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97화 (97/205)

인과의 실타래 (3)

“천하 씨는··· 우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연 말입니까?”

그렇게 이하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유천하가 건넨 물음과는 다소 동떨어진 대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하린으로선 자신이 그간 느낀 바를 최대한 명확하게,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예. 우연이요. 저희는 그 날······ 우연히 만났던 거였잖아요. 저는 우연히 그날 침식방어전에 참여했고, 천하 씨는 우연히 그날 그곳에 계셨고, 그렇게 저는 우연히 죽을 뻔한 천하 씨를 구해드릴 수 있었어요.”

“······.”

“그리고 다시 천하 씨는 우연히 저와 같이 등천회랑에 입학하게 되었고, 다시 우연히 그날 밤의 저와 만나 제게 무공을 가르쳐주셨고, 계속 우연히··· 우연히 그렇게 저희는 이제껏 많은 일을 함께 겪었다고 생각해요.”

이하린은 유천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실······ 저는 그 모든 일이 그저 우연이었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

“혹시 그런 말 들어보셨어요? 우연이 한 번뿐이라면 그저 우연에 불과하지만, 그런 우연이 두 번 겹치면 인연이고, 다시 세 번이 겹쳐진다면 운명.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겹쳐지면 그걸 기적이라 부른다는 말을요.”

이하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천하를 향해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로서도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무척이나 부끄러웠지만, 이하린은 지금 용기를 내는 중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지.

자신이 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이전부터 그녀는 이 마음을 언젠가는 꼭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생각했었으니까.

“저는 저희의 만남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천하 씨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천하 씨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천하 씨를 제 손으로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정말로, 정말 많이 감사하고 있어요.”

“······.”

“제 손으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게 제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구한 게 천하 씨였다는 게 또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진심으로요.”

“······그래서.”

“네. 그래서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구해드렸으니까, 그런 천하 씨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러면 정말 너무 슬플 것 같아서······ 그래서 검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에요. 그게 맨 처음의 이유였어요.”

천하 씨는 제게 기적과도 같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하린의 마음속에는 많은 사연과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고, 다시 그 말을 듣는 유천하 내면에도 많은 사연과 감정이 뒤섞여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천하의 머릿속에는 이제서야 지금껏 이하린이 보여준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이하린은 유천하의 사정을 알 수 없었기에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천하만큼은 이하린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그녀가 갖고 있는 죄책감이 자신을 그녀에게 있어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다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비록 온전하진 못하더라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소중하단 마음과 염려하는 마음.

호의에 대한 감사와 다시 안쓰럽단 생각.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교차했고, 이하린은 그 와중에 말없이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보았다.

그리고는 슥- 그의 입에 걸쳐져 있던 마스크를 살며시 걷어버림과 동시에, 이하린은 그렇게 유천하의 맨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끔이지만 천하 씨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이제껏 가까이서 지켜봤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시니까, 항상 더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시니까······ 저는 천하 씨한테 더 기대하게 되고, 천하 씨를 더 걱정하게 되어버려요.”

“······.”

“그게 나중의 이유였어요.”

“······.”

“천하 씨가 앞으로 보여주실 모습이 기대되고, 또 걱정돼서. 천하 씨가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게 되실지 알 수 없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더 무리해서라도 정말 좋은 걸 선물해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네. 천하 씨가 이해하시기는 힘들겠지만 저는 정말 그런 이유였어요······ 천하 씨는······”

제게······ 너무나 소중하신 분이니까요.

“······그게 전부에요.”

속삭이듯 흘러나온 작디작은 목소리.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의 맥동.

이렇게 진심을 고백하는 건 그녀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차분히 가라앉은 정신 속에서도 심장이 너무나도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고,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러면서도 이하린은 유천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신기하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분명 유천하의 표정 속에선 평소처럼 무감정한, 담담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었던 탓이었고, 지금 이하린의 눈동자에 비친 유천하의 눈동자는 약간, 아주 약간. 조금이지만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 상당히 혼란스런 심경에 휩싸인 상태였다.

내 귓가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이하린도, 그녀가 선물해준 검도, 그리고 그녀가 말해준 속마음도 모두 내 마음속에 이런저런 파문을 일으키는 중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한 말을 되새겨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제가 천하 씨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천하 씨를 제 손으로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정말, 정말 많이 감사하고 있어요.

분명히- 나는 이하린이 가진 죄책감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 묘사로 접했던 글 줄기 몇 개에 불과했고, 한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그건 너무나 부실한 단면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나는 여태껏 이하린이 내게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

이하린에겐 그게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

나는 조금 당혹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미래를 막아내기 위해 필요한 동료.

주연인물들만큼, 아니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새로운 주역.

이제껏 나는 그녀에게 비치는 내 모습을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 스스로 이하린에게 내 모습이 그렇게 비칠 수 있도록 신경 써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게 아니었던 모양.

