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무련 (4)
어쩐지 아까부터 다소 묘한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진다 했더니 이래서였던 건가?
유천하는 암야에 들어간 업륜의 개수를 알게 된 즉시 말없이 제 몸- 정확히는 그 몸을 둘러싸고 있던 암야를 내려다보았고, 그리고는 이내 앉아있던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짓는 그녀.
“······.”
이 순간 유천하는 그녀가 저에게 주고자 했던 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 내용에 순간적으로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한 심경이 드러났는지, 그를 지켜보던 련주의 입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전에 자세하게는 못 들었나 보구려.”
“······업륜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들었습니다만, 설마하니 그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10획- 그것은 절대 작지 않은 숫자였다. 또한 암야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더해진다면 이건 단순히 업륜의 가치만으로 생각할 물건은 벗어난 수준이었다.
유천하는 빠르게 그 가치를 가늠해보았다.
사실상 업륜의 희소성을 생각해보자면 이것을 만들기 위해 그 정도 숫자의 업륜의 파편이 사용되었다는 건, 실로 누구에게 말해주더라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터.
물론 이것은 무련의 공략자들이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둘씩 기증해온 업륜을 그러모아 만들었다고 하니, 온전히 개인이 스스로 업을 증명해 소유하게 된 업륜의 숫자와 비교하자면 그 무게가 동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 10획은커녕 5획 이상의 업륜을 소지하고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이 세계에는 3천 명에 가까운 등천자가 존재하고 있고, 그들은 모두 최소 1획 혹은 2획의 업륜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서 공략자로서 활동한 기간이 길거나 하이랭커급으로 올라간다면 3획, 4획의 업륜을 지닌 자들도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자면 10획을 모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10획은 10획이지.’
유천하로서는 그렇게 모여든 업륜일지언정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고, 공략자들의 특성상 그런 방식으로라도 업륜을 모으기가 힘들었을 거란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의 가치는 단순히 업륜의 개수로만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조금 전 들었던 이름을 떠올려보았을 따름.
‘거기다가··· 프리앙에 아르탈이라.’
대마도사 프리앙과 금술사 아르탈.
저 지고한 초인- 승천자들의 이름.
비록 그들 중에서도 원작에선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이들도 꽤 있었기에 유천하라고 모든 승천자들에 대해서 알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이전에 나르화리얀과 조우하고 난 뒤 유천하는 바로 승천자들의 이름을 모두 외워두었으니, 앞으로 저 자신이 그들과 어떻게 얽히게 될지, 혹은 몇 명이나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그들의 이름과 이능 정돈 외워 둘 필요성을 느낀 탓이었다.
그들은 그 자신의 행보에 영향을 끼칠만한 역량과 입지를 갖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 덕분에.
“사용되었다는 업륜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셨다는 분들의 이름도 상상 이상이군요.”
유천하는 제 몸에 걸쳐져 있는 이 물건이 정확히 어떤 가치를 지닌 물건인지, 또한 그걸 만들어내기 위해 무련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까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소이까? 확실히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요소긴 하오.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세간의 시선이 쏠렸을 정도니 말이오.”
“그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걸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 정도 수준의 조건들이 필요했었소.”
“원하는 걸 위해서 말입니까?”
련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출된 업륜의 파편은 그 본질을 다소 잃기에 그걸 막기 위해 2획의 업륜이 소모되었고, 그 공정을 위해 프리앙님의 손을 빌렸다오. 다시 강도와 내구성을 위해 아르탈님께 도움을 요청하여 2획의 업륜을 추가로 부어 넣어 강화시켰고, 파손 후 복구를 위해 3획을 썼소. 사실상 반절은 암야 자체보단 암야의 기능을 유지해내는 데 쓰였다 보면 되오.”
그 말에 유천하는 다시금 만상의 눈으로 제 몸- 그곳에 걸쳐진 암야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10획이라기엔 미묘하다 했더니.
분명 지금 암야가 내포하고 있는 마력의 총량을 따져보자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이긴 했지만 10획이라기에는 조금 애매하긴 했었다. 허나 저런 이유로 소모되었다면 그로서도 그러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암야의 장점은 그 마력의 총량보단 업륜의 본질- 즉 자연회복과 형상변환이 가능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물론 그래도 최상급의 기보지만 말이오.”
“예. 이 정도의 물건은 찾기 어렵겠지요.”
실제로 암야를 이루는 업륜이 5획에 불과하다 한들- 그건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
당장 저 자신만 해도 2획의 업륜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한 업륜 5획을 온전히 방어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만 생각해봐도,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감수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가 늘어날 터였다.
