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58화 (158/205)

천중무련 (5)

무인의 신념을 무武로써 증명한다.

그 너무나도 당연한 대명제가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그 오만하면서도 담대한 무인의 도발에 장내가 모두 얼어붙었을 때. 처음 문답을 시작했던 서문옥이 유천하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멍해졌던 순간.

그 순간 처음으로 나섰던 건 한 창사였다.

“창월의 7번 공략대를 맡고있는 산동악가의 악목단. 자네에게 비무를 요청하는 바네.”

“받아들이겠습니다.”

한마디- 대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아앙-!!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뻗어져 나온 창격은 그대로 유천하의 검과 맞부딪혔고, 한순간에 휘몰아친 막대한 기파가 대전에 퍼져 나감과 동시에 그곳에 있던 이들도 정신을 차리고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카가가각-!!! 콰앙-!!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대전 안에는 비무장이 만들어졌으니, 그 익숙하리만치 신속한 모습을 보며 유천하 또한 이 쓸데없이 넓은 대전의 용도를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무련이라는 이름에 맞게 이런 경우는 흔하다는 건가- 유천하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였고, 그렇게 다소 엉뚱한 생각 속에 비무는 순식간에 끝을 맺었다.

물론···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과 함께.

“끝입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없다. 아니, 없소이다.”

퀴잉- 그 말과 동시에 상대의 목에 겨눠진 유천하의 검이 지면을 향해 내려왔고, 창을 들고 뛰어 들어왔던 남자는 그렇게 8합 만에 이를 악물고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심회 일검자 단목화운이 비무를······!”

“창월의 3번 공략대 대주 이 팽호천······!”

“황보세가 황보종산이 비무를 요청······!”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유천하를 향해 비무를 요청하는 격양된 목소리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으니, 그 소란의 한가운데서 유천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그렇게- 성질이 급한 이부터 한 명씩 유천하를 향해 뛰쳐나가며 시작된 격전.

난데없이 시작된 비무였지만 아무도 그 비무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나같이 그다음을 노리고 있었을 뿐.

이미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이 일이 발생한 과정은 중요치 않게 되었다. 그저 유천하는 무련의 중심에서 자신의 무론을 펼쳤고, 그것을 자신의 무로써 증명한다고 외쳤으니 이제 중요한 건 서로의 무를 겨루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서더라도 유천하를 꺾지 못한다면 결국 무련이 추구하는 무의 가치는 유천하 개인의 의견보다 가벼운 것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하니 이것은 당연한 일에 불과했다.

유천하가 무의 숭고함을 부정하고, 초절정이라는 지고한 경지마저도 그저 하나의 계단으로 여긴 순간. 그것을 초절정의 고수 앞에서, 무련이 존경하는 이의 앞에서, 이 무련의 한가운데서 장담한 순간. 그는 그것을 자신의 검으로 증명해내야 했고, 무련은 다시 그것을 저들이 쌓은 무로써 반박을 해야 했다.

유천하에게 암야를 수여하는데 찬성하는 입장이었든, 반대하는 입장이었든 상관없이.

그렇기에 이 순간의 비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각자의 신념, 혹은 분노, 혹은 흥분을 그 속에 담은 채 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오로지 저 자신의 무武를 증명하기 위해.

“······큭! 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척이나 놀라웠다.

처음 뛰쳐나왔던 창월의 7번 공략대주를 유천하가 8합으로 꺾어냈을 때. 그때까진 사람들도 모두 그걸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나이와 그 발언을 떠나서라도 유천하는 위타극을 토벌한 이.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련주와 검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 실로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그런 것도 정도가 있지 않겠는가?

“이의··· 없습니다! 예!”

“······한 수 배웠습니다.”

“졌소이다. 허··· 참나.”

두 번째 상대의 목에 검이 겨눠지기까지가 3합. 세 번째 상대의 목에 검이 겨눠지기까지가 다시 5합. 그다음이 2합. 그다음은 다시금 8합. 7합. 4합. 9합. 1합······ 순식간에 상대가 교체되며 이루어지는 비무는 사실상 차륜전에 가까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점에 대해서 누구도 불합리하다 여길 수 없었다.

