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31화 (131/205)

거울의 양면 (3)

자리를 박차고 나온 아리엘은 한참을 멍하니 걸어 나갔다. 웃고 떠들며 축제를 즐기고 있는 생도들의 옆을 지나쳐, 다시 신기한 듯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곁을 지나쳐, 한참을 걷고 걸어서 인적 없는 2학구까지 오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멈춰 섰다.

어느새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아직은 쌀쌀한 공기가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분명 조금만 발걸음을 옮겨보아도 형형색색의 빛깔로 반짝거리는 축제 현장이 펼쳐지겠지만,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 주홍빛 가로등만이 덩그러히 놓여있는 공원 안에는 그저 적막만이 가득했으니 그 대비가 아리엘에게는 무척이나 차갑게 와닿았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저도 모르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조금씩 식어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시끄럽게 웅성거리던 거리에서 벗어나 홀로 2학구의 공원까지 걸어오게 된 아리엘은 구석에 놓여있던 벤치 위에 주저앉았고, 그리고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어보았다.

“······바보.”

마치 옹알거리듯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

저 혼자밖에 없는 텅 빈 공원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였기에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리엘은 멍하니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멍청이, 머저리, 어리광쟁이, 한심한······”

후- 그렇게 그녀는 말을 멈추고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고,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푹 숙여진 고개. 그녀는 그 상태로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어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온 걸까 이 바보는- 그것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내가 미쳤지 정말······ 진짜 왜 그런 거야.’

잠시 울컥했던 감정이 가라앉고 나자 아리엘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행동이 무척이나 당황스럽게만 느껴졌다. 즐거워 보이는 축제의 분위기가 낯설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시합 장면을 다시 보게 되니 분해서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도 모르게 제 친구들에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걸까?

‘아리엘 이 바보 멍청이. 진짜 머저리.’

분명 아리엘의 분함과 실망은 자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이번 시합을 준비해왔고, 그리고 시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지금의 감정은 그저 바보 같은 투정인 셈이었고, 자신은 결국 저 스스로의 감정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제 친구들마저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 것에 불과했을 뿐.

분명 즐거워야 할 축제인데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겐 얼마나 당황스럽게 느껴졌겠는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천하와 이하린의 표정 속에는 분명 걱정과 당혹스러움이 담겨 있었고, 차가운 공기에 머리가 식혀지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로서는 그게 너무 미안했고, 부끄러웠으며, 또 수치스러웠다.

그렇기에.

“······.”

아리엘은 뒤늦게 자신을 따라온 이하린의 모습에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엿보이는 하얗디하얀 볼.

공원 한구석- 그곳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선 제 눈치를 보고 있는 이하린을 발견한 순간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잠시 웃음이 나올 뻔했고, 그녀로서는 잠시나마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이 다시 이하린에게 너무나도 미안하였다.

애초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축제를 즐기며 돌아다니고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겠는가?

그렇기에 그녀는 우울함과 미안함, 그러면서도 고마운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어보았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괜찮아. 다시 안 숨어도 돼 하린아.”

그러자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는 그림자.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이하린의 몸이 잠시 흔들렸고, 고민되는 기색을 내비치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걸 역시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 순간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와 주홍빛 불빛 아래로 들어온 이하린의 두 눈에는 분명 투명한 빛이 담겨 있었고, 저와 함께 글썽거리고 있는 이하린의 눈망울에 아리엘은 다시 한번 더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

“······네. 몰래 들어서 죄송해요.”

정말 한결같이 착하고 여린 아이구나- 어쩐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나 싶었더니 혼자 자책하는 내용을 전부 들어버린 모양.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기거나 바보 같다고 놀릴 수도 있었고, 혹은 유난 떤다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무엇보다 제 일처럼 같이 공감하고 슬퍼하는 게 먼저였으니 이하린은 정말 한결같은 이하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걱정이 가득해 보이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더 사과를 건네보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해서.”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하린은 그런 아리엘의 사과에도 그저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고, 그리고는 조금 투명한, 그러면서도 염려 어린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며 옆으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아리엘의 옆에 살며시 주저앉는 그녀- 그와 동시에 이하린은 아리엘의 손등 위로 자신의 두 손을 올려놓았고, 이내 그 작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마치- 자신은 정말 괜찮다는 듯이 말이다.

