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50화 (150/205)

중망소귀 (1)

6월의 첫 주가 지나가는 시각- 1학구의 거리에는 지금 푸른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분명 밤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아직도 1학구의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엿보였으니, 그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과 곳곳에서 몸을 밝혀오는 주홍빛 가로등에 의지한 채 거리를 거니는 중이었다.

스터디 실에서 걸어 나오는 생도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나오는 아이, 그리고 야간 잔류를 하고 있는 회랑의 직원들까지도.

물론- 그러한 목적이 아니어도 순수하게 승천제 때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기 위해 구경을 하러 온 생도들 또한 존재했고 말이다.

-와··· 개막식이랑 마무리 영상은 아직도 랭킹에서 안 내려오네. 조회수가 다 몇이래.

-둘 다 장관이긴 했지. 나도 멸화급 떨어트리는 장면은 하루에 한 번씩은 다시 보는 듯.

-아. 맞아 그것도 쩔었음. 나 그때 바로 밑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가 뒤질뻔했잖아.

-개 부럽네 진짜. 난 여기서 뒤졌었는데.

승천제가 끝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지만 위의 사실들이 증명해주듯이 아이들은 아직도 모일 때마다 승천제 때의 일을 되새기며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경험이었던 만큼 각자의 활약이나 실수 같은 걸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워내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이 무엇을 기여했는지, 누군가는 자신이 어쩌다가 퇴장당했는지, 자신이 상대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등등을 말이다.

그리고 그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여기! 딱 여기서 아리엘 님이랑 다른 애들이 괴물 같은 놈 상대로 싸웠었잖아.

-능력 규모부터가 진짜 장난 아니긴 했지.

-유천하 걔는 거길 어떻게 끼어들어 갔대.

-그때는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존나 신기하네 그냥.

갑작스러웠던 사건의 연속, 수호자급의 역류와 타천자의 침입. 심지어 마지막에는 멸화급 마수의 역류까지. 비록 모든 게 허상이었을지언정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은 아이들에게 묘한 공감대를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만큼- 일주일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같은 전장에서 싸웠던 생도들 사이에는 어느새 유대감이 조금씩 생겨나는 중이었고, 그러한 공감대는 등천회랑에 입학하고 난 뒤까지도 계속해서 남아있던 각 출신 기관 사이의 벽마저 서서히 허물어트려 주었을 뿐.

덕분에 원래부터 친밀하게 지냈던 이들은 함께 사선을 겪으면서 이전보다 더 돈독해질 수 있었고, 그러지 못했던 이들도 서로 함께 싸웠던 기억을 토대로 어색했던 관계를 넘어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친구, 새로운 대련 상대, 서로가 몰랐던 색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부터 조금은 친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관계까지도.

-얌. 주말에 같이 영화 보러 갈래···?

-뭐래. 우리가 그럴 시간이 어딨다고.

-하루 정돈 뭐 어때. 그리고······ 너 그때는 도와줘서 고맙다며. 부탁 하나 들어준다며.

-아니, 뭔 영화 하나 보는 거로 그걸 또.

그렇게 여러 긴장 속에 봄을 넘겨 보냈던 아이들의 마음은 뒤늦게 찾아온 계기 속에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으니, 몇몇 이들의 마음에는 조금씩 미열이 깃들기 시작했다.

축제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축제에서 같이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그렇게 말이다.

물론 생도로서의 마음가짐과 공략자로서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제대로 된 관계로 이어지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테러다 뭐다, 시험이다 뭐다 하며 굳어있던 생도들의 마음도 여름의 시작과 함께 어느덧 탄력적으로 변화해나가는 중이었다.

회랑 내부에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조금은 뜨뜻미지근한 묘한 기류를 서로서로 조금씩 만들어나가면서.

그리고.

[······.]

그렇게 이 순간- 한 남자가 온기가 교차하는 거리의 한가운데를 걸어 나가고 있었다.

다소 흐릿해진 몸으로 냉막한 표정을 얼굴에 새겨놓은 채, 사람들을 지나쳐가며 무언가의 흔적을 찾고 있는 한 남자가 말이다.

