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118화 (118/205)

승천제 개막 (2)

빛을 받아 백색에 가까워진 푸른 머리. 기묘한 분위기를 두른 채 걸어 나오는 장난스러운 인상의 남자- 승천자 나르화리얀.

녹색의 눈빛에 진중함을 머금은 채, 백금색에 가까워진 머리카락을 빛내며 걸어 나오는 선한 인상의 남자- 승천자 루타텔 화이트.

난데없이 울려 퍼진 두 사람의 이름에 사람들은 순간 멈칫했고, 이어서 차분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아예 얼어붙고야 말았다. 아니, 묵념을 거치며 차분히 고조되었던 사열식의 분위기는 어느새 온전한 적막 속에 사로잡힌 뒤였을 뿐.

-······.

-······.

나야 들은 내용도 있었고 만상의 눈으로 엿본 것도 있어서 딱히 놀랍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등천회랑의 승천제에는 매년 이렇게 승천자가 방문하는 편이라고 들었지만, 이렇듯 둘씩이나 되는 승천자가 함께 방문한다는 건 절대 흔한 일이 아닐 터였다. 하물며 저 둘은 평소에 얼굴도 잘 내비치지 않는 이들이었다 하니 더 경악스러웠을 테고 말이다.

그렇기에 현장이 쥐죽은 듯이 고요해지는 것도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뿐.

하지만 이내.

------------------------------------------------!!!!

순식간에 사방에서 귓가가 따가워질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그렇게 쏟아지듯 토해지는 외침 속에 가라앉아있던 현장의 분위기도 다시 단번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생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 승천자! 스, 승천자가 두 분이나?!

-이번에도 트리스탄 님이나 프리앙 님이 오실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어떻게 저 두 분이 여기에?!

-아니, 나, 나! 실물, 나르화리얀님 실물 처음 봐! 맨날 침식영역에만 계신다더니?!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괴성을 내지르는 것까진 아니었다만, 그래도 생도들은 저들의 우상이 눈앞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흥분됐는지 몸을 떨어대며 저마다 손을 꽉- 움켜쥔 채 단상 위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저 광경을 한순간도 놓치기 싫다는 듯이 말이다.

아, 당연히 전부 그랬다는 건 아니었다.

“······.”

애초에 나 또한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흥분 섞인 괴성 사이에서도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는 중이었고, 그러자 역시 괜히 승천자는 괜히 승천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들은 내 시선을 느끼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왔다.

그렇게 허공에서 교차하는 짤막한 시선.

나는 그렇게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했고, 동시에 나르화리얀은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 모양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루키 꼬맹이.

“······.”

순간 미간이 조금 꿈틀거렸다.

-와! 와!!! 나. 나르화리얀님이 나 보고 웃어주셨어! 와! 와! 근데 방금 뭐라신거야?

-뭐래. 그냥 입 좀 푸신 거겠지. 그리고 나르화리얀님이 너를 왜 봐. 당연히······ 나지!

-쪽팔리니까 좀 닥쳐 봐. 나니까.

물론 그 행동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지만 이미 한번 그와 대화를 나눠봤던 나로서는 딱히 별 감흥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그가 나를 불렀던 호칭이 조금 심기에 거슬렸을 따름이었다.

이걸··· 기분이 조금 묘하다고 해야 할까?

나르화리얀이 승천자로서 활동한 지도 거의 50년에 달한다는 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얼굴만 보면 루타텔처럼 끽해야 20대 후반쯤 돼 보였기에 저런 호칭은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거북하단 느낌.

하지만- 내 기분과는 별개로 실질적인 나이나 업적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인사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 와중에도 주변에선 계속 환호 섞인 외침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개막식의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말 열···, 예. 정말 열렬한 환······ 음.]

사회자는 슬슬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식순을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에 사회자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승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나르화리얀이 씨익- 웃어 보였고, 나는 달싹거리는 그의 입을 읽어냈다.

‘해결해줄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

단상 위에서 터져 나오는 방대한 마력.

----------------------------------------------------!