불과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다섯 명의 상대가 교체되었을 때 그들은 기겁했다.

다시 그로부터 5분이 안 지나서 그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난 시점부터 그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군······ 정말. 허허.”

“정녕 벽을 마주하고 있단 건가?”

“실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로다.”

기어코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을 때- 사람들은 주변에 널브러진 다른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그 한가운데서 끊임없이 상대를 바꿔가며 검을 그어내는 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유천하는 상대의 조건을 가리지 않았다.

설령 상대의 경지가 절정의 초입이든, 완숙이든, 극의이든, 그리고 다시- 그들이 쌓아온 무가 창이 되었든, 검이 되었든, 도가 되었든 유천하는 그저 저 자신의 검을 펼쳐냄으로써 스스로가 쌓아온 무를 증명해내었다.

때론 패도의 일검으로, 극한의 쾌검으로.

혹은 둔중한 중검으로, 변화의 환검으로.

물이 흐르듯 흘러가 수많은 변화를 하나의 검 끝에서 교차해내고 있었으니, 이 순간 유천하라는 도도한 물결은 그대로 천중무련이라는 단단한 강석에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천재天才- 도대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

“······.”

그것은 이곳에 있는 이들 또한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 두 번쯤은 들어봤던 소리이며,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며 내려놓게 된 말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초식 하나 제대로 못 펼쳐지는 이들이라 한들, 재능에도 격차는 존재했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제 재능을 깨닫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마저도 벗어났다.

콰과과과과-!!! 극한의 패격이 서로 충돌하며 막대한 파랑을 터트린다. 대전의 공기가 일순간에 팽창하며 터져 나왔고, 그 가운데서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에 순식간에 3합이 교차하였으니- 유천하는 이 순간 극의에 도달한 무인마저도 압도하는 중이었다.

비록 이전에 덤벼들었던 이들처럼 10합도 안되는 순간에 제압당하진 않았지만, 손발이 교차해갈수록 점점 창월의 2번 공략대주는 빠른 속도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무련의 이들에겐 어떻게 보이겠는가?

이제야 17살. 성인조차 되지 않은 아이가 수많은 고행과 경험을 겪으며 극의에 달한 중년의 검객을 아무렇지 않게 몰아붙인다.

쾅-!! 그리고.

“하하···!! 실로 대단한 기예로군.”

“대주님의 검 또한 훌륭했습니다.”

“아들뻘에게 이런 소릴 듣는 걸 부끄러워 해야 할지, 이런 무인에게 듣는 걸 기쁘게 여겨야 할지··· 참으로 어렵게 만드는구려.”

결국 최전선에서 침식과 맞서 싸우며 절정의 극의에 도달한 무인, 공략자 랭킹 186위에 달하는 강자마저도 유천하의 검에 50합을 넘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해버렸다.

그리고- 이 순간 유천하는 웃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오실 분은 누구십니까.”

수십 명이 넘어가는 고수들 사이에서도 제 신념을 당당히 이야기하고, 다시 그에 격정 어린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쉴새없이 비무를 요청하는 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유천하는 그저 이 순간의 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오랜만에 마주한 무인들과의 대련에 조금 흥이 오른것 뿐이었지만,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러하기에 유천하는 천재天材였다.

그 누구보다 이른 나이에 초절정이라는 지고한 경지의 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자. 그리고 다시 그 이후를 입에 올릴만한 재능과 성정을 지닌 자. 단단한 토양에 그 뿌리를 내려 재목을 피워낸 자.

그렇기에.

“······오만할 자격이 있었군. 아니, 그렇게 치부한다면 그 말대로 우리가 오만한건가.”

그들은 차분히 미소를 지어보이는 유천하의 모습에 튕겨나간 저 자신들의 병기를 붙잡고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어찌 저 모습을 보고 분노할 수 있을까. 그 검도, 태도도 실로 아름다웠으니 그는 분명한 무인이었다.

유천하는 이 천중무련의 한가운데서 저의 무도武途를 외칠 자격이 있는 무인이었다.

***

서문옥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기파를 피부로 체감하며 이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허나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되새겨보았다.

-어찌 무武에 끝이 존재한다 생각하십니까. 실로 오만한 소리입니다.