유천하는 그런 생각과 함께 무림에서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의 순간과 위타극과의 격전에서 입었던 피해를. 하다못해 협력전에서 아리엘에게 당했던 일까지 되새겨보았다.
그 순간들에 이러한 보의가 존재했다면 과연 얼마나 더 편하게 상대할 수 있었을까- 바로 그런 생각들을 떠올려보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 부분을 되물어보았다.
“한데······ 이전에 소유하셨던 분께서 멸화급과 싸우다 영면에 들었다 하셨습니까?”
“아. 그렇소이다. 허나 그건 도시를 지키기 위해 멸화급의 포화에 직격당했기 때문이오. 끝까지 자신을 희생시킨 위인이었소이다.”
“······그렇군요. 저 또한 허상이나마 겪어봤기에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전의 사용자가 영면에 들었을 피해에서도 완파되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전의 소유주가 죽었을 정도라면 멸화급의 공격에 직격당했다는 말- 유천하가 주목하고 있던 부분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었고, 이 순간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미 승천제에서 멸화급의 포화를 겪어본 적 있기에 유천하는 그 위험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저 자신 또한 그것에 직격당했을 때 멀쩡할 자신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맞아줄 자신도 없었을 뿐.
어쨌든, 도시마저 파괴시킬 그런 일격에서도 형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암야의 내구성을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요소였고, 다시 그 방어력에 대한 한계점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분명 훌륭해. 하지만 의지해서는 안 돼.’
암야를 입고 있다면 자신은 저보다 한 수 위의 상대와 싸우더라도 큰 피해 없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걸 과신해서는 안 된다- 유천하는 그 사실 또한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기물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도구는 도구의 수준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장비의 힘을 이용은 하되 그것의 유무에 따라 실력이 잡아먹히면은 안되었다. 특히나 이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라면 그러한 간극은 더욱 넓어질 터.
갑작스럽게 귀한 물건을 얻게 된 만큼 저답지 않게 즐거운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유천하는 빠르게 그 부분을 가라앉혀보았다.
“좋은 물건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것치곤 어째 반응이 담담하오만.”
“너무 좋은 물건이라 그렇습니다. 기쁜 마음만큼이나 물건에 의지하게 될까 봐 염려가 먼저 들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니 말입니다.”
“······정말 나이답지 않은 반응이구려.”
유천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외지물에 기뻐하기보단 만약의 상황을 먼저 주의한다라······ 노련해. 아주 노련해.
-허···! 어찌 저리 침착한 반응인지.
-암야의 가치가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그것보단 말 그대로인 모양인 듯 하군.
그리고 당연히 그런 유천하의 반응에 오히려 련주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이들이 더 감탄했을 정도였지만 그 와중에도 유천하의 태도는 그 담담함을 더 부각시켰을 뿐이었다.
아니, 유천하는 오히려 암야라는 귀물에 기뻐하기보다는 우선 암야의 한계에 대해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듯 물음을 건네왔다.
“혹시 이전의 소유주께서 이것, 암야를 사용하면서 남겨놓은 기록 같은 건 없습니까?”
“······실사용에 관한 기록이랄 건 없소이다다만, 처음 제작하고 강화 및 수복을 거쳤을 때 내구성과 회복력을 시험한 기록 정도는 남아있긴 하오. 지금 바로 들려드리리까?”
“예. 부탁드립니다.”
정말 나이에 맞지 않은 침착함이로다- 련주는 그런 생각과 함께 대답을 돌려주었다.
“우선 상시의 방어력과 내구력은 보편적인 호신강기에 조금 미치지 못하오. 다만 사용자가 업륜을 활용함에 따라 일시적으로 더 강화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기공 수준의 공격 또한 막아내는 게 가능하오.”
“······온전한 강기마저도 말입니까?”
“그렇소이다. 또한 거기에 별도의 호신강기까지 동시에 운용한다면 적어도 어지간한 공격까진 그냥 몸으로 받아내도 무방할 것이오. 물론··· 아무래도 지금 귀공의 태도를 봐선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말이오.”
유천하는 작게 미소로서 그에 화답했다.
“참··· 침착하구려. 또한 그 자체가 갖는 이능 저항력도 존재하기에 어지간한 규모의 마법과 초상 능력은 효과가 반감될 것이오. 약식이나마 마력 방벽이라 봐도 되겠소이다.”
