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망소귀 (2)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업이 끝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의아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나는 조금 전 천중무련으로부터 온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귀하를 천중무련 본단으로 초대합니다.]
조금 전 워치에 떠올랐던 문자- 천중무련에서 보냈다는 메시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것이었고,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내용에 순간 나는 이게 정말 무련에서 온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확인해봤더니 정말 천중무련 본단의 번호가 맞았기에 더욱더 의아해졌을 뿐.
차라리 등천의 구도자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겠지만 나는 천중무련과는 정말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그곳에서 나를 초대할만한 일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면 이전에 남궁설아가 미묘한 말을 했었다는 정도.
-그건 그렇고······ 혹시 연맹이나 무련 측으로부터 따로 연락 같은 걸 받으셨나요?
분명히 중간고사 때 뜬금없이 그런 말을 건네왔던 그녀는 내가 의아해하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나중에 다시 말해준다며 흐지부지 넘어갔었다. 그리고는 이후 한 달이 넘게 지나갈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고 말이다.
그걸 떠올린 나는 우선 무련 측과 남궁설아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은 상태였고, 아직까진 아무 곳에서도 답장이 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 물론 평소였다면 나도 그냥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어차피 오늘의 수업은 필수교과였던 만큼 마침 남궁설아도 바로 옆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있을 터였기에 나는 그냥 직접 그녀에게 찾아가 물어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편이 더 빠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무언가가 내 소매 끄트머리를 살며시 붙잡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어디··· 가헤요?”
내 소매를 붙잡은 사람은 당연히 내 옆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이하린이었고, 수업이 끝나는 소리와 함께 깨어난 그녀가 한쪽 볼에 살짝 눌린 자국이 새겨진 줄도 모르고 다소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두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은 잠에서 조금 덜 깨어난 모양.
어차피 바로 옆이었기에 그녀가 자고 있을 동안 빠르게 물어보고 올 생각이었는데 잠결에도 수업이 끝나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잠시 옆 강의실에 갔다올 생각입니다.”
“······옆헤요?”
“예. 설아 씨에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설아 씨···?- 내 말을 들은 이하린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스르륵 내 소매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섬주섬 위장용 노트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기도 같이 가겠다는 느낌.
“자는데 그대로 두고 가려 하시구···.”
“금방 다녀올 생각이라 그랬습니다.”
이하린에겐 방금의 상황이 자고 있던 자신을 그대로 버려두고 혼자 사라지려던 것처럼 느껴졌던 걸까? 딱히 그러려던 건 아니었기에 나는 잠시 그녀의 정리를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자니 이하린도 서서히 잠에서 깨기 시작한 모양인지, 고개 숙인 귓가가 조금씩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마찬가지로 평소처럼 모른 척 해주었다.
안 그래도 이하린 또한 승천제 이후로는 상태가 조금 미묘해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
“······.”
아리엘과는 반대로 이하린은 딱히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때 이후로 멘탈이 조금 불안해졌다는 게 이따금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비추는 대상은 오직 아리엘과 나. 두 사람한테만이었으니, 아무래도 우리가 제 앞에서 균열에 휘말려 사라졌던 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아리엘과 나는 그리 추측해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하린의 상태와 아리엘의 변화가 맞물리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의 관계도 이전하고는 아주, 조금 달라지게 됐는데······.
“모야. 둘 다 끝나자마자 어디 가게?”
그날 이후로는 이제 아리엘도 수련이나 스터디를 할 때만이 아니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우리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고, 이하린과 찰싹 붙어 다니는 시간도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아리엘에게도 원래 어울리던 친구들이 있었던 만큼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하린의 시간표가 나와 다르게 갈릴 때면 이하린이 그 무리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간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을 정도.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리엘이 혼자 돌아다니는 이하린을 발견할 때마다 낚아채 간다는 느낌이었지만, 승천제를 준비하면서 이하린도 그쪽 아이들과 어느 정도 친해진 모양인지 크게 불편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름대로 다행이라면 다행인 부분.
이전보다 묘하게 더 활발해진 아리엘의 텐션이 당황스러울 때가 없진 않았지만, 괜히 이하린의 멘탈이 흔들려서 또 3월처럼 이상한 짓을 하러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업 끝나면 같이 밥 먹자구 했었잖아.”
“······언제? 처음 듣는 이야긴데 그거.”
“너··· 진짜 내가 보낸 거 다 무시했구나?”