하지만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분명 수상해보였을지언정, 아무도 그런 남자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존재 자체를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역시. 뒤틀림은 여기에 있었어.]

그렇게 다른 이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차원- 그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존재했다면 그 목소리만으로도 남자의 정체를 알아냈을 만큼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건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들어맞지 않아. 원인이 존재해야 돼.]

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을 생각하며. 다시 승천제의 방향을 바꿨던 이유를 되새기며. 그렇게 머나먼 너머에서 오로지 정신만을 등천회랑에 보낸 채 무언가를 살펴보던 의문의 남자- 세간에선 아크샤라 불리는 이는 비틀림을 살펴보며 그리 되뇌어보았다.

푸른 달빛이 내려앉은 거리를 묵묵히 걸어 나가면서, 승천자는 계속해서 원래의 흐름에서 벗어난 요소들을 하나씩 교차해나갔다.

지난주에 벌어졌던 승천제의 풍경을 잠시 끄집어내 보면서, 그리고 그 위에 시간의 흔적이 돌출되고 있는 과거의 잔재를 덧씌워보면서. 아크샤는 잠시 아이들의 활약을 바라보았고, 진시우의 움직임을 관측해보았고, 아리엘의 변화를 감지해냈으며, 솜사탕을 들고 스쳐 지나가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비록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소녀처럼 불필요한 흔적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아크샤는 중요한 뒤틀림을 간측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깨달았다.

[유천하. 역시··· 그 아이가 특이점이야.]

이 불완전한 시간의 교차 속에서 지금의 자신이 관측해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비틀림이 바로 유천하라는 사실을. 3월부터 이어져 온 미미한 변화의 모든 것이 사실은 모두 그 아이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아크샤는 승천제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마지막으로 검증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비록 유천하가 인과의 특이점이라는 사실 만큼은 이제 비로소 확신할 수 있게 되었을지언정 과연 그가 자신이 찾고 있는 특이점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고, 심지어 저의 직감은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선 결국 그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허나 아크샤는 그 부분이 고민되었다.

[······대체 무엇이 정답인 걸까.]

만약 그렇게 대화를 나눠본 결과 유천하의 특이점이 자신이 찾고 있는 게 맞았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협조와 회유, 아니면 강압···?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선택의 갈래에 아크샤는 차가운 표정 위로 잠시 웃음을 머금어 보았다. 저답지 않은 생각을 떠올린 점에 대해, 그리고 그 사안의 중요성에 대해.

하지만 그럼에도 아크샤는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이 바라는 목표- 이 세계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결국 최초의 특이점을 찾아내야 했고, 최초의 승천 때 만상세계가 저에게 알려줬던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으니 아크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이 세계가 이전에 맞이했던 실패의 편린을 관측해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뿐이었기에.

만상세계에 맞닿아 비틀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뿐이었기에.

그리고.

이 세계에 예정된 잿빛의 미래를 관측해낼 수 있는 것 또한 오직 그 자신뿐이었기에.

[······부디 세계에 가호가 자리하기를.]

아크샤는 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판단을 내렸고, 모든 게 불확실한 미래일지언정 그사이에 존재할 단 하나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작게 기도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콰직-! 등천회랑의 따스한 거리를 거닐던 그의 정신체가 흩어짐과 동시에 그의 정신도 원래의 육체로 되돌아왔고, 그렇게 아크샤는 천천히 백색의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았다.

[----------------------------------------------!!!]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달빛도, 색채도, 생명도 모든 게 사라져버린 심연의 하늘을.

“······.”

그렇게 100년의 세월 동안 오로지 하나의 해답을 찾기 위해 시간의 너머를 바라보았던 남자는 피로가 섞인 목소리를 되뇌며 인적없는 그림자의 대지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마수의 울음소리를 흘려들으며, 이미 오래전 폐허가 된 도시의 흔적을 바라보며, 다시 그곳에 겹쳐지는 지나간 세계선의 화목했던 편린을 바라보면서.

“······이제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어.”

승천자는 그렇게 심연을 향해 나아갔다.

