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략의 의미 (6)
멸화급 마수가 그 거대한 몸을 버리고 하늘로 도망가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런 마수를 쫒아 유천하가 하늘을 달려나갔을 때.
기어코 잿빛의 세계에서 터져 나온 칠흑의 참격이 그림자를 반으로 베어 갈랐을 때.
[-----------------------------------------------!!!]
터져 나오는 막대한 굉음을 들으면서도 바깥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입은 벌어져 있었을지언정 그 누구도 그 입에서 소리를 토해내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들은 멍하니,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끼면서.
“······.”
“······.”
낮에 생도들이 전부 멸화급 탑 속으로 입장하고 난 뒤, 그렇게 첫 번째 협력전의 시합까지도 모두 종료되고 난 뒤- 그제야 회랑 측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생도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번 승천제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려주었다.
어떤 걸 바라면서 발의가 되었는지.
어떠한 목적으로 계획이 세워졌는지.
그리고- 어떤 게 준비되어있는지까지.
-그게 말이 되는 거야? 클리어가 가능해?
-생도들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한다고···?
-멸화급이라니···!! 그걸 어떻게 상대해?
당연히 되돌아온 반응은 가볍지 않았다.
아무리 일반인이라 한들 살다 보면 침식사태에 직간접적으로 얽히는 때가 찾아오고, 그렇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뉴스를 보다 보면 마수의 등급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러니 수호자급이 의미하는바- 다시 그중에서도 멸화급이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정도는 이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생도들에게 그런 걸 내보낸다고?
심지어 앞에서 그런 일까지 터트리고서?
사람들은 그 부분에 의아함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걱정과 우려를 내비쳤지만, 그래도 이내 묵묵히 화면 너머 생도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걱정은 되었지만 등천회랑에서도 여러 생각 끝에 결정된 일이라 하니 공략자도 아닌 자신들이 뭐라 말하겠는가? 바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승천제를 보기 위해 방문해있던 공략자들 만큼은, 송신되는 영상을 통해 저 멀리서 승천제를 지켜보고 있던 공략자들 만큼은 그러한 회랑 측의 안내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다시 그 필요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직에서 공략자가 되어 활동하는 이의 대부분이 생도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공략자가 되었던 만큼 그들은 생도들의 기량을 알고 있었고, 다시 멸화급이라는 재앙이 갖는 위협을 조금 더 똑똑히 이해하고 있었다.
멸화급이라는 괴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왜 승천자가 나서서 그것을 처치하는지.
그리고.
생도들의 실력으로 그런 재앙과 맞닥트린다면 결국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 지마저도.
[예. 말씀하신 사항에 대해서는 저희 측에서도, 그리고 제안을 건네온 등천의 구도자 측에서도, 승인해준 세계연맹 측에서도 분명히 사전에 인지하고 고려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의문에 회랑 측의 인사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들이 그동안 고려했던 부분과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내렸던 까닭을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어떠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떠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점점 짧아져 가는 멸화급 탑의 발생 주기와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세 번째의 세계침식을 위해 인류에게 필요한 게 과연 무엇인지를.
그리고 다시.
[마인들의 테러, 갑작스러운 역류, 그밖에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들도 결코 예고를 건넨 뒤 찾아온 적은 없었습니다. 어떠한 두려움과 위협도 저희를 배려해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희는 이겨냈습니다.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두려움의 벽을 마주한 상황에서도 그 벽을 넘고 앞으로 나아간 고결한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인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희망의 빛을 잃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그 빛을 이어받아 미래를 위해 계속해서 불씨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불가능해 보이는 위험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잿빛의 구렁텅이를 넘어 희망을 움켜쥘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움의 늪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희망의 등불을 밝히는 것.]
[그것이 저희 등천회랑이 설립된 이유이고, 승천제가 만들어진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등천회랑과 승천제가 존재하는 이유이니 아이들의 마음가짐을 믿고 지켜봐달라는 말까지 짧게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결국 공략자들도 이내 말없이 생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등천회랑이 이야기하는 바를 그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들이었기에 우려했던 것이지 공략자가 된다면 어차피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한 벽을 맞닥트리게 될 거란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실력과 마음가짐을 갖추고서도 매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세계 어딘가에서는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했음에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도외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어떻게 그들이 저 말을 듣고서 함부로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이건 불합리했지만 필요한 시련이었다.
적어도 탑의 허상 속에서 만큼은 주저앉더라도 삶이 끝나지 않았고, 언젠가 반드시 절망을 마주해야 한다면 차라리 포기할 기회가 존재하는 지금이 적합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미친···! 여기엔 내가 남을게. 너흰 가봐!]
[일단 사람들부터 지켜야지 이 새끼야!]
[아니, 쪼개지는 게 맞아! 3학구부터 가야 돼! 수호자급이 여기로 오면 뭐 어쩔 건데!]
진짜로 시작된 집단전의 상황이 점점 진행되어 갈수록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걱정과 우려 속에서도 그런 아이들의 분투와 대응을 보며 여러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마인들의 습격에도.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탑의 역류에도.
생도들에겐 저 모든 게 현실이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마인을 물리치고, 마수를 토벌하며, 저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수호자급 마수가 역류했어도 그들은 최대한 합리적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팀을 나눴고, 힘을 합쳤으며. 타천자가 등장했어도 각자의 역량으로 분투를 펼쳐냈다. 그 실력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저들에게 주어진 조건 따위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는 것처럼.
[내가. 내가 못 죽이면 다른 누군가가. 네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달려들 테니까.]
