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1)
주말이 지나가는 밤. 구름이 잔뜩 끼어 한껏 흐릿해진 하늘은 달빛마저 그 뒤로 숨겨버렸고, 덕분에 수해의 한가운데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그 빛 한점 없는 그림자 속에서도 그대로 하오란의 눈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전부 죽이고 있다···?”
“예, 옙! 그, 그렇습니다!”
그 순간- 내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의문. 그건 하오란이 예상치 못했던 소식을 들고왔기 때문이었다.
위타극과 적원회의 일이 있었던 만큼 새로운 소식을 들고올 거라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그, 조, 조금만이라도 행적이 드러났다 하면 바로 집행기관이 들이닥쳐서 모가지를 썰어대고 있습니다. 무, 물론 순수하게 밀수만 하던 녀석들은 연행해간다는데··· 어디 이 바닥에 그런 놈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혈마공.”
“예, 예! 그렇습니다! 그, 그래도 원래는 몰래몰래 선만 안 넘기면 저희 같은 잔바리들까지 건드리는 일은 없었는데, 그 날 이후부터는 그냥 조금만 행적이 드러났다 하면 바로 찾아와 조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
“오죽하면 근방에 자리하고 있던 녀석들이 죄다 남미나 아프리카로 도망가고 있겠습니까? 지난 한 주 동안 벌써 어지간한 녀석들은 이미 아시아에서 빠져나간 뒤입니다.”
하오란이 들고온 소식- 그것은 바로 아시아 쪽 접경지에서 활동하는 마인들의 동향과 관련된 이야기였고, 적원회가 테러를 일으켰던 그 날 이후로 아시아 쪽 접경지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마인 및 범죄자들을 토벌하는 건 원래부터 집행기관이 해야 할 일. 그러니 집행자들이 접경지의 범죄조직을 대대적으로 소탕한다는 건 그리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매일 같이 공략활동을 이어나가는 공략자들과 알량한 힘을 믿고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녀석들의 역량 차이는 명확할 테니, 집행자들이 마인을 토벌하는데 애먹을 리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저 조금 의아했을 뿐.
분명 능력으로만 보자면 기관은 그렇게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일 역량 정도는 원래부터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그건 지난 한 달간 마인 사냥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느꼈던 부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 혼자서도 그렇게 마인들을 찾아내 사냥할 수 있었는데 제대로 된 정규기관이 설마 그 정도를 못하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그런 배경에는 분명 나름대로 이유가 존재할 거라 생각해왔고, 그러므로 다시- 왜 지금껏 가만히 있던 그들이 이제 와서 그렇게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시작한 것인지 조금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잠시동안 생각해본 끝에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물론 관계자가 아닌 이상 정확히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신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집단과 개인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가치관과 행동의 방향성이 반드시 부합하진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었다.
애초에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리고 그 집단이 활동해야 하는 영역이 넓을수록 효율성은 분명 중요할 수밖에 없는 요소.
그렇다면 사소한 악행을 일삼는 녀석들까지 일일이 추격해 사살하는 건 기존의 기관 입장에선 이래저래 비효율적인 인력 활용처럼 느껴지지 않았겠는가? 애초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는 침식현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검증된 초인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게 현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집행기관에서 마인들과 범죄자들의 온상을 어느 정도 무시하고 있던 까닭은 거기서 나타나는 이득이, 다시 녀석들을 직접 토벌하러 돌아다니는 데 소모되는 인력의 가치와 셈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란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집행기관의 입장이 지난주에 갑자기 바뀌었다면······ 시기상 내가 추측해볼 수 있는 원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적원회.”
“······예? 아. 적원회. 예. 그렇습니다. 다른 녀석들도 적원회가 저지른 사고 때문에 보복당하는 거라 추측하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순간 생각하던 내용이 입 밖으로 새어나갔고, 그런 내 말을 하오란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소 엉뚱한 소리로 답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저건 내 짐작과는 다른 이유였다.
