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의 실타래 (1)
이제 곧 5월이라 그런 걸까? 평소였다면 마냥 화창하게만 느꼈을 날씨도 오늘따라 그녀에겐 조금 덥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이하린은 손으로 옷깃을 몇 번 펄럭거린 뒤 앞에 놓여있던 빨대를 입으로 앙문 채 후루룩거렸고, 이내 입안에 퍼져나가는 민트의 청량감과 차가운 얼음조각의 감촉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언제 오시징.”
그 말과 함께 잠시 시간을 확인해보는 그녀- 하지만 역시 기존에 약속했던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아있었다.
한마디로 아직 한참은 더 남았다는 말.
물론 잔뜩 들떠버린 상태로 이렇게 일찍 나와버린 건 그녀였기에 이하린은 그저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워치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분명 원래의 그녀라면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지양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의 일정도 그녀에겐 분명 중요한 일이었기에 이하린은 애초에 오늘 하루쯤은 이리 보낼 생각으로 이곳을 방문한 상태였다.
그러니 뭐 지금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이하린은 그런 생각 속에 열심히 워치를 들여다보며 소소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각성자들의 웹사이트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헌터넷에 한번 들어가 보고, 다시 회랑의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는 정도.
안 그래도 어제 막 중간고사가 끝났던지라 회랑의 커뮤니티는 그 얘기로 떠들썩했고, 둘러볼 글이 충분히 많았던 덕분이었다.
그녀는 인기순으로 글을 정렬해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건 익숙한 이름. 역시나 예상한 대로 커뮤니티의 게시글은 모두 유천하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녀는 순서대로 화면을 터치해보았다.
[아니 유천하 이게 말이 되냐? 진짜?]
-난 든든히 말아먹었는데 이게 뭔데 ㅋㅋ
ㄴ솔직히 컨닝이지 이건 ㅋㅋㅋㅋㅋㅋ
ㄴ4점에서 710점이 말이 되는 거야?
ㄴ시험문제 난이도 개에바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고 진짜 시발; 너무 이상하잖아;;
이건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그녀와 아리엘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놀라지 않았는가? 그러니 분명 다른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
하지만- 그런 생각 속에서도 이하린의 손가락은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ㄴ말은 안 되는데 컨닝이 가능할 만큼 허술한 시험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했나 보죠. 등록. 꾸욱.
그녀는 다시 다음 글을 눌러보았다.
[지숨찐 지숨찐하더니 진짜 지숨찐임?]
-여태까지 진짜 지능을 숨김이었네;
ㄴ아무리 그래도 4점은 너무 숨겼는데.
ㄴ실기 타임어택도 미쳤는데 필기점수 변화는 진짜 상상도 못 했다고 진짜 ㅋㅋㅋㅋ
ㄴ지금까지 멍청이라고 뒤에서 놀렸던거 반성하겠습니다 ㅠㅠ
ㄴ배치고사는 근데 왜 그렇게 본 거래? 저 정도면 원래 저 실력이었던 거일 텐데.
ㄴ그냥 두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한 거 아닐까요? 요새 맨날 스터디실에 보이던데 ㅎㅎ
등록- 이하린은 다시 한 번 댓글을 달았고, 이내 다시 다음 글로 이동해보았다.
그런데 인기순 정렬을 해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 전날의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시험 보랬더니 지 혼자 스피드런 찍네;;]
-48초 뭔데. 사실상 전부 1초 컷에 수호자급 마수에 끽해야 5초 걸린 거 아니냐 이 정도면? 실력을 떠나 가능한 거야? 이게?
ㄴ걔 특성 일격 특화형임 혹시?
ㄴ설마. 관찰계열일걸.
ㄴ하이랭커급은 빼박이네요 이 정도면.
ㄴ클라스차이 어마어마하네 진짜··· 존나 허탈하다. 재능 차이 자괴감 오져요 ㅠㅠ
ㄴ각자의 영역이 있는 거니까 힘내세요. 승천자 트리스탄님도 재능은 하나도······
······없었는데 노력으로 오른 거래요. 등록.
친절히 댓글을 달아준 이하린은 잠시 고민한 끝에 좋아요까지 눌러주었다.
