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35화 (135/205)

광란의 축제 (2)

미소와 함께 뻗어져 오는 잿빛의 손.

그 궤적을 따라 일렁거리는 공간의 균열.

아직 정확한 특성까진 모르겠지만 조금 전 등장에서 목격했던 모습과 지금의 현상 속에서 이하린은 적의 능력이 공간과 관련된 특성임을 유추해낼 수 있었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손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림자 교단. 멸화급 주교.’

대체 이 녀석들이 왜 지금 등장한 것일까- 자신이 적었던 내용대로라면 지금은 아직 그림자 교단이 표면 위로 부상할 시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2학기. 진시우가 멸화급과 조우하고 나서야 그들은 활동을 개시했을 터.

그러니 원래라면 지금 교단은 남미의 침식영역에서 근원석을 연구하고 있어야 했다.

물론 그간의 경험에서 깨달았듯이 완벽하게 정해진 미래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 세계에 빙의한 이상 미래로 향한 물줄기는 뒤틀리기 시작했고, 지난 2년간 이미 많은 변수를 만들어버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단순히 원작과 비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란 것 또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 세상의 모든 일에는 분명 인과가 존재했고,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으니 지금 이 상황에도 이유가 존재해야 했다. ‘원작’의 세계에선 이런 무모한 짓 따윈 벌이지 않았을 놈들이 왜 등천회랑 테러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는지. 그것도 왜 하필 승천제라는 시기를 골랐는지.

그리고 또한.

‘베헤딕트 휴반······? 왜 바뀐 거지?’

왜 전혀 모르는 자가 그림자 교단의 멸화급 주교를 자처하고 있는가- 까지도 말이다.

물론 그간 자신이 펼쳐온 날갯짓이 무언가를 바꿔냈다면, 그 변수의 바람이 멸화급 주교의 사망으로 이어졌다면 주요 인물이라 한들 교체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그 정도 수준의 강자가 죽으려면 지금의 유천하같은 변수나, 승천자 정도의 인물과 만났어야 했을 테니 그건 희박한 확률이긴 했지만, 그래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터.

그렇기에 아직도 마인을 향해 검이 뻗어져 나가는 중이었지만, 찰나의 순간 동안 그녀의 정신은 저작권리의 가호를 발동시켰고-

그리고 그 순간.

‘그림자 교단. 멸화급 주교. 오스벨런.’

‘타천자 오스벨런. 현재 상태. 생존.’

‘현 위치 남아메리카 마나우스 외곽.’

지잉-!! 이하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 속에 즉시 미간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뻗어 나가던 검이 순간적으로 흔들린다.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라는 걸까- 그녀는 눈앞의 마인이 한 말과는 다르게 아직 멸화급 주교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그렇다면 거짓말을 했을 마인의 실력이 정말 하이랭커급에 근접해 보인다는 점에 혼란한 기분을 느꼈으며, 평소와는 달리 강한 두통마저 동반된 가호의 여파에 저도 모르게 멍한 기분에 휩싸여버렸다.

하지만.

카가가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검은 드디어 마인의 손과 충돌했고, 특성의 백업을 받은 백색의 빛은 그대로 공간의 왜곡마저 무시하며 잿빛의 그림자를 향해 나아갔을 뿐이었다.

왜곡된 허상 따윈 가뿐히 지나치며.

마인의 본질을 그대로 베어낼 듯이.

그리고는.

“이것까지···? 거슬리는군.”

“······.”

순간 잠이 들것처럼 몽롱해진 기분에 저도 모르게 이하린의 기세가 흐트러졌고, 백색의 검이 타천자의 손을 베어냄과 동시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풍경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마치- 바닷속에 빠진것 처럼 말이다.

키이잉-!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일변하는 풍경.

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하린이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옥상에 있던 그녀의 몸이 한순간에 80m 가까이 되는 상공에 도달한 뒤였고,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중력에 사로잡힌 채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후우웅-!

“······!!”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이하린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위기에 처한 이성은 즉시 잡념을 털어냈고, 이미 임전 태세에 들어와 있던 만큼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다시 올라가야해!’

조금 전 정신이 잠시 이상해지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이 없어지면 아리엘은 저 마인과 단독으로 전투를 치러야 했고, 그건 너무나도 위험했다.

저 마인은 하이랭커급으로 추정되는 괴물.

그러니 아리엘을 지키기 위해선 자신은 빠르게 다시 저 위로 올라가야 했다. 허나 현재 위치는 80m 상공, 승천관의 외벽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상황, 벽에 검을 박아 넣어 멈추기에는 위치와 높이가 애매했으니- 그렇다면 추락을 막을 요소가 전혀 없다는 소리.