그렇게 나르화리얀을 중심으로 흘러나온 푸른 바람이 그대로 수백 미터 반경을 휩쓸기 시작했고, 그 푸른 물결은 흥분했던 사람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대로 현장의 분위기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그 마력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산들거리는 기세로 말이다.

후우우우웅-!!

가시화될 정도로 흘러나온 마력의 파랑.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흘러나가는 바람.

물론 일반 시민들은 갑작스레 스쳐 지나간 마력의 바람에 그저 감탄을 토해내는게 전부였지만, 이능을 단련하고 마력을 사역하는 생도들로서는 그 자연스럽고도 방대한 운용에 입조차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그저 두 눈을 깜박거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지금 일어난 마력의 전조를 사전에 감지해낸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저 마력 속에 담긴 자연의 본질을 감지해낸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건 그만큼 자연스레 세계와 동화되어 흘러나온 마력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감탄스러울 정도.

‘역시······ 승천자급이라면 저 정도는 기본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건가?’

어쨌든, 그렇게 내가 잠시 머릿속으로 나르화리얀이 마력을 움직이던 순간의 모습을 되새겨보고 있자니, 어느새 소란스럽게 들떠 올랐던 현장도 다시 한순간에 차분한 상태로 되돌아왔고, 그 모습에 사회자 또한 재빠르게 그 상황을 받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예. 여러분의 진심 어린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찾아와주신 두 분께 걸맞은 열띤 환대였다 생각하고, 그럼 계속해서 개막식의 식순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넘어가는 진행.

물론 나르화리얀 덕분에 분위기가 환기되긴 했어도 아직 사람들에겐 흥분이 뒤섞인 열기가 조금 남아있었지만, 사람들은 승천자가 들려준다는 축사를 경청하겠다는 듯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단상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그에 화답하듯이-

[그럼 다음으로 승천자 루타텔님의 승천제 개막 축사가 이어지겠습니다. 루타텔님께서는 단상 위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진 사회자의 말에 가만히 침묵을 지키며 생도들을 바라보고 있던 루타텔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는 단상. 그 위에 놓인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와··· 루타텔님 말씀하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에 듣겠네······ 이게 얼마 만이야?

-거의 모습을 안 드러내시긴 하지··· 항상 바쁘실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야야. 조용히 해. 이제 말씀하신다.

흥분과 기대, 그러면서도 긴장과 선망.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루타텔에게로 쏠려 들었고, 각색의 감정들이 뒤섞여 고조된 침묵마저 내려앉아 있는 단상 위에서 그는 말없이 생도들의 사열을 내려다보았다.

“······.”

그리고는- 이내 천천히 그 입을 열어왔다.

***

[1933년 5월 27일.]

축사의 시작은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분명 그 목소리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조금 더 무거웠고, 조금 더 격조 있는 위엄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인사도 없이 시작된 그 축사에 루타텔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 그러나 이내 사람들은 그 날짜가 무슨 날인지 깨달았는지 일제히 작게 탄성을 토해냈다.

왜냐하면.

[그날은 희망이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짜야말로 어찌 보면 지금 본인들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전까지 인류는 거대했던 전쟁의 희생자보다 더 많은 생명을 잃어버렸고, 수많은 희생 속에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능력은 한없이 부족했고, 넘어서야 할 벽은 너무나도 높았으니 심연은 그 말 그대로 인류에게 절망의 심연이었습니다.]

바로- 잠시 멈춰지는 목소리.

그리고는.

[위대한 희생이 있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 순간에도 침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절망을 이겨냈어도, 다시 두 번째 절망이 찾아왔고, 두 번째를 이겨냈어도, 저희는 다시 다음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한 세기의 기다림 동안 8억 명.]

