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축제 (3)
그야말로 일방적인 유린에 가까웠던 싸움.
유천하와 진시우- 그들의 전투는 시작된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바로 종료되었고, 결과는 그렇게 함축될 수 있었다.
사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초상 능력 위주로 싸우는 각성자들이 전투에서 상대하기 꺼려하는 부류는 결국 더 높은 출력의 이능을 구사하거나, 혹은 그런 이능의 발현마저 무시한 채 한순간에 다가와 근접전을 벌이는 초인이었으니 말이다.
즉- 그런 두 부류를 동시에 마주한 시점에서 타천자의 결말도 정해진 운명이었을 뿐.
진시우의 몸에서부터 터져 나온 빛의 파동은 그대로 잡다한 마인들을 한순간에 불태우며 퍼져나갔고, 그 백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뻗어 나간 유천하의 검격은 하위권 타천자가 받아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격에 마인의 팔이 잘려나가고, 이격에 가슴이, 이어서 심장이 베여나간 것도 어찌 보면 그저 당연한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1학구··· 저쪽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데.
-타천자가 한 명, 아니 두 명 더 있었군.
-두 명? 그럼 세 명이나 쳐들어왔다고?
그들이 아무리 빠르게 전투를 끝냈다 한들 분명 3학구와 1학구에서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고, 유천하의 만상의 눈은 그 부분을 빠르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기세만 봐서는 1학구 내부에 2명의 타천자가 더 들어와 있는 상태- 그것도 둘 다 조금 전처리했던 타천자보다는 더 강해 보였으니 지금 막 교전이 시작된 걸 확인한 유천하로서는 바로 선택을 내려야 했다.
물론,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수호자급 마수도 중요한 요소긴 했지만 기껏해야 황혼급 하나에 여명급 넷 정도라면 현재 회랑에 있는 생도들의 숫자만 해도 천을 넘어가는 만큼 알아서 해결할 수 있었다.
허나 이지 없는 마수라면 모를까 사람의 지성과 경험을 갖고서 타락한 마인들은 실전경험이 부족한 생도들에겐 분명 위험한 적이었고, 하물며 그 상대가 등천자급을 넘어가는 수준이라면야 보편적인 기준에선 동레벨의 마수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사람을 상대로 살의를 주고받으며 싸워본 경험이 부족하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므로.
-저쪽은 내가 해결하지.
정보를 공유한 둘은 길게 의견을 나눌 것도 없이 바로 1학구를 향해 발을 박찼고, 다시 서로 다른 곳을 향해 흩어졌을 뿐이었다.
유천하는 이하린과 아리엘을 향해.
진시우는 그냥 나머지 한곳을 향해.
그리고 그렇게.
“······.”
진시우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하나의 춤사위와도 같았다.
어두운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푸른 색채.
육안으로는 제대로 관측하기도 빠듯할 만큼 초속의 속도로 지면과 사슬을 박차며 움직이는 남궁설아의 신위는 수십 갈래의 채찍을 자유자재로 농락하며 마치 춤을 추듯 검무를 펼쳐냈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흔들린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타천자에게서 멀어졌다가도 다시 한순간에 타천자를 향해 다가가 군청색의 쾌검을 그어내고 있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사슬을 가볍게 쳐내고,
다시 적을 향해 패도의 일격을 쏘아낸다.
퀴이잉-!! 쾅-!! 카가가가각-!!
사슬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마력의 양을 봐선 조금이라도 리듬이 엇나가는 순간 그대로 치명상으로 이어질 격전이었지만, 남궁설아는 평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실력으로 타천자를 공략해나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완급까지 확실히 조절해나가면서.
“하! 벌써 지친 거냐? 이 쥐새끼 같으니!!”
“······.”
아무래도 그가 보기엔 남궁설아는 타천자를 살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고 그 추측을 긍정하듯 남궁설아는 가볍게 공세를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눈만큼은 흔들림 없이 마인의 심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소 아슬아슬해 보이긴 하다만 타천자의 상태를 보니 승산이 없어 보이진 않는 상황.
