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무련 (1)
토요일 아침- 주말이라 그런 건지 회랑의 게이트 관리소에는 생도들이 북적거린다. 짐을 보니 주말 간 본가에 다녀오려는 듯한 아이들도 있는 듯했고, 볼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오려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도 엿보였다.
그리고 물론.
-근데 뭔 영화를 프라하까지 가서 봐?
-딱 영화만 보고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딱히 불만인 건 아닌데······.
-그럼 딱 저녁까지만 먹고 돌아올까?
이전보다는 조금 미묘한 기류를 풍기는 아이들의 모습도 시야에 들어왔으니, 확실히 큰 행사가 지나간 뒤라 그런지 이래저래 사이가 가까워진 듯한 이들이 꽤 많아 보였다.
물론 Mt든 축제든 무언가 계기가 생기면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현상이었고, 굳이 이성 간의 관계만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근래의 회랑은 전보다 더 활력에 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멸화급이란 재앙을 다 같이 격파했다는 게 아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제공해주었던 모양.
이러한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던 걸까? 과연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풍경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 씨?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그러니까- 이런 평온한 분위기가 말이다.
“날씨가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오늘은 바람이 선선한듯합니다.”
“와··· 좋은 거 받으러 간다구 기분이 좋나 보구나? 천하 너가 그런 생각까지 다 하구.”
“······.”
장난스럽게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웃어 보이는 아리엘의 모습에 나는 잠시 대꾸를 해줄까 생각해봤지만, 이내 빠르게 관두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다소 의아했던 부분을 되짚어보며 그녀들에게 말을 건네보았다.
“그것보다··· 대체 배웅은 왜 나온 거야?”
“모야. 우리는 배웅도 해주면 안 돼···?”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는 그녀.
하지만 당연히 정말로 서운해 보이지는 않았고 그냥 장난을 치는듯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그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잠시 갔다 오면 그만인 마당에 이렇게 배웅까지 나왔다는 게 더 부담스러웠으니 말이다.
“그야··· 그냥 잠깐 물건 하나 받으러 갔다 오면 끝인데, 무슨 배웅까지 나오고 있어.”
“······그치마안··· 저번에도 그렇게 가셔놓구 뉴스에서 얼굴을 보게 됐던걸요? 그리고 설아 씨랑 같이 가니까 왠지 조금 더··· 넵.”
약간 쪼그라든 모습으로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흘러나온 이하린의 말. 그 말에 옆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있던 남궁설아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랑 같이··· 가서 말인가요?”
“아. 그, 그게 아니라······ 그, 그게.”
두 눈을 깜빡거리는 남궁설아의 반응에 이하린이 순간 아차 하며 당황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옆에서 잠시 토라진 척 연기를 하고 있던 아리엘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드럽게 새어 나온 작은 웃음소리. 그렇게 맑은 목소리를 짧게 흘려보낸 그녀가 이내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설아랑 둘이서 설아네 다녀왔었잖아. 며칠 동안 수업도 다 빠지구 말이야. 그때 테러 날까지 연락 한번 안 해줬었다며.”
“아, 아리엘 씨!”
“······그때는 수련에 너무 몰두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계속 가르침을 청했던지라 은공께 폐를 많이 끼쳤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 그냥 저도 생각나서 한 말이지 뭐라 하려구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실례를 끼쳤던 건 사실이라서···.”
우리의 반응에 이하린은 저가 더 미안하다는 듯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당황했고, 그녀의 모습에 남궁설아는 무슨 말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이전보단 나아졌을지언정 둘은 확실히 서로를 조금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이하린이야 원래 그러한 사람인 만큼 그렇다 쳐도, 남궁설아가 이하린을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대련에서 지고 다소 미묘한 일이 있었다 해도 생각보다 조심스러웠으니, 그 부분이 조금 의아하긴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남궁설아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그러려니 할 수밖에.
