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의 마음 (2)
분명히 다른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음조차 감수하는 건- 어떻게 보면 그건 공략자로서는 훌륭한 마음가짐이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이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보는 입장에선 당연히 복잡한 심경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 도움을 받게 된 이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을 뿐.
“그것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
“······?”
그렇게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그에 창백해진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아리엘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상황이 다급한 만큼 떠오르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 맞겠지만, 지금 유천하가 건네온 말속에서는 다소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뭐를 물어보려고?”
그리고.
“아까. 그래서 왜 그랬던 건데.”
“······.”
그 순간- 두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
순간적으로 유천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리엘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곤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어왔다.
“······아니, 천하야.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실체화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은 여기서 나갈 방법부터 찾아서 시도해봐야지! 아까 일은··· 신경 쓰이는 건 알겠지만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
“지금 중요한 건 빨리 나가서 저걸 해결하는 거야. 아니, 그게 힘들더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내야 해. 지금은 그게 우선이잖아.”
아리엘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답했고, 고개를 내저으며 마력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그녀의 태도에서는 대답하기 싫다는 기색도 풍겨 나오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오로지 빠르게 바깥으로 탈출해 저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마음이었으니 아리엘은 지금 스스로 한 말처럼 바깥의 상황에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답게 멸화급 마수에게 휘말리게 될 사람들의 목숨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왜.”
“······.”
그렇기에 유천하는 더더욱 지금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천하가 보기엔 아까 아리엘이 한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해 보였다. 어떤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면서 그랬다는 건, 만약 이게 현실이었다면 조금 전 아리엘은 자칫하다 죽을 뻔했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로서는 그 부분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구해주려고 그랬다 한들 그에게는 그게 별로 합리적인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 한들 한번 그런 선택을 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이 사태가 터지기 전- 그녀가 보여줬던 모습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유천하는 말없이 아리엘의 두 눈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의 태도에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조금씩 눈길을 돌리며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물론.
“······.”
“······.”
유천하는 그래도 계속 그녀를 응시하였고, 그렇게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적막은 무거운 분위기를 머금고선 아리엘을 내리눌렀으니 그녀는 이내 입술을 깨물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지금 얘가 왜 이러는 걸까.
그녀는 안 그래도 복잡해졌던 머리가 꼬여가는 느낌에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닥거렸다.
“······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잖아.”
“그건 알아. 내가 묻고 싶은건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너는 몸으로라도 대신 막아주겠다는 것처럼 뛰어들었던 거잖아. 대체 그게 뭔 줄 알고.”
“그때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만약 이런 식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네가 대신 죽을지도 몰랐던 상황이었는데도?”
“······그건.”
아리엘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저건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던 부분이었고, 자신이 무모했다는 건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꼈던 부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 만약 상대의 능력이 다른 것이었다면 이런 곳에서 눈을 뜨는 게 아니라 다른 결말에 도달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몸이 스스로, 본능적으로 움직여버린 걸 대체 자신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건 분명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어떠한 생각의 과정을 거친 끝에 내린 판단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고, 그저 무의식이 행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허나- 그렇다고 그걸 솔직히 이야기해주기에는 조금 민망했고, 다시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 또한 대체 자신이 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래도 계속 급변하는 상황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
“······.”
그녀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을 뿐이었다.
자기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지만 그래도 할 말은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나갈 방법이나 찾아보자는 듯이. 그대로 유천하의 시선을 피하면서.
하지만 그러고 있자니 그녀는 이내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무모했다는 건 너도 알 거 아니야.”
“······.”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지난 한 달 동안 밤잠까지 줄여가면서 노력했던 결과가 허무하게 끝나버린 점에 대한 허탈함도, 그로 인해 느꼈던 자책감도, 난데없는 테러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분노와 슬픔도, 다시 그런 상황에서까지 결국 마지막엔 유천하의 도움을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느꼈던 복잡한 심경까지도. 모두.
그렇게.
“······네가.”