[확답은 못 합니다. 하지만 할게요.]
[죽이진 못해도. 무조건 버텨야 해.]
[몰아쳐! 거리 유지해! 사정거리는 100!]
등천자급, 다시 하이랭커급의 마인이 자아내는 이능은 스크린 너머로 지켜보면서도 그 위험성이 똑똑히 전달될 정도였지만 타천자와 마주한 이들 중 그 누구도 도주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그들은 각자의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런 생도들의 모습에 사람들도 점점 그 상황 속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학생에 불과한 아이들이 저렇게 분투를 펼치는 데에 대견함과 감사함을, 저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계속 맞서 싸운다는 점에 신기함을 느끼면서, 그 상황에 빠져들었다.
테러를 일으키던 마인들이 어느덧 전부 제압되어 갈 때까지, 역류했던 수호자급 마수들이 수백의 생도들에게 순식간에 공략당해 한줄기 파동으로 변할 때까지, 그리고 토벌이 불가능해 보였던 타천자를 난데없이 나타난 유천하가 곧바로 베어낼 때까지, 점점 긴박해져만 가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감은 기어코 멸화급 마수가 역류했을 때 결국 절정에 도달하였다.
[-----------------------------------------------!!!]
스크린마저 순간 떨리게 만든 포효소리.
화면 안에 다 담기지도 않는 거대한 형상.
그것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괴물이었다.
아니, 마수는 모두 괴물이었지만 저것이 특별하다는 사실 정도는 고작 스크린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라도, 다시 마수의 위협을 직접 체감해본 적 없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다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산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거대한 체구도. 날 수 없는 형상을 한 채로도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감정을 갖춘 것 마냥 움직임을 취하는 그 기괴함도. 모두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사람들은 한번 생각해보았다.
자신들이 저곳에 서 있었다면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과연 저걸 사람의 손으로 이겨내는 게 가능은 하다는 말일까. 대체 어떻게 저런 게 존재하는 걸까- 바로 그런 생각들을.
당연히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간단했으니, 그 순간이 되었을 땐 일반인들도 공략자들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숨소리 한번 내지 않은 채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과연 저러한 괴물과 마주하고도 아까와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과연 저걸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신 못 차리다 뒤지면, 너만 뒤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다 죽는다 생각해.]
[그러니까 무조건 붙들고 버텨야 돼.]
[뒤질 때까지 버티고, 뒤져도 버텨야지.]
생도들의 대응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화면 너머의, 편집된 영상 속에서도 아이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그 손이 거세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겁먹고 주저앉는 이는 없었다.
파랗게 질린 이도, 몸을 떨고 있는 이도.
모두 당연하다는 듯 3학구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
결국 실체화를 끝낸 마수가 막대한 마력을 터트리며 생도들을 갖고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마수를 막기 위해 하늘 위로 마력을 쏘아 보내는 생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튀어나온 유천하가 잿빛의 포화를 베어내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아리엘이 다른 이들을 그러모아 공략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조금씩 공략의 불씨를 피워내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일제히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떨어져. 저 밑으로.]
기어코 아리엘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괴물을 지상으로 떨어트렸을 때. 수많은 생도들이 모여 마수의 마력을 부서트렸을 때. 그렇게 마수가 고통 어린 비명을 토해냈을 때.
그 순간 사람들의 입에선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거센 함성과 함께 터져 나왔다.
-바로!! 바로 그거야!! 잘했어! 잘했다!!
-저걸!! 저걸!! 진짜로 떨어트렸어···?!
-맙소사!!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 진짜!!
-멸화급이잖아···?! 멸화급이라고 저거!!
그 광경 속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을 체감하며, 거칠게 뜀박질하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점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공략의 상황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저들만으로 공략해낼 수 있을지.
과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지.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
멸화급 마수가 그 거대한 몸을 버리고 하늘로 도망가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그런 마수를 쫒아 하늘을 달려나간 유천하가 기어코 칠흑의 참격으로 그림자를 베어 가른 순간.
그렇게- 바로 지금 이 순간.
“······.”
“······.”
회랑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세계 어딘가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도, 이러한 결과까진 기대하지도 않았던 계획의 입안자들도, 그 꿈속의 세계에서 직접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르화리얀과 루타텔까지도. 전부 다.
모두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짜릿한 전율 속에 마치 시간이 멈춘것 처럼, 소리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렇게 얼어붙고야 말았다.
결코 불가능하리라 생각했기에, 올바른 절망을 겪어볼 필요가 있었기에, 그러한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피워내는 걸 보고 싶었기에. 그렇기에 계획된 시련이었고, 상황이었다.
하지만.
[-----------------------------------------------!!!]
비록 수많은 이들의 힘이 합쳐지고, 수많은 이의 도움이 뒷받침되었다 한들 일개 생도의 검은 기어코 불가능의 벽을 베어냈다.
그러니 이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카드득······ 콰과과과과과과과과-!!!
그렇기에 눈앞에 존재하던 거대한 탑에서 빛이 터져 나온 순간에도, 화면 속 잿빛의 세계가 점점 금이 가듯 깨져나가던 순간에도.
사람들은 말없이 그 빛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우웅-!!!
이 말도 안되는 순간의 여운을 간직하며.
말도 안되는 일을 해낸 이들을 기다리며.
