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37화 (137/205)

광란의 축제 (4)

그렇게 이 순간 타천자의 태도에서는 대놓고 그러한 여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녀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저에겐 아무런 소용없을 거라는 그런 자신감이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 묵묵히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그녀들의 위치는 유유자적한 타천자의 걸음걸이에 맞춰 계속해서 변화하였고, 자신의 실수가 서로의 피해로 이어지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들은 각자 무의식적인 직감에 의해서, 또한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서 서로를 믿고 전투를 지속해 나갔을 따름이었다.

아리엘은 이하린의 실력을 믿었고, 이하린은 아리엘이 올바른 판단을 하리라 믿었다.

비록- 무아지경에 접어든 상태일지라도.

“······.”

아니, 이하린의 의식은 무아에 접어든 상태로 육체를 움직이면서도 그 무의식의 한구석에선 끊임없이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멸화급 주교가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건지도, 그림자 교단이 왜 이런 활동을 벌이는 건지도, 저작권리의 가호는 그 무엇에도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만약 이것에 원인이 존재했다면 그건 그녀 자신의 업보였을 터.

전생자와 빙의자- 그리고 인과의 비틀림.

만약 이 세계에서 침식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진시우와 자신밖에 없었고, 다시 이하린이 아는 미래를 뒤틀어낼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것도 당연히 저 자신일 터였다. 그러니 어떠한 인과가 그림자 교단의 충동을 이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면 그건 분명히 자신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정말 말 그대로.

저들이 등천회랑을 습격한 이유가 그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인과의 대가라면, 즐겁게 웃고 떠들던 축제의 거리가 한순간에 화마에 휩싸인 것도 자신의 탓이라면, 이하린은 분명히 이 일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녀의 ‘원작’에선 이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이하린은 검극을 그어냈다.

자신의 손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자신의 손으로 저 괴물을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사람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역설적이지만 죽어도 죽어줄 순 없었다.

하물며 협력전에서 보여줬던 아리엘의 일격이라면 타천자에게도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고, 그 틈을 노려 녀석을 베어낸다면 토벌의 가능성 또한 아예 없지는 않을 터.

그러니 이하린은 시간을 벌고, 아리엘을 지키고, 그 결과 마인을 죽이기 위해- 그 모든 걸 해내기 위해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팔이 하나쯤 날아가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씨발 뭐야 저거.

-미친··· 저게 능력이라고?

뒤편에서 들려온 생도들의 목소리에 무아에 접어들었던 그녀의 정신이 잠시 수면 위로 부상했고, 스펠을 외우던 아리엘 또한 뒤늦게 다른 이들의 접근을 인지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고작 3분에 불과할지라도 이 정도 규모의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이상 생도들이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몰려오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슬슬 불나방들이 모여들고 있군.”

안타깝게도 아리엘이 보기엔 지금 다가온 이들 중에선 당장 도움이 될만한 전력은 없어 보였고, 그건 타천자도, 다가온 생도들도 마찬가지로 곧바로 깨닫게 된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쿠드득··· 카드드득-!!

-땅이 뒤틀린다!! 방향이 뒤섞였어!

-설마 공간조작이야? 진··· 미친!!

-가, 갑자기 뭔 시···!

타천자 베헤딕트가 휘저은 마력의 선을 이하린은 즉각적으로 베어내고, 다시 아리엘도 나머지 여파를 뒤틀어냈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해진 왜곡의 선은 그대로 생도들이 서 있던 공간을 덮쳐버렸고 그에 찾아왔던 생도들은 한순간에 공격에 휩쓸려 튕겨져 나갔다.

-시발 뭔··· 흡!!

-큭··· 으아악!!

그것도- 온몸에서 피를 흩뿌리면서.

콰과과과과과과-!!!

그야말로 단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까 뭐라 말했더라··· 몇백 명쯤 모이면 나도 무리라 했던가? 저런 수준이라면 모인다 한들 위협이 될지는 모르겠구나. 아무리 모여든다 한들 표적만 늘어나는 셈이겠어.”

그렇게 인자한 표정 속에 이죽거리는 타천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리엘은 잠시 이를 악물었고, 이내 빠르게 감정을 털어내었다.

분명 타천자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생도들을 믿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 등천회랑까지 오기 위해 노력했을 아이들의 재능과 마음가짐을 믿고 있었다. 비록 지금처럼 당장 몇 명밖에 없을 때라면 저게 그들의 한계겠지만, 수가 더 모이게 되면 분명 답을 찾아올 터.

설령 개개인의 기량이 부족하다 할지언정 다수가 모이고 모여, 머리를 맞대 여러 능력을 조합한다면 분명 저런 괴물 같은 자에게도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무리 저자가 평범한 마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상대는 고작 1명에 불과하지 않은가?