[그렇게 희생의 역사는 끊임없이 기록되고 있고, 저희는 계속되는 악의 속에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세 번째의 절망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세 번째 벽에 마주했을 때 저희는 다시 한번 크나큰 절망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심연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재앙이며, 다시 그걸 이겨내기까지 어떠한 희생을 치르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항상 멸망을 대비하고 있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공략자가 된 이유이며, 다시 승천자가 되어 이 자리에 온 까닭입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던 루타텔은 잠시 말을 멈춰 섰고, 그는 잠시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단상 아래 늘어서 있는 생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을, 저에게 복잡한 눈길을 보내오는 제 아이를 바라보며 루타텔은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아직 어렸던 시절. 공략자가 되기로 한 날- 조부님께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네가 공략자가 된 순간부터, 네가 나아가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된다.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그때. 누군가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네가 죽어라.’]

[그리고는 그걸 자신할 수 없다면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민폐를 끼치지 말고 그냥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저를 걱정해서 하신 말씀일 테고, 저는 깊게 고민한 끝에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죽겠다고, 누군가가 죽어야한다면 제가 죽는 길을 선택하겠다고, 어설픈 마음이 아닌 진지한 마음으로 침식에 맞서겠다고 그렇게 조부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던 아이는 어느새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다시 승천자가 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침식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침식을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루타텔의 말이 다시 한번 멈춰섰다.

하지만 그 입이 다물어졌음에도 누구 하나 소리를 내는 이가 없었고, 그곳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앞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아이들도, 그리고 부친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거운 말에 부친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던 아리엘도, 모두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흡 소리 하나 흘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예.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 명의 각오로 바뀌기에 침식은 모두가 함께 대항해야 할 역경이며, 저는 마수를 토벌하는 법은 알고있어도 침식을 저지할 방법은 모릅니다. 그렇기에 승천자가 된 이 순간에도 하루하루 공략을 시도하러 돌아다니는 게 저의 최선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한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루타텔의 눈이 잠시 아리엘을 바라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의······ 아이가, 친우가, 그리고 이웃들이 침식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다시 언젠가는 침식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떠들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후에 태어날 아이들에겐 역사 속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잊어버릴 지나간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저뿐만이 아니라, 이 앞에 서 있는 생도 여러분, 제 말을 듣고 계신 세계 시민 여러분, 그리고 지금도 현장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여러 공략자분들 또한 마찬가지로 바라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인종과 국적, 연령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다른 이들을 위해 매일같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 고결한 헌신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저희는 같이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인류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고, 이후로도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공략자들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을 수 있는 등을 보여주고,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바랍니다.]

조금 더 힘이 실리기 시작한 그의 목소리.

루타텔의 낮은 목소리는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품고서 등천회랑에 울려퍼졌다.

[모두가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공략자들이 주어진 의무를 완수할 수 있기를. 그리고. 비단 주어지는 권리 때문이 아닌, 그 의무를 짊어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가볍게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무거운 마음을 구가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 힘이 오로지 의무 속에 존경받을 수 있기를, 그 끝에서 비로소 명예롭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금 바랍니다.]

[여러분의 발걸음이, 그리고 저의 발걸음이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최초의 승천이 저희에게 주어진 빛을 꺼트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렵고 힘든 순간이 올지언정 그 벽을 넘고 앞으로 나아가 결국 끝에 닿을 수 있기를, 어떠한 고난과 위험과 절망 속에서도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발걸음이 모여 인류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 것이고, 희망의 등불을 바라보며 인류는 다시 절망을 헤치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저는 그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 이곳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루타텔의 말이 잠시 멈춰섰고, 이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이 바로 승천제의 의의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드리고, 다시 그 빛을 품에 끌어안고 다음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하여 이 축제는 세계 곳곳에서, 매년 계속해서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루타텔의 시선이 주변에 앉아있던 시민들을 한번 훑어보았고, 다시 지금의 광경을 촬영하고 있는 드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단상 아래 각각의 색으로 도열한 채 눈동자에 빛을 채워 넣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도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은, 주어진 의무를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에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최초의 빛을 가슴에 품은 채 다음 세대를 위한 희망의 등불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난데없이 건네진 무거운 질문.

하지만 이곳엔 저런 질문에 대답을 망설일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걸 위해 등천회랑에 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

-······.

선서를 위해 각 학년을 대표하여 나가 있던 아이들- 그중에서도 아리엘은 루타텔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말없이 자신의 손을 심장 위로 올렸고 두 눈을 감으며 묵례를 올렸다.

