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라인 (4)
난데없이 울려 퍼진 그녀의 목소리.
그로서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끼어든 이하린의 반응은 조금 당황스러웠던 모양인지, 리베르테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 뭐야. 설마 아리엘이 아니라 너야?”
“······네?”
“이거이거. 얘 반응이 되게 수상하네.”
리베르테는 이내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장난스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고, 그에 이하린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하린? 그 이름 맞지? 맞아맞아. 유천하랑 둘이서 붙어 다니는 것도 몇 번 봤는데, 반응도 수상하고 혹시 님 유천하랑······”
“······아, 아니에요!”
“오우···? 갑자기 뭐가 아님?”
“······.”
이하린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잠시 내 눈치를 힐끗 보더니 옆에 풀어둔 칼의 손잡이를 향해 슬금슬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평소 아리엘이 놀릴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녀치고는 상당히 빠른 결단력.
하지만 그렇다 한들 태도가 멀쩡해질 뿐이지 내면의 소심함 마저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를 대신해 리베르테를 향해 적당히 조치를 취해 줄 수밖에 없었다.
놀리는 건 리베르테여도 그 어색함의 뒷감당은 결국 나중에 내가 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해.”
그리고.
“······?!”
“······!!”
바로 그 순간- 쇼파에 쭈르륵 앉아있던 아이들이 다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리고는 그들은 무척이나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뭐 하냐는 듯이 말이다.
“······.”
“······.”
그와 동시에.
“······어, 어우씨. 야! 야! 살기! 살기!”
질겁한 리베르테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을 토해냈고, 그런 녀석의 반응과 함께 저마다 마력을 쏟아내며 아연한 표정과 함께 아이들도 하나둘씩 말을 꺼내오기 시작했다.
“······처, 천하씨 혹시 화나셨어요?”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살기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훌륭한 기세입니다.”
“아니 메췐? 훌륭이고 나발이고 아, 알았으니까 좀 가라앉혀봐! 숨 막힌다 야!”
아무래도 기세를 쏘아 보낸다는 게 그 속에 살기가 같이 섞여서 나간 모양.
안 그래도 나는 무의식적인 살기자체가 무척 짙은 편이었기에 조금만 신경을 느슨히 풀어놔도 기세의 기질이 달라지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여태까진 잘 조절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깨달음을 통해 신경이 약간 느슨해지면서 가끔이지만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덕분에 의념 수련 중에 살기가 새어나간 적도 이따금 생기는 중이었다.
어쨌든- 반응을 보니 다들 부담스러운 모양이라 천천히 기세를 가라앉혔을 따름.
그러자 기세가 집중되고 있던 리베르테는 갑자기 천천히 호흡을 내쉬기 시작했고, 주변에 앉아있던 아이들 또한 다소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리베르테에게 담담히 한마디를 덧붙여주었다.
“이 정도로 유난 떨기는.”
“뭐···? 유난? 유나안? 유나아아··· 앜!”
그렇게 기세가 가라앉자마자 눈을 부릅뜨던 리베르테는 이번에는 아리엘 손짓에 팔뚝을 얻어맞았고, 그와 동시에 사카타 또한 녀석의 뒤통수를 한 번 더 후려쳤다.
“제발 넌 눈치 좀 챙겨라. 부탁이니까.”
“얘는 정말 언제 철들 생각인지··· 참.”
“······아니, 농담 좀 한 것 같고 너무하네.”
물론 오늘만 해도 네 번째 얻어맞게 된 리베르테는 다소 억울하다는 듯 그들을 노려봤지만, 양쪽 다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양 한심하단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러게 누가 헛소리를 하랬나? 제발 친하지도 않은데 그러지 좀 마라. 그럴 때마다 같이 다니기도 수치스러워지니까.”
“아니, 내가 뭐 얼마나 놀렸다고···?!”
“천하는 원래 자기 놀리는 건 별로 신경을 안 쓰는데 하린이 건드리는 건 되게 싫어해. 같이 입학해서 서로 되게 친하거든.”
“······아, 그, 그런 건 아닌데···!”
“아리엘 너도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 그냥 계속 이상한 오해를 하길래 그런 거야.”
