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라인 (1)
주말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니, 사실 주말이라 해봤자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이래저래 일이 많았으니 조금 미묘하기는 했다.
그래도 토요일 저녁은 의념에 대한 사색으로, 다시 일요일 하루는 에테리얼 크리스탈을 녹여내는 데 사용했으니 이래저래 알차게 보낸 주말이었다 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분명 소정의 성과도 존재했다.
쿠구구구구구-!
순간적으로 풀려나오는 일곱 갈래의 매듭. 물론 제대로 내력을 끌어올린 건 아니었지만서도, 지금 이렇게 혈도를 타고 내달리는 패도적인 내력의 기세만큼은 내게 무척이나 강한 만족감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역시 내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당분간 내력이 부족한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떠올랐을 정도였다.
아, 물론 그렇다고 벌써 크리스탈의 마력을 모두 녹여서 흡수해낸 건 아니었다.
고작 하루 만에 모두 녹여내기엔 황혼급 근원석의 마력량은 상당히 많았고, 아무리 정화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그리고 섭취할수있게 에테리얼 크리스탈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이차적으로 마력이 소실됐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영약보다도 더 많은 기운을 그 속에 품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 제대로 녹여낸 건 2할에 불과했을 뿐.
뭐, 그것만으로도 내력이 늘어난다는 게 확연히 체감되고 있었지만, 만약 1~2주의 시간을 걸쳐 모두 녹여낸다면 내력이 지금보다는 3할은 더 늘어난다 봐도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에테리얼 크리스탈의 마력을 모두 내공으로 흡수하고, 거기에 손등에 있는 2획의 업륜까지 더해진다면- 사실상 가용할 수 있는 기운의 총량만 놓고 보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의 비해 약 3배의 수치를 달성하는 셈.
그러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업륜을 제외하고서라도 2배로 늘어났다 봐도 될 정도이니, 빠른 시간 동안 거의 연달아 섭취한 두 개의 크리스탈은 내게 부족했던 세월을 빠르게 메꿔주고 있었다.
만약 이 정도의 내력을 갖고 그 날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적어도 50명은 더 죽일 수 있었을 터- 물론 검혈마제와의 간극은 단순히 내력만으로 메꾸기엔 두터운 벽이었으니 그 정도가 한계였겠지만, 그래도 이제껏 내력의 양이 깨달음의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었던 건 맞았으니 나는 이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물론··· 만족만 하고 있으면 안 되겠지.’
그렇기에- 내가 이제 당분간 몰두해야 할 일은 수련, 그리고 또 수련이었다.
이렇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대한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무언가 일이 닥쳤을 때 후회밖에 더 하게 될 테니 나는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야 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대로 에테리얼 크리스탈의 마력을 녹여내고, 다시 유식에 대한 깨달음을 붙잡고 가다듬어 초절정을 향한 실마리를 차근차근 낚아채 볼 계획이었을 따름.
애초에- 나아가야 할 방향 또한 확실했다.
오온과 유식은 세계를 인지하는 관점.
나는 그동안 비워냄으로써 나를 마주했다.
나를 마주하고, 세상을 마주하고, 나아가 만상을 직시함으로써 무無를 통해 무武를 깨닫는다. 그 모든 비워냄 속에 나는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다시 ‘무’를 채움으로써 유식의 세계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
그건 무척이나 간단한 질문이었다. 비워냈으니 이제는 채워내야 할 시간. 그것이 순리였다. 그러니 다음에는 세계를 새롭게 인지해야 할지도 몰랐다. 새로 담아내, 새로운 세계를 직시해, 그 너머에 발을 들여야 했다.
깨달음의 무학- 그것이 천마신공의 근간.
모든 정진에는 어떠한 정답도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 앞에도 오직 대략적인 방향성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심마를 파고들고, 다시 파고들어, 결국에는 마음의 번잡함마저 뒤틀어내 천도를 자아내는 경천의 역치. 그렇기에 천마신공은 마공이 아니었으나 마공이었고, 정공이 아닌 역천의 길을 닦아내는 하나의 신공이었다.