“아리엘 씨 기분은 저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이하린은 그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여러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에요. 아리엘 씨도 이전에 제가 우울해할 때면 이렇게 신경 써주셨고, 항상 먼저 다가와 기분을 풀어주셨잖아요.”

“······.”

“그러니까 오늘은 제 차례라고 생각해주세요. 저도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물론.

아리엘은 그런 이하린의 태도에 참 고마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내 그녀의 말에 다시 감정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걸 인지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흐느적거리는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건 말에 담긴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자신의 투정 하나에 저렇게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눈까지 글썽거려주는 그녀가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었으니, 담담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지금 이하린의 눈은 분명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저리 걱정해주는 걸까.

사실 이하린의 입장에서는 아리엘의 과거도, 재능도, 성격까지도 모두 제 손으로 써 내려간 것이었기에 아리엘이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과 자책도 모두 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잘못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그건 아리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그런 이하린의 모습이 그저 자신이 우울해하는 걸 보고 걱정 속에 울먹거리는 모습으로만 느껴졌을 따름.

그렇기에.

“······?!”

아리엘은 미안함과 의아함,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를 꼭 껴안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세게.

“······대체 하린이 너는 왜 그러는걸까.”

“네, 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정말··· 누가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하래?”

당연히 이하린은 제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순간적으로 상황을 잊고 당황하고야 말았고, 그렇게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긴 했지만, 그와 반대로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달라붙어 오는 아리엘의 태도에 이하린은 다급히 몸을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저를 끌어안고 있던 아리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겠잖아···.”

“······.”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단 말이야.”

힘없이 흘러나온 그 목소리 속에 담긴 마음이 그녀는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쯤은 그래도 괜찮아요.”

그렇기에 이하린은 그녀의 말에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려 꼭 마주 안아주었고, 이내 살며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주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쓸어내리듯이 부드럽게.

아리엘로선 당연히 이런 자신의 모습도, 지금의 상황도 모두 부끄럽고 민망하게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른 누군가한테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잠시 가면을 내려놓고 마음을 풀어버렸고, 이하린 또한 그런 아리엘의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

“······.”

평소였다면 서로의 역할이 반대였겠지만 지금만큼은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위로하고, 위로를 받았을 뿐.

그리고 그렇게 이하린을 꼭 껴안고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리엘은 문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의아함을 느꼈다. 정말 유천하도 그렇고, 눈앞의 이하린도 그렇고 자신의 마음을 참 너무나도 쉽게 흐트러트리는구나- 바로 그런 생각에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이유는 그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은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아리엘 화이트가 아닌, 그저 아리엘이 되는 것만 같았고, 그들의 앞에서는 상냥하고 완벽한 모범생이 아닌 그저 장난을 좋아하는 평범한 생도가 되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그녀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여러 가지가 떠오르긴 했다. 그들이 저를 그처럼 평범한 한 사람으로 바라봐준다는 것도,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것도, 그럴만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분명 관련이 있을 터.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다시 어느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천천히 말을 꺼내보았다.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혹시 기억나?”

“······그때요? 언제 말씀이신가요?”

“너랑 설아가 완전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나타나선 갑자기 싸우고, 천하가 그런 둘 사이에 끼어들구, 그리고 나선 하린이 너가 잔뜩 쪼그라들었던 때. 한번 그런 적 있었잖아.”

“······.”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이하린의 귓가.

그날의 일은 분명 다소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그녀에겐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었으니 그녀는 지금도 이따금 침대 위에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발로 이불을 뻥뻥 걷어찰 정도였다.

그러니 그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아리엘이 그걸 알 리는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손으로 이하린의 머리카락을 매만졌고, 그러면서도 허공을 바라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때 하린이 너는 내 질문에 우리가 유망주라서, 그래서 알고 있다고 했었지. 그치?”

“······아, 네에···”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해왔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떤 공략자가 되고자 하는지······ 글 줄기 너머로나마 좋아했고 이해한다고, 그래서 슬펐다고 했던 말. 그때 너가 말했던 거 다 기억나 하린아?”

“기, 기억은 나는데에······”

“나, 그때 그 말 듣고 진짜 충격받았었다?”

“······충격이요?”