언뜻 보면 이건 적원회가 일으킨 테러행위의 보복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날 여러 일이 겹친 끝에 적원회는 분명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수뇌부도, 구성원도 대다수가 죽었으니 이미 제대로 된 조직의 기능은 상실했을 터.
그러니 정작 당사자들이 전부 죽은 마당에 보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건- 내가 보기에는 그저 적원회의 부재로 인해 발생할 여파를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 기관측에서 일부러 땅 고르기에 들어갔다는 걸로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분명히 적원회가 일으켰던 테러도, 그리고 다시 괴멸당한 녀석들의 상황도, 모두 접경지 내의 질서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테니 그걸 수습하기 위해 기관에서 인력을 투입했다 생각한다면······
효율성을 무시하고 마인들을 사냥하는 것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저 투입한 인력을 그대로 활용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간단히 답을 돌려주었다.
“당분간은 마인 사냥을 쉬는 게 좋겠군.”
“······!! 예. 그,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하오란은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그 의견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격렬히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물론 나로서는 집행자들이 알아서 마인 사냥을 해주겠다는데, 굳이 그곳에 끼어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만 아무래도 하오란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 사, 사실 저도 며칠 전부턴 접경지에서 나와 근처에서 숨어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근처에서?”
“예, 옙! 이전에 했던 일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상태라 저도 적발당하면 바로 사살당할 확률이 높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그런 의미로 물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제서야 녀석이 추레한 몰골로 나타난 까닭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곳 위주로 돌아다니며 노숙을 하고 있는 모양.
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굳이 야산에 숨어들었는지 순간 의아했지만 이내 나는 녀석의 입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분간은 금제의 주기를 늘려주마.”
“······! 저, 정말이십니까?!”
“마인 사냥을 할 게 아니라면 굳이 만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 대신 동향파악은 계속해야 할 것이다. 정보는 웹상으로 전달받으면 그만이니까.”
“가, 감사합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나 다른 접경지로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금제의 주기 때문이었는지, 내 말에 하오란은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고개를 숙여왔다.
녀석이 편하라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는 부분.
솔직히 말해서 마인 사냥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시기에 돌아다니게 놔둬서 뭐하겠는가? 괜히 애먼 데서 모가지라도 따였다간 정보습득처만 잃는 셈이었기에 내린 판단이었는데 하오란은 그저 금제의 주기가 늘어난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나를 안 봐도 된다는 사실도 나름대로 그 기쁨의 이유 중 하나처럼 보였고 말이다.
물론 그런 녀석의 태도가 조금 어처구니 없긴 했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녀석과 나는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으니 녀석에게 어떤 태도를 바라겠는가? 나와 얽힌 순간부터 하오란에게 정해진 미래는 이미 하나로 귀결된 것과 다름없었고, 나 또한 녀석이 지은 업보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 뿐이었으니 그런건 감흥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신교에서 처음으로 암영비천대를 맡게 되었을 때도 수하들은 내가 자리를 비운다고 할 때마다 저런 반응을 내비쳤었기에, 하오란의 저런 태도를 이해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뿐.
다만- 그런 녀석의 태도를 보고있자니 갑작스레 신교에서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는게 조금 거슬렸을 따름이었다.
대뜸 자신의 상관이랍시고 찾아온 소년이 소교주라는 부담스러운 신분의 소유자란 걸 알았을 때 녀석들이 지었던 표정이라든가, 그렇게 빈정거리다 결국 얻어맞은 뒤에야 달라졌던 태도라든가, 마지막까지 나를 돕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들던 모습이라든가······ 뭐 이제 와선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뜬금없지만 다시 한 번 내 목표를 되새길 수 있었다.