어쨌든 그렇게 나는 충격받았다는 듯 과장스레 입을 틀어막는 아리엘의 모습에 고개를 작게 내젓고선 가볍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상한 소리나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냥 잠깐 옆 강의실에 갔다 오려는 거 뿐이야. 하린 씨는 그냥······ 잠결에 따라온다 했고.”
“······자, 잠결에는 아, 아니었는데.”
“잠결? 아. 하린이 볼에 자국 나 있다···!”
“······!”
그 말에 파우치를 들어 올리던 이하린이 황급히 제 손으로 양 뺨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알려주겠다는 듯 아리엘이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건드려주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같이 만지작거리는 걸 봐선 그냥 장난을 치고 싶었던 모양.
그렇게 아리엘은 해맑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이하린의 뺨을 반죽하듯 주물렀고, 그러면서도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건네왔다.
“근데 옆 강의실에는 왜? 누구한테 볼일이 있길래. 사카타? 리베르테? 아님 설아?”
“설아 씨. 천중무련에서 연락이 와서.”
“네? 무련에서 연락이 오셨다구요···?”
“······무련에서? 너한테? 갑자기 왜?”
“그걸 모르겠으니까 물어보려는 거지.”
그렇게 나는 벙찐 표정을 지어 보이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대답을 돌려주고선 뒤로 돌아섰다. 마침 조금 전 저쪽도 수업이 끝났는지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응? 왜 다시 멈춰?”
“안 가도 될 것 같으니까.”
그 순간 나는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나를 따라 일어서려던 두 사람이 몸을 멈칫하고는 뭐하냐는 듯 물어왔지만, 나는 가볍게 문을 가리켜주었을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저··· 찾으셨나요?”
그곳에는 이미 남궁설아가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결과적으로 우리는 결국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간단히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듯하자 아리엘이 그대로 남궁설아까지 식당으로 끌고 와버린 탓.
그렇게 그녀까지 더해 우리 넷은 지금 승천관에 있는 식당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저건 또 뭔 조합이래. 멤버가 더 늘었어.
-응? 아, 조합은 그냥 타천자 토벌 파틴데?
-근데 남궁설아는 왜··· 아 위타극. 어쩐지 설아 쟤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했네.
-눈앞에서 원수 썰어줬으면 웃을 만 하지.
물론 평소에 공용식당은 전혀 이용하지 않는 편인 데다가 같이 온 인원도 인원이다 보니 이래저래 시선이 쏠렸지만, 다들 이 정돈 익숙한 이들이었기에 우리는 가볍게 끼니를 때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천하 씨한테 기보를 수여키로 했다구요?”
“예. 갑급의 기보가 주어질 예정입니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은공께 직접 연락이 온 거라면 무련 차원에서도 논의가 끝났다는 걸 테고, 아마 등천의 구도자하고도 어느 정도 연락이 오간 상태일 겁니다.”
“······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군요.”
“사실 얘기는 한참 전에 나왔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제야 말씀드리게 되었네요.”
내가 중간고사때의 일을 언급하자 그녀가 돌려준 대답은 조금 뜻밖의 내용을 품고 있었으니, 그에 옆에서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고 있던 아리엘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기보면 아티팩트 같은 걸 말하는 거지?”
“응. 천하 씨에게 수여될 물건이라면 일반적인 것보단 그쪽에 더 가까운 부류일 거야.”
“근데 등천도 아니고 무련에서 대체 왜?”
“저도 무련에서 제게 그걸 왜 준다는 건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로 의아한 부분이었기에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더니, 그녀는 홀가분해보이는 표정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제가 무련에 그걸 요청했었으니까요.”
그것도 상당히 뜻밖의 대답을 말이다.
“······설아 씨가 말입니까?”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해보았고, 역시 짐작이 가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위타극 토벌에 대한 보답으로 말인가요?”
“맞습니다. 또한 거기엔 놈을 토벌해주신 점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있겠지만, 위타극 토벌 자체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아리엘은 더 아리송한 표정을, 이하린은 무언가 짐작이 가는 듯 두 눈을 크게 깜빡거렸지만, 남궁설아는 그저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이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역시 제가 너무 늦게 말씀드린 것 같네요. 뒤늦게 죄송합니다. 확실해지고 말씀드린다는 게 시간이 너무 지나가 버린 듯 합니다.”
“예. 조금 갑작스럽긴 하군요. 그런데 전자는 이해가 가지만 후자는 무슨 의미입니까?”