-무극을 보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무를 안다는 듯이 숭상하겠습니까. 어찌 흠모하겠습니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니 그저 나아가야 할 뿐입니다.

-무武에 정론이란 없는 법인데 어찌하여 타인의 무도에 정론을 논하고자 합니까.

무武를 숭상하기에 무武를 흠모했던 정심회주 서문옥은 조금 전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무극이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저에게 무는 어떠한 대상이었던 걸까. 과연 자신은 무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길을 걷고 있던 것인가?

그리고- 그런 되뇌임 속에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번 검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 사백, 초절정의 고수가 저에게 무의 의미에 대해 물어보면서 해주었던 말이 말이다.

-내게 이 검은 그저 검에 불과하다. 3척 남짓한 길이에 금속으로 이루어진 날붙이지.

그리고- 다시 그가 말한 검의 재능까지도.

-검을 이해하고, 휘두르는 것.

그때의 서문옥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이 순간 유천하의 말을 통해 제 신념에 흔들림이 일어나자 그 균열의 사이에서 서문옥은 저 자신이 이제껏 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심正心이란 가치 아래 자신도 모르게 제 무도武途에 한계를 그어놓았다는 것을. 제 알량한 재능만으로 무극을 제한하였기에 검으로 하늘을 베어내고 싶다는 검제의 말조차 허황된 말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서문옥은 그에게 패배했다.

아직 비무를 치르지도 않았건만, 그 짧은 문답 속에서 그는 저의 오만을 깨달았고, 다시 이제서야 저의 우물을 깨우칠 수 있었다.

“······오만했군.”

허탈한 기분 속에 탈력감이 느껴진다.

서문옥은 저보다 한참 어린 무인의 몇 마디만으로도, 아니 오히려 그런 이의 입에서 들은 말이기에 저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걸 느끼게 되었고, 그건 스스로가 한 말을 저 자신의 검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유천하의 비무를 바라보며 더욱더 짙어져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문옥이 이대로 있다간 주화입마에 사로잡힐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순간, 멍하니 있던 그 옆으로 남궁설아가 다가왔다.

“회주님께선 비무를 안 하실 건가요?”

“······소가주께선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사석이니 평소처럼 부르셔도 됩니다.”

그 말에 서문옥이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설아야. 넌 생각이 없느냐.”

“예. 저는 은공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무의 가치가 무의미하다는 것에도···?”

“아닙니다. 저로서는 그저 무의 의미에는 정론이 없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약간의 우울감마저 서린 서문옥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궁설아는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는 지금 서문옥이 느끼는 기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사실 저도 예전에 은공에게 제가 평생을 쌓아온 검이 부정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뭐?”

“제가 복수를 위해 선택한 길은 쾌검이었는데, 은공께선 제게 그것이 틀렸다 말씀하시더군요. 그때는 정말 많이 괴로웠습니다.”

“아니, 무슨··· 타인에게 그런 말을······.”

서문옥은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무학이 편협했단 사실을 깨닫게 된 것보다는, 저러한 지적이 무인에게 있어선 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서문옥의 반응에 남궁설아는 괜찮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지만 저는 은공이 해주신 그 말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그러면서도 저는 제가 이제껏 걸어왔던 길이 온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게는 여러 방향이 있었을 뿐이니까요.”

“······.”

“그리고 제 검이 변화하고 난 뒤, 마주하게 된 위타극은 제게 무림에 대해 물었습니다.”

“무림에 대해?”

“예. 제게 무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남궁설아는 그 말을 하면서 대전의 가운데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은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아름다울 만치 검로를 자아내고 있는 유천하의 모습과, 그날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위타극을 향해 검을 뻗어내던 그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저는 녀석에게 이리 대답했었습니다.”

“······어떤 대답을 말이냐?”

“스스로 옳다 믿는 일을 행하기에 의. 다시 의를 숭상하기에 협. 그러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검을 들어 올려 의협이고, 그걸 지닌바 무로 증명하기에 무인이며. 그런 자들이 살아 숨 쉬었기에 무림이었다고 말입니다.”

“······.”

