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59화 (159/205)

심검지로 (1)

털썩- 막 씻고 나와 잠옷을 걸친 채로 이하린은 쓰러지듯 제 침대 위로 기울어졌다.

그러자 푹신한 쿠션이 그녀의 몸을 받치며 작게 튕겼지만, 이하린은 그저 쏟아지는 피로를 체감하며 두꺼워 보이는 하얀 이불 속에 제 흰 피부를 그대로 파묻었을 뿐이었다.

무척이나 푹신푹신한 기분- 당장에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기분과는 반대로 편히 잠을 청하기가 힘들었기에 이하린은 나지막하게 제 입을 달싹거렸다.

“연락······.”

침대에 푹 파묻힌 채 작게 옹알거리듯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가 적막을 파헤친다.

“······해주신다고 했으면서.”

이하린은 오늘 하루 동안 쌓인 피로에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다시 한결같이 연락 한번 안 해주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늘어지는 신경줄을 붙잡아보았다.

그렇게 그녀의 마음은 피로를 느끼면서도 조금 흔들렸으니 그 까닭은 별게아니었다.

-은공께선 검제님과 볼일이 있으셔서 추후 따로 오신다고 합니다. 예. 검제님이요. 예? 아··· 무련에서 별일은 없었습니다. 음··· 예.

그것은 저녁에 무련에서 복귀한 남궁설아가 건네준 말 때문이었으니,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분명 아침에는 그냥 물건 하나만 받고 온다면서,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던 사람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탓이었다.

대체 검제와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걸까.

심지어 늦어지더라도 연락은 해준다고 했으면서, 남궁설아를 통해 전달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연락조차 해주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이하린은 조금 콩닥거리는 가슴을 웅크리면서 커다란 베개로 제 얼굴을 감싸보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이 아니란 건 이하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유천하는 어디 위험한 곳에 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저 위대한 초인- 승천자와 함께 있다고 하니 저가 걱정할 요소는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하린은 불안했다.

승천제가 끝난 지도 벌써 2주가 지나가고 있건만, 그녀의 꿈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을 뿐.

제 손으로 지켜야 할 두 사람이 눈앞에서 균열에 휩쓸려 사라졌던 순간이. 아리엘이 유천하의 앞을 막아서며 같이 휘말렸던 순간이. 그 순간에도 상대가 유천하였기에 안일하게도 제 몸을 던지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물론 회랑 측에서 추후 생도들을 위해 실시했던 테스트에선 금방 회복될 거란 진단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그렇게 멘탈 케어를 받으면서 그녀 스스로도 어느 정도 빠르게 진정되어가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불안한 걸 저 자신이 어쩐단 말인가?

그렇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는데.”

이하린은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 그렇게 걱정 어린 목소리를 힘없이 되뇌어보았다.

그러면서도 이하린은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써 내려갔던 원작에 대해서.

그중 이미 해결된 사건들에 대해서.

아직도 남아있는 위험들에 대해서.

그녀가 이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저가 적어버렸던 위험들에 대해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둘 수 있었다.

이하린은 그간 위협이 되는 요소들에 대해선 여러 조치를 취했었고, 정치적인 문제로 추후 문제를 일으킬 집단에 대해서도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제 손으로 예방할 수 있는 건 제 손으로, 그게 불가능하다면 등천의 구도자의 힘을 빌려서, 티르유와 개인적인 협력을 맺어서, 혹은 익명의 제보를 통해서라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막지 못했다.

카룬드를 미리 없애기 위해 페루의 일을 건드렸다가 시기만 앞당겼고, 위타극의 침식 충동이 가속화된 것도 모르고 남궁설아에게 괜한 말을 했다가 그녀마저 잃을 뻔했으니 만약을 생각해보자면 지금도 아찔해질 따름.

그러나 한 사람이 있었기에, 그가 항상 저의 곁에 있었기에 실패를 막을 수 있었다.

“······천하 씨.”