“응? 뭐. 둘이 친한 건 사실이잖아. 그치?”
“······.”
솔직히 말해서 참으로 난장판이었다.
조금 전 아리엘이 한 말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설아의 모습이나, 마지막 말에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이하린의 모습이나, 저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사카타나 리베르테의 모습이나.
어째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만 대화가 너무 산만하다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둘은 대화를 너무 통통 튀게 만들었고, 둘은 대화를 너무 진지하게만 받아들이고, 한 명은 그저 쭈굴거리기만 하니 어찌 보면 대화가 계속 산으로 가는 것도 당연한 일.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아까부터 말이 좀 이상한데. 일단 아리엘이나 하린씨랑은 그냥 같이 수련하는 사이인 게 다야. 더 이상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
“······.”
“친분은 있어도 그런 사이는 아니니까.”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은 일제히 저마다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사카타와 투닥거리던 리베르테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그래서, 그럼 너희 셋이서 매일 밤마다 같이 수련하는 사이라는 거지? 아니, 사이가 아니라. 그러니까······ 음? 아니, 이건 사이라 해도 되는 거잖아. 고러치?”
“······수련을 하기야 하지.”
“오! 그럼 나도 껴도 됌? 가···”
“아니. 그럴 일 없어.”
눈을 빛내오며 끔찍한 소리를 건네오는 녀석에게 나는 단호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니 메췐? 왤케 단호함? 개 너무하네.”
“애초에 우리도 어쩌다 보니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거니까. 그리고 딱히 다른 사람이랑 같이 수련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러자 내 말에 리베르테는 치사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의외로 녀석보다는 정작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사카타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더 짙게 드러나고 있었다.
리베르테는 반쯤 농담이었던 모양이지만 사카타는 은근슬쩍 끼고 싶었던 모양.
하지만 사람이 늘어날수록 나만 귀찮아질 뿐이니 나는 굳이 사람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상 지금도 이하린을 지도해줄 뿐이고 아리엘은 옆에서 알아서 마법을 수련했으니 약간 덤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아, 물론 주연들이 성장한다면 내게도 나쁠 건 없었지만 이하린에 비한다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남궁설아처럼 대놓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라면 모를까 내가 나서서 도와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화제를 돌려보았다.
이대로는 대화가 진척되지 않을 것 같았으니 빠르게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럼 일단 두 분은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네?”
나는 아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들에게 바라보았고, 그러자 이하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아리엘이 말했던 내용에 제게 궁금한 부분이 있으셨다고 한 것 같아서요.”
“아. 그게에······”
내 말에 이하린은 조금 고민 된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걸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기에 도대체 뭐가 궁금하길래 저러나 싶은 순간- 그 옆에서 들려온 대답.
“검강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남궁설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하린을 대신해 내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검강··· 말씀이십니까?”
“예. 정확히는 탄검강입니다. 요새 고민 중이던 부분이었는데 오전 수업 때 영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린씨도 그 부분에 애를 먹고 계시다길래 이렇게 같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조금 실례였을까요?- 남궁설아는 내게 정중히 말을 건네왔고,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이하린 또한 그 말에 에라 모르겠다는 듯 열심히 같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뭔가 했더니 생각보다 별거 아닌 질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침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카타와 리베르테 또한 무척이나 공감한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 맞아! 너 그건 어떻게 한 거였음? 뭔 놈의 검강이 그렇게 멀리 날아가는 거냐.”
“······혹시 요령 같은 게 있는 건가?”
실례인 걸 알아도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세 명과 그저 한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한 명. 그렇게 네 명의 시선이 내 입으로 향했고, 대화의 주제가 무학에 관한 이야기였던 만큼 아리엘은 관심이 없다는 듯 소파에 몸을 기대 대화에서 빠져나갔다.
그런데 문득- 그러고 보니 지금 네 사람 다 경지가 얼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 남궁설아가 제일 우세할 테고 이하린은 상황마다 조금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네 명 다 절정의 입문에서 초입 너머까지 퍼져있는 상황이었기에 서로의 경지를 생각하자면 탄기공에 관심이 생길만한 시기이기는 했다.
애초에 나도 처음 강기를 발현했을 때는 어떻게 날리는지 감도 안 잡히지 않았던가?