꿈속의 세계가 깨어지며 현실과 겹쳐지고, 그 어마어마한 마력의 여파가 그대로 새어 나와 깨져나간 잿빛의 마력이 눈송이처럼 흩날릴 때까지도. 사방 곳곳에서 오색찬란한 빛무리에 휩싸인 채 현실로 되돌아온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을 휘청거릴 때 까지도. 그곳에 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화면의 너머에서도, 현실의 눈앞에서도 터져 나온 희망의 빛만이 존재했을 뿐.
그리고 그렇게.
마침내 모든 생도들이 현실로 되돌아오고, 하늘에서 마수를 베어낸 유천하가 그대로 허공에 나타나선, 다시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
바로 그 순간- 함성이 세계를 뒤덮었다.
***
전력을 쏟아내 마수를 베어 가른 뒤- 갈라진 근원석에서 마력이 터져 나온 순간에도, 그와 동시에 세계가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던 상황에도, 다시 그렇게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휘몰아치던 순간에도 유천하는 담담했다.
그는 이미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것을, 탑 속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멸화급 마수를 베어내면 그 즉시 시련이 끝날 거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이잉-!!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하고, 정신간섭마저 끝났는지 그 중 몇몇이 욕설이 담긴 탄성 아닌 비명을 토해내던 순간에도 유천하는 온몸에 힘을 푼 채 조금 전의 일격을 되새겨보았을 따름.
‘······.’
그 참격은 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기운의 한계마저 넘어 벼려냈던, 이런 세계였기에, 그런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격이었다.
당연히 그게 현실이었다면 뒷일을 생각해야 하니 그렇게까지 일검에 전력을 쏟아부을 수 없었지만, 허상 속에서만큼은 방금처럼 육체가 망가지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저질러볼 수 있었다. 용매에서 끌어 올려진 언령의 힘에, 전신의 내력에, 업륜까지 모두 일검에 담아내는 그런 짓을 말이다.
허상 차원이었다는 게 참 다행인 부분.
어쨌든 그렇게 원래라면 느끼지 못했을 감각을 경험해볼 수 있었던 만큼 유천하는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순간을 되새겼다. 분명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보며.
그렇게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버린 사이.
콰지지직-!! 사방을 가득 메웠던 빛이 한순간에 사그라듦과 동시에 유천하는, 다시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던 생도들까지도 모두 무사히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깨져나가 현실과 겹쳐지는 세계의 풍경.
그 사이에서 흩날리는 잿빛의 눈송이를.
그리고 다시.
잔뜩 흥분한 얼굴로, 무척이나 감격한 얼굴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자신들을 향해서 막대한 환호성을 토해내며 열렬히 손을 흔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
-----------------------------------------------!!!
응원과 축하. 감탄과 찬사. 그 모든 게 뒤섞인 사람들의 외침은 무척이나 크게, 많이도 뒤섞여 그 발음마저 뭉개드렸고, 뭐라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잔뜩 흥분한 사람들의 함성에 생도들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벙찐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연이어 터져 나왔던 사건 속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고, 그 싸움 끝에 멸화급 마수의 폭발을 목격한 순간 갑작스럽게 세계의 풍경이 뒤바뀌었다는 느낌이었기에 대부분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탓.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승천제라는 특별했던 상황.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환호.
의아했던 여러 상황들까지.
-뭐, 뭐야···?!
-무, 뭔데 갑자기?
-잠깐만··· 이거 설마?!
-아니 미친!!!
정신간섭이 끝난 상황에서도 그러한 조건이 의미하는 진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등천회랑의 생도들은 멍청이가 아니었고, 그렇게 그들은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지난 밤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어 보면서, 그곳에서 개고생해야만 했던 이유를 순간 빠르게 깨달아가면서.
그리고 그렇게.
“······어쩐지!!”
이미 시험 도중 진실을 깨달아 강제로 인지를 왜곡 당했던 이하린 또한 다시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덕분에 왜 저작권리의 가호가 그렇게 대답을 돌려주었는지, 왜 난데없이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고는 여러 심경이 담긴 외침을 빽 토해냈다.
그리고는 이내- 왜곡 때문에 캐치하지 못했던 부분을 한순간에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의아한 부분이 너무 많다 싶었는데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을 줄이야! 아무리 원작의 흐름이 달라졌다 해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던 그녀는 드디어 알게 된 진실에 억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오늘 얼마나 많이 마음 졸였던가?
지금 이 순간- 진실을 깨달은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균열에 휘말렸던 유천하와 아리엘의 모습이었으니, 그녀는 안도와 억울함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
유천하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게 된 이하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녀는 그 즉시 하늘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축 늘어진 채 떨어지는 그 모습을!
“처, 천하씨···!”
물론 유천하는 그저 전투 중에 느꼈던 미약한 깨달음과 마지막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잠시 멍을 때리고 있던 것뿐이었지만, 그 사실을 이하린이 알리는 없었고, 그녀가 알고 있던 건 유천하가 마지막엔 거의 일대일로 마수를 상대해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서 그가 기절해버리기라도 한 게 아닐까?
이하린은 가만히 추락하는 유천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고, 그렇기에 그를 받아내기 위해 빠르게 그 밑으로 달려가 손을 하늘로 뻗어보았다. 다른 이들은 아직까지도 정신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하린이 지상에서 유천하를 받아내려고 열심히 손을 휘적거리기 시작하고, 이 모든 게 허상이었단 사실에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던 아리엘이 안심하며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을 때. 그리고 유천하 또한 슬슬 생각의 정리를 멈춰야겠다 싶었을 때.
후우웅-!!
“하하! 뭐야 기절한 줄 알았더니 아니네?”
“······제가 기절을 왜 합니까? 갑자기.”
“시체처럼 늘어져 있길래 설마 했거든.”