그리고 그 순간- 부드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던 아리엘이 이내 손가락을 탁 튕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번에는 바로 돌아오는 거지?”
“그렇겠지. 그냥 받고만 오는 거니까.”
“예. 은공께선 받고만 오시면 됩니다. 그걸 위해서 제가 본단까지 따라가는 거니까요.”
“그럼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나 또 뉴스에 나올 일 있으면 먼저 연락이라도 해주는 거 잊지 말고. 그러니까······ 우리 하린이한테!”
“······진짜 맨날 놀리시기만 하시구······.”
그 마지막 말에 이하린은 너무하다는 듯 울상을 짓고선 아리엘을 바라보았고, 그런 이하린의 귓가는 미미하게 달아올라 있었으니- 날이 갈수록 말 한마디만으로도 이하린을 뒤흔드는 솜씨가 늘어난다는 느낌이었다.
저것도 나름 언령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선 가볍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럴 일 없어. 그리고··· 만약 늦어지더라도 이번에는 연락 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넵.”
그렇게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하린의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슬슬 무련으로 출발할 시간이라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아까부터 워치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해보고 있던 남궁설아도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 괜히 늦으면 곤란해질 테니까요.”
물론 물건만 받고 오면 그만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물건만 툭 던져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거창하진 않더라도 절차는 존재했고 그건 평소답지 않게 정장, 비록 세미에 가까운 차림새였지만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고 온 남궁설아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 덕분에 좋은 소재를 얻게 된 마당에 실례를 저지를 순 없었으니 나도 최소한의 예를 갖춰 줄 필요는 있었을 뿐.
그러니 늦지 않게 슬슬 출발해야겠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갔다 와! 이따 봐!”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고, 그대로 게이트를 향해 발을 옮겼다.
***
천중무련 天中武聯
그곳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지역에 자리해왔던 무인 집단 ’무림맹’을 전신으로 삼아 설립된 단체로서, 무림이 몰락해가던 와중 세계침식에 휩쓸리게 된 무인들이 정사의 구분 없이 힘을 합쳐 만들어진 단체라고 한다.
내가 지나온 무림을 생각하자면 실로 믿기지 않는 노릇이었지만, 여기엔 여러 상황이 겹쳐진 결과였으니 충분히 이해는 되는바.
어쨌든 그렇다 보니 천중무련은 사실상 세계침식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널려 있는 각각의 장원들.
그리고 그곳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인파.
천중무련의 본단이 위치한 중국 북경시의 한 구역은 현대와 과거의 건축 양식들이 뒤섞인 채 이루어져 있었고, 게이트를 넘어 본단까지 가는 와중에도 거리에선 무기를 패용한 자들이 심심치 않게 엿보였으니 확실히 이곳에선 무림의 풍취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번에 하북성에 황혼급이 또 생겼다며?
-아 그거? 정심회주께서 처리하셨다던데.
-하하! 무공만으로도 대단하시구먼. 정말.
심지어 거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의 주제도 대부분 천중무련이나 무인들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을 따름.
그리고 그렇게.
“바로 이곳이 본단입니다.”
“무척 고풍스러운 곳이군요.”
우리는 세월이 흘러서도 무림의 잔재가 남아있는 거리를 지나쳐 천중무련 본단에 도착하였고, 눈앞에 놓인 거대한 장원을 바라보며 잠시 발을 멈추고선 그곳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면적의 장원. 그리고 저 멀리에, 그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옛 된 양식의 건물.
만상의 눈을 통해 엿본 시야 속으론 그 장대한 규모의 본단이 모두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선 다시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비록 대부분이 고수라 불리기엔 다소 모자람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였고, 이곳에는 일류라 불리기에는 충분한 무인들이 수없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절정 이상이··· 최소 수십 명.’
가볍게 훑어본 것에 불과하다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시야에 들어온 자들이 존재하였으니,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고수들이 침식과 맞서 싸우는 세계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런 평시에 이 정도 수준의 고수들이 이렇게 많이들 모여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남들보다 확연한 존재감을 내비치는 고수들도 존재하였고 말이다.