물론 자유자재로 날리게 된 건 결국 순례자의 길에서 천마신공이 6성에 도달한 이후였지만, 탄기공 자체를 할 수 있게 된 건 4성. 즉- 절정의 초입부터였으니 이 아이들도 조금 노력을 기울이면 검강을 쏘아내는 거 자체는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그 ‘충분히’가 쉽지 않았을 뿐이지.
“대답해주기 다소 미묘한 질문이군요.”
“아··· 역시 너무 염치없는 질문이었나요?”
“아니요. 알려드리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저- 그렇기에 나는 그 말과 함께 잠시 탄검강의 요령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알려드려도 큰 도움은 안 될듯해서요.”
“그래? 그래도 작은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우리야 좋지. 어떠한 가르침이든 천금과도 같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넌······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뻔뻔하게.”
“아~ 그래서 너는 방금 안 물어봤음?”
“······.”
“물어봤지? 우리 친구 쉿. 오키오키?”
그 말과 함께 리베르테는 조용히 하라는 듯 사카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답지 않게 진지해져서는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다소곳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조금 미묘한 기분을 느꼈을 뿐.
“······그럼 요령만 알려줄게. 요령만.”
그러자 내 말에 아이들은 저마다 일제히 내게 감사를 표해왔고, 그와 동시에 리베르테처럼 진지한 모습으로 내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적으로 말하자면 탄검강 자체는 별거 없어. 검기를 흩뿌리는 거나 검강을 흩뿌리는 거나 요령 자체는 같으니까. 다만······”
“그렇다기엔 검강이 풀려버리던데?”
“그래. 그게 탄강을 처음 시도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이지. 강기 자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 말과 함께 의념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허공에 띄어 보였다.
“사실 이건 요령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야. 제대로 일념을 벼려내고, 그 의지를 신체에서 멀어진 순간까지 계속 유지해내는 것. 결국 그게 전부라고 해도 되는 문제거든.”
“······.”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의념을 내세우는 것 만으로는 감 잡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
그리고 그 순간.
퀴이이잉-!!
“······!!”
“······?!”
나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허공에 떠오른 검에 칠흑빛의 검강을 덧씌워보았다. 그러자 다들 넋을 잃은 표정으로 입을 벌려왔다.
“중요한 건 경계를 허물어내는 거니까.”
그리고는.
“도대체 어떻게 손도 안 대시고···?”
“어검? 아니··· 진짜 어검인가 설마?”
“무슨 소리야. 진짜 어검은 이런 조잡한 기술이 아니야. 이건 잡기술이지.”
“조잡···? 미친! 이게 조잡하다고?”
“조잡하지. 그냥 검강을 피워낸 거니까.”
그렇게 나는 빠르게 당황을 토해내는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검강을 피워낸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면 검강정도는 다 뽑아낼 수 있잖아? 차이가 있다면 그저 손을 댔냐 안댔냐의 차이일 뿐이겠지.”
“그 차이가 무척이나 큰 거 같은데?”
“그래. 작은 차이는 아니겠지.”
사실 설명을 하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긴 했지만, 이렇게 의념만으로 검강을 피워올리게 된 건 나도 얼마 전에야 성공한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식에 도달하고 마음의 편견을 벗어낸 이후의 일.
업륜의 활용을 고민하고, 유식에 대해 고민하고, 다음 경지를 위해 의념을 수련하다 보니 자연스레 어검으로 의식이 이어졌고, 그 결과 이런 시도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방금 말한 것처럼 어검에 비해서는 조잡하고 별거 아닌 일이었기에 나는 담담히 설명을 이어나갔을 따름이었다.
“근데 그렇게 큰 차이도 아니란 거야.”
“······그렇습니까?”
“예. 어찌 보면 마음가짐의 문제니까요.”
“마음··· 가짐? 겨우 그런 걸로?”
“겨우라니. 편견을 버려. 의념에 발을 들여놓고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마법사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외부의 마력을 조작하는데, 무인이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어.”
“······.”
“지금 이것도 그런 의미에서 보여준거야.”
조금 아리송해 보이는 아이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허공의 검을 낚아챘다.