흑역사가 헤집어지는 기분에 수치심을 느끼던 이하린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이어지는 목소리에 태도를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응. 사실 이제껏 살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시선은 많이 받아봤었거든? 호의 가득한 시선도, 질투 어린 시선도, 기대 어린 시선도 모두 말이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런 시선은 처음 받아봤더라구.”

“······.”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해. 정말 누가 우리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겠어? 유망주라는 타이틀은 그런 의미로 주어진 게 아니잖아. 여태까진 아무도 안 그랬단 말이야.”

분명 아리엘의 말은 담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말이 그녀에겐 왠지 모르게 뭉클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설아··· 의 일이 일이다 보니까 그렇게 말했다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었던 거 있지? 그때 하린이 넌 설아만이 아니라 정말 우리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렇게 말했던 거잖아.”

“······네.”

“그래서인지 나한테는 하린이 너가 다른 사람들하고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것 같아.”

물론 그건- 생도 이하린이 아닌, 원작을 집필한 원작자 이하린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친구로만 생각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처음 생각보다 너가 더 특별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어.”

“······어떤 부분에서요?”

“자세히 말하기엔 어려운 부분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나, 가끔식 보내오는 시선이나, 그러면서도 보여주는 여러 모습 등등.”

“······.”

“어쩌면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걸지도 몰라. 남들 앞에선 절대 안 이럴 거면서··· 괜히 너희가 받아줄 것 같으니까, 너희한테는 그래도 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이러는 거지. 바보처럼,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

그렇기에 이하린은 자조적인 어조로 흘러나오는 아리엘의 말에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껴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몰아치는 상념을 가라앉히며 아이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맞닿은 곳에서 올라오는 체온.

그건 분명 따스하게 느껴지는 온기였다.

하지만 이하린에겐 그 생명의 증거가 너무나도 시리게 다가왔고, 그녀는 다시 그런 따스함을 지켜주고 싶었기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적어 내려갔던 과거마저 바꿀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앞으로의 미래에서는 모두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면 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으니까.

다시 그렇기에- 이하린은 고개 숙인 그녀의 귓가에 자신의 진심을 속삭여주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얼마든지 기대셔도 돼요. 정말 괜찮으니까요.”

비록 지금의 그녀가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말 몇 마디가, 그 속에 담긴 진심이 아리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럴지라도 저만큼은 항상 들어드릴게요. 항상 받아주고, 응원해주고, 지켜보고······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

“그러니 얼마든지 기대주셔도 괜찮아요.”

그리고는 이내.

“제게도 아리엘 씨는 특별한 분이니까요.”

이하린은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고선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보았고, 살며시 떨려오는 아리엘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올곧은 목소리로 그리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순간- 아리엘의 시야에 담긴 그녀의 눈빛은 분명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빛을 머금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아리엘은 저를 바라보며 저런 말을 건네오는 이하린의 진심에 잠시 멍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속삭이듯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내가 바보같이 굴어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저도 바보라서 괜찮아요.”

“그럼 내가 막··· 너희한테 도움도 못 되고, 맨날 걱정만 시키는 사람이 돼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저도 항상 그러는데요 뭘.”

하지만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임에도 이하린은 망설임 없이 대답을 돌려주었고, 아리엘은 그 말속에서 분명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몽글거릴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아리엘로서는 이런 상황도, 기분도 처음이었기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떠올랐고, 그렇기에 그녀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중에 혹시 막 승천자 됐다고 나 모른 척하고 그러면 안 된다? 알았지?”

“그럴 일 없어요. 그리고··· 저보다는 아리엘 씨가 승천자가 될 확률이 더 높을걸요?”

“무슨 말이야? 천하면 모를까. 내가 뭘···”

“아니에요. 제가 장담해드릴게요. 아리엘 씨는 나중에 분명 꼭 승천자가 되실 거에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이하린은 망설임 없이 진심 어린 대답을 돌려주었고, 그에 그녀는 목이 메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뿐.

“······.”

그러면서도 아리엘은 다시 계속해서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고, 이대로 있다간 저도 모르게 앞으로도 쭉 그녀에게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질 것 같았기에 결국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입으로는 계속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보면서 말이다.

“······여기 계속 있다간 하린이 너한테 무슨 말을 더 들을지 모르니까 그만 돌아갈래.”