그 순간 이하린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나르화리얀이 하늘에서 나타나 짙은 미소와 함께 그대로 마력으로 유천하를 붙들었고, 이내 유천하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유천하는 분명히 그런 걱정을 받을 만한 일을 해냈기에 나르화리얀은 그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굉장히 수고했다는 눈빛과 함께 그대로 가볍게 그를 바닥으로 내려주었을 뿐이었다.
탁- 그것도 아주 사뿐하게 말이다.
“······.”
“······”
그에 짧은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어 보이고 있던 이하린은 한순간에 제 옆에 내려앉은 두 사람의 모습에 잠시 두 눈을 깜빡거리곤, 이내 자연스럽게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물론 지금은 이래저래 생각할 게 많았던 만큼, 나르화리얀도 유천하도 그런 이하린의 행동에는 딱히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저 서로 가볍게 대화를 나눴을 뿐.
“재밌는 모습을 기대한다고 했지. 이런 것까지 기대한 건 정말 아니었는데 말이야.”
“······.”
“아주 잘했어! 생각 이상이었다 꼬맹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잠시 정신을 차렸던 유천하는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이번에는 주변에서 쏟아지고 있던 환호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을 바라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의식의 물결에 미묘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보내오는 찬사와 감탄,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아. 그것보다 몸은 괜찮아?”
“아···! 맞아요. 괜찮으세요?!”
멍하니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모습에 나르화리얀이 미소와 함께 갑작스러운 질문을 건네왔고, 이하린의 질문까지 또 이어지자 유천하도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아. 예.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게 유천하는 우선 가볍게 대답을 돌려주며 빠르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확실히 이번에는 탑 안의 속임수가 아니라 실제로 현실로 나오게 된 거라 그런지, 낮에 있었던 일과는 다르게 소모된 내력이나 육체에 쌓인 피로도가 전부 회복되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순례자의 길에서도 그랬는데 대체 자신은 왜 그걸 당연하게 여겼던 걸까? 유천하는 잠시 어이가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는 이내.
“멀쩡하다고? 그래. 그럼 문제없겠네.”
“······아직 뭐가 또 남아있는 겁니까?”
흥겨워 보이는 미소와 함께 건네진 나르화리얀의 말. 그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느낌에 이번에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그런 유천하의 대답에 옆에 있던 이하린마저도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하지만 그에 나르화리얀은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뭐가 남기는.”
그것도 장난스러운, 아니 그저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서, 지금의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이젠 너희도 축제를 즐겨야 할 거 아냐? 이번 축제의 주인공은 분명. 너희들이니까.”
안 그래?- 나르화리얀은 그 말과 함께 주변을 가리켰고,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에 유천하의 시야에도 다시금 의식의 물결이 인지되어 그 흐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유천하는 깨달았다.
지금도 여전히 쏟아져 나오고 있는 환호와 갈채는 계속 생도들을 향해 있기도 했지만, 그중 절반에 가까운 호의와 찬사가 바로 저 자신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개막식 때만 해도 그러한 의식의 흐름에 거북함을 느꼈었던 그였음에도, 이번에는 저를 향해 쏟아지는 것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이 순간만큼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그렇게 유천하는 그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부분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귓가에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만상세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원래라면 지금 들을 일이 없는 목소리를.
쏟아지는 함성소리와 함께 듣게 되었다.
막간 - 색채의 경계
아리엘의 정신은 기묘한 부유감과 함께 서서히 깨어났다. 몽롱한 감각 속에서도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이 뻑뻑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시원했으니, 그렇게 조금 멍한 기분 속에 그녀의 의식도 다시 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늘 밤 폐막식에서는······ 9시에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모두 즐겨주시기······.]
슬그머니 귓가로 들려오는 방송음.
그러나 나른한 기분 속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에게 그건 마치 하나의 자장가처럼 느껴졌고, 뺨을 스치는 살랑거리는 바람도, 그 사이로 들려오는 사그락거리는 소리도, 다시 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마저 모든 게 아리엘에게는 그저 고요한 속닥거림에 불과했다.
어쩐지 일어나기 싫은 기분- 그녀는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에 손을 꼼지락거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그녀의 정신은 승천제를 준비한다고 수면시간을 극도로 줄여왔던 것에 정당한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그에 저항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무리하고, 또 무리를 해왔으니 말이다.
승천제를 준비하느라 수면을 줄인 것도.
오늘 계속해서 정신력을 쥐어 짜낸 것도.
능력 이상의 마력을 제어해낸 것도······.
그리고.
“······!”
그 순간- 아리엘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멸화급 마수, 마수는 어떻게 됐지?- 축제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빠르게 부상한 생각은 그녀의 정신을 채찍질했고, 그녀는 몽롱한, 그러면서도 다급한 기분 속에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제 몸이 무척이나 폭신한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부드러운 이불에 고이 감싸져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창밖에선 따사로운 햇볕이 기어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
그렇게 아리엘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제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다시 그저 고요하기만 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기절하기 전에 깨달았던 사실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했던 테러와 탑의 역류. 그 모든 게 시련을 위한 허상이었다는 것과 그것도 이젠 전부 다 끝났다는 점을 말이다.
“······아.”