물론 이하린 자신 또한 유천하가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이란 건 똑똑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한들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건 그녀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이하린이 바라는 건 유천하도, 주연들도,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의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것이었고, 그 불가능에 가까운 유치한 희망을 위해 그녀는 항상 미래를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하린은 시험을 망쳤다고 우울해 하는 아이들에게는 격려의 댓글을 달아주었고, 다시 유천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시글에서는 이상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댓글을 달아줬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천하랑 같이 다니는 키 작은 애는 서로 무슨 사이길래 맨날 그렇게 붙어다니냐는 글을 바라보며 뭐라 댓글을 달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댓글을 달려던 순간.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신 건가요?”
“······!”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이하린은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검은색의 볼 캡을 푹 눌러쓴,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대강 묶은 채 서 있는 미형의 남자.
그가 바로 그곳에 서 있었다.
심지어 오늘의 그는 생도복이 아닌, 루즈하게 떨어지는 셔츠를 걸친 채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는데 평소의 회랑에서 보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기에 이하린은 그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
“······.”
그런 그녀의 태도에 그는 잠시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의 표정에 이하린 또한 이내 정신을 차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차린 이하린은 이내 해맑게 웃으며 상대를 반겨주었다. 왜냐하면-
“어서 오세요··· 천하씨!”
지금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눈앞의 남자- 유천하였으니까.
***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채 통통 튀듯 걸어나가는 이하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번 등천도시에 방문했던 날.
그때의 나는 거리 곳곳에서 흘러넘치는 평온함에 질려 앞으로는 여길 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뒤에 바로 테러가 터지는 바람에 마인들을 죽이겠다고 건물을 박차고 뛰어다녔고, 다시 이하린과 아리엘을 구하기 위해 회랑까지 달려나가느라 이래저래 고생하기도 했지만······ 뭐. 어쨌든.
그렇기에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겠다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 다짐하고 고작 한 달이 좀 더 지났다고 이렇게 마음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내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었던 탓.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던가?
물론 상황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 상황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현대에서 살았던 내가 무림으로 가 새롭게 변하였듯이, 무림에서 살던 내가 다시 이 세계에 발을 들임으로써 나는 다시 또 변화를 맞아가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분명 지금의 나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여러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도 꽤 빠르게.
솔직히 말해서 이 변화의 끝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 모습이 어떤 광경일지는 아직까진 상상이 잘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림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될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변화의 많은 부분이 바로 내 눈앞의 그녀를 통해 이루어지리란 걸 조심스레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런데 천하씨는 안 더우세요? 저는 오늘 조금 더운 것 같은데······ 얼마나 됐다고 벌써 봄도 다 지나가나 봐요!”
“예. 이제 곧 여름이 올 것 같네요.”
내가 그런 감상을 느끼든 말든.
정작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당사자는 무언가 즐거운 듯 해맑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나 또한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맞춰주는 중이었다.
그리곤 해맑아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저······ 혹시 천하씨 내일 시간 되세요?
지난밤- 이래저래 소란스러웠던 결과발표가 지나가고, 다소 들뜬 상태로 그녀들과 스터디까지 모두 끝내고 난 뒤의 시각.
-그러엄 혹시이··· 내이일··· 저어랑 같이 등천도시에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헤어지기 전에 이하린은 마지막으로 내게 그런 요청을 건네왔었다. 그것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기색을 담아서 말이다.
-아···! 그, 그으······ 다, 다른 건 아닌데에······ 그냥 천하씨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아, 아니, 그, 그 정확히는 가고 싶다기보단······ 그냥 보여주고 싶은 게에······
물론- 그 말에 내가 의아함을 표출하자 이하린은 자연스레 조금씩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그런 이하린의 태도에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나는 이하린의 소심함을 알고 있었던 만큼 그녀의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고, 왜 갑자기 저런 부탁을 건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하린의 성격상 의미 없는 부탁은 아니라 생각했던 탓. 그렇게 나는 그런 이하린의 태도를 통해 뭔지는 몰라도 꽤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던지라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 저기 천하씨 있어요···!”
“······그게 무슨··· 아.”