“마력 방벽이라······ 그렇군요.”
그는 조금 전 련주의 도움을 받아 시험을 해봤을 때 일어났던 반탄력- 검기에 대한 마력의 저항과 그 강도에 대해 되새겨보았다.
“회복의 경우 업륜의 회복속도와 유사하오만 쓰인 업륜이 업륜인 만큼, 파괴의 정도가 심하면 그만큼 회복이 더뎌지니 조심하는 게 좋을게요. 물론 이것도 마찬가지로 업륜을 사용함으로써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소.”
“······.”
“우선 기본적인 정보는 이러하나, 직접 사용해보면서 감을 익혀보시는 걸 권장하오.”
“예. 알겠습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
유천하는 지금 들은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내구성의 기준선은 대략 호신강기 정도.
업륜의 마력으로는 강화와 회복이 가능.
약식이나마 이능에 대한 저항력이 존재.
하물며 그러한 부분들을 자유자재로 형상까지 변환시켜가며 이용할 수 있을 테니 상황에 따라선 정말 제 목숨을 구해줄 만한 가능성을 지닌 신외지물을 받아버린 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실제로 사용해보면서 더 상세하게 시험을 거치고, 또 암야의 활용방안을 연구해보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의문점도 존재했고 말이다.
“다시 한번 이런 귀물을 저 같은 외인에게 주신 점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었으니 개의치 마시오.”
“한데··· 지금에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이건 제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천중무련에게 있어서 귀한 물건이었던 듯합니다.”
“······흐음?”
그렇게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미묘한 대답에 련주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대전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수군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허나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도 유천하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냐하면.
“제게 이것이 주어지는 이유도, 그에 필요했던 대가도 사전에 설, 아니 남궁세가의 소가주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암야의 가치가 무련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 과정에 대해 염려가 생기는군요.”
“······그렇소이까? 염려라 하면 어떤?”
“과연 이걸 외인에게 수여하는데 아무런 반대가 없었을까··· 하는 염려가 말입니다.”
조금 전, 그가 암야를 받아들인 뒤부터 그의 등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오는 이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숨길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이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올곧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서문옥과 시선을 마주하였다.
“······.”
“······.”
딱히 불만이 어린 눈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기엔 서문옥의 시선 속에는 아까 그를 안내해주었을 때와는 별개로 그에게 보내오는 무언가의 심경이 담겨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 확인하고 싶다는 듯. 그렇게.
조금 전까지는 유천하로서도 그 시선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렇게 직접 암야를 받게 되니, 아니 그 가치를 알게 되니 그러한 이유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그 또한 신교의 소교주로서 집단과 개인의 이해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집단 내에서도 또 다른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허허. 정말이지 이 짧은 순간 내에 이 노인네를 참으로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려.”
그런 유천하의 태도에 서문옥과 그를 번갈아 지켜보았던 련주는 이내 작게 웃음을 토해냈고,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꺼내왔다.
“분명히 그건 틀린 염려가 아니었소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실제 귀공이 위타극을 토벌하고 바로 이러한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존재하였으니 말이오.”
“지금은··· 아닌 것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미묘하긴 하오.”
련주가 서문옥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추후 시간을 마련해준다고 하였거늘 정심회주께선 어찌 손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열렬하게 시선을 보냈소이까?”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했던 탓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일. 지금 묻고 넘어가고자 하나, 추후 손님에게 사과하시길 바라오.”
“예. 알겠습니다. 직접 그리하겠습니다.”
서문옥은 포권을 취해 보이며 그 말에 화답했고, 그리고는 유천하를 바라보면서도 약식으로나가 짧게 고개 숙여 사과를 건넸다.
그것을 본 련주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저기 보이는 정심회주께서는 무련에 소속된 이가 아닌, 외인에게 암야를 수여하는데 우려를 표하는 입장이었소이다. 그건 명분과 대가는 충분했을지언정 암야가 무련에 의미하는 바는 조금 더 거대했기 때문이오.”
“이해합니다.”
“감사하오. 허나 결국엔 수여가 결정되었고, 정심회주 또한 그것을 받아들였으니 귀공께선 그 부분만큼은 염려 않으셔도 되오.”
“그렇습니까···?”
그렇다기엔 정심회주- 서문옥의 시선이 무척이나 강렬했기에 유천하는 다소 의아하였지만, 말 그대로 불만이 어린 눈빛은 아니었기에 그게 조금 더 신경쓰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련주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여주었다.
