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56화 (156/205)

천중무련 (3)

대전으로 걸어 들어오는 두 명의 사람.

천중무련의 수장과 조금 전 만났던 검제가 묵직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들어왔고, 저들이 장내에 나타나자마자 실내의 공기가 아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온데간데없이 무척이나 진중하게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각 문파의 수장들이 저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나는 조용해진 순간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

“······.”

헌데 천중무련주의 첫인상은 내 예상과는 다소 달랐다. 검제야 바로 전에 봤던 것처럼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기세를 숨기고 있는 이였지만, 련주는 그하고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무척 온화해 보인다는 느낌.

사전에 듣기로는 련주도 10년 전까지는 공략자로 활동했었다던데, 확실히 은퇴를 한 후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매일같이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기세의 날카로움이 무뎌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가 아닌, 말 그대로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의 분위기였다.

“모두 그간 강녕하셨소이까?”

물론- 그렇다 한들 그 위치에 걸맞은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을 뿐.

바로 옆에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덜해 보일 뿐이지 련주는 이곳에 존재하는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문파의 수장들처럼 간극이 훤히 들여다보이진 않았고, 그렇다고 검제처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달아오를 만큼 격차가 느껴지진 않았으니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오로지 한가지 뿐이었다.

‘절정의 초극. 벽을 마주하고 있구나.’

바로 련주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벽 앞에 서 있다는 것- 예기는 다소 무뎌졌을지언정 분명히 절정의 초극에 도달해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세한 차이. 반, 아니 반의 반합.’

나는 이번엔 련주와의 합을 속으로 가늠해보았으니, 그 결과- 확실히 똑같이 벽을 넘어서지 못한 상황이라 그런지 그와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세월 동안 쌓아온 노력과 경험이 있을 테니 쉽게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지 자체가 다른 수준만 아니라면 실전에서 그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변수였다.

하물며 저렇게 무뎌져 있는 상태라면야.

“다들 잘 지내신듯하니 다행이오. 그럼 공사가 다망한 분들이 모이셨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오만, 모두 괜찮겠소이까?”

“괜찮습니다 련주님.”

“예. 그리하시지요.”

하지만 그 평온이 깃든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이곳에 모여있던 이들은 모두 그의 말에 공손히 대답을 돌려주었으니, 비록 기세는 온화할지언정 련주가 이들에게 어떠한 존재로서 여겨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련주는 무력을 떠나서 사람 자체로서의 무게와 위엄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

“여러분 덕에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구태여 설명하진 않겠소. 이미 여기 왜 모였는지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

“그럼 내객께선 앞으로 나와주시겠소?”

그렇게 련주는 인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말을 따라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의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리는 게 피부로도 느껴질 정도였지만 아까와는 달리 입을 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게 신기했을 따름.

어쨌든 내가 그곳- 련주와 검제가 있는 곳 앞까지 다가가자 그런 나를 바라보며 련주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리고는 이내 다짜고짜 생각지도 못한 말을 건네왔다.

“우선은 사과의 말부터 전하리다.”

“······사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위타극은 본 무련에게도 주요한 악적이었소이다. 하니 원래라면 귀하에게 더 빨리 감사를 표했어야 했으나 이번 사안과 겹쳐 여러모로 조율할 게 생겨 늦어지고야 말았구려. 양해해준다면 감사하겠소이다.”

“감사를 받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나는 이전에 말했듯이 이런 경우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위타극을 베어낸 것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말하자면 사실 이하린을 위해서였고, 부차적으론 남궁설아를 위해서였다. 무련에게 감사를 받을 거란 생각은 이제껏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을 정도.

하지만 남궁설아에게도 한번 들었듯, 이곳 사람들에겐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던 걸까?

-허허. 과연 의협義俠다운 대답이로군.

-어린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춘다면 오만해질 법한데, 참으로 훌륭한 후배일세.

-범상치 않은 이니 위타극을 베었겠지.

아무래도 사람들은 내가 겸손하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으니, 덕분에 주변에서 속삭이듯 들려온 의협이란 단어에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건 정말이지 나하고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속닥거림에 련주는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왔다.

