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3)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르기 시작한 시간.
그 어스름의 하늘 아래. 지금 우리는 2학구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바로- 그녀들과 같이 스터디를 했다는 것.
물론 이렇게 결국 스터디를 하게 된 상황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존재했고, 그건 아까 전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말을 건네온 아리엘 때문이었다.
-역시 안 되겠어! 아무리 성적에 관심이 없어도 차원이론학은 꼭 제대로 배워!
그렇게 아리엘은 차원이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부터 시작해 독학의 난이도까지 열심히 설파하며 내게 얌전히 스터디를 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계속해서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어느 정도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에서 나만큼 차원의 개념에 대해 궁금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솔직히 수련시간이 줄어드는 게 조금 거슬리는 것이었지 차원이론학을 본격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당분간만큼은 그녀들과 같이 스터디를 하기로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뭐··· 애당초 시간 좀 뺏긴다고 깨달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결과- 우리는 얌전히 스터디를 시작했고, 결국 시간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리엘은 마치 교수라도 된 것 마냥 우리에게 열심히 이론을 가르쳐주었을 따름이었다.
“오늘 둘 다 괜찮았어?”
그렇게 잠시 아까 전의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자니, 이내 앞서가던 아리엘이 고개를 돌리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이해하기 쉬웠어요.”
“둘 다 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배우던데?”
“그게 다 아리엘씨가 알기 쉽게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정말? 천하도 그렇게 생각해?”
“잘 가르쳐주긴 했지.”
우리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어 보이는 그녀.
“그치? 이게 바로 이론 1등의 위엄이야!”
“와! 역시 이론 1등! 대단해요···!”
장난스레 으스대는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장난스레 받아주는 이하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니, 이번에는 조금 반대의 생각이었다.
아까는 이하린이 아이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은 마치 아리엘이 아이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당사자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만 느껴졌을 뿐.
왜냐하면 이하린은 애초에 이론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보유한 가호- 저작권리의 가호에도 한계는 있겠지만, 그렇다 한들 그건 그녀가 집필했던 설정 내에서 만큼은 절대적인 백업을 자랑하는 사기적인 이능이었다.
그리고 차원이론학에 대한 개념과 이론도 그녀의 가호가 백업해주는 범주 안에 속해 있었고, 그 사실을 뒷받침하듯 원작의 이하린은 2학기부터 아리엘을 제치고 꾸준히 이론 1등을 달성했을 정도.
그래서인지 오늘 하루 동안 이하린이 보여준 모습은 내가 보기엔, 아리엘의 기분에 그녀가 장단을 맞춰주었다는 느낌이었다.
“으음. 뭔가 듣기 좋은데? 더 해줘!”
“아리엘씨는 대단해요!”
“정말?”
“네! 물론······ 장난 치실 때는 빼구요.”
그런데 내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는 동안 이하린도 아까전 일을 되짚어본 걸까?
계속해서 아리엘과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던 이하린은 잠시 아리엘을 향해 소심하게나마 눈을 흘깃거리기 시작했고, 그런 이하린의 태도에 아리엘 또한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물론 아리엘은 아리엘이었기에 그녀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하린이 아직도 서운했어? 너희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자꾸 나도 모르게 그래 버리네······ 내가 미안해 하린아······”
“그, 사, 사과하실 것 까지는······ 기, 기분이 나빴던건 아니에요!”
“어? 그럼 나 계속 장난쳐도 돼?”
“······.”
그렇게 잠시나마 어른스러워 보였던 이하린의 모습은 다시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그라들었고, 그런 이하린을 해맑게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은 마치 동생을 놀리는 언니처럼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원작의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면 괜찮아요.”
“정말? 고마워! 역시 하린이밖에 없어!”
그 말과 함께 다시금 이하린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리는 아리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제 와선 나도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지만, 사실 원작의 아리엘은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
원래 그녀의 이미지는 완벽한 모범생.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한 아이.
소설 속의 그녀는 딱 그런 느낌이었을 뿐.
하지만 입학식 때부터 이제껏 마주친 아리엘의 실제 성격은 분명 원작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꽤나 명랑한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 짙게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점점 커져가는 중이었고 말이다.
“······아, 그, 껴, 껴안지는 말아주세요!”
“으음··· 하린아 쉿!”
“읍읍!”
허나- 그러면서도 아리엘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이하린과 나밖에 없었기에 나로서는 조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을 뿐.
그렇기에 나는 그 이유 대해 잠시 고민해보았다. 원작의 아리엘도 이하린에게 저러지 않았는데, 도대체 원작과 어떤 차이가 있기에 지금의 아리엘은 이렇게 우리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있는 걸까.
“······아, 아니 이런 때 언령까지 쓰구···!”
“다시 쉿! 왜 이렇게 빨리 풀린 거야.”
“······읍읍!”
아. 물론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아마도 그날 밤이었던가? 이하린이 다쳐서 돌아왔던 날- 그때 3학구의 숲 속에서 아리엘은 내게 조금이나마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과 다시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감.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온 사람들의 기대와 선망은 은연중에 아리엘에게 그런 모습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리엘은 그 사실에 어느 정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내게 스치듯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원작에서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 부분이었다.
분명 아리엘은 기본적으로 인기도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저반에는 분명 그녀의 재능으로 인한 것도 있었을 테지만, 다시 그녀의 아버지- 승천자 루타텔로부터 기인한 이유도 크게 자리하고 있었을 터.