다행이다- 아리엘은 그 부분을 다시 깨닫고 나자 한 번 더 몸에서 힘이 쫙 풀려나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는 부분에.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무사했다는 사실에. 그 모든 사실에. 그녀를 옥죄이던 긴장이 모두 녹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제 몸이 무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지금 누워 있던 곳이 병실이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비록 탑에서 나오면서 부상이 얼추 회복되었다 하지만, 격전을 치르면서 쌓아온 피로도나 한계까지 혹사당했던 정신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이내 흐느적거리는 팔을 들어 올린 아리엘은 제 몸에 마력을 흘려 넣어 상태를 관조해보았고,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풀어낼 겸 마력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이제 싸움이 끝났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건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
우웅- 퍼져나간 마력 속에 감지된 내용.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아리엘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제야 그녀는 뒤늦게나마 제 앞에 앉아있던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
바로 그곳에서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저의 아버지- 루타텔 화이트의 모습을.
그곳에선 루타텔이 그녀가 누워있던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조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듯한 책을 무릎 위에 엎어두고는 그녀에게 무뚝뚝한, 아니 그래도 평소보다는 상당히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을 보내오는 중이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대면에 당황한 아리엘이 제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자니, 이내 그 모습에 작게 웃어 보인 루타텔이 입을 열어왔다.
“······몸은··· 좀 어떻니?”
“······아, 괘, 괜찮아요!”
하지만 역시- 이러한 분위기가 어색했던 건 당연히 루타텔 또한 마찬가지였을 따름.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을지언정 정작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제 자식에게 건네는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조심스러웠고, 다시 그곳에서는 어색함마저 물씬 묻어나오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에 아리엘마저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었으니, 그들 부녀 사이로는 어느새 순식간에 미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았을 뿐.
“······.”
“······.”
물론- 아리엘은 그런 분위기가 싫었기에 뭐라 말을 꺼내 보려 해보았지만, 솔직히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선 그녀로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올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아니,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와는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했었으니 지금도 참 오랜만에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게 된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찌 말이 그리 쉽게 나오겠는가?- 그 사실을 떠올린 아리엘은 다소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잠시 대체 어쩌다가 아빠와의 관계가 이 정도까지 돼버린 건가 생각해보았고, 이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보며 조심스레 루타텔의 표정을 살펴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그러면서도 조금은 신기한 기분을 하나 느낄 수 있었다.
“······.”
오랜만에 푹 잔 상태라 그런지, 아니면 시합이 전부 끝나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라면 쓰러지기 전에 유천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서 그런지 아리엘은 이 허탈함과 어색함 사이에서도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고, 다시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기분마저 조금씩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그렇게 묘한 기분을 되새겨보고 있었던 아리엘은 이내 제 마음이 스르륵 풀어지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기분.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뺨은 간지럽혔고, 아리엘은 살며시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천천히 입을 열어보았다.
“근데··· 오랜만에 봤는데 그게 다예요?”
그렇게 아리엘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론 유천하나 이하린이 봤다면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만큼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루타텔에게 말을 건네보았다.
“요즘엔 어떻게 지내냐, 힘든 건 없냐, 그런 말 정도는 더 해주셔도 될 것 같은데··· 아니면······ 우리 예쁜 딸 보고 싶었다 라거나?”
“······.”
“그, 그것도 아니면 오늘은 날씨가 좋은 것 같다든가··· 바람이 시원하다든가 뭐······.”
그리고 물론- 루타텔로서도 그녀가 대화를 하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고, 저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니 점점 붉어져만 가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또한 이내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루타텔은 그 말을 꺼내 보았다.
“······내가 만약.”
“······네?”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뜬금없지만, 저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부분을. 이면 세계에서 아리엘이 했던 말들을 되새겨보면서.
그렇게 아이에게 저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내가 이전에 얌전히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면, 너도 평범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겠지. 아니 그것보다 더 평온한 일상을 보냈을지도 모르겠구나. 너희 엄마와도 조금 더 오래······ 같이 있어 줄 수도 있었겠고.”
“······아.”
“이제껏 공략자가 된 걸 후회해 본 적은 없었지만, 너희 엄마와 너를 생각하면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렸단다. 오래전부터 말이야.”
“······.”
“그래서 아빠는 항상 네가 걱정되었단다.”
그건 분명히 아리엘에겐 무척이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저가 유천하에게 했던 말을 루타텔이 모두 듣고 있었을 거란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에 담긴 마음은 아리엘로서도 진작에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고, 다시 그렇기에 그녀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시나 자신이 무리하는 걸 본 아빠가 이제 와서 저를 말리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걱정을 끼쳐 아빠에게 짐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왜 이 순간 루타텔이 저 자신에게 이런 말을 건네오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지만 오히려 걱정을 끼치고 있었던 건 나였던 모양이구나. 네가 왜 그렇게 공략자가 되고자 했는지······ 그것도 모르고선.”
“······.”
“몰래 엿들어서 미안하지만, 듣게 된 이상 너에게 뭐라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아리엘의 이성은 이내 루타텔이 하는 말의 의미를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말속에 담긴 내용까지 빠르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엿··· 들었다고요? 그걸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아, 아니이. 그, 그게에···!”
제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게 된 아리엘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라 버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물론 루타텔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엘 너는 내겐 정말 소중한 아이란다. 그래서 아빠는 네가 행복한 일상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네가 다른 사람보다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단다.”
“······.”
“그리고······ 그런 내 바람이 아리엘 네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어쩌면 차마 너를 말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돼서 나도 모르게 너를 피해왔던 걸지도 모르지. 바보 같게도.”
아리엘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진 상황에서도 루타텔의 말을 듣고선 올라오는 여러 감정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바보처럼 가만히 입을 오물거렸다.