“그렇군. 다만 하나 알아주셨으면 하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시는 분은, 아니 이곳에 계신 분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놈이 20세기부터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벌인 악행은 분명 우리 무련에게도, 다시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소.”

“······.”

“마도련이 몰락할 때 그자가 세상에 흩뿌린 마공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범죄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테고, 놈이 주기적으로 일으켰던 살겁은 이 아시아 곳곳에서 아직도 큰 화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말이오.”

하지만- 련주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자가 왜 이제껏 살아있었는지, 왜 우리가 그동안 그를 잡지 못했는지 아시오?”

딱히 대답을 바라고 건네진 질문 같지는 않았지만, 그 물음이 내게는 조금 당연하게 느껴졌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해버렸다.

이유라고 할 게 있을까. 내 생각엔 그저.

“강하고, 또한 추잡했기 때문이지요.”

“······.”

이것만이 그 이유였을 따름이었다.

분명히 위타극은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마주쳤던 이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강자였고, 그러면서도 삶을 갈구하여 침식을 받아들였다가 망념에 사로잡히게 된 자였다.

무림을 부정하면서도 누구보다 무림에 집착했던, 그렇기에 스스로의 무업을 갈고닦으며 삶을 갈구한 뒤틀린 마인.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물음에 옭매여있던 과거의 망령.

정녕 무림을 이해하고 싶었으면 녀석은 침식과 마주했을 때 죽음을 선택했어야 했다. 하지만 생사를 넘어선 무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놈은 타천의 마인이 되었고, 결국 놈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물음을 찾아 100년의 세월을 도망쳐온 머저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어찌 추잡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마도魔途에 역으로 잡아먹힌 전형적인 마인이라 볼 수 있었으니 녀석은 그저 마인이라 강했고, 추잡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

“······.”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기에 대답을 돌려주었더니 일순간 장내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 마냥. 그렇게.

“······추잡했다라. 허허. 그렇소이까.”

하지만 이내 내 대답에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던 련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긍정하였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정확하오. 그는 강했고, 강하면서도 추잡했소. 그를 마주했던 자들은 모두 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자였고, 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이들이기에 모두 그 강함에 무릎을 꿇었소이다. 놈에게 붙여진 살무제라는 조롱 섞인 아명은 무림의 자조라 할 수 있었소.”

“······.”

“하지만 놈의 추잡함을 알면서도 능력이 있는 이는 그 추악함을 뒤쫒을 수 없었고, 능력이 없는 이는 모두 그 추잡함마저도 이겨낼 수 없었기에 우리의 입으로는 차마 그 사실을 당당히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말이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겠구려. 이것이 위타극을 베어낸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우리는 이제 놈의 추악함을 욕할 수 있겠소이다. 몇몇 분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시오.”

그 말에 몇몇이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우리의 손으로 해낸 일은 아니니 다시 다른 짐을 어깨 위에 올리시길 바라오.”

그 말에 몇몇이 깊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이 순간 련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저 담담했으나, 그 속에는 분명 위로와 격려가 담겨있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내 일제히 진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련주는 그 모습을 쭉 훑어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고,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또한 귀하, 아니 귀공에게는 이 현원학이 천중무련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겠소이다.”

쥐어진 주먹, 펼쳐진 손바닥이 마주했다.

“소속과 연배를 떠나 무련은 귀공에게 감사드리며, 다시 귀공의 업적을 기억하겠소이다. 본 무련이 큰 빚을 하나 지어버렸구려.”

“······.”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포권- 무척이나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인사였고, 그와 함께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도 감사를 보내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나 또한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나는 말 없이 포권을 지어 보이며 그들의 인사에 대답했고, 그러자 시야 한 편에선 모르는 이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마저 엿보였으니 장내엔 기이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별다른 말이 오가진 않았지만 그저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많은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참으로. 이 또한 무림의 풍취였다.

“허허. 감사를 받아주셔서 감사하오.”

“아닙니다.”