“아. 그 부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드리자면··· 은공께는 조금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으시겠지만, 우선 위타극은 천중무련이 설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던 마인이었습니다.”
그 말에 내 머릿속에는 잠시 이전에 아리엘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1차 세계침식 당시. 위타극과 마인들이 일으킨 학살을 기점으로 기존의 무림과는 다른 체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조금 더 긴밀하게 서로의 기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천중무련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공유에는 무학의 교류도, 인력의 지원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기보나 영약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서요.”
지금 같은 상황이라기엔 미묘하단 느낌.
“그럼 더욱더 천중무련에 속하지 않은 외인에게 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요청을 하셨다 하더라도 명분이 없을 텐데요.”
“말씀드렸듯 위타극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중무련에게도 그 자는 중요한 마인이었고, 지금까지 녀석이 벌였던 악행이 있었기에 그 토벌만으로도 명분은 충분하셨으니까요.”
거기까지 듣고선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천중무련에 그러한 제도가 있다는 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있었던 신교나 무림맹 내에서도 비슷한 체계는 존재했고, 집단의 공적이 된 이를 토벌해줬다 생각하면 어느 정도 명분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분이 마련되었다 한들- 그래도 저리 말할 정도라면 별거 아닌 물건을 주려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고 나 같은 외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귀물을 줄 리도 없었을 테니 그 부분이 그저 의아했을 뿐.
명분은 중요하지만 한 집단의 소유물을 단순히 그것만으로 수여할 순 없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 부분을 짚어보았다.
“우선 갑급은··· 어떤 수준의 기물입니까?”
“특별한 업이 깃든 보구나, 주술로 벼려진 무구 등. 단순한 금전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물건일 경우에만 갑급으로 분류됩니다.”
“와. 진짜 아티팩트 급이네 그 정도면.”
“명분만으로 받아내기엔 조금 과하군요.”
그런 걸 그렇게 간단히 수여해준 다라- 남궁설아가 말한 대로라면 사실상 그건 신병이기에 가깝지 않은가? 물론 마법과 이능이 존재하는 세계인 만큼 기준이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미묘했다. 이하린이 내게 선물해줬던 검도 분류해보자면 그런 분류에 속하는 귀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그런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던 건지 남궁설아가 나를 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훈장 정도라면 아무 대가 없이 수여했겠지만, 기보를 얻어내려면 대가가 필요했으니까요.”
“대가라 하신다면······.”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가는 저희가 이미 지불했으니까요.”
바로 남궁세가에서요- 그 말과 함께 남궁설아는 그 차가워 보이는 얼굴 위로도 미미하게나마 뿌듯한 기색을 내비쳤고, 그러면서도 약간은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허나 그녀가 뿌듯해 한다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남궁세가에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 대가가 조금 신경이 쓰였을 뿐.
“······.”
지금의 남궁세가에게 과연 그럴 여력이 남아 있던가? 딱히 그녀를 위해서 위타극을 베어낸 것도 아니었던 만큼 대가라는 말을 들으니 괜히 그 부분이 거슬렸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예상한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녀가 마침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대가라고는 해도 딱히 금전적인 종류는 아니었으니 부담은 갖지 말아 주세요.”
“금전적인 종류가 아니라면 어떤······?”
“천중무련이 설립되고부터 저희 세가에서 쌓아왔던 공적치를 소모했을 뿐입니다.”
캉- 나는 그 말에 그러려니 싶었지만 옆에 있던 이하린이 수저를 떨어트린 걸 봐선 저것도 말처럼 가벼운 대가는 아니었던 모양.
하지만 남궁설아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공적치라고 해봐야 원래부터 위타극을 처단하는 이에게 주어져야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제··· 아버님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남궁세가는 이미 한세기전부터 위타극의 죽음만을 바래왔으니까요.”
“······.”
“그저 그것이 영락한 세가의 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저희는 위타극에 목에 공적을 걸어놓았고, 천하 씨가 해내셨습니다.”
“······.”
“그러니 이건 당연한 대가일 뿐입니다.”
그 말과 함께 건네진 남궁설아의 눈빛은 분명 후련한 심경을 담고 있었으면서도 동시에 흔들림 없는 올곧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결국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감이 잘 오진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니 괜히 신경 써주는 게 더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
물론- 그러자 그런 내 태도에 남궁설아는 다시 한번 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청량해 보이는 미소를 말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정말 이렇게 갑자기 말씀드리기보단 미리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괜히 확답을 드렸다가 승인이 안 나기라도 하면 더 죄송해질 것 같아서 따로 말씀을 드리진 못했습니다.”