그렇기에 고맙고, 기대되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막연히 기대기만 해선 안 되는 사람.

이하린은 그 사실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유천하는 원래대로라면 저와 처음 만났던 그 날 죽었을 사람이었다. 그때 유천하의 상세가 그러했고, 상황이 그러했고, 등천회랑을 목표로 세상에 나왔던 그가 원작 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가 존재했을 테니까.

그러니 원래의 세계선에선, 이 시간대에선 존재하지 않았을 사람을 제 손으로 살려낸 만큼 만약 그가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면 자신은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녀에게 유천하는 그런 존재였다.

제게 유일한 위안을 안겨주는 속죄의 상징이자 친애하는 동료. 미래의 불빛이 되어주리라 믿고 있는 찬란한 희망. 다시 저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 제 무모함을 걱정해주는 사람. 저가 위험할 때마다 나타나 그 등을 보여주는 사람. 그렇기에······ 어찌 보면 이 세계에서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좋은 사람.

이하린에게 유천하는 단수가 아니었다.

여러 의미가 섞이고 섞였기에. 이하린에게 유천하는 분명히, 여러 의미로 소중했다.

그러니 그녀는 그의 행복을 소망하였다.

아니, 이하린은 모두의 행복을 소망했다.

“······다··· 잘 되야하··· 는······.”

그녀는 지금도, 그리고 나아가 저 미래의 끝자락에서도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기를 염원했고, 모두가 무사히 저마다의 소중한 것을 지켜내며 살아가기를 희망하였다.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그 유치하고, 뻔한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원작자 이하린은 이곳에 와있었고, 제 손으로 적지 못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염원이자, 희망이고, 다시 소망이며······ 진실된 마음이었으니까.

“······.”

그런데 왜일까. 자신의 마음을 되뇌고 있자니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는 3월에 나눴던 어떤 대화가 스르륵 떠올랐다. 아마도 유천하와 검제의 이름을 함께 들어서 그런 걸까?

-단련하기에 따라 검과 하나가 되어, 검으로 공간을 뛰어넘고, 마침내 세상을 베어낼 때까지··· 의념은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검 말입니까?

유천하가 저에게 의념을 가르쳐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고, 다시 저 자신이 원작의 결말부에 적기로 마음먹었던 소재가 떠올랐다.

-하늘이 베어지더군요.

그날의 유천하는 심검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으로 하늘을 베어낼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이 미처 적지 못해 확신할 수 없었던 얘기를 유천하는 실제로 가능하다고 해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만약.

자신도 언젠간 마음으로 하늘을 베어낼 수 있게 될까? 비록 아직은 미약할지언정 미래에선 이 마음으로 어두워진 세계를 베어낼 수 있게 되는 걸까? 이하린은 뭉글거리는 기분 속에 저가 바라는 미래를 떠올려보았다.

아직은 검강을 날리는 것도 간신히 해내는 실력이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유천하가 말해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제 마음이 단순한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검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이하린은 서서히 가라앉는 의식 속에 유천하의 목소리를 되새김질해 보았다. 유천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다시 미래의 유천하가 웃는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웅.

적막한 실내에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이하린의 워치 설정은 기본적으로 무음- 진동이 울리는 연락처는 극히 소수였기에 비몽사몽해져가던 이하린의 의식은 한순간에 깨어났고, 그녀의 손은 머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벗어둔 워치를 낚아챘다.

그리고.

[며칠 정도 어딜 좀 다녀올 생각입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이하린은 제 눈에 들어온 그 음성까지 지원되는 메시지에 천천히 동그란 두 눈을 깜빡거렸고, 그리고는 이내 빠른 속도로 워치를 두들겼다. 잠들려고 했던 와중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야심한 시각이란 사실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러자 뚜뚜 거리는 연결음이 울려 퍼졌고, 이하린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상체를 세워보았고 그대로 워치를 제 앞으로 갖고 왔다.

그러자 얼마나 지났을까.