비록 잠시 의무를 내려놨을지언정, 결코 목표를 잊을 생각은 없었고, 지금은 조급함을 내려놨지만 그건 다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으니······ 내가 여유를 찾고자 하는 건 결코 이곳에 안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지금은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기억일질지언정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탐욕 속에 천마의 이름을 흙발로 짓밟아버린 추악한 노괴에게 그 이름의 무게를 알려줘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저 자신이 저지른 업의 대가를 되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다시 한 번 상기해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소천마 유천하로서 반드시 해내야 할 업이었고, 다시 내 스스로도 반드시 이루겠다 다짐한 목표였으니까.
***
주말이 지나가고 찾아온 4월의 마지막 주.
드디어 등천회랑의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아씨··· 조지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강등당하는 거지.
-나 중간고사는 필기에 몰방할 계획임.
-그냥 바로 승천제나 하면 좋겠다···.
-응. 아직 한참 남음~
그래서인지 거리를 거닐고만 있어도 시험에 대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는데, 그건 3학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깊이 체감되는 중이었다.
작게는 시험의 성적에 관한 이야기부터, 크게는 어떤 식으로 시험이 이루어질까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아이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었고, 사뭇 긴장한 표정을 그 얼굴에 띄우고선 3학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게 시야에 엿보였다.
-여긴 진짜 쓸데없이 넓네.
-백색탑 세워놔서 어쩔 수 없음.
아. 참고로 시험은 배치고사와 마찬가지로 백색탑의 내부에서 시행될 예정이었다.
물론 시험방식까지 배치고사와 같진 않았고, 시험 자체도 실기와 필기를 이틀 동안 각각 나눠서 진행하는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생도들의 기량을 보다 더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한 번에 전 생도들의 시험을 동시에 치르기에는 부합되는 백색탑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물론 이전처럼 한 번에 생도들을 몰아넣고 시험을 보면 간단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시험에서는 단체전이 아닌 개인전으로 평가가 이루어졌고, 학년별로도 시험이 시행돼야 했기 때문에 차마 그러기는 다소 요원했을 따름.
그나마 필기시험은 그렇게 학년별로 대강당에 모여 일제히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실기의 경우는 회랑에 존재하는 30개의 백색탑을 이용해 최대한 인원을 나눠 실시하는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오. 등천자님 지나간다.
-저 정도면 실기는 전혀 걱정 안 되겠지?
-근데 왜 유천하 쟤는 맨날 혼자 다니냐.
-뭐래. 요새 맨날 그 키 작은 애랑 아리엘 님이랑 같이 돌아다니는 거 모름? 시험장 갈렸나 보지.
-엥? 진짜? 뭔 조합이래 그건.
그렇다 보니 나도 이하린도, 아리엘도 모두 다 각자 다른 시간대, 다른 장소에 실기시험이 배정된 상태.
둘은 오후에 시험이 예정되어 있다던가?
하지만 나는 아침에 측정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3학구를 거니는 중이었고, 평소 이곳을 거닐었던 시각이 인적 드문 야심한 시간이었던 만큼 지금처럼 사람이 북적거리는 3학구의 풍경이 어째 어색하단 생각마저 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우웅- 손목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곧바로 워치를 확인해보았다. 그간 메시지 확인 건으로 아리엘에게 하도 시달렸기에 다소 본능적으로 한 행동. 하지만 누가 보냈을지야 안 봐도 뻔하긴 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생각한 그대로.
[시험 잘 보세요! 조심하시구 화이팅! : )]
[대박 기원! 아자 아자!]
애초에 나한테 연락을 보낼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기껏해야 이하린이나 아리엘, 그것도 아니라면 이따금 리베르테같은 애들이 보낼 뿐이지 어지간해선 나한테 연락할만한 사람은 한정되어있었다.
평소에 나한테 오는 연락의 90%는 이하린에게서 오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하린씨도 잘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생각 속에 이하린에게 똑같이 격려의 메시지를 답장으로 보냈고, 우웅-! 곧이어 손목에서 느껴진 진동에 다시금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참 답장을 빨리도 보내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새로 온 메시지는 이하린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고,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등천의 구도자에서 연락 드립니다.]