“역시 본단엔 고수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예···? 아. 벌써 느끼셨나요? 예. 비록 각자의 사문에서 수양을 쌓는 분도, 공략을 하러 돌아다니시는 분들도 많지만 저희 천중무련은 설립의 계기가 계기다 보니 기본적으로 상주하며 활동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서로 무공과 가르침을 교류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각자 문파의 비전까지는 공유하지 않지만, 기본적인 무리武理의 교류나 비무는 거리낌 없이 하는 편입니다.”
“과연··· 좋은 곳이로군요.”
확실히 세계가 세계이다 보니 내가 있던 무림에 비해선 꽤 개방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중원에서는 외인에겐 기본적인 무리武理의 가르침이나 비무를 엿보는 것마저도 금기시하는 분위기였고, 실제로 대부분의 교류는 각자의 문파 내에서만, 그것도 항렬이나 배분에 따라 구분해서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체계다 보니 중원 무림에선 재능만큼이나 무공을 배울 수 있는 환경도 중요했으니, 이곳처럼 개개인의 재능과 노력보단 사문에 따라 성취가 달라졌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교류를 한다면 어느 정도는 각자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무학武學에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감상.
내게도 실로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이래서야 지난번에도 굳이 제게 가르침을 청할 이유는 없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너무 짓궂은 말씀이십니다.”
그렇기에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슬쩍 그녀에게 농담을 건네보았는데, 그러자 내 말을 들은 남궁설아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저로서는 은공께 부탁을 드리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실력, 식견, 상황··· 그 어떠한 측면에서도 말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물며 저희 세가의 비급을 아무에게나 보여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럼 저는······.”
그 말에 한 번 더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건네보려 했지만, 남궁설아는 그걸 예상했는지 본인이 먼저 선수를 쳐선 대답을 돌려줬다.
그것도 다소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이다.
“예. 아닙니다. 적어도 저희에겐 천하 씨만큼은 외인이 아니십니다. 말씀드렸듯 남궁은 은공의 이름을 기억하고, 또 언제든지 가문의 은인을 위해 검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
“그러니 농담으로라도 그리 말씀하시면 너무 짓궂다는 느낌이 들 뿐입니다. 제게 천하 씨 당신은··· 가문의 은인이면서, 다시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주신 은인이고, 또 제게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신 은인이시니까요.”
그 대답에 나는 잠시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농담 하나에 이리 반응한 게 민망한 건지, 아니면 저 말 자체가 조금은 쑥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남궁설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런 내 시선을 피하였다.
“······.”
“······.”
그녀답지 않게 겸연쩍어하는 듯한 모습.
나는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고, 그리고는 이내 그녀에게 사과를 돌려주었다.
“예. 앞으로는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반응이 과했던 것이니 너무 개의치는 말아주세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실례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더 실례했습니다.”
물론 내 태도에 남궁설아는 더 당황할 따름이었으니 솔직히 말해서, 이러면 안 되겠지만 그 모습이 내겐 조금 재밌게 다가왔다.
요즘 아리엘과 같이 다니는 시간이 다소 늘어나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말에 장난기가 깃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하린은 내 말에 더 크게 반응을 하는 편인 만큼 딱히 농담을 건넬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리엘은 오히려 언제나 한결같이 저가 더 놀려먹으려고 드는 애였으니 예외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저기 저 사람. 설아 소저 아닙니까?
-설아? 검화 아가씨? 어 진짜 남궁설아네.
-오랜만이시네. 근데 옆에는 또 누구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본단의 장원을 거닐고 있다 보니 어느새 본단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남궁설아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서서히 우리에게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영락했다 한들 1세대 승천자에 무림맹주까지 배출했던 집안이라 그런지 남궁설아는 확실히 유명한 모양이었고, 그런 만큼 그녀와 함께 무련에 방문한 내게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자, 잠깐··· 저 사람 혹시 그, 그거 아냐?
