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양면 (1)
협력전 시합이 종료된 시각은 24분 32초.
[수호자급 마수 전 개체 토벌 완료.]
[상황 종료. 협력전 시합이 종료됩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인지함과 동시에 휘두르던 검을 멈춰 세웠고, 그런 내 행동에 나를 향해 검을 들어 올리던 그녀- 이하린 또한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산산이 깨져나가는 세계.
치지직-! 그렇게 시간마저 멈춰선 세상이 한순간에 부서지기 시작했고, 시야를 가득 메운 채 휘몰아치는 오색찬란한 빛무리 속에 우리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키이이잉-!
귓가에 이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나는 혼미했던 정신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느꼈고,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입었던 부상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괜히 이런 곳에서 진행한 게 아니었다는 느낌.
물론, 그래도 아직 여파가 남아있긴 했다.
‘어지럽군.’
탁-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상에 가까운 상태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만큼 나는 한순간에 변화한 신체에 다소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 기분은 모두 비슷하게 체감하는 모양인지 다소 벙쪄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건.
“······아.”
당연히 내 앞에 서 있던 이하린 또한 마찬가지였을 뿐. 방금까지만 해도 온몸이 백색 빛에 휩싸인 채 빈사 상태까지 내몰렸던 그녀는 순간 힘이 풀렸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그렇기에 나는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으며 들고 있던 검을 집어넣었고, 휘청거리는 그녀에게 다가가 살며시 팔을 부축해주었다.
“괜찮으신가요?”
다만- 아직은 감각이 혼란스러웠던 모양.
“······!!”
이하린은 내 손이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기세를 일으키면서 뒤로 물러섰고, 그러면서도 날카로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도 이내 상황을 이해했는지 두 눈을 깜박거리고는 재빨리 검을 집어넣었고, 얼굴을 좌우로 털어대며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변화한 상황도 상황이지만, 역시 그녀도 마지막에 가서는 반쯤 기절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던 게 아니었을까?
아니,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고통이 경감되고 출혈이 대체되었다 해도 피해 자체는 그대로 적용되었으니, 온몸이 빛에 휩싸일 정도로 검에 베여나갔던 그녀의 정신 또한 멀쩡하기는 힘들었을 터.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감각이 이질적이야.’
현실이었다면 최소 중상-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던 몸이 한순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와서 그런지 감각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시합 동안 소모되었던 내력과 업륜까지 모두 회복되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
‘허상차원이라 가능한 일인가? 미묘하네.’
솔직히 말해서 아리엘의 마지막 언령에는 나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네의 특성으로 증폭된 이솔라의 이능은 내력과 의념의 흐름마저 뒤틀어놓았고, 그 순간을 노려 가해진 언령속에는 분명 거대한 규모의 마력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나도 이전처럼 쉽게 털어내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그런 만큼 난데없는 언령의 연타에 나는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기분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고, 차라리 업륜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아이들을 상대로, 다시 이솔라의 특성을 막아내느라 모두 소모된 상태였기에 오직 의지만으로 버텨내야 했을 뿐.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냈긴 버텨냈고 결국 그녀를 제외하곤 전부 베어냈지만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이젠 다 끝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마지막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아······ 수, 수고하셨습니다!”
“예. 하린씨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설마 이렇게 끝까지 버티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해주셨습니다.”
“······아.”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하린에게 인사를 건네주었고, 그러자 그녀는 내 말을 듣고선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오물거렸다.
“······아니에요. 결국··· 아리엘씨도 못 지키구 간신히 버티는 게 고작이었는데요 뭘.”
생각했던 결과와 많이 달랐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 하지만 예상외였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이하린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기죽지 마세요. 충분히 잘하셨으니까요.”
“······!”
그러자 잔뜩 쪼그라든 채로도 조금씩 움찔거리는 이하린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리엘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건 아리엘도 예상 못했을 거에요. 저도 하마터면 죽을뻔했으니까요. 정말 다들 생각보다 많이 준비했다는 게 느껴졌고, 생각보다 더 아슬아슬했습니다.”
“······.”
“진심으로 임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만큼, 솔직히 저도 속으로 많이 감탄했어요.”
이하린이 정말이냐는 듯이 다소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물론. 이건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를 잡겠다고 주연들이 몰려왔다 한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많아도 10분 정도면 모두 베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5분이 지난 시점에서 생각보다 큰 공격에 당해버렸고, 다시 남아있던 아이들 또한 내 생각보다 더 악착같이 덤벼왔다.
특히-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가 말이다.
14명이 8명으로 줄어들기까지가 5분.
거기서 5명으로 줄어들기까지가 1분.
다시- 단 1명만 남게 되기까지가 4분.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하린은 결국 나를 상대로 기어코 혼자서 5분을 버텨냈을 뿐.
“특히 하린씨는 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정말요?”