의념으로 몸을 들어 올린다? 기각.

마법사도 아니고 그런 건 무리였다.

허공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기각.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무리였다.

검을 밟고 뛰어오른다는··· 가능했다.

물론 그것 또한 제대로 발을 박차기 위해서는 의념을 응용해야 했고, 다시 짓밟은 검을 회수하기 위해선 꽤 집중을 해야 했다. 공세에 적용하는 거라면 모를까 의념의 외부응용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난데없는 추락사를 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을 뿐.

그렇기에 추락하던 이하린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검을 발밑에 갖다 대기 위해 몸을 뒤집은 순간, 그 순간 이하린은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자세 유지해!”

“······아리엘 씨?!”

옥상에서 뛰어내려 추락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금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말이다.

“중력부가. 부유제어. 활강부여.”

우웅-!! 언령의 백업을 받으며 낙하한 아리엘의 신형이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던 이하린을 덮쳤고, 그 상태로 이하린을 껴안듯 붙잡은 그녀는 허공에서 회전하듯 무형의 날개를 펼쳐내며 뛰어내린 옥상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력의 유동을 관측했다.

그러면서도 아리엘은 다시 빠른 속도로 주언을 읊조리며 공격을 준비하였고,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열여섯 마디의 음절이 흘러나온 순간 그녀들은 지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공간 왜곡이야. 저기선 너무 위험해.”

“······아.”

탁- 바닥에 발이 맞닿음과 동시에 흘러나온 짧은 설명에 이하린은 곧바로 방금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단번에 특성을 파악해낸 모양.

확실히 아무리 승천관의 면적이 넓다 한들 옥상의 면적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곳에서 공간계 능력자를 상대하기엔 적에게 조건이 너무 유리했다. 하물며 그 상대의 기량이 한눈에 봐도 어지간한 타천자의 수준을 넘어섰다면야 더욱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아리엘은 확 트인 사방을 향해 마력의 파문을 일으켜 감지를 시작했고, 이하린도 검을 들어 올리며 기감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드드득-!! 한순간에 공간의 균열이 일어났고, 타천자가 그 틈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것도 무척이나 평온해 보이는 표정으로.

“쯧쯧. 불경한 녀석들 같으니.”

사방에 일렁이는 마력을 퍼트리면서.

미소와 함께 추악한 악의를 뿜어내면서.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무척이나 신속했을 뿐.

쾅-!! 타천자의 입가에 제대로 미소가 떠오르기도 전에 이하린의 본능은 순식간에 정신을 벼려냈고, 신검합일- 완벽하게 검과 하나가 된 신형이 흑백의 잔향으로 늘어졌다.

무념의 상태에서 발하는 하나의 일념!

퀴이이잉-!!

비록 조금 전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신이 흔들렸지만 지금은 멀쩡했고, 공간계 특성이란 걸 명확히 인지한 이상 그녀는 같은 수법에 또 당해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물론 이하린의 실력으론 특성으로 발현되기 직전의 전조를 전부 다 감지해낼 순 없겠지만, 현재 그녀의 직감은 <검의 반려>의 백업을 받고 있었다. 검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세계의 가호가 주어지는 효과를 말이다.

그렇기에.

쿠구구구구구-!!

그녀는 자신이 발을 박찬 순간 요동치는 마력의 물결을, 그리고 거기서 시작되는 현상의 간섭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을 인지한 즉시 빠르게 궤적을 그어냈다.

마력의 간섭이 일어나는 즉시 베어낸다.

공간이 왜곡되는 순간 곧바로 깨트린다.

퀴이잉-! 콰드드득-!!

백색의 별빛은 순식간에 허공을 그어냈고, 그와 동시에 왜곡의 전조가 깨져나가며 균열이 시작되려던 마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본래라면 현상으로 화하기 이전의 마력을 베어내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신검합일에 다다른 이하린의 의념과 특성의 백업마저 부여된 그녀의 검은 평상시라면 불가능했을 행위마저 거리낌 없이 가능케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특······”

“아리엘.”

바로- 공간의 간섭마저 베어낸 이하린이 이 순간 타천자의 앞까지 도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정지. 동결. 구속. 중압.”

“성··· 이······”

우우웅-!! 아리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언령이 순식간에 네 갈래의 현상으로 화해 타천자의 몸을 휘감았고, 이하린의 검을 향해 손을 뻗어오던 마인의 손이 잠시 얼어붙었다.

“······.”

동시에 마인의 몸에서 일렁거리는 마력.