당장 아리엘 자신만 해도 혼자서는 유천하에게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지만, 협력전에서 다른 아이들과 합을 맞추고 힘을 합친 것만으로도 이기기 직전까지 갈 수 있었다.

그때 그녀와 힘을 합쳤던 건 겨우 14명.

하지만 생도들의 수는 천 명이 넘어갔다.

물론 위대한 승천의 업에 도달한 초인이 상대라면 단순히 숫자만으로는 넘볼 수 없는 영역이 펼쳐지겠지만, 정말 승천자라면 모를까 저러한 마인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강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분명히 공략의 틈은 엿보였다.

그저 너무나도 미약한 틈새였을 뿐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해.’

아리엘의 역할은 생도들이 하나씩 저자의 손에 쓸려나가는 걸 막기 위해 이 자리에서 타천자를 붙들고 있는 것이었고, 다시 다른 누군가가 찾아왔을 때 결정적인 틈을 만들어줄 수 있도록 강력한 일격을 준비해야 했다.

미약한 힘이 모이고 모여서 녀석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무작정 치르는 싸움이 아닌 제대로 된 ‘공략’ 이루어지도록 선두에서 저 괴물을 막아내는 게 그녀들의 몫.

그렇기에.

이하린은 계속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타천자의 이능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고, 아리엘은 그동안 쌓아왔던 축언의 업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현상을 주조해냈을 뿐이었다.

[↖︎ ↑ → ⇡ ⇠ ↘︎ ← ⇢ ↓ ⇣]

우웅-!! 허공에 마력의 문자가 떠올랐고,

그 즉시 형상에 맞닿은 마력이 뒤틀린다.

콰과과과과과-!!

계속 빗겨내고 있음에도 사방에서 뻗어져 나오는 마력의 선은 멈추지 않고 그녀들을 향해 채찍처럼 내려쳤지만, 그 끝에서 주언을 읊조리고 있는 아리엘도,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이하린도 망설임 없이 그에 대응했다.

투웅-! 빠르게 그어지는 백의 궤적.

그리고 다시 허공을 베어내는 검극.

카가각-!! 점점 주변에 자욱하게 깔려가는 마력의 밀도에 이하린은 호흡마저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뒤섞이는 주변의 풍경은 이젠 정말 다른 세계라도 되는것 마냥 왜곡되어 일그러져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변수가 더해질 때까지, 다시 타천자의 심장을 물어뜯을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그녀들은 계속해서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갔고 그 흐름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전투가 시작되고 5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친···! 저 정도면 하이랭커급 아니야?”

“······위험해. 능력의 범위가 너무 넓어.”

“걔가 말한 쪽도 위험해 보이던데··· 저건 아예 규격 자체가 달라 보이잖아. 어쩔래.”

“괴물이군 완전··· 남궁설아 쪽으론 우리만 간다. 나머지는 전부 남아서 저걸 상대해.”

그녀들이 기어코 5분을 버텨낸 시점- 그 소란에 이끌린 생도들이 그곳으로 모여든 순간부터 전장에는 조금씩 변화가 시작됐다.

***

점점 정신이 멍해지는 듯한 기분.

아직 아리엘과 이하린이 타천자와 막 교전을 시작했던 순간, 그때의 유천하는 1학구의 거리를 달려나가면서도 계속해서 흐릿해지는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을 자극하는 위화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유천하는 그 모든 걸 되새겼다.

조금 전 하오란을 마주한 순간부터 느껴지던 미약한 이질감. 그리고 진시우의 말을 통해 알게 된 마인들에게서 느꼈던 위화감.

그리고.

“······.”

그 모든 부분에서 늘어지는 불쾌함까지도.

위화감을 인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정신이 멍해진다. 마치 모든 걸 잊어버리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럴수록 유천하는 정신을 벼려내었고 천마신공을 최대로 활성화시키면서 신검합일을 이뤄 정신을 유지하였다.

다른 이들- 이하린과 진시우의 의식이 한순간에 왜곡 당하고 멍해지던 순간에도 유천하는 강제로 흐려지는 의식을 붙들었고, 의아함을 놓지 않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그 부분을 깊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더 생각을 이어나가면 간신히 붙들고 있는 이 위화감마저 사라지리란 걸 그의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끊임없이 흐릿해지고 또렷해지는 의식의 격류 속에 일념을 벼려내었고, 그 위화감을 계속해서 붙들어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아니, 애초에 이러한 이질감이 시작된 건 아까의 순간이 아니었다. 유천하는 분명 협력전 시합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왔던 순간에도, 아니 협력전 시합이 시작되던 순간에도, 그 이전에 멸화급 탑에 입장했던 순간부터 계속 미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황색탑에서의 기억처럼.

