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의 마음 (4)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반짝거리는 눈. 비록 아직 조금은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지만, 조금 붉어진 상태였지만, 그 녹색의 마음은 분명 무거운 결의를 그 속에 품고 있었다.
단순한 충동이 아닌, 조금 더 깊은 생각을.
그렇기에 유천하는 결국 그녀가 들려준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넌 앞으로 나한테 무모하다고 하지 마.”
“······응.”
솔직히 말해서 이런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우선, 그로서는 조금 한숨이 나오는 상황.
애초에 유천하가 저런 식으로 아리엘을 떠본 이유는 결론적으로 그녀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급함에 쫒기다가 무모한 선택을 해버려서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저 그러한 이유로 건넨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응!”
비록 선택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언정, 적어도 아리엘이 했던 선택이 마냥 충동적인 판단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로서도 딱히 뭐라 해줄 말이 없었을 뿐.
아니, 해줄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자신으로 인해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거라면 뭐라 해도 상관없었겠지만, 저걸 그런 선택과 동일시 하기에는 조금 궤가 다른 느낌이었고, 그녀의 신념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할 순 없는 노릇. 유천하는 그녀의 대답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물론- 그게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
“······.”
유천하는 아리엘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굴다가 죽거나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미래의 이하린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다시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러했고, 그걸 떠나 순수한 호의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했다. 적어도 그 또한 그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해주진 않아도 돼.”
“걱정 안 했어. 바보 같다고 생각한 거지.”
“나도 너 말대로 무작정 그러진 않을 거야 나도.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그게 안 되면 그러겠다는 거지. 무작정 죽든 말든 상관없이 그런다는 건 아니야. 함부로 안 그럴게!”
“걱정 안 했으니까. 방법이나 찾아.”
본인이 그리하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런 생각과 함께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이하린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생도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작의 주연 인물들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궁설아까지 포함해서 이 아이들은 제 목숨보단 타인의 목숨을 우선시할 때가 많았으니 이쯤 되면 그로서도 조금씩 적응이 되는 기분.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참 손이 가면서도 여러모로 대단한 아이들이지 않은가?
유천하는 잠시 묘한 감흥을 되새겨보았다.
물론 조금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정도로 위험한 사건은 아직까진 그리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고, 어차피 자신 또한 그러한 일들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으니 그로서는 그저 앞으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실제로 멸화급 마수를 마주하게 되니 아직 단독으로 저 정도 체급을 상대하는 건 무리라는 게 확연히 실감 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어지간한 타천자나 마수 정도는 그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축제가 끝나면 다시금 마인 사냥을 시작해야겠다- 유천하는 잠시 그림자 교단을 떠올리며 이후의 방침을 내려보았고, 자신이 감당해낼 수 있는 범위에 대해 가늠해보았다.
비록 본격적으로 그곳과 얽히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승천제가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만큼 이게 놈들을 어떻게 자극하게 될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래서. 여기서 어떻게 나갈 건데.”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니었으니, 그건 일단 나중의 이야기였을 뿐.
“뭐 생각나는 방법이라도 있어?”
“그야 당연히······ 아직은 없지.”
비록 자신에게는 이 상황이 시험에 불과하다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게 아니었고, 대체 회랑 측이 바라는 게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지금은 일단 저것을 해결하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유천하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럼 무슨 수로 나가겠다고 한 거야.”
“그래서 아까부터 찾자고 했잖아! 너가, 너가······ 아까 그러지만 않았어도 이미···!”
“알았으니까. 빨리 찾아보기나 해. 그럼.”
“······너 조금 미운거 알아? 오늘따라?”
그렇게 조금 묘한 기분 속에 아리엘을 한번 놀려준 유천하는 아까의 여파가 남아 눈시울이 빨개지려는 그녀를 무시한 채 다시금 만상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던 승천자들의 모습까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하겠지만, 아리엘의 상태도 조금 진정된 만큼 지금은 우선 여기서 나갈 방법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찾으려면 쐐기점을 발견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
“······.”