“그럼 이제 말로만 이럴 게 아니라 성의를 보여야겠구려. 모인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련주는 그 말과 함께 한쪽에 서 있던 청년을 향해 가볍게 눈짓을 보냈고, 그러자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달려가더니 문 너머에서 무언가의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길다란 사각형. 묵빛이 맴도는 커다란 곽.

쿵- 한데 청년이 내려놓은 상자를 바라보니 그 외부에는 여러 문자가 마치 봉인이라도 하듯 마력과 함께 각인되어 있었고, 나는 만상의 눈을 통해 상당한 마력이 그곳을 중심으로 순환하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상당히 의아한 방식의 보관이기에 나는 련주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가주 대리께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을 터지만, 직접 말해드리겠소이다. 귀공께선 저 기보의 이름을 알고 있으시오?”

“암야暗夜. 암야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저것의 이름은 암야라 불리며, 다시 암야는 일반적인 물건이 아닌 특별한 공정을 거친 일종의 기운의 응집체라 할 수 있소이다. 마력 각인체라 부르는 게 맞겠소.”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곽을 잠가놓았던 자물쇠가 풀어졌고, 동시에 무언가의 과정을 거친 뒤 점차 곽의 봉인이 풀려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후웅-! 상자가 열리는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막대한 마력을 머금고 몰아치는 검은빛의 구슬이었으니. 나는 그것을 목격한 순간- 저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암야는 갑급의 기보로서 주인을 가리오. 처음 기운이 각인된 자를 소유자로 여기며, 기운에 맞지 않는다면 반응하지 않소이다.”

“······.”

“이전의 소유했던 주인은 멸화급 마수와의 격전 중에 영면에 들었고, 파괴되고 남은 핵에 다시 무혼, 아니 업륜의 파편을 부어 복구해냈으니 우리는 실수로 엉뚱한 이가 소유자로 판명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이가 나올때까지 저걸 저리 보관하고 있었다오.”

세계와 공명하는 마력의 집합체.

그것이 바로 내 시야에 들어오는 암야의 본질이었으니, 덕분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설명이 아니었더라도 저것이 어떠한 물건인지 바로 깨달았을 것이란 걸.

왜냐하면.

“사실상 업륜··· 그 자체로군요.”

“······느껴지시오? 그렇소이다.”

만상의 눈은 저것의 구조가 업륜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바로 간파할 수 있었고, 다시 그러면서도 업륜의 본질을 내품은 채 그것이 또 다른 방향성으로 강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홀린 듯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

내가 그 앞에 서자 곽을 들고 왔던 청년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고, 나는 이 순간 다른 건 신경 쓰지도 않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우우웅-

도대체 업륜을 어떻게 이리 그대로 뒤틀어낼 수 있었던 걸까. 이래서야 단순히 업륜의 파편을 녹여내 만든 게 아니라, 업륜 자체를 또 하나의 방향성으로 확립시킨 셈이었다.

만상세계가 부여한 삼라만상의 권능을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지 경탄스러웠고, 하나의 이적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나는 다소 멍하니 련주를 바라보았다.

“잡으시오.”

그러자 묵묵히 되돌아오는 목소리.

나는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홀린 듯이 그대로 암야에 손을 뻗었고, 내 손이 맞닿은 순간 암야는 나- 정확히는 내 손등의 업륜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내 존재를 한번 확인해보겠다는 듯 순환하는 세계의 마력.

우웅-!! 그리고는 이내 울음을 토해냈다.

마치 나를 소유주로 인정하겠다는 것처럼.

그대로 내게 녹아 들어오겠다는 것처럼.

“공명이 되었구려. 그럼 이제 기를 순환시켜보시오. 업륜을 사용할 때처럼 그 형상과 성질을 변환시키듯이, 귀공의 머릿속에 떠오른 염상이 암야의 형상을 만들어낼 터이니.”

염상- 나는 그 말을 들은 즉시 생각했다.