***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교수의 목소리.

“최초의 침식이 발생했던 1931년 5월 31일. 그 이후로 세계 곳곳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침식이 발생한 원인을 파악해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이제껏 그 누구도 정답······.”

창문을 틈타고 기어들어 오는 아이보리빛 색채와 중저음의 잔잔한 목소리는 이제 막 점심을 먹고 온 아이들에겐 다소 힘든 조건이었는지 하나둘씩 점차 고개를 꾸벅거린다.

귓가로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고, 시야로는 천천히 책상을 향해 고개 숙이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들어오고 있었으니 참으로 평온해 보이는 풍경.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러한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소 복잡한 상념을 정리해보는 중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승천제에서부터 시작된 고민과 상념은 축제가 끝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으니, 덕분에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 그 부분을 비롯해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해답 없는 고민을 되새겨볼 수밖에 없었다.

크게는 만상세계와 다음 경지에 대해서.

작게는 이하린과 진시우, 그리고 주연 인물들이 얽히게 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또한.

승천제의 마지막 날- 나르화리얀과 만상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까지도.

-갑자기 만상세계가 주시한다 했다고?

그날 모두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던 한 목소리- 멸화급과의 전투가 모두 끝나고 난 후, 분명히 그 모든 건 허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되돌아온 생도들의 귓가에는 일제히 만상세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건 물론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는 아리엘처럼 무언가를 얻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짐작 가는 이유가 많았던 만큼 그 사실 자체엔 딱히 불만이 없었다. 아무리 다다익선이라지만 지금의 내게는 불필요한 힘의 축적보단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비가 필요했고, 필요를 떠나서라도 객관적으로도 조금 미묘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네··· 만상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세계가 먼저 너를 들여다봤다면 내가 아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어.

한가지 신경 쓰이는 점은 분명 존재했다.

-세계가 너한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거.

그때 내 귓가에 들려왔던 만상세계의 목소리. 다른 아이들에겐 업이 축적되었음을 알리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지만, 만상세계는 내게 만큼은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갑자기 들려왔던 목소리와 생도들에게 일어났던 현상이 의아해 나르화리얀에게 그 내용에 대해 한번 물어보았고,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내게 이리 답했었다.

-뭐··· 물론 정확하진 않지만 주시의 목소리는 보통 하이랭커급, 그중에서도 승천자의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에게만 들려왔었거든.

-나 같은 경우는 존재가 만들어지고 자아가 형성된 순간 곧바로 들려왔고, 단 2번이었어. 그래. 만상세계가 나를 인지하고, 내가 승천의 업에 도달해 승천자가 되었을 때.

-물론 목소리를 듣는다고 모두가 승천자가 되는 건 아니긴 해. 하지만 주시받은 이가 모두 승천의 업에 도달하진 못했을지언정, 승천자가 되었던 이는 모두 주시를 받았었지.

-네가 정말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아니 이런 걸 거짓말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세계는 너의 가능성을 인정했단 거야.

-정말···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나르화리얀은 짙은 미소를 그 입가에 머금고선 그 말과 함께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오히려 그 이야기는 내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한번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이전에, 조금 의외의 장소에서 말이다.

-만상세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내가 그 목소리를 들었던 적은 총 2번.

그것도 처음의 순간은 이 세계가 아닌 무림에서, 그곳에서 마지막을 각오하고 있던 내게 그 목소리는 분명 갑작스럽게 들려왔었다. 만상세계에 대한 개념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내게, 환생으로 인해 변화를 맞이했던 내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초대를 받아들여 이 세계에 오게 된 뒤로는 정작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까지 특성이나 업륜, 가호 등을 얻었을 때는 그저 내가 했던 행동과 인과에 관한 결과만이 안내되듯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만상세계의 목소리는 그저 하나의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듯이.

하나- 이번만큼은 다시 그게 아니었다.

승천제에서의 사태가 모두 끝나고 난 뒤, 쏟아지는 환호 속에 내가 마음속으로 복잡한 상념과 함께 심경의 변화를 체감했던 순간.

바로 그 순간- 만상세계는 반응했다.

-만상세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마치 내 심경의 변화가 하나의 인과로 작용했다는 것처럼. 절묘한 순간에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고민해보았다.