[유천하님의 등천을 축하드리며, 유천하님께 지급될 포상에 관련하여 안내사항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그간의 공로를 통해 본 기관에서는 유천하님께 새롭게 에테리얼 크리스탈을 지급해드리기도 결정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수여 및 제대로 된 축하를 위해 본부로 초청하는바······]
그건 정말이지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
등천의 구도자에서 날아온 난데없는 연락.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전에 티르유가 이에 대해 한번 언급을 했던 적이 있긴 했었다.
아마도 그때가 훈장수여식 때였던가?
나와 이하린을 보기 위해 수여식에 참여했던 그녀는 그때 분명 아크샤의 이름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포상이 주어질 예정이라 했었는데, 시간이 지났음에도 따로 들리는 말도 없었고 원래부터 그리 큰 기대를 안했던지라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에테리얼 크리스탈?
‘아니··· 주는 것 자체는 좋긴 한데.’
물론 내게 포상을 지급해준다는 건 좋은 이야기였다. 하물며 그게 영약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양팔을 벌려 환영해도 모자를 수준.
안 그래도 7성에 도달한 이상 깨달음을 갈무리하더라도 내력의 소모도가 더 높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그런 만큼 조만간 접경지를 돌아다니며 마수를 잡아 기운을 흡수할 계획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딱 맞게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으니 나로서는 그저 좋은 노릇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걸 갑자기 나한테 왜 주는 걸까- 나는 그 부분이 조금 의아했을 뿐이었다.
물론 첫 계약 시에도 후원의 개념으로 받았던 만큼 그렇게 낯선 보상은 아니었지만, 사실 에테리얼 크리스탈은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제조하기 까다로운 물건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수호자급 마수에게서 온전히 근원석만을 빼내는 게 어떤 난이도를 품고 있는지는 지난번 밀라노에서 확실히 깨달은바.
그때의 나는 괜히 근원석을 캐내 보려다 마수만 놓칠 뻔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나라면 여명급까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은 지금도 특별한 이능의 도움 없이는 힘들 거란 판단이 들었다.
그런 만큼 그런 근원석을 구하는 것도, 그리고 다시 근원석을 정화하고, 순수한 에너지 결정체로 가공하는 것도. 분명 객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과 기술, 그리고 공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내 공로가 뛰어나다 한들 바로 두 달 전에 이미 한번 받은 마당에 또 이렇게 수여해준다는 게 나로서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는 노릇.
게다가 등천의 구도자 본부에 초청한다?
나 또한 공략자로서의 내 가치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갑작스런 에테리얼 크리스탈 지급과 맞물려 조금 미묘한 대접이라는 생각이 드는 중이었다.
“······.”
하지만-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짐작 가는 게 영 없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궁리해본다 한들 이 일의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그저 시험이 끝나면 한번 이하린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따름이었다.
적어도- 이하린은 이하린이니 그녀를 찔러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 속에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나는, 마침내 내게 배정된 백색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은 다소 거리가 남아있음에도 커다란 존재감을 풍기며 땅에 우뚝 솟아있는 백색의 기둥. 평소였다면 딱 거기서 끝이었을 테지만 시험평가를 위해서인지 그 주변에는 이런저런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선 회랑의 직원이 무언가를 열심히 점검해보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우선은 시험부터 쳐야겠지.’
그렇기에 나는 탑을 발견한 즉시 머릿속에 떠다니던 생각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니었고, 우선은 이게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백색탑 바로 앞까지 걸어갔고, 그러자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생도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한사람이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리를 격하고 마주친 서로의 시선.
바람결에 흩날리는 군청색의 단발머리.
푸른빛을 머금은 바다 같은 눈동자.
그렇게 남궁설아는 분명 뒤를 돌아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나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생각했는데 무슨 감지계열의 가호라도 있는 걸까?
원작에선 나오지 않았던 부분이었기에 잠시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고 있자니,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이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