분명, 원래대로라면 내가 떠올렸을 것은 간단한 코트 형식의 겉옷이었겠지만 아마도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이 원인이 되었던 걸까? 내 머릿속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어떤, 특별한 의복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무림의 풍취를 계속 느껴서인지 무림의 시절을 떠올리면서. 다시 무림에서 내가 가장 자주 입어야만 했던 하나의 복장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우웅-!!

칠흑의 암막이 내 몸을 타고 물결쳤다.

***

유천하는 암야에 소유주로 문제없이 인정받았고, 그리고는 역시 괜히 등천자가 아니라는 듯 무척이나 익숙하게 그대로 암야의 변형을 시도했다. 평소에 업륜을 여러번 다뤄봤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저게 무슨- 그것이 유천하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

“······.”

밤하늘이 그를 감싸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촤르륵- 물결치듯 일어난 장막이 만들어낸 형상은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모습이었으니, 마치 실제로 어딘가에서 가져온 듯 완벽한 형상으로 빚어진 암야의 외형에 사람들은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번의 시도만으로 저렇게 완벽한 형상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었다는 점에 대해. 다시 그렇게 만들어낸 의복이 갖추고 있는 형상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는 사실에.

바로 그러한 사실에 말이다.

“······.”

흘러내리듯 걸쳐진 칠흑의 무복.

그곳에서 풍겨오는 짙은 분위기.

흑색의 일변도로 만들어진 복장이었을지언정 그 형상 겉면에는 명도의 차이를 통해 짙은 회색빛의 선으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다시 전체적인 재질에서부터 은은한 묵빛의 광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저 옛날 무림에 존재하던 귀공자의 풍채처럼.

그리고 다시.

그것을 걸치고 있는 이- 유천하의 짙은 머리카락과 융화돼 검디검은 밤하늘과도 같은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으니, 실로 그야말로 암야暗夜라는 말에 어울리는 형상이었다.

하지만.

촤르륵-!! 그것은 단 한 순간에 불과했다.

“······허.”

“······아.”

저 옛날 무림의 시절을 상상하게 만들어준 유천하의 모습은 순식간에 다시 형상을 뒤바꿔버렸고, 유천하는 그 외형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번에는 암야의 형상을 현대식의 외투처럼 다소 단출하게 만들어냈다.

정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다.

“······.”

“······.”

허나 갑작스럽게 펼쳐진 신묘했던 광경에 지켜보던 이들은 이미 적막에 사로잡힌 뒤였고, 그건 앞에서 유천하를 지켜보던 련주와 검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광경은 정말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기에.

조금 전 유천하는 마치 수 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걸 알 리가 없는 유천하는 그저 저도 모르게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그저 변형시킨 암야의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소매의 끄트머리를 부분적으로 변형시켜보며 암야의 기능을 확인해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련주가 말을 꺼내왔다.

“생각보다··· 형상화에 능통한 듯 하오만?”

“업륜을 처음 얻고 나서부터 실험과 연습을 자주 해왔습니다. 형상과 성질을 어떻게 변화시키냐에 따라 도움이 되니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대단한 숙련도이오만··· 허.”

변명하듯 돌려준 대답이었지만, 동시에 유천하로선 전부 사실을 말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처음 업륜을 얻고 나서도 계속 업륜에 대해 연구를 해왔고, 물질화가 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 그리고 성질의 변화까지 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새로운 방안을 생각해왔다. 형상과 성질 그 모두에 대해서.

물론 그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기둥은 오로지 스스로가 쌓아 올린 무武의 업이었다.

하지만 이하린을 치료해주었을 때나, 남궁설아의 특성에 착안해 가속을 얻어냈을 때처럼 업륜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으니- 유천하에게 업륜은 막대한 마력을 지닌 마수와 싸울 때 사용할 수단 중 하나이면서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비수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 정말로 죽어야만 하는 싸움이 있다면,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신체 일부가 날아가도 지지대를 만들어 지탱하고, 생명의 원기로 변환시켜 활력을 부여하고, 그렇게 해서 설령 저 자신이 죽게되더라도 그 대상 또한 무조건 같이 죽게 만들 수 있도록. 그는 이미 3월부터 업륜의 숙련도 또한 계속 꾸준히 수련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인의 삶은 투쟁이고, 그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생사의 줄타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될 테니까- 그로서는 그저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그 사실을 되새겨보고서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암야를 만져보았다. 들었던 대로라면 이게 저 자신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걸 막아줄 수도 있을 테니까.