그것이 지금의 분위기를 헤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답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시작으로 앞에 나가 있던 아이들도 일제히 같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비록 저 질문은 사전에 예정되어 있던 절차가 아니었을지언정 그 누구도 이 순간에 의문을 품거나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앞에 나가 있던 생도들도, 일제히 사열해있던 생도들도 모두 짧게 고개를 숙이며 같은 자세를 취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생도들은 망설임 없이 의무를 받아들였다.

아직 성인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이 행하는 무언의 맹세는 무척이나 경건했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루타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바라건대, 이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이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이 되어주시기를 청합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의무를 등에 업고 가족을 위해, 친우를 위해, 이웃을 위해, 찬란한 생명을 위해, 그리고 저희 스스로를 위해 언제나 위험을 향해 나아가 절망을 부수고 희망의 빛을 밝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저의 바람이며, 저희의 의무이고, 다시 목적이니 모든 것이 끝나는 날까지 그 앞날에 빛이 가득하기를 소망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루타텔은 그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들어 올려진 손.

하지만 유천하의 눈은 그곳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마력의 동조를 관측할 수 있었고, 그가 아니더라도 다른 아이들 또한 전신이 오싹거릴 만큼 몰려들기 시작한 마력의 흐름에 자세를 풀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그런 염원속에 다시.]

그리고 그 순간.

[저는 여러분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언제나 빛이 자리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하늘 위로 몰려드는 백색의 태양.

저 하늘 너머에 떠 있는 태양마저 뒤덮을 정도로 밝은 빛을 발산하며 떠오른 백열의 구체는 그렇게 막대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망의 태양은 아무런 열도 없이 그저 밝은 빛으로 세상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

그렇게 세상을 감싸 안은 희망의 바람은 찬란한 빛으로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휘몰아쳤고, 이내 다시 그 구체를 잘게 깨트리며 회랑의 하늘 위로 빛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봄의 끝자락에서 내리는 마력의 눈꽃.

하늘에서 흩날리는 백색의 축복.

오로지 순수하게 축복을 위해 쏘아진 마력의 색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루타텔 스스로가 되뇌었던 바람을 담아, 하나의 염원 속에 그는 세계의 의지를 그 끝에 담아내었다.

-와······

-이건······

그렇게 그 빛의 산란은 이내 나르화리얀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온 바람에 뒤섞여 아이들에게 따스한 빛을 하나씩 내려주었고, 그 황홀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들은 이내 자신들에게 다가온 빛의 조각을 감싸쥔 채 하나둘씩 손을 위로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예정에는 없었던 식순-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승천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축복의 기원 속에, 그리고 그 말 속에 담겨있던 마음을 느낀 아이들은 하늘 위의 빛을 손으로 그러쥐듯 뻗어냈고, 이내 그 손끝에서 다시금 제각각의 마력을 하나둘씩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생도들의 모습을 보며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회랑의 교사들도 저의 손으로 마력을 피워올렸고, 그 모습에 개막식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던 공략자들도 이내 천천히 하늘 위로 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피어나오는 가지각색의 색채.

수천명이 만들어내는 마력의 물결.

누군가는 손끝에서만 간신피 피워올렸고, 누군가는 하늘 위까지 마력을 뻗어냈으며, 누군가는 그 빛무리 속에 자신의 마력을 그대로 녹여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불어온 바람은 그 마력을 모두 품고서 하늘 위로 띄어 올려주었고, 그렇게 찬란한 태양빛 아래 하늘에선 각색의 빛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으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희망이 자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백색과 청색, 주색과 황색, 초록빛, 그리고 다시 칠흑빛까지. 서로 뒤섞이고 흩날린다.

색색들이 피어나는 각색의 다짐.

그리고 그곳에서 몰아치는 파란.

비록 구체화되어 물리적인 힘을 가진 것도 아닌, 오로지 시각적인 연출만을 위해 피어올린 마력이었으나 그 속에는 분명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기원과 바람, 염원과 결의, 희망, 슬픔, 애도, 그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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