물론 타천자의 수준이 낮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 녀석 또한 마력특화형의 각성자였고, 가속된 남궁설아의 움직임은 근접계 초인들마저 제대로 인지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 서로의 상성은 상당히 나쁜 편이었다.
차라리 자신과 같이 범위 자체를 밀어버리는 방식도 병용한다면 모를까, 저렇게 타겟을 직접 타격해야 하는 부류의 능력이라면 남궁설아의 속도는 상당히 거슬리는 수준일 터.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실력 자체도 뛰어나 보였으니 아마 라피냐가 저걸 보았다면 영입을 욕심내지 않았을까? 진시우는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상기한 그는 다시 빠르게 빛의 마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저답지 않게 잠시 감상에 빠져버리고 말았지만 지금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도 유천하도 모두 3학구의 수호자급 마수보단 1학구의 마인들을 처치하기 위해 이동한 것 아니던가?
거기에 그녀의 전투도 승산이 보일 뿐이지 잘해야 동귀어진이 될 가능성이 더 컸으니 저렇게 맡겨만 두고 있을 때가 아니었을 뿐.
그렇기에.
---------------------------------------------!!
남궁설아의 신형이 타천자에게서 멀어진 순간,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시작된 빛의 기둥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대로 마인의 몸을 강타하며 잿빛의 사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야말로 단 한 순간에 말이다.
“크윽······ 크아아악!!”
“······!!”
콰과과과-!! 솔직히 말해서 남궁설아가 휘말릴까 봐 마력을 조절했기에 최선의 위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한된 마력만으로도 진시우는 타천자의 능력을 뚫고 녀석의 마력 너머. 그 본질을 곧바로 타격해낼 수 있었다.
물론 내구도가 튼튼한 마인이었다면 이걸로는 별 효과를 못 봤겠지만, 저렇게 마력만 믿는 전형적인 초상 능력 특화형은 진시우에겐 무척이나 손쉬운 유형의 상대였을 뿐.
그러므로- 진시우는 타천자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일념혼에 하나의 원을 그리며 특성을 발동시켰고, 난데없는 포화에 잠시 당황했던 남궁설아도 이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저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인 남궁설아의 입에서 벙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시우?”
“뒤로 더 물러나.”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불필요한 설명은 안 하겠다는 듯 짤막하게 대꾸한 진시우는 다시 한번 더 마력을 끌어올렸고, 그가 영혼에 원을 하나 더 그려낸 순간- 그 즉시 증폭된 마력은 순식간에 타천자를 향해 휘몰아쳤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백색의 기둥.
그림자를 찢어발기는 빛의 포화.
그리고.
터져 나오는 강대한 마력의 파동!
콰아아아아앙-!!!
남궁설아로서는 당연히 갑작스레 시작된 그 공세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는 조금 전 황찬룡을 보냈던 걸 생각하고는 진시우가 자신을 도우러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당연히 끝까지 저 혼자 전투를 이어나가고 싶은 기분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사방에서 마수와 마인이 날뛰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 미련한 고집을 피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금 이 상황은 분명 실제 상황. 그렇다면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타천자를 토벌할 수만 있다면야 당연히 그걸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이······ 망할 애새끼들이!!”
진시우가 끼어들었다 한들 저렇게 쉽게 끝날 정도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으니, 그녀로서도 계속 기회를 엿보면 그만이었을 뿐.
쿠드드득··· 콰과과과과과-!!!
그렇게 타천자의 몸에서 시작된 그림자의 물결이 순식간에 빛의 포화를 밀어내며 터져 나왔고, 그 즉시 마인의 마력은 잿빛의 사슬로 화해 녀석은 휘감싼채 주변을 휘저어나가기 시작했다. 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빛의 마력을 후려치며, 그대로 다소 거리를 벌리고 있던 진시우를 후려칠 듯이 말이다.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잿빛의 사슬.
그 중심에서 흐물거리는 흑의 색채.
