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에서 (3)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을 단둘이서 밤길을 거닐었는데, 그 이유로는 같은 시기에 올라와서인지 서로의 숙소가 가까운 편이라는 점도, 화이트라인의 숙소는 공원을 가운데로 두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공원의 산책길을 지나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뿐.
물론 사실 빠르게 복귀하고 싶으면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그만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하린은 이렇게 같이 밤 산책을 하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은근슬쩍 내 눈치를 보며 산책길을 고집하였기에, 나 또한 그런 그녀에게 적당히 발을 맞춰주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그날 이후로 스터디 잠시 멈춘 상황이었고, 그 쪽팀과 합을 맞춘다고 3학구에 오는 일도 줄어든 상황이지 않은가?
일, 이십 분 더 늦게 잠든다고 피로가 생기는 것도 아닌 만큼, 이 정도로 그녀가 즐거워한다면야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저기 하린이랑 유천하 아니야?
-뭔 소리야. 걔네가 이 시간에······ 응?
-모야모야. 우리 하린이 저기서 뭐한데.
-설아는··· 아까 끝났다고 했는데?
저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일단의 무리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뭐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익숙한 이름들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들은 이하린과 잘 아는 사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부터 잘 알게 된 사이일 터.
하지만.
정작 그녀들의 모습을 발견한 당사자- 이하린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하였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세차게 떨려오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말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저, 저는 이, 이만 가볼게요···!”
굉장히 다급해진 목소리- 하지만 나는 이하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그녀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겠는데 이 상황에서 그러셨다간 괜한 오해만 더 생기지 않을까요?”
“······!!”
내 말에 그녀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고, 그리고는 이내 결심을 내린듯 검병을 움켜쥐었다. 이하린치곤 정말이지 신속한 결단력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순식간에 가라앉는 표정.
“······.”
“······.”
나로서는 대체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까 싶어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소 어이가 없기도 했다. 물론 조금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나는 조용히 속으로 웃어보았고, 그렇게 그녀와 같이 산책길 한가운데 가만히 멈추어 서있자니 어느새 건너편에 있던 아이들이 우리의 앞까지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아리엘과 그 친구들이 말이다.
“며칠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아리엘은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는 듯 내게 상냥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왔고, 그에 나도 그녀에게 천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랑 똑같지. 너는 준비는 잘······”
“모야 모야? 우리 귀염둥이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쟤랑 대련하고 온다더니. 응?”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대련하고 온대서 팀 연습도 뺐는데 이렇게 야밤에 단둘이 이러고 있었네? 그치···?”
“······.”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사방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내 말은 그대로 묻혀버렸고, 그녀의 친구들은 내게는 가볍게 손만 흔들어 보인 뒤 저마다 이하린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걸어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한창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참 쾌활하단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
그렇게 내 말이 묻힐 정도로 빠르게 말을 토해내기 시작한 그녀들은 서로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설아랑 같이 대련하러 가놓고 왜 혼자만 이렇게 늦게 내려온 걸까? 궁금하네?”
“맞아 맞아. 그것도······ 쟤랑 단둘이?”
“너무 그러지 마. 그냥 뭐 데이트라도······”
“그냥. 남아서. 수련을. 더 했어요.”
하지만 검을 움켜쥐고 있던 이하린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그녀들에게 또박또박 단호히 대답을 돌려주었고, 그런 그녀의 태도에 아이들은 마냥 귀엽다는 듯한 표정으로 짓궂은 미소를 그 입가에 띄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어왔는데, 그 순간.
“저기··· 얘들아? 조금 조용히 해줄래?”
“그럼 하······ 읍읍?”
우웅-! 그녀들이 다시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리엘은 시끄럽다는 듯 언령을 발현했고, 그리고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친구들이 음······ 조금 활기차지?”
“······아니, 뭐. 밝네. 다들.”
“읍읍? 읍읍!”
“읍읍읍읍!”
“어휴. 나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아리엘은 항의하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방해 좀 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보기에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랬다기보다는 이하린을 도와주려고 나선 거로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반쯤 억지로 데리고 갔던 만큼 지금의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
아, 물론 그렇다고 아리엘네 팀에 딱히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그녀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말이다. 또한 실제로 표현이 조금 짓궂긴 했어도 그녀들의 눈빛 속엔 호의만이 가득해 보였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하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아리엘이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내왔다.