뚝- 상대가 전화를 받은 순간 연결음이 끊어졌고, 그와 동시에 이하린의 입이 열렸다.

“천하 씨···!”

[예. 무슨 일이신가요?]

평소처럼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하게 콩닥거렸던 심장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방금 본 메시지의 내용이 내용이었던 만큼 이하린은 빠른 속도로 유천하를 향해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었다.

“어떻게 되신 거에요? 설아 씨 말로는 검제 님이랑 볼일이 있으셨다는데 이 시간까지 대체······ 그리고 방금 그 메시지는 뭐에요?”

[아······.]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다시 받자마자 쏟아져나오는 물음에 유천하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 말을 흘렸지만 이내 그는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검제··· 님과 무학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눴습니다. 승천제 때의 일을 유심히 보신 듯하더군요. 저도 근래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보니 조금 길어진 듯합니다.]

“그럼··· 그럼 어디 다녀오신다는 거는요?”

[검제 님께 가르침을 받기로 했습니다.]

“······가르침이요?”

그 대답에 순간 잠이 확 달아나버린 그녀.

[예. 사실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애매합니다만 제게 도움이 될 거라 하시기도 했고, 저 또한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 승낙했습니다.]

“와···! 정말로 축하드려요!”

이하린은 그 말을 외침과 동시에 기쁜 마음에 제 침대 위에서 몸을 방방 뛰어보았다.

[축하······ 말인가요?]

“넵! 검제 님이시잖아요! 며칠이라곤 해도 천하 씨한텐 분명히 큰 도움이 되실 거에요!”

[······그렇긴 하겠지요.]

“네! 안 그래도 항상 저는 열심히 가르쳐주시면서 정작 천하 씨는 맨날 혼자 수련하시는 걸 보고 신경 쓰였는데, 그래도 승천자라면 천하 씨라도 가르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한 말은 이하린으로서도 진심이었다.

항상 유천하는 저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었지만, 정작 본인의 성취가 너무 뛰어나다 보니 제 길을 걸어갈 때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항상 혼자서만 수련을 하였다. 그게 이하린으로선 참 대단해 보이면서도, 또 미안했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유천하는 지금도 충분히 강했지만, 분명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음··· 감사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며칠 동안 검제 님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물론 그 말엔 기뻤던 마음도 한순간에 흔들렸지만, 이하린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며칠 못 봐서 제 가슴이 콩닥거리게 되는 것보단, 유천하가 더 강해지는 게 더 중요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 걱정보단 실질적인 그의 안위가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저도 그동안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게요!”

[예. 아직 업륜없이 검강을 쏘아 보내시는 데는 익숙지 않으시니 최대한 다양한 상황에서 길게 쏘아내는 연습 해보시길 바랍니다. 마수와 싸울 때는 그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넵···! 안 그래도 오늘도 연습했어요!”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묘한 기분이기는 했다.

지금도 이렇게 서로에겐 큰 격차가 있는데, 유천하는 정말 빠르게 강해진다. 처음 봤을 때도 강했으면서 항상 더 빨리 나아가고 있었다. 이하린은 제 손으로 유천하를 지켜줄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수련시간을 더 늘려보기도 하고, 휴일에는 혼자 여명급 탑 정도는 공략해보려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점점 멀어져만 가는 기분에 그게 또 우울할 따름.

물론 그렇다 한들··· 그래도 지금만큼은 순수하게 기쁘다는 마음이 더 컸을 뿐이었다.

유천하의 성장이 빠르다고 해서 반대로 느려지기를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하린은 그저 자신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다짐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찾아온 기회엔 순수히 기뻐할 수밖에.

그렇기에.

“오늘은 마르네 씨랑도, 사카타 씨랑도 대련해서 비겼구, 아리엘 씨가 도와줘서 저도 10m짜리 참격도 한번 성공했고··· 또······.”

[예. 잘하셨습니다. 습득이 빠르시······.]