서문옥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가볍지 않게 느껴져서, 제 아비의 죽음을 목도하고 쉴 새 없이 울음을 터트렸던 이 아이가 언제 이리 자랐는지 세월의 신기함을 느끼면서.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단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설아는 그저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저의 무는 제가 옳다 믿는 것을 행하는 것이고, 그걸 제 검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

“하니 회주님께서도 회주님 스스로 옳다 믿는 무를, 그 검으로 관철하시면 됩니다.”

“······.”

“무도武途에 정론이란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제서야 서문옥은 깨달았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남궁설아가 지금 저를 위로해주려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것이란 사실을.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제 동요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단 사실을 말이다. 그에 서문옥은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하지만 남궁설아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저희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처럼 무인은 자신의 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걸 제대로 못 해냈지만요- 남궁설아는 그 말과 함께 이번엔 조금 민망하다는 듯 허탈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러면서도 유천하, 정확히는 유천하가 걸치고 있는 암야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은공께선 그날 제 눈앞에서도 그리하셨었습니다. 분명 그때의 천하 씨는 위타극보다 낮은 곳에 있었음에도, 격전이 시작됨에 따라 온몸이 도신에 베여나가면서도 천하 씨는 그저 저 자신의 검으로 나아갔습니다.”

“······.”

“그리함으로써 은공께선 한 계단을 더 올라가셨고, 그렇게 결국 놈을 베어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서문옥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래서 암야의 반출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은공은 자신의 안위보다 나아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함으로써 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걸 제게 보여주었기에 무련의 다른 누구보다 더 암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보였으니까요.”

“······그랬던가.”

“예. 그리고··· 저도 이런 일은 예상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은공은 지금 그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주님께서도 상심을 떨치시고 직접 검을 부딪혀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서문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武의 의미를 묻고자, 비무를 청하겠다 처음으로 말한 주제에 겨우 몇 마디 말에 제 신념을 관통당해 이러고 있는 중이었으니- 제 조카뻘의 아이에게 위로받는 게 스스로도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남궁설아가 왜 이렇게 위로를 해주러 온 것인지 의아하단 생각도 들었기에 서문옥은 이내 제 검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어찌하여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거냐.”

“말씀드렸듯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제 욕심과 기대가 담긴 요청이 회주를 그리 심란한 게 만들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암야의 의미에 대해 제가 다소 안일히 생각했었나 봅니다.”

“······아니다. 네가 옳았다.”

그 말에 서문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호흡을 내쉬며 흔들린 의념을 빠르게 가다듬었고, 슬슬 도전할만한 이들은 모두 도전한듯한 장내의 풍경을 바라보고는, 다시 그녀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를지언정 저리도 자신의 무武에 확신을 갖고, 그걸 제 검으로 증명하고 있으니 어찌 자격이 없다 할까.”

“······.”

“백리 원로님은 그것을 알고 승인을 하신 듯 한데, 내가 아둔하여 이리되었으니··· 하.”

그리고는 이내 제 발걸음을 떼었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그래. 이리되었을지언정 말을 꺼냈으니 나도 내가 한 말은 내 검으로 지켜내야겠지. 빚은 달아두거라.”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서문옥은 그녀를 뒤로 한 채. 어느새 또 한 명을 이기고선 부족하다는 듯 다음 상대를 찾는 젊은 무인에게, 그러면서도 저보다 높은 곳에 올라선 이를 향해 다가갔다.

저 어린 나이에 저곳에 올라서 있는 검객의 검 속에는 어떠한 무게가 실려있는지를, 직접 제 검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 속에.

그 순간- 유천하가 차분히 말을 건네왔다.

“드디어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제게 무武가 지닌 가치를 알려주시러 오시는 겁니까?”

“···조금 전에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함부로 입에 올리기엔 오만한 말을 해버린 듯 합니다. 귀공에겐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서문옥은 아까의 일을 언급하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유천하를 바라보았고, 이내 눈앞의 무인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이전보다도 더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서야 어찌 무인으로서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귀공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으나, 무武를 입에 올렸으니 저 또한 제 검으로 증명하겠습니다.”

“······.”

“하니 이 서문옥. 비무를 청하겠습니다.”

그렇게 잠깐 대련을 즐기고 있던 사이 무언가의 변화를 거치고 온 상대를 바라보며 유천하는 흥미롭다는 듯 웃어 보였고, 그렇다면 증명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시지요.”