왜 그 목소리는 싸움이 끝난 직후에는 울려 퍼지지 않았을까. 원래라면 그랬어야 했을 텐데 왜 하필 그 순간에 들려왔을까. 왜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모든 생도들의 행동을 하나의 업으로 인정해주었던 걸까.

그리고 다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만상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계는 왜 나를 초대했는가에 대해서.

“······.”

하지만 그것만큼은 원작을 읽었던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건 이 세계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으니. 덕분에 나는 항상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일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건 단순히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닐 테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만상세계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도 단 한 명뿐.

그렇기에 나는 잠시 내 옆에 앉아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그녀-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잘 자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웬일로 노트북을 들고 왔나 싶었더니 아예 수업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 이하린은 지금 제 얼굴에 비하자면 커다란 노트북을 펼쳐놓고선 그 뒤에서 색색거리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참으로 태평한 모습.

학교 수업에 대해선 항상 한결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교차하는 무거운 고민과 대비되어 왠지 모르게 순간 이 모든 게 우습게만 느껴졌다.

저것도 원작을 집필한 자로서의 자신감일까 아니면 그냥 본인의 성정이 이런 것일까?

이하린은 어쩌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고민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나 같은 경우는 그녀 또한 상정하지 않았던 알 수 없는 변수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해보기엔 걸어야 할 판돈이 생각보단 많았고, 그걸 감수하기엔 아직까진 그 물음이 그리 중요하지가 않았다.

‘······의아한 구석이 있긴 해도 내게 중요한 건 결국 왜가 아니라 어떻게일 뿐이니까.’

만상세계가 내게 무엇을 기대하든, 내가 어떠한 일에 엮이게 된 것이든 중요한 건 내겐 이 모든 게 새로운 기회였고 그 길의 끝에선 무림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시점에선 아직까진 이러한 의문점은 그렇게 비중이 높은 부분이 아니었다.

물론 허리춤에 걸린 검이 증명해주듯이, 평소에 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증명해주듯이 지금의 이하린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부 이해하고 협조를 해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지금의 나 또한 조금은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이하린은 분명 내가 만나본 이들 중에서도 가장 무해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조금 별개의 이야기.

“······.”

“······.”

그러한 이야기가 이하린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지,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어떠한 미래로 이어지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하린의 성정과 마음가짐을 제외하고서라도 저 자신이 걱정하고 믿어왔던 모든 진실이 또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긴 힘든 내용일 테니 말이다.

과연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하린은 어떤 반응을 보여주게 될까. 그녀답게 두 눈부터 글썽거릴까? 혹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해 절망스러워할까? 어떻게든 이겨낸 다음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밝은 모습을 보여줄까?

그건 분명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한- 과연 정말 무엇이 진실인지는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게는 전생도 무림도 이곳도 모두 실존하는 현실이었으니 내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건 오직 내 검이 나아가야 할 길밖에 없었다.

“······.”

그러므로 나는 몸을 뒤척거린 채 고개를 돌려오는 이하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태 그래왔듯이 천천히 생각을 가라앉혀보았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경지를 올리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고, 신교에서의 생활로 알 수 있었듯이 결국 어떠한 상황이든 길을 만들어내는 건 나 자신이 쌓아온 무력이었다.

내 검이 겨눠져야 할 곳이 무림에 있는 검혈마제의 목이 되었든, 아니면 세계침식과 함께 찾아올 심연의 형상이 되었든, 혹은 그 무엇이 되었든 결국 역량이 부족하다면 그 모든 게 전부 부질없는 고민에 불과했을 뿐.

그러니 언젠가는 이하린에게 모든 걸 물어볼 시간이 올지언정 적어도 지금은 아직 아니었고, 나는 불필요한 판단으로 지금 이 순간의 균형을 망가트리고 싶지도 않았다.

원작을 걱정하면서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어리숙한 모습도 비춰주는, 이하린은 분명히 나와는 달리 지금처럼 평범한 모습이 더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물러진건지 성장한거지.’

분명 번민과 고뇌는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행위였지만 마음에 여유가 깃들었더니 어째 더 모르겠다는 기분.