하지만 타천자의 몸에서 마력이 풀려나오기도 전에, 멈춰선 마인의 손이 다시 까닥거리기도 전에- 그 찰나의 순간 그어진 다섯 번의 검격은 그대로 마력의 간섭마저 무시하며 타천자의 몸을 베어냈고, 밤을 가로지른 백색의 검강은 그림자를 찢어발겼을 뿐이었다.

일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연격이 이어진다.

그림자를 상대로 별빛의 검무가 흩날린다.

그리고.

“······.”

콰각-!! 뒤늦게 겹쳐진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검에 베였던 타천자의 몸에서 그림자가 토해졌을 때. 다시 급격하게 가속된 시간 속에서 억지로 세계와 동조해낸 아리엘의 입에서 주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새어나왔다.

그렇게.

[낙뢰.]

쿠루룩.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의 선!

츠즈즉- 낙하하는 동안 읊조렸던 주문의 인과가 그 한마디에 완성되었고, 백열의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그림자를 내리찍었다.

-----------------------------------------------!!

그것도 무척이나 강렬한 빛을 동반하면서.

콰아아아앙-!! 어두운 밤거리에 그렇게 한순간에 낮이 찾아왔고, 그 백야의 가운데서 이하린은 눈앞에서 터져 나온 빛을 응시하며 그대로 다시 또 검신에 검강을 덧씌워냈다. 적의 방심 속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단번에 핵을 베어 가르기 위해서.

신검합일 身劍合一

순식간에 허공에 새겨진 백은의 궤적.

그렇게 이하린의 몸은 검과 하나가 되어 아직도 멈춰있던 타천자의 심장을 베어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키이잉-!!

“······!”

그녀가 내지른 일격은 그대로 대기를 가로지르며 허공을 베어냈고, 이하린이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얼어붙었던 마인이 수십 미터 너머에 나타난 뒤였을 뿐이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모습으로.

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듯이.

마인은 그렇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공간의 왜곡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녀석이나, 마력의 격차도 무시하고 현상을 강제하는 녀석이나······ 참으로 대단하구나.”

“······.”

“하지만 결정력이 부족하니 어찌할까.”

정확히 말하자면 분명 지금 마인의 몸 곳곳에는 이하린의 검에 베여나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다시 그 몸에서부턴 찐득한 그림자가 피처럼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딱 거기까지였을 뿐.

마인이 한 말처럼 그녀들의 공격에는 결정력이 부족했고, 저 정도의 피해는 침식의 마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지금도 그 상처들은 순식간에 꾸드득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마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처럼 상성이 불리한 상대를 만났는데 아직 제대로 개화하지도 못한 아해들이라니 안타깝지만, 이 또한 인과의 결과물이겠지.”

“······.”

“무의미해 보이는데 계속해볼 생각인가?”

그 말과 함께 다시금 떠오른 인자한 미소.

쿠드득-!! 하지만 그 미소와는 별개로 타천자의 마력은 이미 사방을 잠식해나가며 주변의 풍경을 뒤틀어내는 중이었다. 공간의 좌표를 뒤섞으며, 모든 위치를 꼬아내면서.

오로지 그녀들만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승천관의 건물과 주변의 광장마저 그 범위에 휩쓸려 왜곡되어 뒤틀려 버린 순간, 그렇게 그의 마력이 그대로 멈춰선 순간.

바로 그 순간.

콰과과과과과과-!!!

사방에서 마력의 파동이 터져 나왔고, 뒤틀린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던 건물들이 그대로 왜곡된 상태로 멈춰선 채 일제히 산산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이내 그 건물들의 잔해마저 다시 물리적인 현상에서 벗어나 곳곳에서 흩날리기 시작했을 뿐.

지면에 박힌 가로등이 하늘을 부유했고,

깨어진 파편이 대지와 뒤섞여 비산했다.

그야말로···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

그렇기에.

“······”

“······.”

저걸 대체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걸까- 순간 그녀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아니, 확실히 그녀들의 눈앞에 존재하는 타천자는 이능에 특화된 능력자였고, 반응속도와 방어력은 부족해 보였을지언정 마력의 규모와 능력의 응용만큼은 정말이지 괴물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승산이 희박했다.

그러니 일개 생도- 끽해야 유망주에 불과했던 그녀들이 하이랭커급 강자에게 압도당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저런··· 겁이라도 먹은 모양이로군.”

차라리 하위권 등천자 정도였다면, 아니 능력의 상성이 나쁘진 않았으니 중위권 등천자급만 되었더라도 가능성이 존재했을 터.