그러하니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심마를 비틀어 잡아내는 것. 불가의 관점을 기반으로 시작되었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천마신공은 한계를 벗어던지는 게 중요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 다시 세계의 경계를 빗겨내어, 만상의 관념과 번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인지를 다시 세계에 관철해낼 수 있게 되는 것. 자아를 무아로 벗겨내, 깨달음 속에 진정한 자신을 굳건히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천마신공의 정도였다.
그렇기에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인지는 무엇일까. 세계는 무엇일까.
본질은 무엇이며, 삼라만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다시.
그렇다면 업과 인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렵군.”
역시 아직까지는 내게 조금 어려운 이야기같았다. 유식을 깨달았다 한들 아직은 경험이 온전치 못했고, 다시 삼사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는 더 많은 번뇌를 빚어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천천히 나아가야할 뿐.
그렇기에.
“······.”
나는 지금껏 길을 걸어가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론 깨달음에 대해 고민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허공에 의념의 검을 띄어보는 중이었다. 나아가기 위해선 기반을 더 튼튼히 다져야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고오오오-
물론 말은 거창했어도 그저 의념의 결집이었고, 이걸로는 나뭇가지 하나 베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검강을 뿜어내는 것을 넘어, 무형의 검으로 무언가를 베어내고, 다시 마음으로 세계를 베어내기 위해선 역시 지금보다 더 정신을 갈고 닦아야 했다.
모든 게 사라진 공허. 무아에서 일념을 되새겨야 했고,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하나의 마음으로 꿰뚫어야 했다. 호숫가에 일어난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 천 번을 휘두른 검이 하나의 궤적을 그려나가듯, 세월 속에 떨어진 빗방울이 결국 바위마저 깎아버리듯. 그렇게 일념을 내세워야겠지.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벼리고 벼려내어,
다시 세계를 담아 휘두르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벽을 넘어 천마의 업을 등에 짊어지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어우씨. 유천하 쟤 뭐냐 방금?
하지만 물론.
-응? 뭐가? 뭐 있었음?
-스쳐 지나갈 때 존나 소름 돋았는데 지금.
-뭐야. 쫄았냐? 쫄? 쫄?
-아니 미친 새끼야. 기감은 엿 바꿔 먹음?
-아 뭐래. 존나 잔잔하기만 하구만.
아직은 조금 미숙했고, 이렇게 상시로 의념을 발현하는 수련을 진행하다 보니 이따금 무의식적으로 살기가 살짝씩 밖으로 새어나가는 모양이었지만, 뭐······ 이곳이 등천회랑인 만큼 이 정도는 딱히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피해를 볼 만한 아이라면 생도가 못됐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수련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건- 결국 강의실에 도착해 문을 열어 재끼는 순간까지 계속되었고, 그렇게 강의실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의념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 월요일의 필수전공 수업에는 1학년 생도들이 모두 모이는 만큼 사람이 많았고, 한두 명이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까지 살기를 흘려대는 건 확실히 민폐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관심은 충분히 받는 편이었다.
-유천하네? 야 등천자님 오셨다.
-올. 쟤 주말에도 한바탕 했다던데.
-아 그거 나도 봤음. 완전 미친놈이라니까 저거? 저 새끼 나이 속였을지도 몰라.
-이제 하다 하다 합리화를 거기까지 하네.
-음······ 저기··· 니가 10살은 더 먹어도 수호자급 원킬은 못 낼 텐데 그렇게 합리화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니? 제발 정신 차리렴.
-부탁인데 넌 좀 닥쳐줄래?
-충격속보. 실력이 낮을수록 언사가 폭력적이라는 연구결과가 밝혀졌으며······
역시나 전 1학년 생도가 모두 모이는 수업이었던 만큼 다양한 잡담소리에 섞여 다시 익숙한 소곤거림까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중간고사 이후로 필기에 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수군거림쯤은 괜찮았다.