후우웅- 그런 생각 속에 나는 더워하는 이하린의 얼굴 위로 가볍게 바람을 흘려보내 주었고, 복잡했던 생각을 한구석에 밀어 넣은 채 다시 수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생각해봤자 부질없었고, 이하린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간 괜히 내 신경까지 같이 둥그스름해지는 기분만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하린이가 그렇게 귀여워? (=゚▽゚)/]

우웅- 난데없이 날아온 마력의 형상에 나는 다시금 집중을 풀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지만 그 내용이 거슬렸기에 나는 저 앞에서 앉아있을 아리엘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또 다시 날아오는 마력.

[너무 그러면 나도 질투 나는데 (*ノ▽ノ)]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이쪽을 향해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리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이유를 알긴 알았다.

루타텔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왔길래 그리 펑펑 울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리엘의 태도는 그날 이후로 분명히 달라졌다.

물론 아리엘은 원래부터 우리에겐 항상 장난기가 가득한 아이였기에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승천제에서의 일이 일이었다 보니 무언가 마음가짐이 조금 더 여유롭게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어떤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전보다는 조금 더 애가 느슨해졌다고 해야 할까?

일단 나나 이하린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이전보다도 더 스스럼없어졌고, 언제부터 이곳을 힐끗거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 중에 딴짓을 하고 있다는 부분만 봐도 아리엘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면 근래 승천제를 준비한다며 진지해졌던 모습만 보다가 다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니 더 대비되는 걸지도 몰랐고 말이다.

[이번에는 나 쳐다보는 거야? (ノ∇≦*)]

“······.”

물론 그래서인지 다시 예전처럼 사람을 어이없게 만드는 순간이 잦아지기도 했고, 최근 장난에 휘말린 이하린이 울상짓는 횟수도 더 늘어나 버려서 조금 미묘하기는 했다.

어째 텐션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느낌.

하지만 역시 아리엘에겐 그때처럼 우울해하는 모습보단 지금처럼 밝게 웃는 모습이 더 어울렸기에 나도 이하린도 아무런 불만없이 평소처럼 그녀를 상대해주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평소처럼 대답해줄 수밖에.

[앞에나 봐.]

그렇게 나는 아리엘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그랬듯이 그녀를 무시한 채 강단을 바라보았고, 그런 내 대답에 곧바로 되돌아오는 마력도 가볍게 튕겨내주며 수업에 집중하였다.

“······탑에 다이브를 시도할 시 유형에 따라 가끔 특이한 이면 세계가 펼쳐지기도 하는데 그걸 통해 학자들은 침식에 대해······.”

물론 그러자 아리엘이 너무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지만 어차피 저것도 장난이라는 걸 지난 일주일 동안 충분히 겪어왔기에 나는 가뿐히 그걸 무시한 채 앞을 바라보았다.

축제 이후로 묘하게 하이텐션이 되어버린 그녀와 계속 상대해주다간 이하린처럼 의식의 흐름에 휘말리게 될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수업 내용이 그리 중요해 보이진 않았을지언정 들을 필요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제 6월인 만큼 슬슬 다시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기초상식이 부족한 상태. 방심하면 필기 4점의 시절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물론 정말 그렇게까지 떨어질 거란 생각은 안 들었지만 수업을 듣냐 안 듣냐에 따라 폭은 달라질 터.

그러므로 나는 이젠 업륜까지 사용해서 장난을 걸어오는 아리엘을 무시한 채 강단을 바라보았고, 딴생각을 하는 동안 진행된 수업의 내용을 빠르게 파악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웅-

“······.”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모양.

나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진동에 다시 집중이 풀리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워치에 저장된 연락처의 숫자가 증명해주듯이 내게 연락을 보낼만한 이는 한정되어 있었고, 옆에서 이하린이 자고 있고, 앞에서 아리엘이 열심히 업륜을 갖고 놀고 있는 이상- 그 범위가 더 좁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등천의 구도자를 예상하며 손목을 들어 올렸지만, 이내 워치에 떠오른 글자에 잠시 눈을 깜박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천중무련 송신.]

그건 내 예상과는 다르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온 연락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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