다시금 차원 너머를 인식하게 된 시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 그 중 루타텔의 표정은 그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으나, 그와 반대로 나르화리얀의 표정만큼은 제 생각과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으니 그와 눈이 마주친 유천하는 순간적으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걸 무슨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유천하는 저와 아리엘을 보며 어딘가 대견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굉장히 흥미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나르화리얀의 모습에 잠시 멈춰 선 채 그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그걸 본 아리엘이 타박을 건네왔다.
마치 지금 뭐 하고 있냐는 듯이 말이다.
“왜 멍때려! 방법은 같이 찾아봐야지.”
“······찾고 있어. 생각 중이야. 잠시.”
“우선 복합차원인지부터 파악해보자.”
아무래도 그녀의 눈엔 자신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엿보이는 모양- 애초에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유천하는 우선 담담히 그녀의 제안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복합차원은 맞을 거야. 아마도.”
“어···? 그걸 벌써 확인한 거야?”
그러자 대답을 들은 아리엘은 직접 확인해보려는지 여기저기 마력을 쏘아내기 시작했지만, 유천하로서는 그 정도는 따로 확인해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탑 속의 차원. 그리고 다시 그 내부에서도 공간의 틈 사이에 구성된 이면 세계였으니 복합차원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
“복합차원··· 맞나? 근데 쐐기점이 안 보이는데? 차원 단면도 없고··· 특이점이 뭐지?”
하지만 물론- 그건 그 사실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알아채기 힘든 부분이었고, 그렇기에 아리엘은 저가 알고 있는 이론을 토대로 조건을 검증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유천하는 지금도 계속 나르화리얀과 시선을 교환하는 중이었는데, 왜냐하면 다소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루타텔과는 달리 그는 지금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유천하로서는 그러한 반응이 영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젯밤. 했던 얘기. 생각해 봐.]
“······.”
유천하의 시선을 마주 보던 나르화리얀이 묘한 미소와 함께 허공에 글자를 만들어 보였고, 잘 생각해보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무척이나 큰 힌트를 줬다는 듯이.
스르륵- 그리고는 이내 나르화리얀의 모습이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했는데, 만상과 동화되어있던 유천하의 눈은 이 순간 그가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아예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단 한 순간 만에 벌어진 일.
설마 저 말을 해주려고 기다렸던 걸까- 자신이 다시 저를 인식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볼 건 다 봤다 생각해서 사라진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우연히 타이밍이 겹치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유천하는 그 사실에 조금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이라면······ 3학구에서의 일인가.’
의도는 모르겠으나 나르화리얀이 괜히 저러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 유천하는 이내 그의 말대로 어젯밤의 기억을 빠르게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의념을 수련하고 있던 순간 난데없이 찾아와 장난치다, 다시 조언을 건네주고 사라졌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를 인지하는 관점만 돌리면 의식의 힘이라 할지언정 보는 게 불가능하진 않아.
그중에서도 의식을 유독 자극하는 말이 하나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그렇게 그는 미미한 직감 속에 천천히 그 말을 되새겨보았다.
실체가 없는 파문일지언정 실존한다.
인지의 관점을 돌려 관측할 수 있다.
유무를 가르는 경계- 그것이 식識
그 맥락은 분명 유천하의 깨달음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것은 오온을 넘어 유식에 도달한 유천하가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고민해보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만상의 눈 속에 들어오는 풍경을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르화리얀이 괜히 저러진 않았을 터.
“······.”
하지만 마력 한 점 없는 흑백의 세계. 만상의 눈으로 보아도, 육안으로 보아도 이 공간의 구조는 무척이나 간단했으니 이곳에 있는 건 오직 텅 빈 그림자밖에 없었을 뿐.
경계를 넘어 현실의 차원까지 겹쳐서 보아야 그나마 실제의 흐름이 관측되어 온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이 공간에서 놓치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천하는 계속해서 인지의 관점을 돌려보았다.
단순히 마력이나 물체의 형상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본질부터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리고 다시 무형의 파문이 존재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제 의식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흘려넘기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이내.
