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망소귀 (4)
우웅- 감춰두었던 업륜의 마력이 깨어나며 흑색의 원형 2획이 손등 위로 떠오른다.
물론 앞으로를 대비하자면 이것 말고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많긴 했지만, 지금 당장 큰 흥미가 느껴지는 건 낮에 들었던 업륜으로 만들어냈다는 기보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걸 녹여낸다라.”
업륜은 만상세계가 부여하는 세계의 가호임과 동시에 각성자가 쌓아온 업의 구체화. 원형으로 이루어진 이 각인은 분명히 막대한 기운이 모임으로서 만들어진 밀집체였다.
그것도 삼라만상의 근간을 이루는 무척이나 정순한 기운으로만 이루어진, 일종의 세계와 동화된 회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운도 아니라 해야겠지.’
어두운 밤이었기에 칠흑의 문양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만상의 눈으로 바라본 시야 속에서 업륜은 세계와 공명하여 지금도 자연스럽게 마력을 순환시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업륜 속으로 스며들어와 변환되는 세계의 마력은 분명 일개 기운에 불과했을지언정 삼라만상이 자아내는 무수한 가능성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바로 이 세계의 표상과 마찬가지로 다변의 가능성을 말이다.
세계가 다변하니 만상과 만물은 순환한다.
그것이 내가 업륜을 얻고 나서 얻은 깨달음으로서, 비록 온전한 무학의 깨달음이라기엔 조금 빗겨나가 있었지만 기의 물질화를 처음 목도한 순간- 바로 그 순간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깨우치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전까지만 해도 삼라만상의 근간에는 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기와 물질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업륜이 물질로 화하는 걸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이상 그것이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
나는 잠시 손등에서 마력을 뽑아내보았다.
우웅-! 묵빛의 마력은 한순간에 뿜어져 나와 형상을 만들어냈고, 정육면체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업륜은 내가 원하는 순간 그대로 그 형상을 하나의 물질로써 구체화 시켰다.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면 그대로 질감과 밀도가 느껴졌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등에 녹아 들어있던 무형의 기운은 이렇게 한순간에 물질로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걸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세계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는 기운은 분명 모두 삼라만상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고,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 본질은 만상에서 나왔으니 사람도, 생명도 모두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이 자아내는 의식과 생각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표상의 규정은 어디서 확립되는 걸까.’
나는 원래라면 기운에 불과했을 업륜으로 만들어냈다는 그 물건이 무척 흥미로웠다.
내 업륜으로 내가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나’ 자신의 의지와 염상만 있어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도의 마력의 집합체에 불과한 걸 원하는 형상으로 만들어내고, 다시 그러면서도 그 본질을 영구히 유지시키는 건 과연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물론 나도 업륜의 추출에 대해서는 이미 수업에서 몇 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업륜의 파편- 소유자가 영구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저 자신의 업륜을 그 자체로 형상화 시킴으로써 업륜의 성질을 지닌 특별한 결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허나 그것에도 분명히 한계는 존재했다.
물론 업륜처럼 고밀도의 마력이 모여 만들어진 그 결집체는 스스로 마력을 그러모으기도 하고, 다시 어떠한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 하였으나 실제의 업륜처럼 자유자재로 변화하지는 못한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 쓰임새조차 특별한 아티팩트의 동력원이나, 단번에 흡수 가능한 영약 대용으로 쓰이는 게 전부라고 했을 정도.
“······역시 비효율적이야.”
하지만 그건 일 획의 업륜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노력과 고난을 생각해보자면 사실상 무의미한 쓰임새였고, 그 쓸모를 생각해봐도 역시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활용이었다.
차라리 전선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공략자가 있다면 후대를 위해 그렇게라도 남겨주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실제로 업륜을 얻어 활동하는 공략자의 숫자와 그런 공략자들의 마음가짐을 생각하자면······ 조금 미묘할 뿐.
등천자의 숫자와 그들의 태도.
평균적인 연령대와 사망률까지.