유천하는 분명 순례자의 길에서 비슷한 현상과 기분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고, 그건 당연히 현실에서 분화된 세계였기에 느낄 수 있었던 이질감이었을 터······ 그러나 유천하의 생각은 그 이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전에 아무 징후도 없었던 침식 역류의 전조를 느꼈던 것처럼, 그의 무의식은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영역까지 인지하였을 뿐.

그렇기에 유천하는 멍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생각을 끊어내며 의식을 유지하였고, 그러면서도 붙들고 있는 위화감의 본질에 대해 무언가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유천하의 심상에서 일어났던 번민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가던 순간- 그는 그제야 방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는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늘과 대지가 뒤섞여 흩날리는 풍경.

그 중심을 향해 쏟아지는 마력의 포화.

---------------------------------------------!!!

사방을 왜곡시키며 무지막지한 현상을 자아내고 있는 한 명의 타천자와 그런 녀석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마탄의 세례를 말이다.

-몰아쳐! 거리 유지해! 사정거리는 100m!

-시발! 무슨 공간계열이 세 자리까지···!!

-마력량은 최소 수호자급 정도로 가정해!

-아리엘이랑 이하린은? 저기 위험해 보여.

-저쪽은 건들지 마! 지금 저기 끼어들어봤자 방해만 될 테니까 타천자부터 타격한다!

마력이 몰아치며 발생하는 굉음과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얽히면서 뭉개지는 소음.

“······.”

그렇게 유천하는 현장에 도달한 순간- 그 즉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야로 들어오는 광경에 조금 신기하다는 감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분명 3학구에 있던 자신이 현장에 도달하는 것보단 1학구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던 이들이 이곳에 도달하는 게 더 빠르긴 했을 터였다.

그러니 딱히 이상한 광경인 건 아니었다.

‘······균형이 잡혀있어.’

그저 만상의 눈에 엿보이는 전장의 흐름이 생각보다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물론 유천하가 그런 감상을 느끼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타천자가 다루는 이능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그런 마인을 상대로 쏟아지는 아이들의 공격이 생각보다도 더 체계적인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타천자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건 소수.

중심을 향해 다가가는 건 고작 네 명.

하지만 그 힘을 깎아내는 건 다수였다.

수십 명의 생도가 타천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마법의 술식을 짜올리며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근접 계열의 아이들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며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물론 초조해 보이는 표정과 움찔거리는 몸짓을 보아하니 그들 또한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싶어하는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몸놀림만을 믿고 타천자의 능력- 공간 왜곡이라는 사기적인 이능의 범위로 들어가는 게 바보 같은 짓이란 건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건 사방에 널브러진 채 끙끙대고 있는 아이들이 앞서 증명해준 게 아닐까- 유천하는 전장의 상황을 그렇게 판단하였다.

애초에 저런 능력에도 저항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거나 상대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상대는 하이랭커급의 강자였다. 그런 마인과 교전을 이어나갈 역량의 소유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기에.

현재 타천자를 향해 제대로 다가가고 있는 건 이하린 한 명뿐이었고,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해 아리엘이 뒤에서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으며- 다시 그런 그녀들과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달려든 이솔라와 마르네가 공간의 왜곡을 깨부수며 신경을 교란시키는 중이었다.

“아 씨발···! 저거 존나 거슬리네 진짜.”

“······마르네. 앞서 나가지 마. 조심해.”

그 말과 함께 손을 내뻗는 그녀- 이솔라.

우우우웅-!!

이하린의 특성 <검의 반려>가 상대의 특성마저 베어내게 해주었다면, 이솔라의 특성 <세계천칭>은 그녀의 염원에 따라 세계를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당연히- 다른 이가 발하는 이능까지도.

카드드득-!! 그렇게 이솔라의 특성은 타천자가 뻗어오는 공간의 왜곡마저도 그대로 자연의 마력으로 분해해버렸고, 그런 이솔라의 이능을 다시 마르네의 특성 <파동증폭>이 보조함으로서 두 사람은 차근차근 상대의 마력을 소멸시키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솔라의 신체 능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보니 대놓고 접근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저렇게 갉아내는 것만으로도 타천자를 방해하기엔 충분해 보였을 정도.

그리고 또한.

그 외의 나머지 생도들도 전부 최소 100m 이상의 거리를 벌린 채 원거리에서 이능을 통해 공격을 쏟아내고 있었으니- 타천자의 마력 소모는 점점 가속되어가는 중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시작했을 때에 비해서였고, 아주 조금씩에 불가했을지언정 말이다.

[동결. 억압. 구속. 압박. 족쇄. 정지.]

다중의 사슬이 타천자의 몸을 옥죄인다.

사방에서 마력의 탄환이 쏟아져 나온다.

퉁-!! 퉁-!! 키잉-!! 카가가가각-!!!