당장 제 아빠한테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했던 말이 말이었던지라 아리엘은 루타텔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가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하지만 루타텔은 그런 아리엘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제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리엘에게 지금 해줘야 할 말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해보면서.
그리고는.
“너는 이미 한 명의 공략자였더구나.”
그녀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살며시,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은 되지만, 그게 너의 뜻이라면. 내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런 생각을 해준 게 참··· 고맙고, 미안했지만.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게 됐으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더구나.”
“······.”
“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훌륭했고, 내 걱정보다도 더 잘 자라주었단다. 정말로.”
“······아.”
그렇게 루타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허나 그러면서도 항상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리엘의 마음이 다시금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해줘서 고맙구나.”
그리고 이내- 그 고동은 더 커져만 갔다.
자신의 손을 부여잡았던 루타텔이 그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시야 안으로 가져왔을 때. 그리고 그 손을 떼 아리엘 저 자신의 손등을 그녀 자신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리고 그 손등에 새겨진 한 개의 원을 발견해냈을 때.
우웅.
그렇게 아리엘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째서?”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루타텔은 이해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래. 이례적인 일이지. 황색탑이나 청색탑에서는 이따금 있는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침식과 맞서 싸워 업을 쌓은 게 아니라 백색탑의 허상으로 업이 쌓이는 일은 말이야.”
하지만- 그 말과 함께 루타텔은 자신의 손등을 들어 올려 제 아이의 손에 갖다 댔다.
“세계는 너희가 쌓은 업을 인정했단다.”
우웅-!! 그러자 교차한 손등 사이로 일어나는 마력의 공명. 오색찬란한 빛의 입자가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마치 그녀에게 이 모든 걸 축복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허상에 불과한 싸움일지라도 너희의 행동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걸. 너희는 그만한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는 걸. 만상세계도, 사람들도 모두 인정해준 것이지.”
아리엘은 제 손에서 일어난 그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현상에 잠시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고, 결국 그대로 얼어붙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이내- 두 눈을 글썽거렸다.
“······.”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에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빠가 그걸 말해주었다는 사실에, 세계가 그걸 보증해주었다는 사실에 이 순간 아리엘은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리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타텔은 이내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제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너도 이제 훌륭한 한 명의 공략자란다. 그것도 세계가 업적을 인정해준 공략자.”
“······저, 저는.”
“그러니 나는··· 아빠로서, 또 선배로서 네가 단 한 가지만 약속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에 아리엘은 뭉클거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고개를 들어 루타텔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열면 바로 다른 것까지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입은 꾹 다문 채. 투명해진 두 눈으로.
“걱정은 되지만, 그것만 약속해준다면 나도 너를 믿고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단다.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만큼, 다시 나한테도 넌······ 정말 소중한 아이니까.”
“······.”
“그러니 약속해주지 않겠니?”
그리고는.
“너는 정말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조급해하지 않기로. 다른 이들의 목숨을 걱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너의 목숨도 소중히 여겨주겠다고······ 이제는 그걸 약속해주렴.”
“······.”
“네가 그걸 약속해준다면······ 나도 언젠가는 네가 바라는 대로 우리가 같은 곳에서 싸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으마.”
그렇게 어렸을 때 했던 약속과 정반대가 되어버린 또 다른 약속을 듣게 된 아리엘은 잠시 멍하니 제 아빠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약속하마. 네가 그렇게 내 옆에 오게 될 때까지. 무사히 잘 있겠다고.”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입으로도 약속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 바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루타텔을 바라보며 그리 대답했다. 자신이 아빠를 걱정하는 것만큼, 아빠도 저를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제는 다른 약속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였기에.
정말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듯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루타텔은 다시금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기어코 울음을 터트린 아리엘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안아 주면서, 걱정과 기대, 소중한 마음을 담아 천천히 그녀를 토닥여주면서.
***
뭔가 붕 뜬 기분. 머리가 조금 멍했고, 아리엘은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루타텔과 이야기를 나눈 뒤 아리엘은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치료시설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잠들었던 사이 축제의 마지막 날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거리 곳곳에선 생도들과 시민들이 웃고 떠드는 게 엿보였다.
이젠 정말 생도들의 일정은 다 끝난 셈이기에 다들 마음 놓고 축제를 즐기는 모양.
물론 어제 있었던 일이 일이었던 만큼 생도들의 PTSD 예방 차원에서 심리검사를 한번 받긴 해야 한다 했지만, 치료시설을 나온 아리엘은 나중에 받기로 결정하였다. 언젠가는 받긴 받더라도, 우선은 조금 걷고 싶었다.
그냥,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리엘은 멍하니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코를 한번 훌쩍였다. 그리고는 제 손을 들어 올려 손등의 업륜을 바라보았고, 다시 그것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실실 웃어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걸까- 아리엘은 다시 멍한 표정으로 제 뺨을 꼬집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팠고, 혹시나 또 허상 차원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닐까, 이게 꿈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손등의 업륜은 열심히 우웅- 마력을 순환시키며 그녀에게 제 존재가 거짓이 아님을 계속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멍하니 생각해보았다.
협력전이 막 끝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우울하고, 슬펐는데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버린 걸까? 속도 후련해졌고, 아빠한테 칭찬도 받았고, 업륜까지 얻게 되었다.