-그거가 뭔··· 어? 뭐야. 유천하 아니야?
다만- 한가지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척마검! 척마검이다! 위타극 살해자!
-척마검이라니! 승천제 이후로 승천검룡으로 별호를 바꾸잔 소리가 나오고 있구만!
-쯧쯧! 네 글자보단 세글자 별호가 더 멋이 산다는 걸 모르나? 짬을 헛먹었군. 아주.
-그것보다 저 실력에 룡이 말이 되나? 후기지수의 수준을 넘어선 검객인데 말이야.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
물론 공략자들에겐 성신이니, 검제니, 용제니 하는 이명이 붙어있었고 하다못해 유망주들에게도 광휘의 진시우니, 언령의 아리엘이니 하는 별명은 붙어있었지만 그걸 저렇게 열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아니, 그것보다 관심을 끄고 살아서 몰랐는데 그간 나를 저렇게 부르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상당히 거북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순간 아까부터 내 눈치를 보고 있던 남궁설아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
“······.”
조금 전에 대화로 민망해하고 있던 그녀였지만, 남궁설아는 내 얼굴을 보고선 잠시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주변의 웅성거림을 들었는지 아- 하며 내 눈을 마주한 채 작게 두 눈을 깜박거렸다.
남궁설아가 속삭이듯이 말을 건네왔다.
“듣다 보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예.”
남궁설아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 말해왔지만 나로서는 조금 떨떠름했을 뿐. 차라리 무림에서 저런 소릴 들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 같지만 이곳에선 다소 미묘했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중원 무림이었다 한들 겉치레를 중시하는 정파의 샌님들이나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사파의 무뢰배들이라면 모를까 신교 내에서는 다들 별호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냥 있으면 있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별호의 존재감은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하물며 나는 위치상 소교주로 불릴 때가 대부분이었고, 대외적인 활동은 암영비천대의 특성상 은막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았으니 그저 암영비천대의 대주에게 주어지는 암영이라는 직책만이 호 대신 불리었을 뿐이지 보편적으로 불리는 별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성이 별로 없다는 소리였다.
“저도 어린 시절에는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듣다 보니 괜찮아졌습니다. 물론 생도들끼리 있을 땐 그러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사춘기가 왔을 때는··· 저도 심경이 조금 복잡하긴 했으니까요.”
“······고생하셨습니다.”
“사실 무련의 사람들이 이런 쪽의 가십거리를 더 좋아하는 면도 있으니, 오늘 하루만 적당히 흘려들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다.”
나는 그녀의 조언을 받들어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들을 모두 흘려넘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 이 사람! 룡보단 검으로 끝나는 게 더 끗발이 높다는 걸 왜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자네는 척마보단 승천이라는 글자가 더 장대한 뜻을 품고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건가?
-검제님처럼 두 글자로 천룡정도면······.
-허. 제정신이 아니로군. 검을 왜 빼!
그렇지 않고서는 저 낯간지러운 소리들에 기분이 미묘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묘하기도 했다. 뉴스 기사나 웹의 여론 정도면 모를까 현실에서 저런 소리를 저리 열심히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참으로 무림이라 할 수 있었다.
-거 대충 부르지 뭐 그리 열을 올리는지.
-하. 별호를 누가 대충 부르나 이 사람아!
-허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도다!
정말, 참으로 무림이었다.
***
그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시선을 받으며 본단의 중앙건물- 그곳에 구비된 응접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째 아직 물건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정신이 조금 피로해졌다는 느낌.
다행히 응접실에는 남궁설아와 나. 우리 둘밖에 없었기에 잠시 대기를 하는 와중에는 따로 이상한 소리를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또한- 이따가 기보를 받을 때 예정된 절차에서는 무련의 중진들만 만나고 오면 된다 하였으니, 고수들은 아까처럼 별호를 갖고 들떠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해볼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 심경이 티가 났던 모양. 남궁설아가 차분한 미소 속에 말을 건네왔다.