애초에 그간은 내용이 미묘해서 찝찝했던 거지, 주목받는 삶 자체는 익숙했으니 저렇게 수군거린들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근데 쟤는 승천제 때 팀 구했으려나.
-걔 있잖아. 어차피 이하린이랑 하겠지 뭐.
-같이하면 비교는 엄청 당하겠다.
-비교당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아예 옆에서 활약도 못 하고 묻힐 게 뻔한데.
-하긴. 뉴스에서도 똑같더만. 그나마 루타텔님이 계셔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어후.
그런데 그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 아이들의 관심은 이달 말에 다가올 승천제나, 주말에 있었던 대규모 토벌에 쏠려있는 듯 싶었다.
사실 주말 동안 확인해본 결과- 아무래도 침식영역에 박혀있을 승천자까지 끼어든 판이었기에 뉴스에서도 꽤 집중적으로 조명받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루타텔이 보여준 모습은 겉으로 엿보이는 광경만으로도 어마어마했으니 이래저래 일반인과 공략자를 가리지 않고 상당히 관심이 쏠렸을 거라는 생각.
뭐- 어쨌든 대부분은 흘려들어도 되는 내용이었기에 나는 이하린을 향해 걸어갔다.
평소의 이하린은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지향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나와 같이 듣는 수업에서만큼은 항상 나보다 일찍 강의실에 나와있었고, 마찬가지로 지금도 내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저 멀리서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그녀가 맡아놓은 자리- 맨 뒷자리의 구석을 향해 걸어갔고, 그러면서도 여러 아이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을 따름이었다.
남궁설아라든가, 사카타라든가, 마르네, 리베르테, 그 밖에 이름 모를 아이들까지.
묵례를 건네오는 아이에게는 마주 묵례를.
손을 흔들어오는 아이에게도 마주 묵례를.
그리고.
“앜!”
장난스레 가운뎃손가락을 펼쳐보는 마르네에게는 의념으로 뒤통수를 때려주었다.
그리고 당연히 저 멀리- 기원학회의 친구들과 같이 앉아있던 아리엘도 내가 온걸 발견하고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어왔는데, 내 눈에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좋은 아침.
물론 입 모양으로 인사를 건네며 미소 짓는 모습 자체는 평소와 똑같았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은 그녀의 번잡해 보이는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을 뿐.
아무래도 토요일에 말해준 내용이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야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 부분에 내가 함부로 끼어들기도 조금 그랬으니, 나는 그저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그걸로 말이라도 걸어온다면 그때 들어주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가볍게 그녀와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렇게 이내- 뒷자리에 도착했다.
그러자 그 순간.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이하린이 평소처럼 밝은, 그러면서도 아직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하린씨.”
“네, 넵···! 좋아요. 넵!”
물론 아직 완전히 멀쩡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지난 토요일- 아리엘과 있었던 일 덕분에 어느 정도 많이 나아진 듯 싶었다. 물론 등천도시에서 들었던 고백을 다시 꺼내기라도 한다면 언제 괜찮아졌느냐는 듯 순식간에 다시 쪼그라들겠지만, 나도 당분간은 놀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뿐.
이하린에게 농담이라도 한번 건네려면 신경 써야 할 구석이 참 많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기에 나는 간단한 대화를 건네보았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흡수는 잘 되어 가시나 보군요.”
“네? 아. 천하씨한텐 바로 보이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잘하고 계시네요.”
“넵···! 다행히 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당!”
그녀 또한 주말 동안 에테리얼 크리스탈을 섭취한 모양인지 마력이 꽤 늘어난 상황.
물론 여명급인 만큼 늘어날 마력량 자체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총량이 작아서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녹여내고 있는듯싶었다. 아니, 애초에 이하린은 따로 심법같은걸 운용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몸에 그대로 녹여내면 그만이었을 터. 아마 그녀는 며칠 내로 섭취한 마력을 모두 흡수해낼 것 같았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워낙 정순한 기운이라 빠르게 흡수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급하게 하기보다는 감각을 짜 맞춰가면서 녹여내세요.”