“역시 아직 한 달 전이라 그런지 천하씨에 대해 관심이 많나 봐요···! 안 그래도 이젠 등천까지 하셨으니 더 그런 거 아닐까요?”
“······.”
나는 건물 외벽. 그곳에 붙어있는 디스플레이 속에서 움직이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건 훈장수여식 때 찍힌 영상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저게 왜 지금 여기서, 저렇게 재생되고 있는지 굉장히 어처구니가 없었을 따름.
[등천자 유천하의 등천을 축하드립니다.]
물론 밑에 달린 자막까지 읽어보니 아무래도 테러 건과 얽혀 도시 차원에서 내게 굉장히 우호를 표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나로서는 그냥 부담스러운 상황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나는 착잡한 심경을 담아 이하린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역시 사복을 입고 오길 잘했군요.”
“아. 그렇긴 하죠···? 아마 생도복을 입고 왔으면 사람들이 엄청 몰려들었을 거에요. 안 그래도 생도들한테 관심이 많은 곳인데 천하씨가 얼굴까지 드러내셨으면 정말 엄청 몰려들었을걸요? 모자 쓰고 나오시길 잘한 것 같아요···! 그리고······ 되, 되게 잘 어울리기도 하구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진짜. 진짜루요! 잘··· 으··· 진짜루요!”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얼떨떨한 기분속에 다시 한 번 모자의 챙을 푹 눌러썼다.
지난번 방문경험도 있었고, 테러사건도 있었다 보니 이래저래 귀찮은 일을 예방하고자 이렇게 얼굴을 꽁꽁 가리고 온 것이었는데.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도 이런 풍경을 목격하게 되니 새삼스레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던 탓.
그러자 그런 내 행동을 지켜보던 이하린은 이내 내 심정을 이해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천하씨 그러니까 연예인 같아요.”
“······너무 많이 가렸나요?”
“아.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그, 그래도 승천제가 시작되면 겪게 될 일이니까 먼저 적응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승천제··· 말입니까?”
“네! 이제 승천일도 곧이니까요···!”
승천제라- 사실 지난번 아리엘이 한번 언급하기도 했고, 회랑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씩 승천제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었을 뿐.
물론 나름대로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기도 했고, 회랑 자체 차원에서도 큰 규모로 치를 예정인 축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승천제는 원작에서도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진 부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원작에서의 이하린은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이하린은 카룬드 사건을 겪고 한참 마인 사냥을 하며 위타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때였는데, 조급함에 쫒기던 그녀는 업륜을 얻으려고 잿빛탑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다친 상태였다.
물론 그 결과 업륜을 얻긴 했지만 몸져눕게 된 그녀는 결국 승천제 내내 병실에 입원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내가 기억하는 승천제 때의 이하린은 병실에서 골골거리다 그나마 마지막 날에 퇴원해 솜사탕을 먹으며 돌아다녔던 게 전부.
오죽하면 에피소드 마지막 대사가 솜사탕때문에 손이 끈적거린다는 말이었을까?
너무 허망하게 지나간 에피소드였기에 그 말은 댓글 창에서 일종의 밈이 되었을 정도였고, 그렇기에 나 또한 승천제라는 말을 듣고 그 기억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천하씨는 축제 때 뭐하실 계획이세요?”
“딱히 계획은 없습니다.”
어쨌든- 그런 만큼 이미 위타극까지 죽인 마당에 딱히 신경 쓸만한 일은 없었고, 승천제 때도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었던 만큼 그런 축제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정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들떠 보이는 이하린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을 돌려주었는데, 내 대답에 이하린이 무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시구나. 그렇군요. 음. 좋네요.”
“······하린씨는 무슨 계획이 있으신가요?”
“네? 아, 아니요···! 저, 저도 딱히 없어요!”
항상 느끼는 바였지만 이하린은 거짓말을 너무 못한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굳이 캐물어서 괴롭히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흔들리는 이하린의 동공을 바라보며 화제나 돌릴 겸 아까부터 궁금했던 부분을 질문해보았다.
“그런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슬슬 알려주실때도 된 것 같은데.”
“아. 그, 그건······ 아직은 조금만 더요···!”