“천하야? 너 찾고 있는 거지 지금?”
“······.”
“너 설마 진짜 멍때리는 거야? 설마?”
유천하는 결국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이 허상 차원 속에서 마력을 보유하고 있고, 다시 색채가 빠져나간 세계에서 색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를.
“빨리 찾아야지! 시간이 없단 말이···!”
“찾았으니까. 일단··· 조용히 해봐.”
“······응? 찾았다구? 뭔데? 뭐야?”
육안으로도 판별되는 유일한 특이점을.
***
달빛이 서린 푸른 밤하늘과 잿빛의 경계가 뒤섞여 자아내는 비현실적인 광경. 저 멀리서는 아직도 난색의 불빛이 옹기종기 모여 평온한 축제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곳의 하늘은 이미 잿빛에 잠식된 상태였다.
푸른 달빛도, 노란 불빛도 모두 집어삼켜 기어코 색채가 사라져버린 잿빛의 세계.
그렇게 머나먼 상공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로부터 시작된 잿빛의 물결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세계의 색을 빼앗고 있었으니, 그림자에 뒤덮여 흑백으로 색칠되어가는 세계는 생도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포효소리.
-------------------------------------------------!!
콰아아아-!!!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무자비한 폭격은 그대로 학구의 경계를 넘어 회랑 전체를 휩쓸었고, 그 소리의 파동에 담겨 있는 막대한 부정 사념은 어떠한 감정을 떠오르게 만들어주었다.
과연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아야 한다는 말일까- 오로지 그러한 두려움을 말이다.
일개 마수라 생각하기에는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는 수 킬로미터 미터 바깥에서도 너무나 선명히 관측되었고, 육안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세차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격류는 그야말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고오오오오-
그저 보기만 해도 전의가 상실되는 광경.
하지만.
“저걸 대체··· 어떻게 잡아 도대체?”
“씨발. 씨발. 씨발··· 좆같네 진짜.”
“심호흡해. 흥분하면 바로 뒤진다.”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또한 절망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채로도 생도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들어 싸움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회랑 곳곳에 발생했던 마인들을 때려잡다가도, 다시 역류한 마수들을 때려잡다가도, 멸화급 마수의 역류를 목도한 순간 생도들은 모두 망설임 없이 3학구로 모여들었다. 전력의 격차를 실감하면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묵묵히 마수가 실체화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각자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싸움이 시작된 후의 일을 짐작하면서도.
그리고 그 모든 건- 생도들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그저 당연한 선택에 불과했을 뿐.
“정신 못 차리다 뒤지면, 너만 뒤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다 죽는다 생각해.”
“······말 한번 듣기 좋게 하네. 미친 새끼.”
왜냐하면 그들이 등천회랑에 온 이유는 애초에 언젠가 찾아올 이런 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다시 위험과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공략자의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서.
갑작스러운 재앙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 생도들은 이곳에 와있었다.
그러니 어찌 두렵다고 도망을 가겠는가.
자신들이 싸우지 않고 물러난다면 그건 다시 수천, 수만 명의 죽음으로 연결될 터였고, 그런 걸 원치 않았기에 그들은 생도가 되었다. 그러니 저 하늘 위의 재앙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아무리 절망스럽게 느껴지더라도 그들은 저 괴물에 대항해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마음가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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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저 개새끼. 저거 지금 웃은 거지?”
“뭔 헛소리냐 말하고 싶지만 웃은 게 맞아 보이는군. 정말로··· 지성까지 갖춘 건가?”
“멸화급 정도면 지능이 있다는 게 정설이긴 하지. 그래도 대형종은 지능이 딸리는 편이라고 하니 저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하지만 어느덧 실체화를 이룰 마력까지 모두 그러모은 잿빛의 고래는 그 밑에 대기 중인 생도들을 비웃듯이 제 몸까지 뒤집어가며 여유로운 자태를 보여주었고, 그 거대한 체구로도 자유롭게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은 신경조차 안 쓰인다는 듯이, 개미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아니면 저런 마력량에 저런 체구를 갖춘 놈을 상대해야 하는 걸 한탄해야 할지.”