“방금 보여준 것도, 검강을 날려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마음가짐의 연장선이니까.”
“······편견을 갖지 말라고?”
“애초에 단순히 탄검강을 펼쳐 보이는 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 이후로 나아가거나 발현범위를 늘리려면 내가 방금 한 것처럼 체외의 의념과 기운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야겠지만, 단순히 날려 보내는 것 자체는 정말 단순한 문제니까 말이야.”
“단순하다기엔 너무 어렵던데 그거.”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허탈해 보이는 리베르테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뒤 나는 허공에 검을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뻗어 나가는 검강.
파삭-! 물론 적당히 범위를 조절해서 벽에 닿기 전에는 흩어버렸기에 순식간에 허물어졌지만 발현 자체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다시 한 번 벙찐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줄게.”
“······.”
“요컨대 중요한 건 의지의 각인이야. 물론 기가 유형화되어 빛날 정도로 고밀도로 압축시키고, 그걸 날려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 중심을 지키는 건 단순히 내력의 운용이 아닌, 온전히 벼려진 일념이어야 한다는 말이야 내 말은.”
“으음··· 마력의 운용보단 의념의 활용 자체에 조금 더 신경 쓰라는 말이신가요?”
“예.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맥락을 보자면 바로 그 말입니다. 그게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다소 모호하게, 그러면서도 최대한 직설적으로 설명해준 내용에 아이들은 저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고, 옆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아리엘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아리엘은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유천하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넌 갑자기 뭔데.”
“의지의 각인이라는 부분이나 설명이 마법의 관점하고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마법으로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걸 마법사가 물어보면 어떡하자고.”
“무인의 관점에서 의견 부탁드립니다···!”
무언가 장난스레 건네진 말이었지만 나는 아리엘의 눈빛에 깃들어 있는 진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조금 전 검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녀도 뭔가 느끼는 게 있었던 걸까?
나는 잠시 고민해본 뒤 대답을 돌려줬다.
“궤는 달라도 결과는 비슷해질 수 있겠지. 순서가 정반대일 뿐이지 의지와 마력이라는 요소로 결과를 빚어낸다는 건 같으니까. 의지를 결집시키고 그 자체로 힘을 행사하는 건 어찌 보면 네 언령하고도 비슷하고.”
“······.”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모든 이능의 갈래는 다 비슷하다고 봐야겠지만, 나는 분명 전부 어느 정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봐.”
“상통한다······ 그러네. 확실히 그래.”
그렇게 친절히 대답해줬더니 어느새 그녀 또한 무언가 생각에 들어간 듯 조용해졌고, 이내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적이 내려앉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언가를 고민해보던 이하린이 조금 전 아리엘이 했던 행동을 따라 궁금하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생각에 몰두해있는 상태라 저도 모르게 따라 해버린 모양.
“저도 궁금하게 있습니다 교수님···!”
“······무엇인가요?”
“영상 속에서 천하씨의 검강이 수십미터씩 날아간 것도 단순히 의념의 차이인가요?”
아, 이것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네.
“그건 반반입니다. 말씀드렸듯 의지를 각인시켜 허공 속에서 의념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렇게 뻗어 나가는 건 솔직히 무척이나 힘든 일이니까요.”
“······어? 그러면······”
“예. 그건 약간의 편법이 있긴 했습니다.”
편법?- 내 말에 생각에 잠겨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등을 들어 올렸다.
우웅-! 그러자 드러나는 칠흑의 각인.
“업륜의 마력. 일반적인 법칙에서 벗어나 순수한 본질에 가까운 이 마력은 평소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 넵!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런 성질을 가져서 그런지 업륜의 마력은 일반적인 기운보다도 훨씬 조절이 자유로운 편입니다. 여러 부분에 있어서요.”
우웅-! 나는 그 말과 함께 손에 들어 올린 검에 일 획의 업륜을 그대로 쏟아부었다.
고오오오오-
그러자 이전보다도 더 선명한 기세로 타오른 칠흑빛은 마치 물질로 구체화한 것 마냥 검신 위에서 선명히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업륜을 쏟아부으면 일반적인 내력과 비교했을 때 강기공의 난이도나 유지력에서도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는 편입니다. 영상 속에서 보신 것도 수호자급을 처치하려고 업륜의 마력을 쏟아 넣은 결과였고요.”