방심한 사이 가격당한 피해가 적지는 않았는지 마인의 형태는 육체의 형상에서 조금 벗어난 채 안개처럼 일렁거렸고, 그 기괴한 형상의 괴인은 온몸의 마력을 터트리며 그림자의 소용돌이를 바깥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마력의 폭류!
허나- 진시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미동 없이 끝없이 마력을 쏟아냈다.
“너희 둘 다 직접 사지를 찢어주마!!”
“아까부터 쫑알쫑알··· 입만 살아선.”
애초에 대인전에 특화된 근접계 초인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마력과 이능만으로 밀어붙이는 부류라면 진시우는 하이랭커급이 아닌 이상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에겐 특성 <광휘의 세례>와 일념혼이 존재했고, 그의 특성은 빛 속성 마력에 한해서는 거의 제로 코스트에 가까운 효율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출력과 상관없이 천천히 상대의 마력을 깎아내 말려 죽이면 그만 아니겠는가?
만약 이곳에 남궁설아가 없었고, 승천제로 인해 몰려든 사람들이 휘말릴 걱정만 없었다면 출력을 높여 속도를 더 늘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었으니 진시우는 조금 더 여유롭게 전투를 끌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또한.
확인해야 할 부분도 하나 있었고 말이다.
“이 새끼가··· 감히 내가 누군지 알······!”
“황혼급 주교. 스카로네 바샤.”
“······뭐?”
“누가 머저리 새끼들 아니랄까 봐 항상 똑같은 패턴, 똑같은 개소리지. 병신같이.”
그 순간- 진시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짜증 서린 말에 타천자의 형상을 이루던 잿빛의 마력이 크게 요동치듯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분노해서가 아니었다.
“네 녀석··· 내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지?”
“진작에 뒤진 새끼라는 것도 알고 있지.”
“······뭐? 갑자기 뭔 개소리냐 그건!”
그 말에 당황한 타천자가 이번에는 분노를 토해내며 뭐라 광분을 토해내기 시작했지만, 진시우는 그걸 가뿐히 무시한 채 다른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타천자의 모습과 능력을 확인하니 어느 정도 생각했던 부분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여명급 주교. 황혼급 주교. 그렇다면······’
진시우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유천하가 향했던 방향- 정확히는 그쪽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 파동을 감지해보았고, 이 상황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저기엔 멸화급 주교라도 와있는 건가?”
“······.”
“오스벨런··· 아니, 저기도 또 망자겠지.”
그렇게 진시우는 사실을 추측해냈지만, 그 말을 들은 타천자 스카로네도 남궁설아도 지금 들려온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타천자는 그저 진시우의 마력을 맞받아치며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남궁설아는 아예 그 말의 의미 자체를 몰랐기에 요동치는 타천자의 빈틈만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태도와 반응에도 진시우는 타천자를 묶어두며 빠르게 정보를 취합해보기 시작했다. 불완전하긴 했지만 이면순례자의 집행자인 그로서는 이 일련의 상황들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취합되기 시작한 정보.
‘여명급 주교. 카샤스 리델. 1년 전 페루에서 사망. 토벌자는 아마······ 나르화리얀.’
‘황혼급 주교. 스카로네 바샤. 그린란드에서 3년 전 사망. 토벌자는 루타텔 화이트.’
‘아까 전 잔챙이들의 대부분은 이미 사망한 놈들이거나 연맹에 수감된 녀석들. 정보와 일치하지 않는 놈들은 그렇다면 아마······’
하지만.
‘······아마?’
바로 그 순간-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 속에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콰아아앙-!! 진시우의 마력이 흐트러진 순간을 노리고 튀어나온 잿빛의 사슬이 빛의 기둥을 쳐내며 사방을 휩쓸었고, 그 기습에 휩쓸린 그의 신형이 뒤로 밀려 나가던 순간- 그 즉시 남궁설아 또한 가속에 접어들었다.
타천자의 심장을 향해 늘어지는 잔향.
서로의 빈틈을 노리고 쏘아지는 일격.
하지만.
콰과과과과과과과-!!!
