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의 마음 (3)
아무 말 없이 멈춰있는 서로의 시선.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각자의 눈에 담은 채로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엘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조금은 길게. 아리엘은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그 두 눈을 글썽거리면서.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는 마.”
유천하의 말이 다시금 이어질 때까지.
“굳이 완벽해지려고 할 필요는 없어. 너는 충분히 도움이 됐고, 설령 네가 바라는 만큼의 도움은 못 되었다 하더라도 말했듯이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히 따로 있는 거야. 그 기준에 미달된다고 너를 내던지지는 마.”
“······.”
“그런 마음가짐이 도움이 될 때고 있고, 아닐 때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조금 과한 것 같아. 나하고 비교해서 노력하는 것까진 내가 뭐라 하기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면 곤란하잖아.”
“······.”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나 때문에 조바심을 느낄 필요는 없어. 내가 중요하다면··· 그만큼 너도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건 아까와 비슷한 내용이었을지언정 이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건네진 말이었고, 그 속에는 분명 그녀를 걱정하는 유천하의 염려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니까 그렇게··· 초조해 안 해도 돼.”
“······.”
아리엘 또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닥에 주저앉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녀는 이내 몽글거리는 마음에 팔로 눈가를 닦아내었고,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다시금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올라오기 시작한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서. 괜히 되돌아오는 뭉클함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갈수록 점점 더 붉어져만 가는 제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는 얼굴을 파묻어보았다.
그리고는.
“······미안해. 바보같이 굴어서.”
이내 작디작은 목소리로 그리 속닥거렸다.
하지만- 비록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직도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을지언정 그래도 그 속에는 아까보다는 더 잔잔해진 차분함이 담겨있었고, 그렇게 아리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
“아까도 그렇고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원래는 진짜 안 이러는데··· 진짜 안 이러는데.”
물론 그래도 아직까진 심란함이 다소 남아 있는 모양이었지만, 유천하로서는 그런 아리엘의 반응에도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를 돌려주었을 따름이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감정이었던 만큼 제대로 추스르기까진 그녀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했을 테니까.
“요새 승천제 준비한다고 너무 바쁘게 살아서 그렇겠지. 너도 그동안 정신없었잖아.”
“······.”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많았기도 했고.”
그리고 그렇게. 담담하게 되돌아온 그의 대답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아리엘은 다시 더 고개를 무릎 속에 파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마음을 다잡으면서 말이다.
물론 그게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녀의 마음속에선 이런 상황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는 자책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당황스러움도 떠올랐으며, 다시 자신을 이렇게 흔들어놓는 유천하에 대한 여러 감정까지 뒤섞여 생각이 번잡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는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을지언정, 한번 빗금이 가 내용물을 모두 토해내 버린 마음은 이 순간에도 깊은 탈력감을 선사해주고 있었으니 대체 이걸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저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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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울려 퍼진 일그러진 포효소리는 지금 그녀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바깥의 시간은 열심히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으니, 아리엘은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그리고 그렇게.
아리엘은 3학구의 하늘. 정확히는 그곳에서 한참 실체화 되고 있는 멸화급 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고오오오오오-
명암마저 빠져나가 흑백의 세계에서도 확연히 차이를 알 수 있을 만큼 변질된 하늘.
자신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어느새 점점 구체화 된 거대한 그림자의 몸체는 이젠 더 이상 흐릿한 부분 하나 없이 뚜렷해져만 갔고, 지금 보니 이곳- 1학구의 가운데에선 이젠 어느덧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말··· 단 한 명의 생도마저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젠 다들 멸화급 마수를 막아보려 3학구에 가 있는 게 아니었을까- 아리엘은 그렇게 판단했고,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다시금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고 있을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과연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를. 그리고 저걸 자신들의 손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를. 저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 다른 아이들은 앞뒤 재지 않고 저곳으로 달려갔을 터였다. 대부분은 저런 괴물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막아내야겠다는 생각 속에 말이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아리엘의 머릿속이 번잡해진 순간.
“조급해하지 마.”
바로 그 순간- 가만히 그런 아리엘을 지켜보고 있던 유천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그것도 마치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무작정 막으러 가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
“저기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야. 한 명이 가고 안 가고보다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제대로 생각하고 가는 게 중요할 거야.”
그러나.
“다들 그 정도는 각오하고 갔을 테지만 제대로 된 계획 없이 덤볐다간··· 현실적으로 저기 있는 대부분이 죽을 지도 몰라. 너도 지금 비슷한 생각 하고 있었지? 상관 없다고.”
가볍게 건네진 목소리에 비해 그 말이 품고 있는 내용은 실로 무거웠으니,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무서웠던 건 그녀 스스로 생각해봐도 유천하의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는 부분이었다.