업의 증명은 침식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을 불태우는 이들이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이제껏 선두 공략자들이 은퇴해왔던 순간은 그저 빠르고 늦고의 차이일 뿐이지 대부분 전장에서 사망하는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체 일부가 훼손되었다거나 개인의 신념을 꺾을 만큼의 사정이 생긴 경우에만 그나마 평온한 은퇴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조금이나마 세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저 자신이 쌓아온 업륜을 추출함으로써 탄생한 게 업륜의 파편이었으니- 그 희소성을 생각하자면 그 가치가 과연 어느 정도의 물건인지 쉽게 짐작해볼 수 있었을 정도.
분명히 어지간한 에테리얼 크리스탈보단 귀하고도 희소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도 흥미로울 수밖에.
그것도 일반적인 쓰임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업륜의 본질까지 그대로 살려냈다 하니 나는 그걸 빨리 실물로 관찰해보고 싶었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을까.
어떻게 추출된 업륜을 변화시켜낸 걸까.
도대체 어떻게 그 본질을 유지시켰을까.
모든 의문은 만상의 눈으로 관찰하고 실험하다 보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될테고, 그게 무학의 깨달음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정도 물건이라면 안계를 넓히는 데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받으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더불어 무련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하고.’
무림에서의 난 소천마의 위치에 있는 이였기에 무림맹을 방문해본 경험은 없었다. 그 저 암영비천대를 데리고 임무를 수행하다 무림맹의 척살조와 몇 번 마주했던 게 전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느 정도 무림맹의 전력을 가늠해볼 수 있었고, 그러므로 한번 이곳의 무림, 그 잔재를 새롭게 탈바꿈해 만들어졌다는 무련을 견식해보고 싶었다.
내가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삼사도.
멸화급을 상대하면서 나는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우선 세계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과 현실이 갈라지는 경계는 그곳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지금의 내게는 경험이 필요했다.
단순한 전투의 경험뿐만이 아니더라도, 내가 인지하는 세계의 영역을 넓힐 수 있도록 정신의 그릇을 넓히고 ‘나’의 세계를 정립할 수 있도록 내게는 더 많은 자극이 필요했다.
가능하다면 직접 대련을 하고 싶긴 하지만 이번엔 초대를 받아서 가는 것인 만큼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가서 천중무련이라는 집단을 관측하고, 이 세계의 무공에 대해 엿보기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고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기원학회도, 각성자 협회도 한 번씩 방문할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물론 그건 우선 조만간 해결해야 할 일- 그림자 교단의 사냥이 끝난 다음에 일일 터.
이하린이야 뭐 항상 그러했고, 아리엘 또한 사건이 터지면 제 목숨마저 도외시하고 달려든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역시 불필요한 변수는 먼저 제거해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비록 허상이긴 했지만 이번 승천제의 사건을 통해서 나는 조금 흐릿해져 있던 그림자 교단의 위험성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고, 그건 카룬드와 위타극을 죽이며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던 내게 앞으로의 사건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보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짧게는 그림자 교단 자체에 대해서도.
나아가 원작의 미래와 변수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어두운 밤거리에 몸을 숨긴 채 아까부터 나를 따라오고 있는 한 사람. 그러면서도 ‘원작’의 주인공인 진시우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정도는 쉽게 간파하는군. 역시 인식 저해 수준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건가?”
그렇게 내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자 기척을 숨긴 채 따라오고 있던 녀석도 저의 행동이 소용없는 짓이란 걸 깨달았는지 곧바로 몸을 드러내었고, 그대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이래서야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어.”
주홍빛을 머금은 백색의 머리카락- 확실히 언제봐도 이질적인 색채였고, 그 외형만큼이나 마이페이스에 가까운 성격을 증명하듯이 진시우는 미행을 들킨 점에 대해 별 생각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선은 찾아온 이유부터 듣고 싶은데.”
“제안을 하나 건네볼까 싶어서 말이지.”
“······제안? 어떤?”
다짜고짜 내게 뜬금없는 말을 건네왔다.
“마인 사냥.”
그것도 다소 흥미로운 소리를 말이다.
***
작중작 <원작>의 주인공.
공략자 유망주 랭킹 1위.
자유연맹에 등록된 초인.
이면순례자 소속 집행자.
전생자轉生者 진시우.
이 녀석도 사실 이 세계에서는 이하린과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하린보다는 어쩌면 나와 더 가까운 존재라 볼 수 있었다. 환생자와 전생자.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선 맥락 자체는 서로 비슷했으니 말이다.