아리엘은 정말 믿기지 않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누군가 한 명을 붙잡고 울고 웃고 이 몽글거리는 기분을 열심히 나눠주고 싶은데 차마 이 빨개진 눈과 메인 목으로는 누군가를 만나기가 부끄러웠고, 또 입을 여는 순간 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게 될 것 같아 아리엘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리엘은 이 순간 왠지 모르게 이하린이 보고 싶었다. 그 애한테라면 그렇게 바보처럼 굴어도 덜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리고 다시- 그녀를 생각했더니 이번엔 유천하가 생각났고, 그렇게 보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요 하루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게 다 그와 관련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유천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금씩 만들어진 열등감이 그를 이기고 싶단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게 만들었고, 그를 구해주고 싶어서 몸을 날렸다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결국엔 아빠와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타천자를 토벌한 것도, 멸화급 마수를 토벌한 것도 유천하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니 어찌 보면 이 업륜도 그와 관련된 게 아닐까?
그런 나름대로 합리적인, 그러면서도 꽤나 바보 같은 생각 속에 아리엘은 저답지 않게 멍한 상태로 열심히 거리를 걸어 다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녀를 어루만진다.
이제는 6월이 시작되면서도, 그래도 오늘까진 봄이라고 주장하듯 공기는 아직도 조금은 선선했다. 그렇기에 시원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매만지며 아리엘은 조금씩 되돌아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 저기······ 아, 아리엘 씨···!!”
붕 뜬 기분 속에 길을 걸어가던 아리엘은 저가 지나쳐온 길에서 들려온 쭈뼛거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그러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두 명의 사람. 그중에서도 잔뜩 긴장한 게 엿보이는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
그렇게 아리엘이 다소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더니, 말을 걸었던 남자는 그 모습에 행복한 듯 입을 벌리다가 다시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런 행동에 아리엘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남자가 왜 저를 부른 것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망주라면 흔히 겪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혹시 저··· 기억나십니까?”
“······예? 기억··· 말인가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말이었고, 그에 아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남자는 그 반응에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또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어렸을 때. 그, 그러니까······ 12년 전에. 노팅엄에서 일어났던 침식 역류라 하면요?”
“······아. 12년 전, 노팅엄이면······ 설마?”
“예. 그때. 아리엘 씨가 저를 구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엄청 작으셨을 때요!”
아리엘은 그 말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 이후로 항상 응원해왔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것도 감사했고, 그 이후로 보여주셨던 행보도 정말 멋지셨고······ 항상 언젠가는 다시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었습니다.”
“······아.”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이번에도 너무 멋있었어요!”
아리엘의 머리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비록 오래전의 기억이지만 그날의 일이 무척이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만큼, 그녀는 이내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 제 손을 붙잡고 감사하다 말했던 그때의 커다랗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다시 제게 감사하다 말하러 왔다는 사실을.
비록 그때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고, 눈높이도 달라졌지만 그녀의 시야에는 순간적으로 12년 전 그날의 기억과 지금의 이 순간이 똑같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투명해진 레이어가 서로 겹쳐지듯이 그렇게 말이다.
“원래는 인사드리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참아보려 했는데··· 어제 그 장면을 보고선···! 정말···! 너무 감격했습니다···!!”
“······.”
“정말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거예요! 아리엘 씨는 제게는 항상 영웅이었으니까요!”
“······감··· 사합니다.”
저 말이 순간 너무 고마워서, 대답을 돌려주려 했더니 다시금 메여오는 목에 아리엘은 이내 기어가듯이 목소리를 집어삼켜버렸다.
정말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 걸까.
왜 이렇게 자꾸 가슴이 뭉글거리는 걸까.
아리엘은 자꾸만 겹쳐지는 기쁜 일에 마음이 점점 풀어지는 걸 막을 수 없었고, 아까보다 더 높이 떠오르기 시작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기분.
제대로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대답해주고 싶은데, 지금 입을 열었다간 다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아리엘은 올라오는 감정을 다시 꾹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바, 바쁘신데 시간을 제가 뺏었나 보네요. 미안합니다···! 조금 흥분을 해서···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 수고하세요!”
하지만 잔뜩 흥분한 채로 말을 토해내던 남자는 멍해 보이는 아리엘의 표정에 혹시 자기가 실수라도 했나 싶을 수밖에 없었고, 혹시라도 그게 맞을까 봐 이내 빠르게 도망치듯 제 친구를 데리고 다시 달려나갔다.
-쯧쯧. 그렇게 귀찮게 하지 말랬더니.
-닥쳐 새꺄···! 피, 피곤하신가 보지! 그, 그래도 인사한 건 후회 안 한다. 절대로.
그렇게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아리엘은 순간 너무 미안해졌지만, 차마 아직도 입을 열기엔 마음이 뭉클해서, 그녀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마력을 쏘아 보내주었다.
최대한 고마운 마음이 닿을 수 있게, 최대한 밝아 보이는 빛의 마력을 넣어서 말이다.
우우웅··· 팡-!
그렇게 아리엘은 저 멀리서 터지는 마력의 유동을 느끼며, 다시 기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계속 길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계속.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아리엘은 볼 수 있었다.
“네? 정말요···? 아, 그, 그럼 나르화리얀 님은 거기에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생겼는데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면 일종의 마킹이라 생각하라고 하시더군요.”
“마킹··· 이요? 만상세계한테 마킹을요?”
“원하지 않았는데 들려온 경우라면 그것밖에 없다곤 하시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엘 자신이 계속해서 생각하고, 보고 싶었던 두 사람- 이하린과 유천하를 말이다.
그리고는.
“으음······ 뭔가 신기하네요 그럼······ 어?”
“······아. 아리엘이네요. 퇴원했나 봅니다.”
“아리엘 씨! 이제는 몸 괜찮으······ 읍?!”