거리를 격하고 쏘아지는 마력의 세례가 끊임없이 빗발치고 있었고, 타천자의 주변에 왜곡된 공간은 그대로 그 공격들마저 뒤틀어 튕겨냈지만 그 마법의 잔재들은 분명 조금씩 공간 자체에 스며들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조금 기별이 오는 느낌이구나.”

“······.”

그럼에도 타천자 베헤딕트는 이 정돈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을 뿐.

분명 이제는 수십 명씩이나 모여든 만큼 생도들이 뿌려대는 마력의 연쇄가 그의 능력에도 조금씩 노이즈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미약한 이질감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지금 이곳에 자리한 이들 중에서 그나마 그의 신경에 거슬린다 싶은 존재는 고작 몇 명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타천자는 광활한 넓이의 전장을 초토화시키면서도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었고, 다시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더 재롱을 부려보라는 듯이 말이다.

“역시 등천회랑이라 그런가? 신기한 재주를 가진 아이들이 많구나. 특히 너희 셋. 너희에겐 혹시 마인이 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군. 원한다면··· 내 필히 위대한 그림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마.”

“하! 제정신이냐? 개소리할 거면······”

“너한테는 관심도 없으니 안심하거라.”

“······목줄부터 차고 오든가 이 새끼야!”

타천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 반 조롱 반의 우스갯소리에 마르네가 욕설을 내뱉으며 마력의 파동을 쏘아냈고, 그와 동시에 지면을 박찬 이하린이 살기를 내뿜으며 타천자를 향해 허공에 백색의 궤적을 그어냈다.

그렇게- 한순간에 쏘아지는 순백의 참격!

하지만 타천자는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이하린의 검강과 마르네의 파동을 바라보면서도 여유롭게 손을 휘저었고, 그대로 공간의 위치를 뒤틀어내 가뿐히 밖으로 튕겨냈다.

콰과과과과과-!!

그저 우습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정작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는 눈치채지도 못한 채, 오직 그녀들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후우웅-

바로 그 순간까지도 전장의 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유천하의 존재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고, 다시 그는 마인의 신경이 그녀들을 향해 쏠려있는 사이에 몰아치는 마력의 잔향 틈새로 살며시 기척을 녹여내었을 뿐이었다.

내력을 가라앉히고, 살기를 가라앉힌다.

무념에 도달한 의식 속에 발을 박찬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가라앉아버린 기세.

----------------------------------------------······

비록 수십 명이 넘어가는 이들이 자아내는 마력의 격류에 혼란스러워진 전장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유천하의 기척은 주변에 그대로 녹아든 상태였고 그는 허공을 박차며 타천자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이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후웅-! 전장의 중심지로 다가갈수록 현실의 방향이 꼬이며 하늘과 대지의 구분마저 사라져갔지만, 만상의 눈은 그 왜곡된 흔적마저 그대로 가시화된 형태로 관측해내었다. 뒤섞여버린 공간의 길과 타천자가 흩뿌려놓은 마력.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그렇기에.

유천하는 사방에 자리한 타천자의 마력- 그 빈틈 속으로 완벽하게 숨어들 수 있었다.

‘······.’

조금 전 그는 전장의 흐름을 파악함과 동시에 타천자에게 존재하는 빈틈을 알아챌 수 있었고, 현장의 상황이 이러니 분명 이용할만한 구석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상대의 기량은 최소 하이랭커급.

하지만 상대는 위타극과는 궤가 다른 방향의 초인이었고, 저런 괴물 같은 행각을 벌이면서도 그와 상반되게 둔해 빠진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게 한눈에 엿보였으니 조건만 갖춰진다면 유천하에겐 위타극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쉬운 유형의 상대였을 따름이었다.

거기에 유천하는 죽여야할 적을 상대로 뻔히 보이는 기회까지 내던지면서 정정당당을 고수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애초에 이것은 대련이 아닌 실전이었다.

그러니 결국 중요한 건 상대를 제대로 죽이는 것- 바로 그 부분이었고 상대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죽이느냐는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으니 이 순간 유천하의 의식은 가라앉은 표면 아래에서 살의를 벼려내었다.

그리고 그렇게.

타천자가 아직도 이하린과 마르네를 상대로 공간을 휘저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그런 녀석을 향해 이하린이 달려들고, 마르네와 이솔라가 그녀를 보조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

오로지 타천자를 물어뜯기 위해 확실한 기회를 엿보며 세계에 동화되어 있던 그녀.

아리엘만이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파괴의 중심부- 그 근원지에 홀연히 나타난 한 사람을.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그대로 타천자의 뒤편에 솟아난 익숙한 한 남자를. 그녀는 그를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 속에서.

찰나의 틈새, 그 늘어지는 잔향 속에서.

퀴잉-

그렇게 아리엘의 시야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들어온 순간- 바로 그 순간 그어진 궤적을 따라 칠흑의 참격이 뿜어져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