“둘 다 좆같으니까 그냥 욕이나 하자.”
“어찌 됐든 무조건 여기서 묶어둬야 해.”
그러한 마수의 행동에 밑에서 대기하던 생도들의 등줄기엔 서늘한 오한이 내려앉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담담히 자리를 유지하였고,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실체화를 앞둔 시점까지 각자 저마다의 수단으로 계획을 공유하며 마력을 가다듬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생각해내고,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지를 되새겨보면서.
그리고 물론.
“응. 무조건 붙잡고 늘어져야지. 무조건.”
기껏해야 30분 남짓한 시간이었던 만큼 생도들이 생각해낸 계획은 별게 아니었다.
그저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이들을 지키며 최대한 마수의 시선을 끄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멸화급 마수를 3학구에 붙잡아두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으니 어찌 보면 계획이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씨발! 이제 곧 터지겠네 저거. 1학구 쪽은 어때. 대피는 끝났······ 아씨 아직이라고?”
“그건 애초부터 시간이 부족했어. 대피할 시간은커녕, 싸울 사람도 부족할 정도니까.”
“계획대로 가야지. 어쩔 수 없어 이건.”
그 말처럼 처음부터 조건은 모든 부분에서 최악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었다. 생도들의 숫자는 부상자를 제외하면 간신히 1,000명에 다다르는 수준이었고, 30분 만에 사람들을 대피시키기에는 인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 속에선 생도들로서도 한 가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붙들고 버텨야 돼.”
“뒤질 때까지 버티고, 뒤져도 버텨야지.”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면 저 괴물 같은 마수를 이곳에 붙들어두자. 무슨 일이 있어도 3학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등천회랑을 유린하고 나서 회랑의 바깥- 등천도시로 향하는 걸 막아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텨내자.
바로 그것이 생도들이 내린 결단이었다.
그것만이 복잡하게 뒤얽힌 이 상황 속에서, 한정된 시간과 조건 속에서, 토벌의 성공 가능성이 미약하다는 현실을 깨달은 생도들이 도출해낼 수 있었던 최적의 결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
“······.”
짧지만 길었던 시간이 지나가고, 어느새 고요해진 회랑에 무거운 적막만이 내려앉았을 때. 실낱같이 가다듬어진 살의와 결의가 얽혀 하늘에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냈을 때.
콰지직-!! 바로 그 순간.
--------------------------------------------------!!!
잿빛의 재앙은 마침내 현실에 도래하였다.
***
적막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마력의 파동.
그리고 그곳을 향해 쏟아지는 빛의 세례.
멸화급 마수의 실체화가 완료되는 순간 터져 나온 강대한 그림자의 파동은 그대로 그곳을 향해 쏘아진 마력의 탄환을 가뿐히 집어삼켰고, 오히려 그대로 지상을 휩쓸었다.
콰과과과과과과-!!!
그 실체화의 여파만으로도 지상에서 마수를 요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생도들의 마력이 일제히 흐트러졌을 정도였으니, 그것만으로도 그곳에서 터져 나온 마력량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감각을 회복시킨 생도들은 마수를 향해 공격을 쏘아냈을 뿐이었다.
------------------------------------------------!!!
누군가는 오직 저 자신의 특성을 통해서.
누군가는 다른 이능과 합격을 이뤄내서.
누군가는 준비해뒀던 마법을 쏟아내면서.
멸화급 마수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녀석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저 하늘 위로 뻗어진 수백 개의 손에서는 그렇게 마력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쏘아져 올라가는 각색의 색채.
수백 명이 만들어내는 마력의 파도.
비록 그 머나먼 상공까지 공격을 뻗어낼 수 있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마수와 맞서 싸웠고, 그렇게 잿빛으로 뒤덮인 무색의 세계에선 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순간.
“······.”
대규모 마법 의식을 준비하던 기원학회의 아이들 앞에서 그대로 마력 파동을 베어 넘긴 이하린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뒤덮은 잿빛의 거체를 바라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