그대로 달려가 두 사람을 껴안아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바로 발을 빼 피한 유천하를 제외하고 해맑게 그녀를 반기던 이하린만을.
***
어느덧 밤이 되어, 참 길고 길었던 승천제의 폐막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검은 도화지 위를 지나서 뻗어 나간 각색의 불꽃은 그렇게 하늘 위의 별과 어우러져 펑- 하고 터져나갔고,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또다시 개막식 때처럼 색색들이 물들어가는 하늘을 아리엘은 여전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계속해서 좋은 일이 들려왔다. 마음이 풀어지고 풀어졌더니, 저 하늘 위의 불빛도 별빛도 모두 너무 예쁘게만 다가왔다.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저 색채가, 이 모든 시간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낸 게 부끄럽지 않았다. 조금 전 아리엘 자신이 울고 웃으면서 뭐라 말을 하자 당황하던 두 사람의 표정이 떠올라 조금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을 정도로.
그 순간-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바람.
아까는 분명히 선선하게만 느껴졌음에도, 아리엘은 순간 조금 덥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5월 밤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조금 후덥지근했다.
그리고 다시- 심장도 계속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불안했는지 저와 유천하의 옷깃을 조금 움켜잡고 있는 이하린의 모습이 즐거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불꽃놀이를 보면서도 그저 무덤덤해 보이는 유천하의 모습이 재밌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아리엘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피유우웅··· 퍼엉-!! 펑!!
그저 지금의 그녀는 모든 게 다 좋았다.
갑자기 어리광을 피운 제 모습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는 두 사람이. 하루 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만 같은 이 상황이. 이제야 드디어 유천하와 같은 선상에 서게 된 증거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업륜이. 아빠하고 나누게 된 새로운 약속이. 그냥 모두 좋았다.
크게 터져 나오는 주홍빛 불꽃이 좋았고, 화려한 노란빛 불꽃도 좋았고, 옆에서 꾸며주는 보라색도, 파란색도, 녹색도 다 좋았다.
이하린이 좋았고, 다시 유천하가 좋았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손을 들어 올려 한 번 더 업륜을 바라보았고, 이내 생각해보았다.
아까부터 계속되고 있는 이 기분은 아무래도 너무 기쁜 일이 계속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계속해서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은 그래서 이렇게 거세게 뛰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일이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에 아리엘은 다시 되새겨보았다.
유천하의 업륜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분과 두 사람에게 구해졌을 때의 기분을. 셋이서 이곳- 3학구의 숲속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느꼈던 기분을 되새겨보았고, 다시 멸화급 마수를 떨어트릴 때 느꼈던 기분까지도.
하늘에서 터져 나가는 색을 보며, 시끄러웠던 소란을 지나 찾아온 평온을 만끽하며.
그렇게 하나씩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펑-!! 퍼엉! 퍼펑-!!
등천회랑에 오고 나서 겪게 됐던 일들.
두 사람과 함께 겪어왔던 여러 시간을.
지난 한 달 동안 해왔던 많은 생각들을.
그런데 하늘에서 불빛이 터질 때마다 하나씩 떠올리며 그렇게 되새기고 있자니, 점점 이런저런 생각이 뒤섞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마력을 제어해내느라 정신력을 너무 소모해서 아직도 멍한 모양. 기분이 너무 좋다보니 생각의 끈이 풀려버린 모양. 아리엘은 머릿속의 생각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니, 분명 그건 착각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쁨은 점점 섞여 들어갔다. 다시 즐거운 순간과 이유가 섞여 들어간다. 긴장이 풀려버린 여유가 다시 겹쳐졌고, 고마웠던 마음이 뒤섞였고, 신뢰했던 마음이 뒤섞였고, 편안한 기분이 얹어졌고, 친애의 마음이 덮어졌다. 물론 아리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기쁨과 두근거림에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한번 쏟아내어 후련해진 덕분일 테니까.
기쁜 일이 많아 두근거리는 거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감정에 이유가 존재했을지언정 마음이란 결코 선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이 즐거워서 좋은 것도, 기쁜 일이 있어서 좋은 것도, 고마워서 좋아하게 되는 것도, 편안해서 좋아하게 되는 것도, 신뢰해서 좋아하게 되는 것도, 동경해서 좋아하게 되는 것도, 친애도. 소중함도. 모두 뒤섞이고 뒤섞이면 구분은 어느 순간부턴 희미해져 사라지게 돼버리는 법이었다. 그저 겹쳐지고 겹쳐져 더욱 진해지는 부분만이 존재할 뿐.
아리엘은 분명히 두 사람을 좋아했다.
그녀의 좋아함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고, 그 좋아함은 친구로서의 좋아함에 가까웠다.
하지만 물감을 뒤섞고 뒤섞다 보면 그 색은 이따금 탁해지기도 하고, 다시 까맣게 물들기도 한다. 따뜻한 색도, 차가운 색도, 미지근한 색도 계속해서 섞이고 섞이다 보면 점점 짙어지고 짙어져 검은색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아무리 하얀색을 다시 뒤섞어도, 원래의 색을 섞어보려 해도 검게 물든 색이 온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피유우웅··· 퍼엉-!! 펑-!!
다시 폭죽이 터져나간다. 검푸른 밤하늘을 수놓은 주홍빛도, 노란빛도, 푸른 빛도 모두 별빛과 어우러져 어둠을 밝혀 빛을 내었다.
하지만 왜일까.
복잡했던 마음이 비워지고, 심란했던 감정이 사그라든 아리엘에게는 이 순간 검게 물든 밤하늘의 한구석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