정말 일부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생도들 개개인의 수준으로는 저 마수의 방어력을 뚫을 수 없고, 다시 생도들 개개인의 수준으로는 저 마수의 공격력을 막아낼 수 없을 터. 그러니 분명히 저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에게는 그게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응. 했어. 그래도 가야하잖아. 우리가 안가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더 죽을테니까.”
“······.”
“위험해도······ 우선은 그게 맞는 거잖아.”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아리엘의 태도에도 유천하는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건네왔을 뿐이었다.
“무작정 대신 죽어도 상관 없다는거야?”
“······.”
갑자기 왜 또 저런 말을 건네오는 걸까.
자신이 어떻게 대답할지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말하는데는 조금 전 대화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아리엘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다급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도, 그 사이에서 찾아온 유천하와의 일도, 그리고 그 모든 게 엮어진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렇게 그녀는 여전히 울렁거리는, 그러면서도 조금이나마 침착해진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엄습하는 막막함 속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그녀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아리엘은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렇게- 순식간에 내려앉는 침묵.
“······.”
“······.”
3학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아리엘의 모습에 유천하 또한 만상의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떠올려보았고, 그렇게 그가 얼떨떨해 보이는 나르화리얀의 표정과 심란해 보이는 루타텔의 표정을 무시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어제 나눴던 얘기 기억나?”
그것도 조금 전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건네져온,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가 말이다.
하지만.
“어제? 무슨 얘기.”
“개막식 끝나고, 잠깐 나눴던 얘기.”
“아.”
아리엘의 마음가짐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건 바로 그였기에 유천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너 5살 때 얘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부끄러운데. 어쨌든··· 응. 그거. 그때 누군가를 구해줬던 경험이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다고 내가 말했었지? 그래서 그게 너무 기뻐서, 그때부터 TV 너머의 공략자들이 엄청 대단해 보였다고.”
“그랬었지.”
“그때 뭐라 더 말하려 했던 건 기억나?”
“말하다가 어색하게 도망쳤던 거?”
“······나름대로 자연스러웠는데.”
도망갔다는 건 부정 안 하는구나- 유천하의 머릿속에는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그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아리엘은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감정을 쏟아내고선 풀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으면서 말이다.
“그때 하고 싶었던 말. 사실 이거였다?”
“······이거?”
그리고는.
“그래서 아빠가 더 대단해 보였다고.”
일어선 아리엘은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려 3학구를 바라보았다. 멸화급 마수의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새기겠다는 듯이. 그곳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의지를 벼려내기 위해서.
하지만 아리엘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
공교롭게도 지금 그 방향에는 탑과 동화된 채 녹아 들어있는 루타텔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껏 흘러나왔던 그녀의 말을 그가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루타텔이 지금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터.
이 흑백의 세계에서 아리엘의 눈에 온전히 비치는 건 오로지 유천하밖에 없었고, 루타텔이 서 있는 모습 또한 그녀에게는 그저 텅 빈 풍경으로만 다가왔을 테니까. 그렇기에 아리엘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근데 원래 어렸을 때는. 그니까 진짜 엄청 어렸을 때는······ 나, 사실 아빠가 조금은 싫었었다? 얼굴도 보기 힘들고, 가끔 돌아와도 금방 또 나가서 오랫동안 못 보고, 언제나 피곤해 보이는 표정만 보여주고 그랬으니까.”
[······.]
“그런데 고작 5살 때. 역류에 휘말려서 직접 침식을 겪고 나니까······ 그런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을 구해주고, 다시 다른 사람한테 구해지고,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그때부터 갑자기 그게 전부 이해가 되는 거 있지?”
유천하로부터 뒤돌아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는 눈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어린 날에 다짐했던 마음가짐을 하나씩 되새겨보면서.
아리엘은 그렇게 나직이 말을 이어나갔다.
“겨우 5살짜리 꼬마애가. 뭘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던 내 손으로도 그렇게 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항상 환호하고, 기대하고, 세계에서 손꼽힌다고 말하는 아빠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었거든.”
[······.]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아빠가 이해되기 시 작했어. 왜 그렇게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는지. 왜 그렇게 침식에 맞서 싸우려 했는지. 그리고 왜··· 항상 그렇게 피곤해 보였는지.”
그리고 그렇게.
아리엘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유천하는 잠시 만상의 눈을 다르게 돌려보았다.
“······그게 전부 이해가 되더라고.”
차원 너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그는 그대로 인지되는 시점을 꺼트렸다.
유천하로서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자니 같이 들어오는 루타텔의 모습이, 그리고 그의 표정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변화가 너무나도 사적인, 그들 부녀만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리엘의 말이 자신에게 건네지는 것일지라도, 유천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
“······무슨 생각?”