“오늘 대련에서도 완전 날아다녔다며?”
“어디서 또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온 거야.”
“응? 아니야···? 설아가 그러던데? 자기들끼리는 한 대도 못 때리고 끝나버렸다고.”
“······아니, 그건 맞긴 한데.”
“흐음··· 기껏 하린이랑 설아 둘 다 연습도 빼고 보내줬는데 조금 자존심 상하네?”
허나- 아리엘은 정작 그 말과는 반대로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승천제 때는 긴장해야 한다 너? 우리도 요새 열심히 전략을 짜고 있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아?”
“수련실에서 나오지도 않는다는 말 정도는 들었지. 동조마법? 그런 거 준비한다며.”
“······응?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설마?”
내 말에 아리엘은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 이하린을 바라보았고, 그와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들 또한 일제히 이하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에 이하린은 몸을 흠칫했을 뿐.
하지만 그녀가 말해준 건 아니었기에, 나는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빠르게 입을 열어 그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가만히 놔뒀다간 이하린이 고생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린씨가 말해준 거 아니야.”
“그으래···? 그럼 설마 설아가? 아니, 걔가 그럴 애는 아닌데··· 아니다. 요새 너 대하는 태도만 보면 충분히 가능해 보이기도······”
“설아씨도 아니야.”
“모야 그럼. 누가 말해준 건데.”
아리엘은 조금 뾰로통해진 해진 얼굴로 그리 물어왔고, 나는 담담히 대답을 돌려줬다.
“어제 리베르테가 말하고 지나가더라.”
“······아니, 걔는 몰래 엿봐놓고선.”
내 말에 아리엘은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으로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내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 다른 아이들은 이미 각자의 워치를 똑딱거리기 시작한 뒤였다.
아마 예상하건대 자고 있던 녀석에게 갑자기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덕분에 순간적으로 조금 미안하단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말해달라 한 적도 없는 걸 갑자기 다가와 아리엘네를 견제한답시고 흘리고 간 말이었으니 딱히 미안해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어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응? 무슨··· 아 내가 말했던 거? 당연하지 바보야. 애초에 나는 그게 목표라 말했잖아.”
순간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는지 올곧은 눈빛으로 대답했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럼 더 준비해. 예상하는 것보다 힘들 테니까. 원래라면 대충할 생각이었는데,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나도 제대로 할 거야.”
“······뭐야. 천하 너답지 않게?”
아리엘은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게 조금 얼떨떨했는지 신기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와 동시에 수상하다는 기색을 눈 위에 띄어 보이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허나- 나는 그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을 뿐.
“너답지 않게 진지하게 나왔으니까, 나도 기대하고 있거든. 네가 뭐를 보여줄지.”
그러자 내 말에 아리엘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그 속에선 다시 여러 심경이 엿보였지만, 나로서도 이건 분명 어느 정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 건네준 말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건 방금 내가 말한 것처럼 그녀가 내게 건넸던 말 때문이기도 했고, 이하린과 남궁설아까지 데려가서 판을 짰다는 점에 대한 기대감이기도 했으며, 그와 동시에- 하루가 지날수록 아리엘에게서 엿보이는 마력의 색채가 무척이나 강렬해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길래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렇게 마력의 잔향이 짙어지는지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또한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한 수였을 테니 그 부분은 모른 척해주었을 뿐. 그녀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든 결국 다음 주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말이다.
“······.”
“······.”
그렇게 우리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고, 아리엘은 이내 다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마치- 그럼 기대하고 있으라는 것처럼.
“그래. 보여줄게. 시간이 주어진 마법사들이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준비가 끝난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꼭. 보여줄 테니까.”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주먹을 내밀어왔고, 그에 나는 마주 주먹을 내밀어줬다.
우리의 손이 툭- 하고 부딪혔다.
“그럼 다음, 아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보겠네. 수업 때 다시 보자. 들어가.”
“그래. 들어가. 내일 보자.”