“그렇소. 이제 암야의 소유주는 귀공이며, 무련의 그 누구도 그에 의문이나 불만을 제기하진 않을 것이오. 그저 그 대신, 귀공에게 몇 가지를 조금 물어볼 생각이었소이다.”
“······어떠한 부분을 말입니까?”
“암야의 세 번째 소유주가 되신 귀공에게, 무련의 보물을 수여하게 된 귀공에게, 과연 무는 어떠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를 말이오.”
그것도 무척이나 짙은, 그러면서도 흥미가 담겨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하니··· 정심회주께선 앞으로 나오시오.”
***
정심회주- 서문옥은 앞으로 걸어 나가며 조금 전 지켜보았던 모습들을 생각해보았다.
‘암야가··· 어떤 것인지는 자세히 몰랐군.’
그가 예상했던 대로 유천하는 암야가 어떤 물건인지, 그것이 무련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닌 물건이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했다.
설명하지 않았던 건가- 그 생각에 서문옥은 저를 향해 복잡해 보이는 시선을 보내오는 남궁설아와 눈을 마주하였고, 이내 고개를 돌리었다. 암야를 요청했던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설아에겐 저게 그저 물건에 불과했던가.’
아무래도 남궁설아로서는 제 가문의 은인에겐 암야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서문옥 또한 어느 정도나마 그 이유를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10획- 그것은 절대 작지 않은 숫자였다.
암야가 제작되기까지 그저 1획의 업륜이 전부였던 과거의 누군가는 무련을 위해 자신의 업륜을 모두 내놓았고, 2획의 업륜이 전부였던 누군가는 죽기 직전에 저의 가능성을 후대를 위해 양도했다. 그러니 그렇게 모여든 10획의 무게가 온전한 10획의 무게와 동등하기는 당연히 어려운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무거운 것인데.’
오히려 그렇기에 암야는 무련에게 있어서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천재가 남겨놓은 유산은 아닐지언정, 후대를 염려하는 선대가, 저 자신이 쌓아온 무업의 결정체를 미래에 안배하였으니 그러한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물건은 분명히 그들이 쌓아온 무의 증거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문옥은 이제껏 남궁세가의 요청에도 암야의 수여만큼은 반대해왔다.
그것은 올바른 무인에게 주어져야 했기에.
위타극을 토벌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저 무림이 있던 시절부터 남궁세가가 쌓아온 공적을 존중하면서도, 그저 강할 뿐인 개인에게 수여하기엔 암야는 명백하게도 무인의 혼을 품고 있는 물건이었기에.
그렇기에 서문옥은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선 부질없는 이야기겠지만.’
제 사백- 검제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는 검제에게 받은 기억을 들여다보았고, 그곳에서 보게 된 유천하의 검격은 분명 그랬던 그의 마음을 빠르게 뒤흔들어놓았을 뿐이었다.
그건 무武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면 보여줄 수 없는 검격이란 걸 깨달았기에, 그가 그 자격을 갖춘 이란 걸 깨달았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건 어찌 보면 그의 오기였다.
정심회를 맡은 이로서, 기어코 그 입으로 들어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그의 의무감에서 비롯된 하나의 고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무련의 손님께 다시 한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천중무련에서 정심회란 단체를 맡고 있는 서문옥이라 합니다.”
“······.”
앞에 당도한 서문옥은 유천하에게 다시금 포권을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네었고, 그에 유천하가 같이 인사를 받아들이자 그는 담담히 고개를 돌려 련주와 검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서문옥은 잠시 좌중에도 포권을 취해 보이며 양해를 구했고, 그러고 나서야 다시 유천하를 바라보았다.
“우선 방금 실례를 끼쳐 죄송했습니다.”
“크게 개의친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희 정심회正心會는 이 격변의 세상 속에서도 순수한 무의 가치를 잃지 않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러 선대들께서 모임으로서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이내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말을 꺼내왔다.
“하여, 온갖 이능과 신비가 범람해 무림마저 쇠락한 시대에서 저희가 추구하는 가치는 바로 무武의 의미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리 말을 건네왔고, 그 말을 들은 유천하의 얼굴 위로는 서서히 흥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천하에게는 저의 눈앞에서 말을 이어나가는 서문옥의 모습이 너무나도 전형적인 정파의 인물처럼 느껴졌기에, 이러한 자를 그가 말한 것처럼 이런 세계에서 마주했다는 점이 다소 유쾌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모여 단순히 강함만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무의 가치를 받들어 싸워나가고자 하는 이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후대를 염려한 선대가 남겨온 안배가 바로 무혼- 업륜이라 불리는 것이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러니 적어도 저희에겐 그러한 무혼의 결정체이자, 초대의 정심회주께서 후대를 위해 만드셨던 암야는 무척이나 중요한 의의를 품고 있는 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면 제가 어찌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대답에 서문옥은 고개를 내저었다.