“생각보다 많이 낯간지러우셨나 보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낯간지럽다기보단 조금 미묘했습니다.”
“그래도 은공께선 빨리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공략자의 칭호는 희망을 주기 위해 불리는 불빛이니, 당신은 분명히 다른 이들보다 더 크게 이름을 떨치실 테니 말입니다.”
“······.”
“당장 지금만 해도 거리에 나가시면 일반 시민들도 은공의 얼굴은 알아볼 테니까요.”
아니라고 하기엔 실제로 비슷한 상황을 몇 번 겪어봤으니 그녀의 말대로 앞으로를 생각하자면 빨리 적응하는 게 편하긴 할 터.
아무리 기회가 빨리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귀환의 시기는 최소 3년 뒤- 세계침식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으니 3년의 세월은 내게도 분명히 긴 시간이었다.
하물며 단순히 겉치레의 용도로 쓰이는 별호와는 다르게 그녀의 말처럼 이곳에선 공략자들의 호칭도 희망의 상징처럼 쓰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해보자면 그런 것도 마냥 불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비록 이제 와선 진흙 발에 짓밟혀버렸을지언정 시조께서 스스로를 천마라 자칭하셨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셨다. 그러하니 의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이름도 명예롭게 받아들이는 마당에 검룡이니 무슨 검이니 하는 소리에 질색하는 것도 조금 웃기는 노릇.
남들에게는 천마라는 호칭이나 그런 거나 그저 비슷한 느낌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내게는 결코 아니지만.’
하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그 추잡해진 허명을. 그 이름의 무게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 그걸 위해선 역시 내가 빠르게 강해질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대략 3년의 유예.
그 시간 동안 나는 벽을 넘어 초절정의 세계에 도달해야만 했고, 추악한 노괴에게 그 이름의 무게를 알려주기 위해선 최소한 완숙의 경지를 넘어서 극의에 닿아야만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까마득한 목표였지만 그나마 녀석을 상대론 심검의 세계까지는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아버지가 주화입마에 빠지시기 전까진 전면에 나설 생각조차 못 했던 놈을 베어내는 데는 내 육신과 검만으로도 충분했고,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진 이상 나는 그것을 반드시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내게 부족했던 건 오로지 시간이었고, 또 시간이었으니까.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이군요.”
“아··· 예.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무림의 분위기를 느껴서일까. 항상 무림 시절을 떠오르게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같이 떠오른다. 잠시 마음가짐이 바뀌었어도 이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
그런데 중원을 떠올리고 있던 그런 내 모습이 그녀에겐 다르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사실··· 바깥에 나가지 않더라도 오늘만큼은 아마도 많은 분들이 찾아오실 겁니다.”
“······무슨 의미신가요?”
나는 남궁설아의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색에 그 부분을 되물어보았고, 그녀는 내 물음에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도 다소 피곤해지는 대답을 말이다.
“이곳은 천중무련이고, 살무제 위타극의 악행에 혈채를 짊어졌던 건 저희 남궁세가 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분명 은공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다들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소식이 빠른 분이라면 당장 지금이······.”
똑똑-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
“······올 거라 생각했는데, 왔나 보군요.”
“······.”
“아직 일정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아마도 은공을 보러오신 분이 맞을 겁니다.”
남궁설아는 때마침 울려 퍼진 노크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기가 문을 열겠다는 듯이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
나는 태연한 남궁설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으니, 한순간에 정신을 벼려낸 나는 그 문밖을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
소리가 울려 퍼지기 바로 직전까지 기척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도.그리고 이 순간 상대를 인지한 즉시 느껴지는 그 거대한 존재감에 대해서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풀어졌던 의식을 조여트리면서.
“예. 들어오······ 어··· 어?”
“설아더냐? 오랜만이구나.”
그리고 그렇게.
“네가 유천하렷다?”
나는 거인巨人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