이하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루종일 수련을 하느라 피곤해졌던 몸이, 다시 긴장이 풀리면서 노곤해지기 시작했지만 편안해지고 들뜬 마음만큼은 그저 달가웠기에.

물론 거기에는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던 탓도 있었고, 조금 전까지 걱정했던 마음에 대한 반동 또한 있었으며, 자신의 마음이 그러했기에 유천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간만큼은 불안한 마음이 사그라드는 탓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 전에 대화를 나누다가 잠들면 오늘만큼은 그 꿈을 꾸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하린은 편안해진 기분으로 대화를 나눴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내일은 무엇을 할 생각인지. 오늘은 무엇을 느꼈고, 이제 며칠 동안 무엇을 해내고 싶은지. 푹신한 이불에 휩싸인채 그녀는 평소보단 조금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따스한 실내의 공기가 마음마저 데워온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했으면 부끄러워서 멈췄을 말조차 해소된 불안함이 편안함으로 매듭지어져 끊기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래서··· 그래서··· 제가······ 또······.”

[예. 그러셨군요. 아··· 예. 그래서······.]

열심히 입을 움직이면서도 어느새 이하린의 몸은 다시 침대에 늘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수마에 휩싸여갔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이 순간의 기분이 무척이나 편안하였기에.

아까 전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가라앉았다. 미래의 유천하가 웃는 모습을.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이들을. 그 사이에 있는 저의 모습을.

모두 모두 그 끝에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무척이나 말랑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평온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흘려들으며.

“······.”

[······.]

그리고- 얼마 안 가 기어코 이하린의 의식은 정전되었고, 적막한 방안에는 오로지 그녀의 얕은 호흡 소리만이 맴돌기 시작했다.

[······하린 씨?]

물론 유천하는 통화를 하던 도중 점점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결국 말이 없어진 이하린의 상태에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했지만 그의 귓가에는 지금도 색색거리는 이하린의 숨소리가 워치 너머로도 잘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그도 이내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잠드셨나요?]

그렇게 유천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돌아올 일없는 물음을 건네보았고, 역시나 그 말에 되돌아온 건 색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물론 아직 깊게 잠들지는 않았기에 이하린의 의식은 몽롱한 상태에서도 그것을 흘려들을 수 있었으니- 이하린은 흐리멍덩해진 세상 속에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끊어야 하는데, 잠들었다 해야 하는데, 잠들었는데 어떻게 말하지, 천하 씨는 안 주무실까, 왜 말이 없으시지- 그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뒤섞인 엉뚱한 생각들을 말이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이하린의 무의식마저도 끊기지 않는 전화에 의아함을 느끼던 순간, 그 순간 다시금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그리고.

[좋은 꿈 꾸세요.]

“······.”

그 순간 이하린의 눈은 다시 뜨여졌고, 그녀는 이내 멍하니 제 두 눈을 깜빡거렸다.

***

뚝- 통화가 끊기며 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화면을 터치해 온전히 종료한 후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에 약속한 것이 떠올라 연락을 보냈더니 갑작스러운 전화통화에 어째 이야기가 길어졌다는 느낌.

최근 이하린의 상태가 불안정하단 걸 알고 있었기에 같이 입을 맞춰주었는데, 설마 대화를 나누다가 잠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요새 정신이 피곤하긴 한 모양.

그나저나 이하린이 했던 말들을 생각해보니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의 진도가 더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듯 하여 그것만큼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2월의 그녀는 상위권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이었다면, 의념을 배우고 이런저런 일을 거치면서 이젠 정말 최상위 유망주 아이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이대로만 가면 올해 안에 극의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을까- 그리 추측해보았을 정도.

‘나쁘지 않아.’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그대로 휴게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깐 연락을 하신다더니, 어째 생각보다 꽤 길어지셨습니다. 무언가 밖에서 듣고 있자니 실례인듯해 나왔는데 혹시 상대가······.”