“그, 급하게 하면 안 좋은 건가요···?”
“아니요. 하린씨의 경우에는 별문제 없을 것 같기는 한데 당분간은 감각이 조금 제어가 안 될 수도 있으실 겁니다. 바로······”
“바로···?”
지금처럼요- 나는 그 말과 함께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
후웅- 그녀의 몸에서부터 살금살금 새어 나오고 있던 마력이 한순간에 내가 주입한 내력에 막혀 가라앉았고, 그 즉시 그녀에게서 풍겨오던 기세 또한 이내 사라져버렸다.
“어, 그··· 지, 지금 뭐 하셨······?”
“기세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 아, 그, 그··· 그런가요?”
“예. 아마 마력이 늘어난 만큼 무의식적으로 순환시키는 마력도 많아진 모양입니다.”
“네, 넵! 가, 가, 감사합니다앙···!”
그런데 내가 손을 댔던 게 실수였는지, 정작 이하린의 몸 내부에서 순환하던 마력이 갑자기 순식간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수가 그 실수를 했다는 건 아니었고, 저건 그냥 이하린이 당황한 탓이었으니 나는 붉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무시하며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조만간 강기공의 운용에 대해서 한번 알려드리긴 해야겠습니다.”
“······.”
“검강의 발현까진 능숙해지셨고, 마력도 늘어났으니 이젠 응용을 시도해봐야지요.”
“······네에···.”
고개 숙인 모습이나, 귓가가 붉어진 정도를 보아하니 이 정도는 잠시 놔두면 금방 진정될만한 수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간략히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카룬드와 위타극까지 처치한 마당에 그녀가 마인 사냥을 한다고 폭주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 한들 미래에 승천자가 될 싹을 가진 아이인 만큼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보단 물꼬를 터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또한 내게 좋은 자극이 되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잔뜩 쪼그라든 이하린에게 아무렇지 않게 수련 일정에 대해 알려주고 있자니 이내, 끼익- 소리와 함께 교수가 들어왔다.
나는 말을 멈추고 강연대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군요.”
2분이 지났을 뿐이니 정말로 조금이었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듯 작게 고개부터 숙여 보였고, 그리고는 출석 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잠시 자신의 워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음··· 오실 분들은 모두 오신 것 같네요. 화이트라인이라고 너무 많이 빠지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긴 한데,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그럼 바로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실전 전투 분석개론 담당- 레이튼 하우버.
랭킹은 아마······ 1,124위라고 했었던가?
“아. 다들 아시다시피 드디어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당연히 승천일에 모두들 기다리고 계신 행사도 열리겠지요?”
하지만 그도 그렇고, 무학담론의 철위강도 그렇고 그들은 내가 랭킹에 연연하지 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는데- 레이튼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완숙을 넘어 극의에 발을 들이고 있었고, 철위강 또한 온전히 절정의 극의에 도달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둘의 랭킹은 기껏해야 1,000위권과 권외에 위치해 있었을 뿐.
물론 그만큼 등천회랑의 인선이 최대한 실질적인 기량 위주로 선발되는 거라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랭킹은 하나의 지표일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점은 아니었다. 물론 높을수록 당연히 강하기도 하겠지만, 업적을 쌓기 위해선 공략활동의 성실성도 꽤 중요한 요소였으니 말이다.
당장 나조차도 랭킹은 300위권이지만 실질적으론 하이랭커급이라는 평가 아니던가?
그렇게- 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가벼운 잡담을 얘기하고 있던 레이튼이 갑자기 말에 크게 악센트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론! 마지막 날에는 승천제의 메인이벤트인 집단전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그렇기에!- 레이튼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묘한 시선을 보내왔는데, 그렇기에 나 또한 생각하던 걸 멈추고 그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수업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현장의 영상을 분석해볼 예정입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적절한 자료가 생겼으니까요!”