그런 만큼-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전까지의 전투로 업륜도 파괴되었다는 것도, 내력이 소모되었다는 것도, 결정적으로 아리엘의 언령을 통해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그런 결과가 나온 이유긴 했다. 그런 상태에서 남아있던 아이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특히 가속된 남궁설아는 상당히 거슬렸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나는 분명 빈사에 가까운 몸으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단번에 베어 넘길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모두 그렇게 되었으니 그런 나를 상대로도 끝까지 버텨냈다는 건 대단한 게 맞았다.
역시 이하린은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기량이 꽤나 달라진다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아리엘이 빛에 휩싸인 순간- 그 장면을 목격하자마자 이하린의 기세는 한순간에 돌변했고, 그 이후의 움직임은 확실히 특별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전의 그녀는 체감상 마치 단단한 등껍질 속에 숨어서 팔만 쏙 내밀고 있는 거북이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물론 평소의 이하린은 거북이보다는 토끼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예. 10분 내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10분도 넘기고, 결국 끝내지도 못했으니까요.”
“······.”
그렇게 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더 미소를 지어주었고, 그러자 내 말에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하린도 이내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좀 괜찮아지셨나요?”
“넵!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당···!”
고개를 들어 올리곤 움츠렸던 어깨를 펴는 그녀. 그렇게 나는 이하린의 기분이 다시 괜찮아진 걸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제 슬슬 정신을 차려가는지 서로 주변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도 다들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 신경 쓰이는 모양.
솔직히 말해서 이해되는 반응이긴 했다.
왜냐하면.
-모두 잘했다! 청팀 수고했어요!!
-정말 다들 잘 싸웠어요!!
-황색 팀 전부 마지막까지 멋졌다!
아까부터 계속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열띤 함성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야 계속 같은 자리에서 생도들만 베어나갔던지라 별 감흥이 없었다만, 아무래도 다른 역할을 선택했던 생도들은 이래저래 열심히 돌아다녔던 모양인지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다들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주어졌던 조건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내가 혼자 백색 팀의 생도들을 거의 반절 가까이 상대했던 걸 고려해보자면 이렇게까지 일찍 시합이 종료되기 위해선 다른 생도들은 꽤나 고생을 했을 터. 여러 방해를 뚫고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수호자급 마수를 모두 토벌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긴 했다.
그리고 그건.
[---------------------------------------------!!]
[미친! 무슨 혼자서 마력방벽을···!!]
[시끄럽고 저게 마지막이야 조져 시발!]
[공략속도 한번 뒤지게 빠르네 진짜!!]
눈앞의 스크린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장면만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을 뿐.
지금도 주변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스크린 속에선 나름대로 이번 시합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싶은 순간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당연히 내가 싸웠던 장면도, 그리고 나와는 관련이 없었던 다른 생도들의 활약 장면도 같이 송출되고 있었다.
마수와 마인 개체들로부터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청색 팀의 아이들부터, 수호자급 마수를 공략하기 위해 팀을 짜서 달려드는 황색 팀의 아이들. 그리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흑백 양 팀의 아이들까지도.
물론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존재했다.
예를 들어- 허상이니 조심할 필요 없다는 듯 무식할 정도로 마력을 때려 박으며 방벽을 녹여내는 진시우의 모습 같은 게 말이다.
또한 녀석의 활약에 흥미를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지금도 주변에선 진시우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진시우 저놈은 평소엔 그렇게 설렁설렁했으면서 시합에서는 왜 저리 열심히 했대.
-사람들 앞이라고 가오 좀 챙겼나 보지 뭐.
-미친··· 마수 하나에 몇 명이 달려든 거야.
-저건 그나마 수호자급이지. 저쪽 봐봐.
-응? 저쪽? 저기 뭐······ 시발 뭐야 저건.
-뭐긴 사람 하나에 수십 명이 달려든 거지.
-와······ 쟤는 무슨 역할 몰입을··· 진짜 마인같은데 저거? 메소드 연기 지린다.
그리고 물론- 이야기가 들려오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보았고, 그러다 이내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
“······.”
그녀- 다소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엘과 말이다.
아리엘은 허상차원에서 나온 여파인지, 아니면 가사 상태를 경험했던 여파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결과가 충격적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당히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을 따름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손을, 아니 정확히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없이 나를 향해 축하해- 입만을 달싹거렸다.
그렇기에 나 또한 자연스레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백색 팀 MVP – 이하린]
[청색 팀 MVP – 아델 딜런]
[황색 팀 MVP – 진시우]
[흑색 팀 MVP – 유천하]
바로- 이번 협력전 시합의 결과였다.
***
어느덧 2일 차의 일정도 종료된 시각.
벌써 축제 일정의 3분의 2를 지나쳐왔다는 느낌 때문인지 협력전 시합 결과에 이래저래 심란해 보였던 아이들도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 속에 점점 녹아들었고, 이내 다들 부담을 내려놓은 채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제 남은건 집단전 단 하나.