“바라는 건 없습니다. 처음에는 외인에게 암야를 수여하는 걸 반대하였으나, 검격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제 검격을 말입니까?”
“승천제 때의 활약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 승천제- 유천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다시금 그에게 되물어보았다.
“그러면 묻고자 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무武가 어떠한 의미인지, 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무武의 의미를 말입니까?”
“예. 새롭게 암야의 소유주가 되실 분께, 저희 무련이, 정심회가 쌓아온 무혼의 주인이 되실 분께 그것을 한 번 묻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말을 건네면서도 서문옥은 제 검을 매만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론 그 또한 유천하의 검을 보았기에 유천하의 검이 단순히 재능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시 그 아름다운 검로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들어갔을 거란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문옥은 묻고 싶었던 것이다.
저 어린 나이에 만검에 맞닿은 검객이 과연 강함만을 추구한 끝에 나타난 결과물인지, 아니면 무를 숭상하고 검을 흠모하여 그 결과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인지를.
“······그러면 정심회주께서는 만약 제 대답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암야의 반출을 다시 거부하실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정심회를 맡은 자로서 비무를 요청드릴 생각입니다. 무武가 지닌 가치를 알려드리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그 순간- 유천하의 입에 곡선이 새겨졌다.
그건 서문옥의 말이 그에게는 조금 우습기도 하고, 다시 기꺼웠기 때문이었으니. 유천하의 입가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애초에 그로서는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이 죽었다 외치며 돌아다니는 미치광이가 존재하고, 백열의 태양을 만들어 떨어트리는 초인이 존재하고, 다시 수백 미터의 괴물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러한 세계에서- 이렇게 무武라는 말에 집착하자는 자가 있으니 어찌 그 모습이 기껍지 아니하겠는가?
그리고 또한- 그러면서도 굉장히 고리타분한 정파의 올곧음마저 느껴졌기에 소천마 유천하로서는 그게 조금 꺼림직하기도 하였으니, 그에게는 그러한 기꺼움도, 낯섦도 모두 그저 유쾌하게만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이 모든 게 그에게는 무림의 풍취였기에.
“······그렇습니까?”
“예. 허니 묻겠습니다. 귀공은 무를 수양하는 무인으로서 무를 숭상하옵니까?”
그러하니- 유천하는 즐겁게 답하였다. 이런 건 고민이 필요한 질문조차 아니었으니.
하지만 물론.
“숭상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서문옥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 대답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사방에서 소곤거리던 목소리가 일제히 웅성거림으로 번져 나왔지만 유천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런 유천하의 담담한 대답에 서문옥은 굳은 표정으로 한 번 더 되물었을 뿐.
“······귀공은 정녕 무인임에도 무의 가치를, 무의 의미를 숭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예. 저는 무를 숭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귀공은 무를 흠모하옵니까?”
“마찬가지로 흠모하지도 않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연이어 흘러나온 그의 대답에 부드러웠던 주변의 분위기마저 한순간에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심지어 앞에서 온화한 표정으로 그 문답을 지켜보고 있던 련주의 표정마저도 말이다.
-지금··· 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니, 훌륭한 모습만 보여주다 어찌···!
-설마하니 저런 경지에 이르러서도 무인이 아니라 그저 초인에 불과했단 말인가?
하지만 유천하는 그저 평온해 보였다.
“하면··· 무를 숭상하지도, 흠모하지도 않는다면 귀하에게 무공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저 강함을 갖추는 데 필요한 그런 도구에 불과하단 것입니까?”
마치 이런 대답이 되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이 실망이 서린, 그러면서도 싸늘해진 목소리로 되묻는 서문옥의 모습에 유천하의 입가에 떠올라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자 차갑게 얼어붙는 주변의 대기.
아니,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드러내듯이 사방에서 따가운 기세마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유천하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리고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늘 하루 동안 느꼈던 무림의 풍취를 되새겨보면서, 그 자신이 생각하는 무림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다시 저의 무武에 대해서.
“제게 무武는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길?”
“예. 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이자 이상향일 뿐이니 무엇 하러 그것을 숭상하고, 흠모하겠습니까. 무武는 무無일 뿐입니다.”