“그런 건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괜히 이상한 오해를 하는듯해 바로 말을 끊었더니, 그게 서문옥에게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책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

하지만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딱히 얼굴을 볼일도 별로 없을 이였기에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애초에 조금 전 연락을 했던 사람이 정말 이하린뿐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리엘과 진시우는 이하린과는 달리 가볍게 답장만 하나 보내고 끝냈을 뿐이지.

“흠흠. 어쨌든 그럼 이제 가시는 겁니까?”

“예. 검제께서 시간이 아깝다 하시니 가야겠지요. 제게도 시간은 중요한 것이니까요.”

“······잠도 안자고 침식영역에 들어간다는 게 단순히 그런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의 실력이 실력이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서문옥은 나와 함께 발을 맞춰 걸으면서도 약간 허탈한 목소리로 그리 답했고, 그리고는 얼마 안 가 저 멀리 보이는 검제의 모습을 바라고는 이내 잠시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이번 일로 크게 개안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나아갈 길이 보인듯하니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그저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대단하신 게지요. 실력도 마음가짐도 저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 대답에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비록 내게 졌기에 그렇지 서문옥 정도의 수준만 해도 원래대로라면 절대 흔한 게 아니었다. 고작 30대 초입에 절정의 극의. 40이 되기 전에는 초극에 달할 재능이었고, 그 정도면 초절정의 세계까지 노려볼 만 했다.

물론 그 벽을 앞에 두고서 그걸 깨트리고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단순히 재능과 노력만으로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정파의 고집이 있어서 그렇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만난 이들 중에서는 꽤나 무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였기에 나는 그의 인사에 흔쾌히 화답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서문옥이 포권을 취해 보인다.

“비록 다들 일정이 일정인지라 저만 배웅을 나왔지만, 본 무련은 귀공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도··· 분명히 저희에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주신다면 다행이군요.”

“하니, 앞으로 무련은 언제나 귀공을 환영하겠습니다. 또한 당신을 생도도, 공략자도 아닌 한 명의 무인으로서 존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서문옥은 제품에서 하나의 물건- 직사각형 형태의 패를 꺼내 건네었다.

“이건······?”

“천중무련을 이루고 있는 각 문파의 수장급. 즉 중진들에게만 주어지는 패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불법만 아니라면야 여러 분야에서 무련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서문옥의 말에 나는 그 패를 받으면서 그리 답해주었지만, 사실 불법적인 일을 제외한다면 내가 무련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까 싶어 조금 심드렁한 기분을 느끼긴 했다.

하물며 이런 옥패를 항상 들고 다니기도 번거로웠으니, 이건 그저 마음만 받고 숙소에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그런데.

“······?”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서문옥은 씨익- 웃어 보이며 내게 제 팔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워치를 몇 번 톡톡 건드리더니 내 손목에 있던 워치에 맞대며 툭- 건드렸고, 그러자 약간의 진동과 함께 내 워치의 화면 위로 무언가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어째 상당히 익숙한 형상의 그림.

나는 화면에 떠오른 옥패의 형상을 바라보며 서문옥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서문옥은 당당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을 들려주었다.

“사실 들고 다니기 번거롭다는 의견이 자주 나와 몇 년 전부터 모바일 증명서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에어드랍으로 보냈으니 적당히 워치에 등록하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아······ 에어드랍.”

“예. 받으신 옥패의 실물은 그냥··· 일종의 기념품이라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하루종일 무림의 풍취를 느끼게 해주더니 마무리가 어째 조금 맥이 빠진다는 느낌.

하지만 시대가 시대였으니 이해하는 바였고, 나 또한 받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했으니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걸 워치에 등록하고선 그대로 저 멀리서 안오고 뭐하냐는 듯 재촉하는 검제를 바라보며 서문옥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예.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그러자 마주 인사가 되돌아왔으니, 나는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검제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은 시원한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순간들을 되새기며, 대련이 끝나고 나서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대화. 저녁 내내 검제와 나눴던 이야기. 초절정의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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