그 순간 레이튼이 지어 보이는 표정- 그 속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내 눈에는 굉장히 짓궂게만 느껴졌고, 나는 그가 한 말에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앞의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아. 이거 타이밍 딱 그건데?
-오···! 그러면 설마 그거 볼 수 있는거야?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예! 대부분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지난 주말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역류현상의 토벌현장 영상입니다! 연맹군 주둔지라 자료를 구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 레이튼은 그 말과 내게 무척이나 즐거워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리고는.
“승천자 루타텔님과 등천자 유천하씨의 활약을 한번 같이 분석해 보록 하겠습니다!”
“······.”
거대한 스크린에 내 얼굴을 띄어 올렸다.
***
기원관에 입점해있는 테라스형 카페- 역시나 위치가 위치인 만큼 평일의 그곳은 언제나 항상 생도들로 북적거리는 편이었다.
특히 학년별 전체교과가 있는 날이면 몰려들었던 생도들도 다시, 수업이 끝나는 즉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음료를 후루룩- 거리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어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아니, 걔는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미쳤지. 수호자급 일격사는 도대체······”
“마력방벽은 티르유 선배가 깬 거 같던데 지속적으로 벗겨낸 것도 아니고, 순간 틈을 만들어준 것만으로 대체 어떻게 근원석을 그렇게 쪼개버리는 거지? 그게 가능은 해?”
“음··· 시아야? 혹시 수업시간에 졸았어?”
“그냥 감탄사니까 태클 걸지 마 멍청아.”
방금 막 수업이 끝난 1학년 생도들.
기원학회 출신의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시아 말에 나도 동의해. 솔직히 보고도 의심스러운 수준이긴 하지 그 정도면.”
“그래! 솔직히 그렇다구···!!”
“뭐··· 확실히 엄청나기는 했지.”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는 잠시 자신의 옆에 앉아 멍을 때리는 아리엘의 눈치를 살펴보았고, 그리고는 다시 살며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루타텔님이 보여준 장면이 너무 엄청나서 임팩트가 조금 덜어진 게 그 정도지. 우리랑 같은 생도라기엔 좀······ 아니었지?”
“좀이 아니지. 나는 루타텔님 영상은 그래도··· 우리 아리 때문에 몇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유천하는 끽해야 배치고사였으니까.”
“응! 바로 그거야! 끽해야 배치고사에서 A급 마수나 상대하는 것만 봤는데 황혼급을 일격사 시키는 거를 보여주니까··· 갭이 참.”
“위타극? 그 마인 잡았다 했을 때도 왜 그렇게 이슈인가 실감이 안 왔는데 이건······”
그 말과 함께 그녀- 티나 아라하는 잠시 강의실에서 봤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차라리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티르유의 첫 일격은 그녀가 이제껏 활약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유천하의 일격은 그녀의 인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연맹군의 액션캠이나 드론의 녹화로는 미처 제대로 담아내지도 못했던 초속의 접전.
수호자급 마수의 마력이 흐트러진 순간 쏘아져 나간 칠흑의 궤적은 한순간에 그림자마저 베어 가르며 근원석을 파괴해버렸고, 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었을 정도였다.
“확실히··· 그 일격만 봐도 괜히 등천자가 된 건 아니라는 거겠지. 속도도, 타이밍을 재는 감각도, 결정력도. 모두 생도는커녕 어지간한 수준은 확실히 넘어섰으니까 말이야.”
“뭔가 실감이 안가는 수준이었어 그건. 그 정도는 해야 차세대 승천자 후보라는 걸까?”
“으으······ 왠지 모르게 자존심 상해.”
“나도 마찬가지야 그건. 같은 생도인데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참. 미묘하네 기분이.”
그렇게 흘러나온 티나의 말에 그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유천하가 대단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같은 또래의 아이가 저리 활약하고 있으니 그들로선 감탄과 함께 복잡한 심경이 들 수밖에 없었던 탓.
그리고- 그건 물론.
“근데 아리는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그녀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