상황이 다급했기에 눌러두었던 마음들이 갑작스레 찾아온 공백의 틈새에서 하나둘씩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물론, 차라리 평소와 같은 순간이었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저 적당히 억누르고, 적당히 툴툴거리고, 적당히 장난을 치면서 웃어넘기고, 방에 돌아가서 혼자 쪼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면 그만인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위험해 보였으니까 그런 거잖아.”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들에 복잡해진 심경은, 더 복잡한 상황과 맞물려 들썩거렸다.
“다른 것보다 그게 더 신경 쓰였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잖아. 그게··· 그렇게 이상해?”
“아니. 하지만 그게 신경은 쓰이니까.”
“굳이 지금 이 상황에서 물어볼 정도로?”
“이런 상황이니까 묻는 거야. 만약 탈출하고 나서도 똑같은 행동을 하면 곤란하잖아. 하물며 밖은 아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지.”
“······.”
“그래서 왜 그랬는지가 중요한 거고.”
그 말에 이제껏 유천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리엘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너··· 비슷한 상황이 오면, 또 그럴 것 같아. 아니, 그럴 거잖아.”
“······이제는 안 그럴 거야.”
“정말 확신할 수 있겠어?”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있는 한 사람의 눈.
그리고 조금씩 떨려오는 누군가의 눈동자.
“······.”
“······.”
침묵 속에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였다. 하지만 아리엘은 입을 앙다문 채 흔들리는 눈빛만을 내비쳤고, 유천하는 결국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안 들어도 뻔한 일이지 않은가?
이대로 있어봤자 제대로 대답을 듣긴 힘들겠다는 생각 속에 유천하는 잠시 허공을 흘깃거렸고, 그리곤 이내 다시 입을 열어왔다.
그것도 분명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이다.
“마음은 고맙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
“······왜.”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네가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도와주려는 것까진 괜찮아. 하지만 우선순위는 너 자신이 되어야지.”
“······.”
“사실 너도 네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잖아. 무의식적이었지? 그런 게 습관이 되는걸 조심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하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잖아.”
“······뭐?”
그 순간-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안 그래도 낮의 협력전에서부터 이어진 정신의 피로에, 테러, 타천자 침입, 멸화급의 역류라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겹쳐졌을 때. 정작 이 심란함을 만들어낸 당사자에게 저런 말을 듣게 되니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감정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모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랬던 건 아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인가.
아리엘로서는 그의 말이 무척이나 서운했고, 빨리 나갈 방법을 찾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게 다가왔다. 정신없고 조급한 와중에도 그 말이 너무 매정하게 느껴져서. 그게 울컥해서.
그렇기에- 마치 구멍이 뚫려버린 둑처럼.
“이유가 왜 없어···? 왜 그렇게 말해?”
이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파묻혀있던 본심이 저도 모르게 밖으로 새어 나와 버렸다.
“너니까··· 그게 너였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이유는 없었어.”
“······없었다고?”
그렇게 되돌아온 유천하의 대답에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몸을 꿈틀거렸고, 제 입술을 작게 깨문 그녀가 조금 서러워 보이는, 그러면서도 붉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네가 위험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고, 생각은 더 많이 든 것 같은데, 사실 그 전에 이미 몸은 움직였고, 나도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그래.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건 맞아.”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그거 말곤 아무런 생각도 안 났던 걸 어떡해?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까, 안 된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뭔가 터져 나오고, 위험하고 정신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 보이고······ 타천자도 수호자급도 나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데, 너는 혼자서 해결할 수도 있고. 그런데 마지막엔 엄청난 게 터져서, 거기서 만약 너까지 없어져 버리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아까 전 나한테는··· 그냥 네가 나보다 더 중요해 보였단 말이야! 이······ 바보야!”
어느새 글썽거리기 시작한 그녀의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색채가 점차 흐릿해져 간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천하 네가 아니었다면 카룬드한테 죽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더 심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나도, 나도··· 너처럼 지켜주고 싶었단 말이야.”
“······.”
“또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너를 얼마나 많이 생각해왔는데? 너 하나 이기고 싶어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한테 뒤처져서, 3월부터 계속 너한테 뒤처지기 싫어서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마지막까지 그렇게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끝나버리면 어떡해? 너한테 아직 제대로 된 보답도 못 해줬는데?”
“······.”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우리.”
그렇게 아리엘은 왠지 모를 서러움이 담긴 눈으로 유천하를 바라보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감정을 그 속에 같이 담아낸 채로 말이다.