물론 한번이 아닌 다회의 삶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아의 주체가 달라진다는 점에서도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다르긴 했다.
하지만 환생을 경험한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진시우의 존재는 어찌 보면 삼라만상의 윤회輪廻가 실존한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으니, 나도 모르게 윤회의 굴레라는 개념에 대한 궁금증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물론 진시우의 윤회전생에는 이유가 존재하였으니 내게 새로운 삶이 또 주어지진 않을 거란 사실정도는 나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
“······.”
지금은 그러한 의문에 빠지기보단 우선 현재 상황에 집중하는 게 더 맞는 선택일 터.
나는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에서 가만히 녀석이 건네온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그 제안의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면 그게 어떠한 이득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런데 그러한 침묵이 녀석에겐 어떻게 느껴졌는지 진시우가 다시금 말을 건네왔다.
“······거절할 생각인가?”
“생각 중이니까 기다려.”
진시우가 건넨 제안- 그건 분명히 내게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이후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좋은 제안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침식 영역이라 위험하긴 해도 네 실력 정도면 어지간해선 문제가 생기진 않을 텐데.”
침식 영역에 들어가 같이 마인 사냥을 하자는 제안- 그걸 내게 건넨 게 과연 생도 진시우로서인지, 아니면 집행자 진시우로서인지에 따라 그 효율성은 심히 달라질 터였다.
안 그래도 승천제에서의 일- 그때 나타났던 마인들을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하오란은 길 가던 나르화리얀한테 잡혀 죽었던지, 아니면 집행기관에 붙잡혔을 가능성이 컸다.
그 증거로 정기 연락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녀석한테선 연락이 오고 있지 않은 상황.
그런 만큼 이면순례자에 속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정보와 협조를 구할 수 있다면야 그림자 교단을 사냥할 계획인 내게도 분명히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단순히 녀석 개인의 행동이라면 차라리 혼자 움직이는 쪽이 내게는 더 쉽고 간편하겠지.
그러나 진시우는 아직 이면순례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으니, 그걸 지금의 내가 먼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녀석이 그곳에 속해있다는걸 알고 있는 건 오직 이면순례자에 속한 이들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우선 간단히 질문해보았다.
“그것보다··· 그걸 나한테 제안한 이유는?”
“이제까지 네가 보여준 활약. 그리고 결정적으로 승천제 때의 모습. 그걸 고려해보니 내가 찾을 수 있는 사람 중에선 네가 가장 내가 필요로 하는 전력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은데.”
“내 능력에 휘말리지 않고 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활동하는 곳이 없어서 행적이 드러나지 않을만한 전위. 아무리 생각해도 너 말곤 떠오르지 않더군.”
“······.”
승천제에서 잠깐 합을 맞췄던 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 확실히 저런 조건이라면 최소한 등천자급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수준의 공략자라면 대부분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터. 생도의 신분이라 등천의 구도자에 이름만 올라가 있는 나라면 적절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행적이 드러나지 않을만한 이라- 나는 다시 질문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았다.
조금 의아한 부분이 또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한테 마인 사냥을 제안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거다. 지금.”
“그쪽에 관심이 있어 보여서로 해두지.”
“그렇다면 이번엔 관심이 있다고 판단한 근거가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묻고 싶은데.”
“······.”
내 말에 진시우는 무언가 고민되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판단을 내린 걸까.
지난번 블랙리스트 건도 그러하고 녀석이 나를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요소는 나로서도 궁금한 부분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걸 내게 이야기해 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 모양. 차라리 이면순례자의 스카우트 건을 언급했다면 나쁘진 않았을 텐데 이래서야 아무래도 흔쾌히 제안을 승낙하기엔 미묘한 구석이 많았다.
애초에 말했듯이 그림자 교단의 추적은 처음부터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개인의 제안이라면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인 사냥을 하려는 이유와 목적은 이야기가 가능한가? 그것마저도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야 제안을 거절하지. 나도 불필요한 곳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진 않아.”
“······.”
“정확한 이유도, 목표도 밝힐 수 없다면 그걸 내가 받아들일 이유 또한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이런 대답을 돌려줬음에도 진시우는 내게 저 자신이 이면순례자라는 부분을 밝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집행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그리 쉽게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제안의 배경을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을 뿐.