하지만 그건 개인전이나 협력전과는 조금 다른 유형의 시합이라 그런지 부담감을 느끼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고, 안 그래도 다들 어제는 대부분 수련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던 만큼 오늘 밤 정도는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휴.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맞아요······ 사 먹고 싶은 건 많은데 전부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해야 될 것 같아요.”
그건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어? 우리 하린이 머 먹고 싶은거 있어?”
“쩌어기이··· 냄새 너무 좋은 것 같은데에.”
“큐브 스테이크···? 뭔가 더 섞여 있네.”
분명 아까 시합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기운이 없어 보였던 아리엘이나, 그런 아리엘에게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오랫동안 쭈굴거렸던 이하린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멘탈이 회복된 모양.
개막식 직후에 약속했던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아리엘은 이하린과 나를 붙잡고선 축제나 구경하자며 1학구의 거리로 끌고 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시합 결과를 가리켰을 때 마주쳤던 표정만 봐서는 조금 걱정이 됐었는데,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걸 보아하니 알아서 잘 추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 아까의 기억을 떠올려보고 있자니, 이내 아리엘이 내게 말을 건네왔다.
“천하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줄 기다리면서 사 먹을래. 아니면 그냥 식당으로 갈래?”
“아무거나 상관없··· 아니, 기다리자 그냥.”
“그럼 저녁은 군것질로 결정···! 땅땅!”
그냥 적당히 대답하려 했던 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야시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하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말을 돌려주었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야시장이 좋은 모양.
아리엘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나저러나 상관 없어 보였기에 나는 그냥 이하린에게 맞춰주기로 했고, 그런 우리의 대화에 무심한 척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던 이하린도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헤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엄··· 어디부터어 줄 서실래요오···?”
“어··· 차라리 입구부터 돌아볼래 그냥?”
“그냥 따로 하나씩 서서 사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일이 기다리면 오래 걸리잖아.”
“그건 당연하지 바보야. 그래도 안 겹치려면 일단 뭐가 있는진 같이 봐야 할 거 아냐.”
“······그건 그렇네.”
나를 향해 양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그녀.
사실 마음 같아서야 나는 그냥 둘 다 무시하고 수련이나 하러 가고 싶었지만, 아까의 시합에서 아리엘과 이하린이 내 기대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던 만큼 차마 행동으로 옮기기엔 양심이 조금 찔렸을 뿐이었다.
적어도-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한 건 그녀들이지 않겠는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지난 한 달간 두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던 나는 오늘 시합의 결과가 그녀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정돈 쉽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야 쉽게 추스를 수 있겠지만 속은 아마도 상당히 쓰려올 터.
그런 만큼, 나로서는 그런 속마음까지도 꾹꾹 눌러 담은 채 내게 신경 써주는 그녀들의 호의를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축제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수련은 새벽으로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까 아리엘이 보여줬던 광경이 내게는 좋은 자극이 되었던 만큼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들에게 발을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씨발 깜짝이야. 음식 떨어트릴 뻔했네.
-뭐임. 갑자기 왜 난리야. 미쳤냐.
-방금 걔랑 몸 스쳤단 말이야 새끼야.
-걔? 아··· 쟤? 스칠 수도 있지 왜 이럼.
이런저런 생각 속에 그녀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자니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던 아이의 입에서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씨! 니가 모가지 참수당해봤냐? 감각이 아주 그냥··· 아까 진짜 존나 무서웠다고.
-참나··· 난 또 뭐라고. 그니까 누가 그러래? 네 팀에서 백색 고른 거 너였다며 븅시나.
-아니, 그건 맞는데 살기가 시발··· 시발. 저 새끼 사실 전생에 마인이었을지도 몰라.
-얘가 사람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렇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그곳을 쳐다보았고, 그렇게 이쪽을 흘깃거리던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바닥에 떨어트렸을 뿐이었다.
-얼씨구. 아주 지랄염병을 한다.
-득츠르 즈블. 즈쯕 츠드브즈드 믈그.
“······.”
아무래도 아까는 조금 심했던 걸까- 그것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털어냈다.
그게 조금 전의 내게 부여된 역할이었던 만큼 진지하게 덤벼온 아이들에게 나도 진지하게 임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나로서는 최대한 실전처럼 대해준 것에 불과했다.
물론, 살기까지 꺼내놓는 건 조금 과했다는 생각이 아예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의 마인이라면 단순히 살기뿐만이 아니라 부정 사념까지 같이 내뿜을 테니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렇기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그냥 무시하며 걸어가고 있자니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런데 쟤네는 생각보다 멀쩡하네.
-쟤네? 아, 원래 셋이서 자주 다니잖아.
-그래도 아까 같은 상황 겪어놓고 괜찮은 게 신기하다······ 저래서 유망주라는 건가? 나는 영상으로 봤는데도 개쫄리던데.
-언령 깨부수고 뛰쳐나온 건 미치긴 했지.
-진짜 이젠 같은 급이라고는 못하겠다.
나는 이하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리엘의 눈빛이 흔들리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