이미 최대치로 마력을 발현시킨 타천자의 형상은 그대로 그림자의 파동을 터트리며 남궁설아의 공격을 튕겨냈고, 마찬가지로 빠르게 제정신을 되찾은 진시우의 본능은 그 즉시 영혼에 세 번째 원을 그려냈을 뿐이었다.
-----------------------------------------------!!
그렇게 벌써 세 개의 원을 그려낸 진시우의 영력은 말도 안 되는 규모로 마력을 증폭시켜 빛의 파동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점점 떨려오는 대기 속에 빠르게 고개를 휘저은 그는 다시 전투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째 순간적으로 조금 몽롱해졌던 느낌.
의아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그리 중요한 부분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서는 우선 지금 터져 나오는 이 마력을 엉뚱한 방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제대로 제어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빠르게 끝내지.”
우선은 마인부터 죽이자- 진시우는 그런 생각 속에 다시 빛의 포화를 내리찍었다.
***
전투가 시작되고 흘러간 시각은 단 3분.
허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꿀렁거리는 공간의 단면은 끊임없이 사방을 꼬아내며 그녀들의 감각을 어지럽혔고, 물리적인 거리감마저 뒤섞여 현실에서 벗어나 버린 광경은 그렇게 쉴 새 없이 악의를 토해내고 있었다.
뱀처럼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지면.
허공에 떠다니며 휘몰아치는 파편들.
콰과과과과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 비현실적인 공상의 가운데서 분투를 펼치고 있었으니, 하늘에 달라붙어 있던 벽면을 밟고서 공격을 회피하고 있는 이하린의 정신은 이미 진작에 무아지경에 접어든 상태였다.
퀴잉-! 궤적이 공간의 간섭을 베어낸다.
그 순백의 검격은 특성이 발현되기 전의 마력의 전조도, 현상으로 화한 공간의 왜곡마저 베어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하늘을 박차고, 대지를 박차고, 중력의 방향마저 뒤섞여버린 세계에서 오로지 타천자를 향해서.
이하린의 신형이 잠시 흐릿해진 순간- 그 즉시 사방이 그곳을 향해 뭉쳐졌고, 직접적인 왜곡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천자는 이차적인 여파로 그녀를 가격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오로지 저 자신의 직감만을 믿고 계속해서 타천자를 향해 나아갔다.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고속의 회피 기동.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백색의 별무리.
단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가는 그대로 공간의 왜곡에 휘말려 육체가 찢겨나가겠지만, 무아에 접어든 그녀의 움직임은 유려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완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를인지하는창에빗장을걸어세우고만물을받아들이는통로에휘장을내려놓······”
[↖︎ ↘︎ ⇡ ⇠ ← ⇢ ↑ ↓ ⇣↑ → ⇟ ⇞ ]
이하린의 움직임이 흐트러질 때마다 뒤에서 언령을 준비하고 있던 아리엘은 마력을 제어해 문자의 형상을 조형해냈고, 입으로는 스펠을 외우면서도 그녀는 그대로 문자로 빚어진 마력의 형상을 <심적권령>을 통해 언령으로 발현시켜 이하린을 보조해주었다.
원래라면 보조수단에 불과한 응용인 만큼 당연히 실제 언령같은 힘을 갖는 건 아니었지만, 한꺼번에 다수의 문자를 발현시키니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마력은 일종의 쐐기점이 되어 타천자의 능력에 간섭해나갔다.
[위 ↑]
우웅-!
비가시의 형태로 떠오른 마력의 형상.
그곳에 맞닿는 즉시 왜곡이 뒤틀린다.
카가가각-!! 비록 온전한 건 아니었으나 상대의 이능에 더해진 힘은 그대로 방향을 왜곡시켰고, 그에 이하린을 노리던 궤적마저 약간의 차이로 목표에서 빗겨낼 수 있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완벽한 마력 운용.