아무래도 이건 이면순례자 차원에서의 행사가 아닌, 진시우 개인의 제안이었나 보다.
그렇다면 역시 이대로 그의 제안을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인 사냥에 들어가게 된다면 회랑에서처럼 온화하게 굴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고, 굳이 같이 다니면서 행동을 조심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
“······.”
이면순례자라면 상관없었으나, 일개 생도라 가정해야 한다면 행동에 제한이 생긴다.
하물며 원작의 이하린 또한 진시우에 대해선 거의 방치하듯 풀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별 탈 없이 후반부까지 잘 살아서 돌아다녔으니, 진시우만큼은 다른 아이들처럼 굳이 걱정해줄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비록 트라우마도 있고, 멘탈은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자폭기에 가까울지언정 녀석의 일념혼과 특성의 조합만큼은 그 누가 대상이 될지언정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하지만.
“······목표면 모를까 이유는 밝힐 수 없다.”
“그렇다면 나도 거······.”
“그러니 제안이 아닌 의뢰로 변경하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진시우도 마침내 고민을 끝마친 듯 입을 열어왔다. 그것도 예상과는 다소 다른 대답으로 말이다.
“의뢰 내용은 교전 시 전위를 맡아줄 것. 목표는 침식지역의 심층부. 심연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림자 교단의 멸화급 주교를 토벌하는 게 내 목표니까.”
“······.”
“대가는 에테리얼 크리스탈로 지급하지.”
이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 나는 빠르게 저 말속에 담긴 배경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네게 부탁하고 싶은 건 근접전뿐이야. 어지간한 상황이라면 내가 해결하겠지만 행적을 쫒는와중에 접경지 같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간 다른 사람들이 휘말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럴 경우에만 부탁하지.”
“······.”
“침식영역에 들어가고 나선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버리고 가도 상관없다. 아니, 그럴 경우에는 오히려 먼저 그래 줬으면 좋겠군.”
멸화급 주교를 노리는 이유는 불명.
내가 아는 정보 내에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의 제안이나 지금의 대답이나 역시 능력의 사용에는 아직 트라우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듯했고, 필요한 경우 일념혼의 전력개방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림자 교단을 추적하기 위해 접경지와 침식 영역 자체를 계속 왔다 갔다 할 생각인 듯한데,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 내가 생각해두었던 계획과도 겹치는 부분이었다.
“크리스탈의 등급은 여명급. 이전에 후원받았던 걸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거라 문제없는 물건이고, 지급 또한 바로 가능하다.”
“······왜 본인이 섭취하지 않고?”
“마력이 부족하진 않은 몸이니까. 지금 있는 마력을 온전히 제어해내는 것도 버거워.”
그렇다 보니 다시 고민이 되는 기분.
물론 단순히 에테리얼 크리스탈에 마음이 바뀐 건 아니었다. 내력이야 많을수록 좋다고는 하지만 지금 당장 시급한 부분도 아니었고, 우선은 깨달음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목표랑 내용이 흥미로웠을 뿐.
침식영역의 심층부에 갈 수도 있다는 점에 어느 정도 흥미가 끌렸고, 멸화급 주교라는 대상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저 두 개 모두 나 또한 목표로 하고 있었던 사항이었다.
하물며 저렇게까지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뒀다면 단순히 접경지 인근을 돌아다니는 거로 그치진 않을 테고, 그렇다면 행동의 제한도 생각보단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터.
정말로 멸화급 주교의 행적을 뒤쫒을 생각이라면 진시우 또한 끝까지 이면순례자로서의 행적을 숨길 수 없을 게 분명했고, 오히려 녀석의 성향을 생각하자면 아예 처음부터 얌전하게 행동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
“······.”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일까.
처음부터 혼자서 추적을 해야 한다면 조금 더 발품을 팔아 뛰어다녀야 할 테지만, 그만큼 행동의 범위에는 조금 더 자유가 생긴다.
진시우와 동행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 정보와 전투에서 백업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평소 사냥을 다닐 때처럼 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의뢰를 받아들일 건가?”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에 고민해보았고-
“나는······.”
-이내 진시우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