하지만 적은 아무리 봐도 하이랭커급의 강자였다. 그 말은 즉- 최소한 위타극. 등천자가 몰려들어도 이기기 힘든 수준의 마인이라는 소리였고, 그런 만큼 두 사람의 본능이 도주를 요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낮에 있었던 협력전 시합. 그때 그녀들이 유천하를 상대로 지금보다 더 많은 인원이 함께 싸웠음에도 이기지 못했던 걸 생각해보면, 겨우 둘이서 저런 수준의 타천자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얼마나 무모한 행위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드릴게요.”

“부탁해. 시간을 벌어줘. 잠깐이라도.”

“예. 이번에는··· 무조건 지킬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은 이 상황에서 도망칠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못 했다고 하는 게 정답일지도 몰랐다.

비록 눈앞의 타천자보단 약했을지언정, 적어도 그녀들의 기량이 생도들 중에서 최상위권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들을 대체할만한 역량을 갖춘 이들이 손에 꼽힌 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러니 어찌 그녀들이 도망을 가겠는가.

적어도 두 사람은 저 괴물을 상대할 역량도, 상성도 갖추고 있었고, 지금 목격한 광경만 따져보아도 그녀들이 물러난 순간 아무도 저 앞을 막아서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죽이진 못해도. 무조건 버텨야 해.”

“또 이런 상황이 돼서 싫지만······ 최소한 천하 씨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버틸게요.”

“······정말 싫네. 그거. 정말··· 싫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아리엘은 차갑게 가라앉은 정신 속에 그렇게 되뇌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위험해 보일지언정 자신들은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아무리 결과가 너무나 뻔해 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수백 명의 목숨보다는 두 명의 목숨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순간- 아리엘의 머릿속에는 뜬금없게도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와 나눴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공략자가 되고 싶다 했을 때, 아버지가 건네었던 물음이.

-공략자가 되려면 가벼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단다. 그러니······ 약속해줄 수 있겠니?

자신을 걱정하던 아버지의 눈빛.

그리고 그와 함께 건네졌던 말.

아직은 어렸던 시절이었지만 그때 아버지의 물음에 자신은 분명 이렇게 대답했었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제가 죽을게요.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약속한 것처럼, 저도 아빠한테 약속할게요. 저도 그렇게 하겠다고.

그리고 그때 자신의 눈에 비쳤던 아버지의 표정은 무척이나 실망한 것처럼 보였었고, 그렇기에 어렸던 자신은 생각과는 달랐던 아버지의 반응에 한동안 무척이나 토라지고야 말았었다. 정말이지 바보스럽게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리엘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공략자가 되는 걸 바라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이를 위해서 자신이 목숨을 걸지 않았으면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 위험에 처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임을.

그것을 아리엘은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아직도 자신이 평범한 일상을 보냈으면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아리엘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정한 길을 해낼 수 있게 마음 한편으로는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겠지- 아리엘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타텔이 그녀를 걱정하는 만큼, 아리엘 또한 마찬가지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의 아버지가 더 이상 위험에 몸을 내던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그것을 차마 만류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그렇기에 다시.

아버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없다면, 당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있기보단, 차라리 아버지와 같은 곳에 서서 그 등을,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의 등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이 공략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아마 아버지는 평생토록 알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루타텔이 침식에 맞서고 있었기에, 아리엘 자신 또한 침식에 맞서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일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분명 지금도 사방에선 잿빛의 마력이 일렁거리고 있었고, 어두운 밤 아래 공간이 뒤틀리고 있었으니- 지금 하기엔 다소 뜬금없는 생각이었음에도 아리엘이 저도 모르게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게 된 까닭은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잡념을 가라앉혔다.

“둘이서 버티는 건··· 이 정도 규모의 마력이 터져 나왔으니까 5분만 지나면 다른 애들도 엄청나게 몰려올 거야. 몇백 명쯤 모이면 저 녀석도 무리겠지. 전부 각성자니까.”

“······그래도 토벌엔 천하 씨가 필요해요.”

“그래 필요할거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저 때문에 후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고, 슬퍼하는 모습도 보기 싫었다. 물론 그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자신이 그걸 볼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아무리 만약을 생각하더라도 그건 너무나 끔찍하지 않은가?

그러니 아직은 약속을 지킬때가 아니다.

아리엘은 천천히 그렇게 되뇌어보았다.

“버티자. 잠시만.”

“예. 맡겨주세요.”

그리고 그 순간.

콰과과과과과과과-!!!

사방에서 휘몰아치던 마력의 격류가 그녀들을 향해 쏟아졌고, 뒤틀리는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리엘도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약속이 지켜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아리엘의 입에서 바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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