나는 이제서야 이하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녀가 내게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려 했는지, 주연인물들보다도 내게 더 신경을 기울였는지, 왜 이하린에게 나라는 예외가 그리 쉽게 허용이 되었는지.

나는 이제야 그걸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다면 하린 씨의 손으로 직접 구해낸 생명이라 그랬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이유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에요. 천하 씨는 정말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

“제가 구한 게 천하 씨였다는 사실도, 제가 천하 씨를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도. 저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서- 이 세계에 넘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게 바로 이하린이었다는 사실에 나 또한 많은 생각이 드는 바였다.

하필 이렇게 소설 속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상황도, 그리고 이 세계에 발을 들이고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사람이 바로 이 세계를 써 내려갔다는 사람이자, 동시에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는 상황도. 그 모든 건 단순히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었다. 내게 중요한 건 이 세계가 현실이라는 점이었고, 그렇기에 다시 내게 중요한 건 무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은 잠시 내려놨을지언정 이제껏 그게 나의 의무였고, 나의 목표였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이제껏 이하린에 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그녀는 내게 호의를 보내주고 있었으니. 원하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그녀와 가까워지고, 그녀를 도와주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으니까. 그저 그렇게 생각해왔으니까. 그저 그런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내게 뭐라 말했던가.

우연과 인연, 그리고 운명과 기적?

허나 그건 그녀가 오해하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아니었다.

처음의 만남은 분명 순수한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그 이후로 이어졌던 모든 일은 내가 원했기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나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다시 이하린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와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천하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저희가 그때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요.”

그녀와 함께 등천회랑으로 향한 것도,

그녀와 함께 여러 사건을 겪게 된 것도,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우연은 단 하나뿐이었고, 그 외에 일어났던 일들은 어찌 보면 그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러고자 했기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 바람의 시작점에는 다시 우연이 깃들어 있었으니. 그녀와 나의 관계는 기적도, 운명도, 인연도 아닌 그저 순수한 우연에 불과했다. 인연도, 운명도, 기적도. 그 어떤 인과의 흐름이 아닌 그저 한 번의 우연.

하지만.

“적어도 저는······ 저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었다 생각해요. 저희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겹쳐졌기에 저희가 만날 수 있었다 생각해요. 그렇기에 저희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건 어찌 보면 인연의 결과라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운명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지금 그게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저는······ 이 모든 게 인과라 생각해요.”

“······인과.”

“네. 인과요. 제가 천하 씨와 만나게 된 것도, 제가 천하 씨를 구해드릴 수 있었던 것도, 저희가 같이 등천회랑에 오게 된 것도, 천하 씨와 여러 사건을 겪은 것도, 천하 씨가 등천의 업을 달성하신 것도, 그 모든 자리에 제가 있었던 것도 모두 무언가의 행적이 쌓인 인과의 실타래라 느끼고 있어요.”

인과의 실타래- 또다시 듣게 된 인과라는 말은 내게 복잡한 화두를 던져주었고, 나는 혼잡한 상념 속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른 누군가도 아닌, 이하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그리고 이 세계를 써 내려간 원작의 저자가 건네온 진심이었기에.

그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저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조금 더 올바르게 매듭지어보고 싶었어요. 저는 앞으로도 천하 씨랑 함께 여러 일을 겪어 보고 싶고, 천하 씨는 제게 여러 기대를 안겨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어떤··· 기대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말 여러 가지요. 상식을 벗어난 천하 씨의 재능도, 기량도,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 말도 안 되는 특성도 그리고······ 저희가 겪어온 일들. 방금 말씀드린 인과라는 부분에 대해서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을 잡고 있던 손마저 떼어낸 채 말이다.

“······그러니까 저는 천하 씨에게 감사하면서도, 또 저, 정말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앞으로 천하 씨가 보여주실 모습들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검을 향해 손을 뻗어왔고, 그렇게 떨려오는 자신의 작은 두 손으로 내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끝부분에 무언가를 매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손을 몇 번 꼼지락거린 뒤에야 황급히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녀의 손길이 스쳐 간 검. 그 손잡이의 끝부분을 들어 올려보았다.

“······.”

그러자 내 눈에 들어온 건 백색의 수실.

검병의 끝에 매달린 수실은 그녀의 피부처럼 새하얀 색채를 뽐내며 그곳에 매달려 있었고, 은은한 마력을 품은 채 그렇게 부드럽게 나풀거리고 있었다.

흑색의 검신과 대비되는 백색의 실타래.

가벼운 무게와 대비되는 무거운 마음.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바, 받아주세요.”

이게 제··· 마음이니까요- 그녀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내게 그렇게 말해왔고,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내게는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그리고 그렇게 내게 기대를 건네는 작은 소녀의 마음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 속에서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을 뿐이었다.

***

생각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작게는 등천의 구도자의 일에서부터 시작해, 만상의 눈에 대해, 만상세계에 대해, 또 그녀가 말해준 속마음에 대해.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인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도 결론을 내리기 힘든 문제들이 사방에 산적해 있었다.