그렇게 우리는 서로 인사를 건넨 뒤 이제 다시 갈 길을 가기 위해 아리엘은 제 친구들을, 그리고 나는 이하린을 바라보았는데······
우리는 순간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
왜냐하면 그녀들은 이하린을 둘러싸고는 한 명은 이하린을 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한 명은 귀엽다는 듯 볼을 쿡쿡 찌르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그런 모습들을 카메라로 찍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하린을 괴롭히려고 그런다기보다는 굉장히······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어린 동생에게 애정을 표현한다는 느낌이었고, 실제로 이하린에게 듣기론 그녀는 평소에도 팀 내부에선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 하니, 내게는 그녀들의 모습이 마치 아리엘이 넷으로 늘어난 것처럼만 엿보였다.
친화력도, 장난기도 참 대단하다는 느낌.
하지만 그 가운데에 껴있는 이하린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음에도 점점 울상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걸 발견한 아리엘은 이내 천천히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 그새··· 괴롭히면 어떡하니 너네.”
“······읍읍? 읍, 그··· 어? 풀렸다. 아리 너 그 상태로 언령쓰지 말라했지! 이젠 평소와 다르게 오래 간단 말이야. 그리고 괴롭히다니? 우리 사이가 그렇게밖에 안 보여?”
“맞아! 내가 하린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말을 그렇게 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응. 누가 봐도 그렇게 보여 멍청이들아.”
얌전히 사진을 찍고 있던 아이가 그리 말해왔고, 그에 이하린과 찰싹 달라붙어 있던 두 사람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던 이하린은 침착한 얼굴로 사정없이 눈을 떨어대고 있었을 뿐.
“시아야? 너도 그러고 있으면서 은근슬쩍 빠져나가지 말아 줄래? 그리고 제발 하린이 좀 괴롭히지 마 얘들아. 내가 기껏 천하한테서 뺏어왔는데 너네가 그러면 어떡해?”
“하지만··· 하린이 반응이 너무 귀엽단 말이야. 내 동생하고 바꿨으면 좋겠는 걸?”
“아멜리아 너 그거 실례야. 그러지 좀 마.”
솔직히- 평소 이하린을 대하는 아리엘의 태도를 생각하면 아리엘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미묘하긴 했지만, 모든 건 상대적인 법.
그렇기에 나는 그 잠깐 사이에 기가 속 빨려 나가버린 이하린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내젓고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조심스레 이하린을 그 사이에서 빼내며 입을 열어보았다.
“얘기 끝났으면 이제 다시 가볼게.”
“너? 우리 막둥이를 어디로 데려가려······!”
“음소거! 천하랑 둘이 숙소 방향이 같은 거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나 진짜 너희 때문에 너무 부끄러워 죽겠으니까. 지금.”
“그곳에선······ 행복해야 해!”
“조용! 둘 다 잘 가. 잘 자구, 조심히 가!”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은 정말로 이 상황이 민망했는지 빨리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기에.
“······아, 아, 안녕히 계, 계세요!”
이하린은 결국 검을 붙잡은 상태로도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채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인사를 건네었고, 나는 그런 이하린을 데리고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물론- 그런 우리의 등 뒤에선 여전히 미묘한 소리와 함께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모습만이 엿보였을 따름이었다.
***
고개를 푹- 숙인 채 쪼그라들었던 이하린의 상태는 결국 숙소에 와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난번 내가 농담을 건넸을 때는 이주일 가까이 가더니 아리엘의 친구들이 건네는 장난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된다는 느낌.
물론 그만큼 승천제를 준비한다고 자주 만나는 탓도 있어 보였고, 어느 정도 친분의 차이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이제 조금 괜찮아지셨나요?”
“네, 네헤에··· 아, 그, 바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당! 그, 그냥 가셔도 괜찮았는데······”
“별로 먼 곳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그리고 상태가 조금······ 그래 보이셨으니까요.”
“······.”
내 말에 이하린은 조금 민망해졌는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귓가와 볼을 가려버렸다. 마치 커튼을 친듯한 모습이었는데, 정작 그 사이로 드러난 하얀 얼굴은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무척 도드라졌을 뿐.
어쨌든- 그녀는 조금 떨리는, 그러면서도 투명한 눈으로 작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워, 원래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늘은 수련을 빠져서 더 짓궂으셨나 봐요.”
“일찍 보내드렸어야 했는데··· 역시 설아씨 가실 때 같이 내려올 걸 그랬나 봅니다.”
“······!!”
암막 사이에서 눈망울이 흠칫거렸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입을 열어오는 그녀.