“······아! 그래서 그렇게.”
애초에 나도 업륜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수십 미터 바깥까지 검강의 강세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 순수한 기량만으로는 끽해야 10m. 물론 제대로 검강의 살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를 이야기하자면 이렇다는 말이었지만 그게 한계였다.
하지만 보통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을 뿐.
“사실 그건 수호자급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써먹게 된 거고, 보통의 상황에선 상당히 비효율적인 기술이긴 합니다.”
“아··· 그런가요?”
“예. 정말 체적이 큰 상대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멀리 있는 상대를 타격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소모값이 비효율적이고, 일반적인 마수나 사람을 상대로 한다면 차라리 직접 검으로 베어내는 게 더 효과적일 겁니다.”
“그거 그래도 간지는 오지던데.”
나는 다시 슬슬 엉뚱한 소리를 꺼내오는 리베르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뒤, 그대로 이하린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이 설명은 그녀를 위해서였으니까.
“어쨌든. 그렇다 보니 실전에서의 사용은 나중에 업륜의 획수가 많아진 이후가 아니라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만, 연습을 위해 사용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그냥 수련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더 탄강에 대해 감을 쉬울 테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하린은 내 말에 조금 자신감을 얻은 듯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고, 그러자 이내-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베르테는 그 내용이 다소 의아했던 듯 내게 질문을 건네왔다.
“뭐냐?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되게··· 저 친구한테 업륜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한다?”
“······?”
나는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없긴 했다.
안 그래도 나도 저번에 이하린이 갑자기 업륜을 들고 와서 조금 놀랐었는데, 거기에 더해 이하린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려진 것도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내가 해결하다 보니 그녀의 존재감이나 상세한 내용은 그대로 묻혀버린 모양.
물론 그녀의 존재감이 묻히든 드러나든 내게는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고, 이하린도 본인도 딱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쓰는 듯 것 같아 보이기는 했다.
그렇기에- 나는 손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이하린을 잠시 쳐다본 뒤, 담담히 리베르테에게 대답을 돌려주었을 따름이었다.
“하린씨도 업륜은 있어. 일 획이지만.”
그리고 물론.
“······뭐?”
“······.”
내 말에 리베르테는 물론 사카타까지 더해 그들은 아연한 기색으로 입을 벌려왔을 뿐.
당연히 위타극때 이미 이하린의 업륜을 목격했던 남궁설아나 먼저 들은바 있던 아리엘은 그저 담담했지만 처음 듣는 이들에겐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테고, 그렇기에 그들은 목이 부러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녀를 향해 쏟아내는 질문.
“정말?! 정말 너 업륜 있다고?”
“어떻게···? 정말 업륜이 있다는 건가?”
“도대체 언제? 어떻게? 너 뭐임?”
하지만.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
“······.”
그런 그들의 반응에 당연히 민망해할 줄 알았던 이하린은 정작 무척이나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답을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이하린답지 않은 침착하고 담담한 대답.
그렇기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이내 그녀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휘익- 이하린은 조금 전 내게 들었던 말을 한번 실험해보려는지 허공에 가볍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손등 위에서 우웅-! 업륜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녀의 검으로 마력이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바로 시도해보고 싶었던 걸까?
그렇기에- 그 검신에서 백색의 별빛이 뿜어져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퀴이이잉-!
그렇게 가볍게 휘둘러진 검극에선 한순간에 백색의 검강이 기다란 궤적을 그어내며 뿜어져 나왔고, 그 별빛은 순식간에 허공을 베어 가르며 그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한 번에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렇게 순식간에 말이다.
“······어?”
앉은 자세에서도 깔끔하게 그어지는 검로.
그리고 그 속에서 번뜩거린 백색의 별빛.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콰아아앙-!!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뻗어 나온 검강이. 입주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숙소의 벽을 사정없이 강타했다는 말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그 사고를 친 장본인.
“······?!”
이하린은 손에 검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한 심경을 숨기지 못한 채. 마치- 이게 왜 한 번에 성공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고, 그리고는 이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세차게 그 몸을 떨어대며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