“우리··· 친구 아니야? 그걸로는 부족해?”
“······.”
“근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왜 없어? 그랬어야 할 이유가 이렇게나 많이 있는데, 그래서 그랬던 건데, 그게 너였어서 그렇게 한 건데······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머릿속에 정리되었던 생각도, 정리되지 않아서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마음도.
“그게 너였으니까. 그게 이유란 말이야.”
유천하의 말에 휘저어진 물결은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마음을 모두 뒤섞어버렸고, 그렇게 탁류를 쏟아낸 그녀의 눈은 서러움과 억울함, 그러면서도 정작 그 속에는 다른 마음마저 가득 담아둔 채 투명하게 흔들거렸다.
한 달 전부터 쌓여왔던 여러 생각을, 아니, 처음 봤을 때부터 쭉 느껴왔던 열등감을, 친근함을, 호의를, 친애를, 그리고 다시 고마움과 미미한 동경마저 뒤섞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심이 건네져온 순간.
“······.”
바로 그 순간- 유천하는 정작 갑자기 터져 나온 아리엘의 말에 뭐라 할 말을 잃어버린 채 가만히 입만을 달싹거리는 중이었다.
그로서는 그저 아리엘의 마음이 너무 구석에 몰려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조율이 필요해 보였기에 시작한 대화였는데 아무래도 실수로 트리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 솔직히 말해서 지금 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너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와버린 탓.
“나도··· 그게 너였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거니까 나한테 뭐라 하지 말란 말이야······.”
“······아니,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아까부터 계속 뭐라 하고 있잖아!! 나는 그냥 구해주고 싶었던 건데··· 계속 그렇게.”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침울해졌다가, 이내 목소리를 높이고는, 다시금 울먹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아리엘의 태도에 유천하는 지금 정말 당혹스러운 기분에 휩싸인 상태였다.
당장 지금의 일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조금씩 쌓여왔던 감정들이 허물어진 둑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 아리엘의 이런 모습이 유천하에겐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이건 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다.
“너무해. 정말··· 그렇게 말하고.”
“······.”
그리고 그렇게.
예상을 벗어난 아리엘의 대응에 잠시 얼어붙은 유천하가 그답지 않게 벙찐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녀는 이내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마치 본심을 토해내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듯, 그렇게 힘없이 말이다.
그리고는 고개까지 숙인 채 웅얼거렸다.
“······이게 뭐야. 이기고 싶었는데 이기지도 못하고,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고, 구해주려고 했는데 구해주지도 못하고,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닌데······ 정작 당사자한테는 혼나기만 하고.”
“······.”
“이러면 너무 억울하단 말이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야······ 이 바보야.”
그녀답지 않게 잔뜩 토라진 채 울먹거리는 모습이 그에겐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항상 여유롭기만 하던 그녀가 아까는 잔뜩 기죽은 채 글썽거리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쪼그라든 채 울먹거리고 있으니 그게 유천하로서는 무슨 말을 꺼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그는 이런 게 걱정돼서 말을 꺼냈던 거기도 했었다.
마음에 들어차 있던 여유를 내던지면서까지, 구석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의 얼굴은 그에게도 꽤 익숙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당장 그 자신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고, 이전에는 이하린과 남궁설아가 그랬으니, 당연히 이런 어리숙함이 신경쓰일 수밖에.
하지만.
유천하가 예상했던 건 그래도 이것보다는 더 아리엘다운 반응이었고,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아리엘은···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 비해 이하린스러운 느낌이 묻어나왔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느낌이 말이다.
그렇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리엘은 이젠 모든 걸 내려놨는지, 아예 풀어진 표정이 되어선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건 솔직히 네가 너무했어······ 사과해.”
“······미안.”
“진짜로 사과하면 어떡해?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민폐인데, 칭얼거려서 미안한데······ 너무 속상해서 그냥 해본 말이란 말이야!”
“······.”
눈앞에 있는 게 아리엘이 맞긴 한 걸까- 그의 머릿속엔 순간 그런 생각마저 떠올랐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아이처럼 토라진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해보았다.
“너······ 지금 조금 어린애 같아.”