어느새 우리는 일반거리를 지나쳐 각성자들이 이용하는 공방거리까지 걸어온 상황. 그렇기에 건넨 질문이었는데, 이하린은 굉장히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대답을 회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하린의 시선은 내 허리춤. 그러니까 내 검을 한번 스치고 지나갔기에,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보며 대강이나마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검인가?’
참고로- 위타극과의 싸움에서 검이 박살 난 이후 나는 여태까지 계속 회랑 측 기자재인 양산형 철검을 들고 다니고 있는 상황.
애초에 당장은 전력을 다해야 할 상대도 없었고, 지금의 내 경지가 병기의 질에 좌우 받을 수준도 아니었기에 임시로 취한 조치였는데, 확실히 양산형 기자재일지언정 회랑의 물건은 물건인지 검의 상태가 나쁘지 않아 계속해서 써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그녀에겐 그게 조금 신경 쓰였던 걸까?
그녀를 따라 걸어갈수록 점점 병장기와 아티팩트를 판매하는 건물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 방금의 시선을 느낀 이상 내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그녀의 의도는 단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 참고로 그렇게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라. 저, 정말 별거 아니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정말요. 정말. 정말!”
“예. 알겠습니다.”
“······.”
“신경 안 쓰겠습니다.”
“네, 네에······”
아무리 봐도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어하는 모습이었기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는데, 어째 내 대답에 이하린의 상태가 조금씩 쪼그라들기 시작했기에 나로서는 그저 의아했을 따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더 발을 맞추어 거리를 거닐었고, 그런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건 결국······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서였다.
***
“······눈 뜨시면 안 돼요. 아셨죠?”
“······예.”
계속해서 신신당부하는 이하린의 태도에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만상의 눈을 통해 눈을 감고서도 상황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조금 전 몹시 당황했던 이하린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렸기에 나는 묵묵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이하린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뭔가 서프라이즈를 기획했던 것 같긴 한데 막상 데려와 놓고 보니 생각했던 그림이 안 나왔던 모양. 이제껏 대놓고 수상한 기색을 풍겨버린 마당이라 서프라이즈는 한참 전에 물 건너갔다는걸 이하린은 이곳에 와서야 눈치챈듯싶었다.
“······그냥 눈만 감는 거에요. 알았죠?”
“예. 아무것도 기대 안 하겠습니다.”
“아, 아니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탁-! 하지만 그냥 기감으로 파악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고, 이하린은 이내 나를 앉혀놓은 방에서 나가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건물이 워낙 왜소하다 보니 이곳에 앉아만 있어도 기감에 건물 내부의 상황이 상세히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하린은 누군가에게 다가가더니 기다란 무언가를 받고 다시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역시나 예상에서 크게 안 벗어나는 상황.
그렇게 문 앞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죽인 그녀는 조심스레 기척을 죽이더니 살금살금 방안으로 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조용히. 호흡까지 멈춘 채 말이다.
어차피 기척으로 느껴지니 숨은 쉬어도 된다고 말해줄까 싶었다··· 그랬다간 이하린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질 것만 같았기에 나는 계속해서 모른 척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내가 이런 인기척 정도는 쉽게 감지할 거란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아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하린은 계속해서 어설픈 행동을 취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뭔가 조금 들떠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모양이었는데 내가 짐작해보기엔 지금까지 그녀는 바로 이 순간에 신경이 쏠려있던 게 아니었을까 싶을 따름.
그리고 그 순간.
“······천하씨.”
“예. 오셨습니까.”
“눈 뜨셔도 돼요. 이제.”
조금 상기된, 그러면서도 여린 울림 속에 흘러나온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고, 그리고.
“······.”
그런 내 눈앞에 놓여 있던 건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한 자루의 검이었다.
“예, 예전부터 선물해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검이 완성되어서 그게 그러니까······”
“······.”
“그······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뭔가 잘 안된 것 같기도 하구······ 마음에··· 드시나요?”
하지만.
“······천하씨?”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바라보았을 뿐이었고, 시간마저 얼어붙은 기분 속에 멍하니 그녀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내게 내밀은 검.
“······.”
올곧게 뻗어 나간 그 흑색의 검신.
그곳에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예기.
이건 나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으니, 그렇게 그 검은 가만히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흘러가는 바람의 결마저 베어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