“다시 돌아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그냥 잠깐 우울했던 거야. 그리고 계속 너무 띄워주니까 부담스럽단 말이야.”

“그치만··· 띄워주려고 한 말이 아닌걸요?”

그렇게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아리엘의 말에 이하린도 여전히 진심이 담긴, 그러면서도 사뭇 장난스러운 대답을 돌려주며 일어섰고, 부끄러워하는 아리엘을 따라 걸었다.

둘은 그렇게 같이 거리를 걸어 나갔다.

인적 없는 공원을 나와, 축제 속으로.

당연히 아직 아리엘의 기분은 싱숭생숭했고, 이하린의 기분도 조금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서로를 생각하며 걸어 나가는 그들의 기분은 처음보단 둥그렇게 변해있었으니 둘은 그렇게 다시 축제의 거리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뭐야··· 저게.

-말도 안돼···.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시끌벅적한 축제의 분위기가 아닌, 시간이라도 멈춰버린 듯 적막이 내려앉아 있는 거리의 풍경이었으며, 그리고- 그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건.

[긴급속보입니다. 1시간 전 최초로 발생한 강제 역류 현상을 기점으로 시작된 대규모 역류사태는 벌써 세계전역에서 47개에 달하는 브레이크를 일으켰으며, 그중 멸화급 탑의 역류에 긴급히 승천자 루라텔과 나르······]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따름이었다.

***

1학구와 3학구의 구역이 맞닿는 경계선.

지금- 그 시끌벅적한 축제의 분위기와 인적없는 고요함이 맞닿아 뒤섞이고 있는 어두운 밤거리를 내달리는 한 남자가 존재했다.

마치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눈에 띄면 안된다는 듯이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어둠 속을 달려나가던 남자는 이내 3학구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점점 빠르게 발을 놀리며 숲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가 숲속을 내달리면 내달릴수록 분명 인적이 없어야 할 3학구의 숲속에선 점점 인기척이 생겨났으니, 그는 분명 지금 그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

남자는 잠시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바로 직전에 스쳐 지나갔던 나무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 같다는 위화감이 들었고, 그 어렴풋한 직감이 그의 본능을 상당히 강하게 자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발을 놀리는 와중에도 조심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역시 텅 비어있는 숲의 풍경이었을 뿐.

“뭐야 씨발 착각인······”

그에 남자는 찝찝한 기분에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고, 그와 동시에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을 느꼈다.

눈앞에 나타난 하나의 시커먼 형상.

“······.”

“······.”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인영-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고, 눈 깜빡할 사이- 정말 말 그대로 눈을 한번 깜빡였더니 생겨난 그 형상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내.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한 순간.

바로 그 순간.

“······!!”

푸슉-! 한순간에 뻗어져 나온 묵빛의 검광과 함께 그의 팔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허공에 부유하는 시뻘건, 아니. 혼탁한 그림자로 물들어있는 잿빛의 기류. 그 모습이 남자의 동공에 담긴 시점에서도 그는 아직 통증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본능적으로 행동을 취했다.

후웅-! 상대를 죽이기 위해 뻗어 나간 손.

하지만.

“세 가지만 물을 테니 제대로 답하거라.”

콰앙-!! 그 손이 채 뻗어 나가기도 전에 남자는 목을 붙잡힌 채 바닥에 처박혔고, 뒤늦게 올라온 통증에 비명을 토해내려던 순간에는 이미 그의 입은 흙바닥에 가로막힌 뒤였을 뿐. 정말 단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큽! 크··· 크읍!!”

“······.”

그렇게 유천하는 땅바닥에 처박힌 남자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잠시 숲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다시 그를 바라보며 남자의 턱 끝을 검으로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네 녀석이 지금 왜 여기에 와있는지. 저곳의 녀석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또한······”

담담한 목소리로 하나씩 물음을 읊조렸다.

그렇게 유천하는 흙투성이가 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만상의 눈으로 그의 본질을 들여다보며 빠르게 여러 가능성을 재고해보았고, 이내 변하지 않는 결과에 마지막 말을 이어나가며 천천히 살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내.

“왜 침식마인이 되어있는 건지 말하거라.”

그의 입에서 말이 모두 흘러나온 순간.

“하오란.”

바로 그 순간- 유천하의 눈은 아무런 빛도 없이 시커먼 색채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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