이것이 강력한 한방을 준비하기 위해 스펠을 외우면서도 상대방의 공간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아리엘이 떠올린 방법이었으니, 덕분에 그녀는 사고를 분할시키는 것만으로도 공격의 준비와 이하린을 위한 최소한의 수비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마력을 감지하고, 분할하고, 제어해내는 다중의 사고과정이 그녀에게도 큰 부담을 주긴 했으나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허··· 볼수록 재주가 많은 아이로구나.”
애초에 타천자 베헤딕트가 다루는 이능은 마력의 선을 따라 발현되는 공간의 왜곡.
처음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는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지만 몇 번의 교전만으로도 아리엘은 상대의 마력을 감지해낼 수 있었고, 그 왜곡이 시작되는 근원- 마력의 선을 막아내면 자연스레 특성의 발현을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물론 저 괴물 같은 타천자가 다루는 힘은 단순히 왜곡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지만, 공간 이동의 경우는 공격용이 아니라는 느낌.
‘차원을 넘나드는 건 별개의 힘이었어.’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타천자의 특성은 공간의 왜곡이었고, 둘 다 같은 공간계열의 능력이기에 착각하긴 했다만 공간이동- 즉, 차원의 단면을 다루는 능력은 베헤딕트 본인의 능력이 아닌 별도의 독립된 능력이었다.
그 증거로 녀석이 그 능력을 사용했던 건 오로지 저 자신의 이동과 이하린에게 직접 손을 대 허공으로 날려 보낸 게 전부였을 뿐.
상세한 조건과 범위까진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공간의 왜곡만큼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는 듯 했고, 정작 공간의 왜곡은 결국 타천자 베헤딕트 본인으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마력의 선을 끊어내면 자연스레 그 뒤는 이능의 발현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리고 다시- 그 말은 즉.
이하린이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후방에서 의식을 준비하는 아리엘에게 가해지는 위협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는 소리.
그 사실을 그녀들이 깨닫게 된 순간은 교전이 시작되고 고작 1분이 지났을 무렵이었고, 그에 아리엘의 앞을 지키고 있던 이하린은 즉시 타천자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게 아리엘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타천자를 공략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었으니까.
당연히 타천자 또한 그걸 인지하고 왜곡의 선형을 빙 둘러 휘두르기 시작했지만, 직접 육체를 왜곡시키는 것만 아니라면야 그 정도 공격쯤은 아리엘 혼자서도 큰 부담 없이 저항하고 빗겨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아리엘은 타천자를 토벌하기 위한 준비를, 그리고 이하린은 그런 아리엘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전투를 이어나갔고, 조금씩이지만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야 15m. 언제 이곳까지 올테냐.”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조금에 불과했을 뿐.
당연히 그녀가 능력에 간섭해오는 방식도, 무엇을 노리는지도 타천자는 처음부터 간파해냈지만 그 부분에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물론 지금의 대치도 감탄스럽기는 했다.
그 자신의 특성 자체를 무효화시키거나 강제로 뒤틀어내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대로 깨부수면 그만이지만, 저 영리한 아이는 자신이 발현하는 마력의 흐름을 그대로 감지해 그 방향 그대로 힘을 더해 공격을 틀어낸다.
저걸 방지하려면 그 상황을 가정해 그가 먼저 힘의 가감을 예측해내야 했지만, 그의 감각으로도 그 형상이 제대로 인지되지도 않는 무수한 마력의 덩어리들이 사방에 떠다니고 있었으니 그로서도 아리엘의 감응력과 제어력에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희망 속에 발버둥 치다 현실을 깨닫고 절망하는 표정은 언제나 감미롭게 다가오지.”
전투가 시작된 지는 이제 겨우 3분이 지난 참이고,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가는 중이었으니 당장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한들 저게 어떻게 유의미한 위협으로 느껴지겠는가?
저 뒤의 아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을지언정 기본적인 마력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었고, 그것을 제외한다면야 저에게 다가오는 꼬마는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그때가 이 대치가 끝나는 순간이 될 터였다.
그리고.
“자··· 어디 한번 계속 발버둥 쳐보거라.”
이대로라면 그게 그리 먼 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타천자는 그런 판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