서문옥은 제 검을 들고 바닥을 박찼다.

퀴잉-! 제가 했던 말을 조금이나마 지켜내기 위해, 그러함으로써 제 상념을 벗어던지고 상대의 검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

대략 세 시간의 시간 동안 모두 82명.

당연히 그 결과는 하나로 귀결되었다.

“기어코··· 귀공은 스스로 한 말을 증명하셨군요. 정말 말이 안 나오는 광경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한데 아까 가격당한 부위는 괜찮으십니까? 조금 손속이 과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스르릉- 그렇게 나는 62합 만에 명치를 맞고 날아갔던 서문옥에게 안부를 물어보며 가볍게 검을 집어넣었다. 사방에서 허탈한듯한, 그러면서도 언제 그리 화가 났었냐는듯이 들려오고 있는 감탄을 흘려들으며 말이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아직 싸우지 않은 이들과도 겨뤄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이제 남아있는 자들은 더 해볼 생각이 없는 모양.

하지만 미련을 담아 한번 되물어보았다.

“련주님께서는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허허. 일선에서 물러난 늙은이와 겨뤄서 뭐 어쩌시겠소? 이미 충분히 스스로 한 말을 지켜낸 듯하니 이 이상은 과욕이올시다.”

언제 고압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냐는 듯 다시금 온화한 얼굴로 되돌아온 련주의 말에 나는 작게 웃어 보였고, 이내 깔끔하게 미련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싸울 마음이 없다는데 내가 뭐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

비록 초극에 이른 무인과 대련할 기회를 놓쳤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태 싸운 것만 해도 충분히 즐거웠으니 말이다.

사실 만상의 눈으로 투로를 파악하며 빠르게 끝내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한 숫자가 숫자다 보니 꽤 방대하게 들어차 있던 내력도 이젠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중이긴 했다. 손아귀 또한 상당히 뻐근한 것이 암영비천대 시절의 일들이 생각나게 만들었을 정도.

어째 오랜만에 몸을 풀었다는 느낌이었다.

‘그간 이렇게 싸워볼 일이 거의 없긴 했지.’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은 제대로 겨뤄볼 대상이 없지 않았는가?

강한 자를 찾는 것은 힘들었고, 뛰어난 무인은 더더욱 없었다. 그나마 주연들이 쉽게 대련할만한 이들이었다만 역시 대부분은 아직 기본기가 부족했고, 이능이 아닌 무로써 대련을 펼칠만한 이는 정말 거의 없었다.

이 세계에 와서 유의미한 격전을 펼쳤던 상대를 떠올려보자면 기어코 지난번 위타극과의 격전만이 생각났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만족스러웠다는 느낌.

정사가 모여 설립되었다더니 천중무련의 중진들은 정파의 고리타분함 속에서도 그 성정은 불같은 구석이 있었으니, 말 한마디에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비록 대부분은 경지가 상대적으로 낮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기본부터 차근차근 무업을 쌓은 이들과의 비무는 즐거웠고, 극의에 달한 이들과도 몇 번이나 검을 나눠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혼자서 고뇌하고 수련하는 것도 그만의 의미가 있을지언정, 역시 직접 경험하며 쌓아나가는 고행이 내게는 더 익숙할 뿐이었다.

만약 상태가 괜찮았다면 검제에게도 비무를 요청하고 싶은 기분이었다만, 이미 그와의 간합은 첫 만남에서 재어보았으니 지금은 제대로 된 격전을 이어나갈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깔끔하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래. 어디 한 번 실컷 즐겼더냐?”

이제껏 비무를 치르는 동안엔 그저 흥미롭다는 듯 바라만 보고 있던 검제가, 모든 게 끝난 지금에 와서야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놀 만큼 놀았냐는 듯한 어조로, 굉장히 짙은 미소를 그 입가에 띄어 보이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이내.

“다 놀았으면 이젠 나랑 이야기 좀 하자꾸나. 원래는 반반이었으나 네 놈이 노는 모습을 보니 역시 한 번 정도는 말해봐야겠다.”

나를 향해 다소 뜬금없는 말을 건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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