“지금··· 네가 그런 말 할 때야?”
“아니, 그렇게 말해서 미안하기는 한데, 갑자기 이러니까··· 조금, 당황스럽네 지금.”
“그러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잖아! 나한테는 갑자기가 아니었단 말이야······ 하린이 앞에선 그래도 이렇게까진 안 했는데.”
평소에 어른스러운 척하던 반동이라도 나타난 걸까. 아무리 봐도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아리엘이 아니라, 한 명의 어린애 같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만든 건 그녀의 말처럼 그 자신이었으니,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뿐.
그렇기에.
“······아리엘 이 바보, 멍청이, 머저리.”
“······.”
유천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물론 저녁에 봤을 때만 해도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알아서 잘 이겨낼 줄 알았더니 여러 상황이 겹쳐지자 그대로 녹아버린 모양. 아니, 어찌 보면 그녀에겐 이 모든 게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로 느껴지고 있을 테니 지금의 상황에 스트레스가 한계치까지 쌓인 걸지도 몰랐다.
협력전부터, 테러, 타천자, 멸화급까지.
분명 다사다난한 하루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알았어. 그럼 우선 이것부터 말할게.”
“······또 뭐를. 또 뭐라 할려고. 또.”
그렇다고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
유천하는 우선 조금 전 아리엘이 토해냈던 본심과 그 속에 담겨 있던 내용, 그것을 떠올리며 아리엘을 향해 차분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지금 해줘야 할 말은 이것인 듯했고,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네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분명.”
다시 사과를 건네올 줄 알았던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다소 뜬금없는 그 말에 울먹거리던 아리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 타천자를 잡을 때. 네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쉽게 안 끝났을 거야. 그건 확실해.”
“······.”
“너는 충분히 도움이 됐어. 애초에 마지막에 사용했던 언령. 내가 그때 왜 너를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필요해서 그랬던 거고, 너도 알아듣고 사용한 거 아니었어?”
“······정말 그런 의미로 본 거였어?”
“네가 준비하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렇게 유천하는 떨려오는 아리엘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말했듯이 협력전에서의 승패는 분명 아슬아슬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하마터면 네 언령 때문에 질뻔했던 건 사실이야.”
“······.”
“또, 구해주진 못했어도 네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건지는 잘 알아들었어. 그걸로 충분해. 그렇게까지 해줘서 고마워. 정말로.”
그러니까- 유천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건 충분히 다 했어.”
“······.”
“나는 그냥··· 네가 그렇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자초한 게 조금 신경 쓰였던 거야.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 그래서.”
“······.”
“네가 너무 충동적이었던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유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아리엘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투명해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고 역시. 내가 생각한대로였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유천하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도대체 너보다 내가 더 중요해 보였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너 조금 바보 같아.”
“······너는 바보라 하지 마.”
“네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어. 나한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고, 너한테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야. 당연히 단순한 일대일 전투 같은 걸 이야기하자면 내가 더 쓸모가 많겠지. 하지만 난 잘 죽이는 건 할 수 있었어도, 너처럼은 못해.”
“······그치만 매번 중요할 땐 쓸모 없는걸.”
“말했잖아. 아까의 마무리는 덕분이라고.”
“······내가 아니었어도 이길 수 있었잖아.”
완전 누구처럼 소심해져버린 그녀의 모습에 유천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는 나르화리얀과 아까보다 더 착잡한 눈으로 자신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는 루타텔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부분이 더 많았던 탓.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괜한 오해를 사기 싫으면 이래저래 끝나고 고생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우선이었을 뿐.
“그래. 솔직히 말할게. 그 녀석을 상대로는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어. 상성이 나쁘지 않았고, 상황도 괜찮았으니까.”
“······그럼.”
“하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쉽게는 못 죽였을 거야. 지금보다 전력의 소모도 컸을 테고, 조금이라도 부상을 피하진 못했겠지. 상대의 실력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당연히 이후에 멸화급을 상대할 때 큰 지장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유천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책하지 마. 안 그래도 돼.”
“······.”
“네가 그럴 이유만큼은 정말 없으니까.”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으로, 그 속에 쪼그려 앉아있는 아리엘의 모습을 담은 채로. 투명해진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