그중에는 이전이었다면 간단히 비워냈을 고민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이하린과 함께 밤길을 걸어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여러 생각 속에 잠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머릿속에 자리한 심란함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저··· 저어······ 그··· 그니까아······.”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정말이죠? 오해 안 하실 거죠···?”

“예. 다른 의미로 오해하진 않았습니다.”

“······.”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눈을 글썽거리고 있는 이하린의 모습이 너무나 웃겼기 때문이었고, 심각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분위기를 몽글거리게 만들어 버리는 이하린이 너무나 그녀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전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다른 의미로 오해하진 않을 테니······ 그렇게 부끄러워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치만··· 그치마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너무 부끄럽단 말이에요······!”

가로등 하나 없는 적막한 길가였지만 내 눈은 어둠을 가르고 그녀의 눈에서 글썽거리는 빛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지금 조금 곤란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왜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보셔 가지구··· 그렇게 물어보시면 무섭단 말이에요······ 저만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하게 시키구······ 정말··· 진짜······.”

“그렇게 부끄러우신가요?”

“······네!!”

그녀가 빽- 하고 수치심이 담긴 대답을 내질렀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짓궂은 대답을 해보았다.

그러자.

“소중한 사람이라 말해서요?”

“@$*%**)@(!!!!”

오랜만에 터져 나온 이상한 외침.

이하린은 얼굴이 펑- 터질 것만 같은 모양새로 내게 순식간에 뭐라 말을 토해냈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나마 웃음을 터트렸을 뿐이었다.

“우, 웃지 마세요···!”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이하린은 도무지 참기 힘들었는지 다시 검을 부여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마음을 진정시키기는 힘든 노릇.

그렇게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터져나갈 것 같은 그녀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예. 안 웃을게요.”

“······웃고 계시잖아요. 정말··· 너무해요.”

솔직히 말해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까 전까지는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했었는데도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심란함은 정말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이렇게 손쉽게 분위기를 깨버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는 다소 뜬금없는 생각이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하린은 그냥 이하린이구나.

그저 그런 생각이 말이다.

이건 참 별거 아닌듯하면서도 중요한 생각이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보내주는 호의에도, 그 속사정에도,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까야 그녀가 보내오는 호의에 의아함을 느끼긴 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이 조금 가벼워지고 나서야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새삼스레 그게 뭐가 중요했을까.

아니, 원래부터 내겐 이하린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녀가 건넨 호의가 의아했고, 그 호의가 시작된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진심을 말해주었고, 그 마음은 확실히 내게 닿았으니 다시 이하린이 어떤 사람인지도, 이하린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내게는 다시 중요치 않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든 내게 이하린은 이하린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말을 잘하더니 순식간에 다시 소심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하린의 모습은 내 머릿속의 심란함을 한순간에 치워버렸다. 그리고 다시.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힐끗거리는 이하린의 모습은 내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처럼 그녀는 앞으로도 그날처럼 내게 검을 던져줄 아이였고, 다시 그날처럼 내 걱정에 두 눈을 글썽거릴 사람이었으니. 적어도 그녀에 대해서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말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린 씨가 말해주신 건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네?”

나 또한 그녀에게 발을 맞춰 주었을 뿐.

“제가 이곳에 오게 되고 처음으로 만나게 된 사람이 하린 씨라는 점도, 저를 구해준 게 하린 씨라는 점도, 제게 그렇게 계속 많은 신경을 기울여 주시는 것도. 저도 분명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니-

“제게도 하린 씨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

그렇게 나는 보름달처럼 커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약간은 짓궂은 마음을 담아. 그리고 어느 정도 진심을 담아 입을 열어보았다.

나로서도 이건 진지하게 건넨 말이었다.

물론 소중함이라는 말속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테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이하린이었으니 그런 부분에서의 의미가 크긴 했다.

그래도······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한다 한들 그게 거짓말을 하는 셈은 아니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어떻게 들렸던 걸까.

“······.”

어떻게 저기서 더 빨개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하린의 얼굴은 정말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고, 콕- 건드리면 그대로 터질 것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내 마음속에는 이하린에게 조금 장난을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 보았을 따름이었다.

“이러면 이제 같이 부끄러우니 괜찮나요?”

“······아. 그··· 그, 그러니까. 그··· 그게···.”

“설마 다른 의미로 오해하신 건 아니실 거라 믿습니다. 저도 말 그대로의 의미였으니까요. 하린 씨와 마찬가지로요.”

“······! 아. 그. 네! 넵! 다, 당연······!”

“예. 하린 씨와 마찬가지로요.”

“······?”

나는 그렇게 대답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 걸어나갔고, 그렇게 이하린은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며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저 뒤에서 펑-! 하고 무언가 터지는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 미묘한 기척에 다시 뒤를 돌아보니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흐느적거리는 이하린의 모습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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