“아, 아니에요···! 처, 천하씨가 지도해주실 때마다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저, 저는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어요. 진짜루요!”
“그래도 다음에 연습하러 가실 때 이번 일로 곤란해지실까 봐 조금 걱정되는군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이미.”
하지만 내 대답에 어둠 너머에서 둥둥 떠다니던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침울해졌고, 그 모습에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물론- 당연히 표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위해 화제를 돌려주었다.
“승천제 준비하시느라 많이 힘드신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짓궂긴 해도 다들 정말 잘 대해주시고, 아리엘씨나 설아씨는 그래도 뭐라 안 하시구 잘 챙겨주기만 하세요.”
“아리엘도요?”
“네. 팀 연습할 때만큼은요!”
“아··· 그렇군요. 연습 자체가 힘드시진 않나요? 뭐를 준비하고 계신지는 몰라도, 연습 한 번 갔다 오시면 되게 피곤해하시던데.”
“넵. 힘들지는 않아요. 사실 저는 역할이 미묘해서, 정말 고생하시는 건 아리엘씨나 티나씨가 마······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하린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고,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흘러내리며 가려져 있던 얼굴이 다시 훤히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 위에 불그스레 올라온 열기.
물론 그 사실을 깨달은 이하린은 다시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붙잡아 얼굴을 가렸지만, 얼굴을 엿보는 건 그 잠깐만으로도 충분했을 뿐. 그렇기에 나는 다시 눈만 둥둥 떠다니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받아 들인 걸까?
“······!”
내 반응에 잠시 흠칫한 그녀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뜬금없는 말을 건네왔다.
“이건 바, 밤공기가 추워서 가린 거예요!”
“그러신가요? 그럼 어서 들어가셔도 됩니다. 여름이어도 아직 새벽은 쌀쌀하니까요.”
“······아, 그, 그렇게 춥지는 않은데에······”
순식간에 말을 뒤바꾸는 그녀- 그렇게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던 이하린은 내 말에 다시 묘한 대답을 돌려주었고, 그 모습에 나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왜, 왜 웃으세요?!”
“열심히 준비하고 계시다니 기뻐서 그랬습니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어찌 보면 하린씨는 제가 가르쳤다 봐도 되니까요.”
“아······ 그, 그건 그렇긴 하겠네요.”
물론 이유는 자연스레 다르게 둘러댔지만 지금의 화제도 딱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나 때문이라면 그녀의 쭈굴거림은 상당히 오래가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아리엘도 기대되지만, 저는 하린씨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조금 기대됩니다.”
“······.”
내 말에 이하린은 마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도요? 정말요?”
“예. 하린씨는 실전과 연습의 실력 차가 조금 있는 편이니까요. 대련할 때의 모습이 아니라, 실전에서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좋은 모습을 기대해봐도 되겠지요?”
그렇게 멍하니 두 눈을 깜박거리던 그녀는 순간 기뻐 보이는 미소를 그 얼굴에 머금었고, 그러다가 이내 다시 진지해진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꼭 보여드릴게요. 반드시요. 꼭이요!”
조금 상기된 표정 속에 되돌아온 대답- 나는 생각보다 더 확연하게 돌아온 그녀의 반응에 순간 의아했지만,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 속에서 진지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날- 아리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걸 보여주고 싶어. 너한테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난 2주 동안 오가며 보았던 그녀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다시 대놓고 이겨보겠다 달려드는 사카타와 리베르테가 떠올랐으며,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열의를 불태우던 생도들의 모습까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다시, 내가 기대한다는 말 한마디에 저렇게 얼굴을 붉혀오는 이하린의 모습 위로 겹쳐졌을 뿐이었다.
원작의 이하린은 그렇게 시큰둥해하더니 내 눈앞의 그녀는 각오가 많이 다른 모양.
아무래도 같은 곳에 서서 싸우고 싶다는 건 아리엘뿐만이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등천도시에서 들려주었던 고백도.
또한, 지금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도.
순례자의 길에서 다짐했던 목표가 참으로 쉽게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빨리 그녀가 의지해오는, 그리고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미묘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역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예.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기에 나도 진심으로 대답을 돌려주었고, 그에 그녀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그대로 양 주먹을 꾹- 쥐어 보였을 뿐이었다.
두근거리는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그 진지해진 눈빛 아래 헤실거리는 미소를 내비치면서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