“중간고사 때 언급하셨던 건 그럼.”
“······그때는 회의에서 요청이 가결되었다는 소식만 듣고선 저도 모르게 들떠서 그만.”
남궁설아는 저답지 않게 조금 멋쩍은 표정과 함께 내게서 살짝 고개를 돌려보았다.
“명분도, 대가도 문제가 없었으니 바로 승인까지 난 줄 알았는데, 그때 연락이 안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선 조금 아차 싶었습니다.”
“······.”
“나중에 알고 보니 요청한 물건이 물건이었다 보니 지급해드리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부분이 꽤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이제 연락이 왔다면 모두 잘 해결된 모양입니다.”
“······.”
“이제야 제대로 보은을 하게 되었네요.”
민망해하면서도 다소 후련해 보이는 얼굴.
평소의 남궁설아에게선 볼 수 없는 표정이었기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옆에서 그녀가 제 아버지를 언급했을 때 움찔했던 두 사람도 어느새 다시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수저를 떨어트렸던 이하린은 잠시 양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아까부터 궁금했다는 듯 천천히 말을 꺼내왔다.
축제를 준비하면서 남궁설아와 이하린의 사이의 어색함도 조금은 줄어든 모양이었다.
“저··· 근데에··· 궁금한 게 있는데요오···.”
“예.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봐 주세요.”
“그래서 설아 씨가 요청하셨다는 기보가 무엇인가요···? 혹시··· 서, 설마 검인 건······.”
그 말과 함께 이하린은 살며시 내 허리춤. 그곳에 있는 검을 바라보았고, 약간 불안해 보이는 눈빛으로 살며시 눈을 데굴거렸다.
정말 한결같이 잔걱정이 많은 사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남궁설아가 요청한게 아무리 좋은 검이라 한들 이하린이 선물해준 검보다는 좋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기에, 나 또한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내게는 그런 이하린의 모습이 그저 유쾌하게만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런 감상은 나만 느낀 부분이 아니었는지 남궁설아와 아리엘도 그런 이하린을 바라보며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남궁설아는 안심해도 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날 은공께서 싸우시는 모습이 제게는 무척 인상 깊게 남았기에, 처음에는 깨져나갔던 검도 고려의 대상이긴 했습니다.”
“······!”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깨져나간 검만큼이나 피로 물들어가던 모습이 더 신경 쓰이더군요. 검이 깨져나갔던 순간에는 새롭게 검을 던져주셨던 분이 있으셨으니까요.”
그리고 역시 생각대로였네요- 남궁설아는 미소와 함께 이하린을 한번, 그리고는 나를 한번, 마지막으로 내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을 바라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이하린은 순간 조금 민망해졌는지 살며시 고개를 숙여 보였고, 이 순간 검은 장막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으리란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남궁설아는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선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여튼, 그래서 저는 보의保衣를 요청했습니다. 은공께는 검 말고도 그 몸을 지킬 수단 또한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연이어서 흘러나온 그녀의 말에는 나도, 아리엘도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보의라면 옷을 말하는 거야?”
“응. 옷이라기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또한 남궁설아가 고려했다는 부분이 뭔지는 나도 이해하겠다만 저 말을 듣자마자 그게 과연 그녀가 말한 것처럼 유용할까 싶은 생각부터 먼저 떠올랐으니 참 미묘한 기분.
아니, 그건 사실상 합당한 의문이었다.
아무리 특별한 처리를 한다 해도 보갑도 아닌 보의라면 소재에서부터 오는 한계가 존재했고, 실질적으로 유망주 정도만 되더라도 검강을 어떻게든 뽑아낸단 걸 생각하자면 내가 고전할 정도의 상대라면 어떤 보의를 갖고 와도 크게 의미가 없을 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어진 남궁설아의 말을 들은 즉시 그러한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음··· 사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그건 보의로 사용되긴 해도, 일종의 특수 예장에 가깝다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국제 분류상으로는 마력 각인체라 부르는 게 맞겠네요.”
“······마력 각인체?”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이제껏 무련의 선인들께서 남기고 간 씨앗. 업륜의 파편을 그러모아 마력을 녹여내서 만들어진 특수 예장. 암야暗夜- 그게 천하 씨에게 수여될 기보의 정식 명칭입니다.”
업륜을 모아 만들어냈다는 기보- 그 말에 담긴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