스륵- 그리고 유천하는 손가락이 닿은 부분에서 비단과 비슷한 재질의 느낌마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 문득 이것의 성능에 관해 확인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감탄 반, 당황 반의 심경으로 유천하를 바라보고 있던 련주의 눈에는 그런 유천하의 생각이 한눈에 엿보였으니- 그는 조금 흥이 도는 걸 느끼곤 입을 열어보았다.

“이번에는 성능이 궁금해졌소이까?”

“예. 형상의 변화만으로도 확실히 신기합니다만, 이게 보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아직 조금 의문스럽긴 합니다.”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보시겠소?”

그 말에 유천하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련주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간단하게 저의 손가락을 까딱거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스르릉-! 벽 한쪽에 걸려 있던 검이 그대로 저절로 허공에 떠올라 그 사이로 날아왔으니 그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허! 어검? 실로 완벽한 의념이시로군.

-예끼 이 사람아. 대단하시긴 해도 뭔 어검인가. 그저 의념의 수발이 뛰어나신 게지.

-그래도 그 일로 은퇴하신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리 정정하시니. 역시 련주님이시군.

그리고 물론- 유천하 또한 그 웅성거림을 흘려들으며 허공에 떠오른 검을 바라보았고,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의념의 수발이 무척 노련해.’

비록 어검이라기엔 미약했을지언정, 그저 의념이라기엔 완벽했으니 확실히 천중무련주의 이름에 걸맞게 현원학은 초절정의 벽 바로 앞에 서 있는 무인이었다. 저곳에 의지를 온전히 실어낼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진정한 어검이 펼쳐지는 순간이겠지.

유천하는 그런 생각 속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암야가 찢겨나간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저 정도라면 찢겨나가도 바로 쳐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예. 해보십시오.”

“좋소. 주의하시오.”

그 순간 검에서 일렁거리는 푸른 기운.

검강은 아닐지언정 검기가 서린 검격이라면 분명 어지간한 쇠라 해도 뚫어낼 것이기에 괜시리 지켜보던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고, 그 상황에도 유천하는 그저 담담히 그 자리에서 그러한 검을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퀴잉-!! 검기를 머금은 검신이 그대로 빛살처럼 쏘아져 유천하의 흉부를 강타했다.

“······.”

“······.”

조용히 내려앉은 침묵- 지켜보던 남궁설아가 저도 모르게 호흡마저 잠깐 멈춘 순간, 이내 유천하를 꿰뚫은, 아니 뚫어보려 했던 검은 그대로 허공을 되돌아 벽에 걸리었고, 그렇게 그는 잠시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해본 끝에 대답했다.

“······대체 업륜이 몇 개가 쓰였습니까?”

지금 저 자신의 흉부를 강타한 검에는 분명 제대로 된 기세와 검기가 실려있었다. 하지만 암야를 뚫어내기는커녕 그 물리적인 충격마저 절반가량을 덜어냈으니, 실로 상식적인 선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수준.

심지어 충돌한 순간에는 암야 자체에서 마력의 저항까지 일어나며 검을 밀어냈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걸까- 유천하는 그런 생각 속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련주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련주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대답하였다.

그리고.

“처음 만들어졌을 때가 5획. 추후 강화를 위해 사용된 게 2획. 파손 후 수리를 위해 3획. 반 백 년의 세월 동안 총 10획이 쓰였소.”

“······.”

“천 일을 축원하고, 백 일을 가공하여, 십 일을 정제해 가다듬었으니······ 저 기원의 위대한 마도사 프리앙 님과 금술사 아르탈 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만들어낼 수 있었던 무련의 최상급 귀물이라 보면 되겠소이다.”

총 10획- 그 말을 들은 유천하는 잠시 멍하니, 그리고 천천히 제 두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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