“그렇게 보잘것없는 최하급의 마수 하나가 그렇게 무서웠고, 위험했는데. 그럼 아빠가 상대하는 괴물들은 정말 얼마나 위험한 걸까. 그리고··· 아빠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린 마음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하지만 이제 시야에 루타텔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을지언정 유천하는 지금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계속 고민을 해봤었어.”
“······.”
“걱정은 돼도 그건 말릴 수는 없었으니까. 걱정되면서도, 사람을 구한다는 행동의 의미가. 공략자로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어떤 건지는 나도 잘 알 것 같았으니까.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아니까. 그래서 말리고 싶진 않았지만······ 아니, 말릴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는 않았으면 했었단 말이야.”
그리고 그 순간.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3학구를 바라보고 있던 아리엘이 다시 뒤돌아 그를 향해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고-
“그러면 내가 가서 도와주면 되겠구나.”
“······.”
“5살 때.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었어.”
-그리고 그런 아리엘의 눈빛 속에는 어느새 글썽거렸던 눈물도 모두 사라진 채, 그저 약간의 흔적만을 남긴 채. 오로지 굳은 결의만이 담겨 있는 올곧은 빛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빛이 말이다.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간 나도 등천자가 되어서, 그리고 승천자까지 되어서 그 옆에 서고 싶다는 생각. 그렇게 같은 곳에 서서 위험한 상황에서도, 무서운 일이 생겨도 옆에서 도와주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말이야.”
그런데 왜일까.
“커가면서 그게 정말 말도 안 되는 목표라는 걸 점점 깨달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서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아빠를 지켜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던 게, 그게 내가 공략자가 되고자 마음먹었던 처음의 이유였어. 물론 그 목표는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유천하는 왠지 모르게 그 마음이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상황도, 이유도 그녀와 다르긴 했지만 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의무를 받아들였던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의무를 알았기에, 그 짐의 무게를 알았기에 그것을 같이 짊어지기 위해 그는 소천마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새롭게 주어진 삶에 혼란스러웠던 그가 유천하로서 바로 서게 된 것은 어찌 보면 그러한 의무를 받아들였던 덕분이었고, 다시 아버지의 뒤를 쫒아 신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라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더 조급해졌던 것 같아.”
그렇기에- 다시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곳은 아직도 너무 높아 보이는데, 너한테도, 아니 너는 조금··· 많이 규격 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같은 또래의 너한테도 그렇게 상대조차 안 되면, 그런 준비를 거친 끝에, 그런 조건에서도 이기지 못하면. 겨우 그런 수준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곳에 닿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
“그래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리고 싫어서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니까 그게 다시 너무 슬퍼서, 자책하게 되고··· 그래서.”
유천하에게도 그러한 목표는 존재했다. 그는 스스로를 한계까지 채찍질하고 다그쳐 끊임없이 몰아붙이지 않으면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목표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저게 이해되지 않겠는가.
결국 자신 또한 그 겨울날의 하늘을 베어내고 싶어서 이제껏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거라 해도 무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까 그랬던 것 같아. 그런 나보다는 네가 더 세상에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서. 너는 언젠가 반드시 승천자가 될 것 같아서. 너였기에 나도 모르게 그랬다는 말속에는 그런 생각까지 담겨 있었을 거야. 아마도.”
“······그건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이네.”
“응. 바보 같은 생각이긴 하지. 정말.”
하지만-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의 입가 위로는 작게나마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한텐 그게 정말 중요했단 말이야. 아빠의 짐을 덜어주고,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니까.”
“······.”
“그런 사람이 못될 거라면···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는 너를 살리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그와 함께 아리엘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러니까. 역시 다른 게 중요하진 않아.”
아리엘은 그 미소와는 반대로 무척이나 진지해진 눈빛으로 유천하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그를 마주한 그녀는 천천히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그에게 대답을 되돌려주었다.
“자책하고 충동적으로 굴었던 건 바보 같지만, 어린애처럼 군것도 바보 같지만······ 그래도 그때 했던 선택 자체에는 후회 안 해.”
“······.”
“결국 이런 거였으니까 무모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만약 정말 죽을만한 공격이었더라면, 그래서 대신 죽었더라면 오히려 나는 만족했을 거야. 네가 뭐라 해도···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란 말이니까.”
아리엘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고, 그리고는 다시 계속해서 올곧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 선택이 바보 같아 보이고 무모해 보여도··· 그게 걱정돼도, 나는 그런 마음으로 여기 와있는 거야.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다들 저곳에 가 있는 것일 테고. 나도 그래서 저기로 가고자 하는 거고.”
“······.”
“막무가내라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저 충동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은 아니란거야.”
“그러면?”
“그게 우리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와있는 거니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아 보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이. 번잡했던 마음을 다시금 가라앉히듯이.
그리고는.
“대신 죽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가자.”
“······.”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이야.”
다시 눈을 떠 보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