“······하면 당신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그 순간 무학은 쓸모 없어지는 것입니까?”
“원하는 목표 말입니까?”
그리고 이 순간.
“벽을 넘어 무극에 도달한다면 말입니다!”
기어코- 그 말을 듣자 유천하의 입에선 기어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야 말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남궁설아가 당황하고, 그와 반대로 유천하의 모습이 익숙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그게 비웃음처럼 느껴졌을 때. 그러하여 서문옥의 미간이 찌푸려졌을 때.
유천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대답했다.
“무도를 묻는 이가 어찌 그리 오만한지.”
“······오만?”
그리고- 그 말에 다시 주변이 웅성거린다.
하지만 유천하는 요동치는 기세를 가볍게 흘려 넘기면서, 그러면서도 저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검제의 시선을 받아주고서는, 이내 모욕을 받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서문옥을 향해 담담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어찌 무武에 끝이 존재한다 생각하십니까. 실로 오만한 소리입니다. 회주께선 무극을 보았습니까? 절정도, 초절정도 그저 구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데 어찌 그 끝이 존재한다 생각해 그리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초절정은 무극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유천하에게 무극이란 실로 그러했다.
그는 마음으로 겨울을 베어내는 이를 알고 있었기에, 또한 그러한 저의 아버지마저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걸, 그 결과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니. 그런 그에게 저 말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무극이란 허상과도 같은 이상향이었다.
만약 저 자신이 벽을 넘어 초절정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무림에 돌아가 검혈마제를 처단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결국에는 마음으로 하늘을 베어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유천하는 제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평생을 걸쳐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떠나, 그리할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유천하는 저를 바라보며 넋을 잃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서문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고리타분한 장년의 검객에게, 다시 난데없이 저에게 무론을 정의내리려 했던 정파의 무인에게.
“저는 무공을 익혔고, 무의를 갈고 닦으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게 무는 그 어떠한 대상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앞으로, 평생동안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길일 뿐입니다.”
“······.”
“무극을 보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무를 안다는 듯이 숭상하겠습니까. 어찌 흠모하겠습니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니 그저 나아가야 할 뿐입니다. 그것이 제 생애 동안 추구해야 할 숙원이며 업業입니다.”
하니- 그 말과 함께 유천하는 가라앉은 눈으로 서문옥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 거칠게 떨리고 있는 그의 동공을.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무극武極에 닿기 위해 걸어가야 할 끝이 없는 길. 그러한 무도無途가 제가 추구하는 무도武途입니다.”
“······.”
“무武에 정론이란 없는 법인데 어찌하여 타인의 무도에 정론을 논하고자 합니까. 실로 오만하고도 무례한 일입니다. 그건.”
오만하다- 그 말은 조금 전 서문옥의 문답에 공감하고, 유천하의 대답에 반응했던 이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으니. 이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오만하다는 생각.
이 대전 내에는 초절정의 무인 또한 존재하고 있고, 무수한 무인들이 존재하고 있건만 17살에 이른 소년 아닌 소년은 지금 그들에게 저렇게 무도를 논해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초절정이라는 지고한 경지마저도 그저 지나쳐야 할 길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그 말에 하나의 의미를 담고서.
“······하면, 그 길을 걸어가면서, 자네는 정녕 천하제일이라도 되고자 한다는 건가?”
“그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다른 이를 앞서는 게 아니라 제가 도달하지 못한 고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그 대답에 말없이 그 문답을 지켜보고 있던 검제의 입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분개하던 다른 이들 또한 그 말의 무게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던 순간.
그 순간- 충격을 받은 서문옥을 대신해 련주의 입에서 한가지 물음이 흘러나왔다.
“정녕 그것이 네가 생각하는 무도라면, 너는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해낼 수 있겠느냐.”
“이것만큼은 정론을 말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질문에서만큼은 유천하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무인의 신념을 증명할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하나뿐인듯합니다.”
스르릉- 손을 대지 않고서 뽑혀 나온 검.
조금 전 련주, 현원학이 그러한 것처럼 물이 흐르듯 검집에서 흘러나온 칠흑의 검은 그대로 유천하의 옆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검디검은 별빛을 불태우며 어두운 밤을 두르고 있는 유천하의 주변을 맴돌았으니.
그렇게 바로- 이 순간.
“무武 그것뿐이지요.”
차가운 미소 속에 검신을 낚아챈 소천마 유천하는 그대로 장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권유를 건네었다.
이론이 있으면 직접 증명해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