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무공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나로서는 그 약간의 요소들만으로 바로 간파당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신공을 자처하는 만큼 그걸 알아챈다 한들 딱히 의미가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검과 말속에서 핵을 이루고 있는 영역을 바로 알아챘다 하니 솔직하게 감탄스러웠다.
“적어도 초절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그다음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길 테고, 무극이 얼마나 덧없는 말인지 알게 될 터.”
“······.”
“하물며 너의 검은 단순히 깨달음을 통해 빚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초식의 경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뻗어져 나오니 그것 또한 최소 만검에 닿은 이가 만들어낸 식이겠지.”
그러하니- 그 말과 함께 웃어 보이는 그.
“너의 스승. 아니, 너의 사문은 그 시작부터가 초절정의 세계는 당연히 밟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곳이라 봐야 하지 않겠느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허. 오만하구나. 실로 오만하다···! 하하!”
검제의 입에서 다시금 거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도망쳤던 마수들도 다시금 기척을 드러냈지만, 검제도 나도 딱히 저런 놈들에게 굳이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 어느 곳이 이 높이를 당연시할 수 있단 말이냐? 허나 그 실체가 내 눈앞에 있으니 막연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
“······.”
“설마 너희 사문에선 너 같은 나이에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게 당연한 일이란 건가?”
“그것은 아닙니다.”
“하면 너는 그중에서도 특출났다는 거군.”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역대 교주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속도를 보인 이는 없었기에 나는 딱히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물론 단순히 빠른 것보다는 옳게, 더 멀리 나아가는 게 중요했기에 내겐 저 사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말이다.
“허나 그렇다 한들 이 시대에 아직도 그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구나. 그런 무맥이라면 스러져간 무림의 줄기에도 분명 그 발자국 정도는 남겨놓았을 터인데······ 혹시 내게 사문의 이름을 말해줄 수 있겠느냐?”
“그것만큼은 어렵겠습니다.”
“······호. 그렇더냐?”
신교의 이름은 그 유무를 떠나서라도 함부로 말해주기는 곤란했다. 또한 애초에 이러한 질문 자체가 어지간해선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부류의 질문이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원래라면 사문과 무공에 대해 캐묻는 건 무척이나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곳이 이러한 세계기에 저렇게나마 넌지시 그런 걸 물어볼 수 있는 거겠지.
“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 사문은 불가의 깨달음에서 시작되었기에 수행을 우선으로 삼으며 이어졌고, 그렇기에 외진 곳에서 그 무맥만을 이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불가에서 시작되었다라··· 흐음.”
“그 외에는 그간 이어져 온 조사의 유지를 받들어 자세히 밝히기가 곤란한 바입니다.”
내 말에 검제가 무언가 후보를 추려보려는 것인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본들 그가 정답에 도달할 일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비록 시조의 위업을 무림이 인정치 아니하였기에, 시조의 바람과 세상의 뜻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그 스스로를 천마라 자처하고 무림에게 그 이름의 업을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었으나 분명 우리의 시작은 그러했다.
비틀린 깨달음으로 하늘에 맞닿은 이가, 다시 세상에서 핍박받는 비틀린 이들을 모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모여든 하나의 집단이자, 하나의 신념을 위해 모여든 종교.
신교는 분명 그렇기에 위대했고, 다시 그러하기에 끝내 비틀림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현시대에 와선 깨져나간 곳이었다.
핍박을 받았던 이들은 시대가 흐르면서 저들의 시작을 덧없이 그 흐름 속에 흘려보내었고, 오히려 구세를 위해 이어온 업을 저 자신들의 탐욕을 불리는 데 사용하였으니 어찌 보면 사람의 이기심을 간과한 시조께선 처음부터 틀린 선택을 하셨던 걸지도 몰랐다.
천마의 이름은 이미 시조가 염원했던 의미와는 달라질 대로 달라져 버린 뒤였으니까.
“흠······ 그래. 딱히 생각나는 곳은 없으니 확실히 외진 곳에 은거한 문파긴 한가 보군. 종교적인 시작이라면 이해는 가는바. 허나 그렇다 한들 수준이 너무 높아서 의아해.”
“······.”
“너희의 개파조사께선 도대체 어느 경지에 이르셨기에 그러한 무공을 창안하였더냐. 말했듯 아무리 천재라 한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그런 걸 만들어낼 순 없었을 터.”
이 정도는 나도 대답해줄 수 있는 범주.
나는 신교가 세워지기 이전, 시조께서 거쳐왔다고 기록된 일들을 되새겨보며 천마신공이 시작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려보았다.
“조사 또한 백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불가. 지금의 기준으로 치면······ 위구르에서 시작된 한 종파의 갈래에서 시작되었고, 정신의 깨달음은 수행자를 통해 계속 내려져 왔다고 합니다.”
“······하면.”
“예. 그러한 수양의 업은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온 끝에 결국 무의 업을 쌓아가던 조사와 맞닿아 새로운 열매를 피워냈고, 조사께선 해탈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번민한 결과, 세상을 바라보는 무의 깨달음을 얻으셨다 하니······ 기록에는 이리 남아 있었습니다.”
“뭐라고 말이더냐···?”
검제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내 입을 응시하였고, 나는 시조께서 남기신 무수한 위업 중 그가 듣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번의 손짓으로 하늘을 베어 갈랐다고.”
바로- 내가 지나온 무림의 기나긴 역사에서도 처음으로 심검을 펼쳐냈던 위대한 이. 고금제일인 시천마蓍天魔의 업적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