그런 만큼 내가 그녀의 친근감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찌 보면 나와 이하린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에 그녀로 하여금 조금 더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게 아닐까 싶었을 따름. 애초에 나도, 이하린도 그녀를 승천자의 자식이 아닌 ‘주연인물 아리엘’로서 인식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아리엘을 아리엘로서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을 것 같긴 했지만······ 뭐. 그런 것 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부분.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털어내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보았다.
“하린씨 좀 그만 괴롭히라니까.”
“······!!”
왜냐하면- 사실 아까부터 아리엘의 품속에 껴 안겨있는 이하린이 내게 격렬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여워서 그런 건데. 괴롭힌 거 아닌데.”
“시끄럽고. 다시 스터디 얘기나 해보자. 이거 언제까지 할 생각인데?”
“응···? 스터디를 언제까지 할거냐고?”
“어.”
내 질문에 아리엘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이하린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무언가 고민되는 듯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리엘의 품에서 풀려난 이하린은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듯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등 뒤로 숨어들었을 따름.
“으음······ 글쎄? 마음 같아서는 천하 너가 800점대는 넘길 때까지 하고 싶은데 나도 그렇게 시간에 여유가 많진 않아서······”
“그럼 아예 안 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
“아니야. 그래도 천하 너가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을 때까진 시간을 내볼게!”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차원이론학을 배워야 하긴 했지만 굳이 아리엘을 무리시켜서 배울 필요까진 없었기에 그렇게 말했는데, 내 말에 아리엘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이건 꼭 해야 되는 일이라니까?”
그리고는 이내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대답을 돌려주었는데, 그런 그녀의 목소리 속에는 답답하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말했잖아. 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게? 너도 이제 등천자잖아.”
“등천자가 왜.”
“아직 너도 생도니까 그렇게 무리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등천자가 되었으니까 근처에서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협조 요청 정도는 계속 들어 올거란 말이야.”
아, 특례법을 말하는 건가?- 잠시 신경 쓰지 않고있던 부분을 되새기고 있자니, 아리엘은 조금 복잡해 보이는 심경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현장에 뛰어들기 전에 최소한 차원이론학정도는 제대로 숙지하고 가야 하는 거라고 바보야··· 그런데 이론을 몰라서 사고라도 생기면 어떡해.”
“······사고?”
“그래 사고! 공략 중에 침식역류가 터지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히 있는 편이고, 탑에 들어갔는데 내부구성이 복합차원으로 되어있는 곳이면 어떡하게? 자칫하단······ 그곳에 갇힐 수도 있어. 많지 않을 뿐이지 꾸준히 생기는 상황이고,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탈출방법도 모르고 있으면 정말 큰일 난단 말이야······”
“······.”
그런데 이 순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
“설마 너······ 갑자기 스터디를 하자고 한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
아리엘은 아무런 대답 없이 뭔가 민망하다는 듯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런 그녀의 태도와 표정은 내 말을 그대로 긍정해주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뭔가 기분이 조금 미묘해지는 느낌.
그런 아리엘의 모습에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내 뒤에 숨어있던 이하린 또한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
나는 그냥 이하린이나 도와주려고 가볍게 건넨 말이었는데 되돌아온 아리엘의 대답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그냥 장난칠 생각만 가득한 스터디인줄 알았더니 속으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모양.
아니,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 스터디의 목적이 시험 때문이었다면 이론만큼은 만점인 아리엘에게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안 그래도 매일같이 새벽까지 수련하느라 시간도 부족해 할 아리엘이 자진해서 스터디를 제안한 것도, 계속 도발까지 해오면서 이론을 강조한 것도, 괜찮다 말해도 계속 붙잡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내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민망한 듯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아리엘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인데, 만약 귀찮다고 무시했다가 너한테 그런 사고가 생기면 너무 그럴 거 같았단 말이야.”
너한테 빚진 게 작은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 속에선 분명히 걱정과 염려, 그리고 배려만이 엿보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심경이 복잡해졌다.
분명 아리엘의 성격상 내가 등천자가 된 사실에 어느 정도 열등감도 느끼고 조바심도 느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건 하나도 티 내지 않으면서 저런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는 게······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잠시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 미묘한 적막 속에서 아리엘은 이내 표정을 털어내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뭐······ 그리구 이왕 같이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못한다 그러면 하린이도 서운해할 거 아니야. 그치 하린아?”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같이 하면 더 좋을 것 같긴 해요. 아리엘씨가 말한 것도 분명 중요한 이유니까요. 그쵸?”
그런 아리엘의 태도에 이하린도 심란해 보이던 표정을 털어내곤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게 말을 건네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렇긴 하지. 맨날 장난만 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줘서 고맙네.”
“뭐? 나 너한테 그런 이미지였어?”
“···그럼 어떤 이미지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음··· 상냥하고 지적이고, 똑똑한 미인?”
아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손으로 안경을 쓱- 밀어 올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우리 셋 모두 피식- 거리며 작게나마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아리엘이 한 말이 너무 그녀다워서 어처구니없었던 탓도 있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일부러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 상황 자체가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나를 걱정해서 이런 자리를 만든 아리엘도, 그런 아리엘을 배려해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하린도, 모두 조금씩 서로를 생각하며 보낸 하루였으니 역시 이런 상황은 내게 너무나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다시 그 낯섦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웃기지 않겠는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평온 속에 어색함을 느꼈던 내가, 그 짧은 시간이 지났다고 다시 어색함 속에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웃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다시 마주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루쯤은 이래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
남미에 위치한 광활한 정글.
이미 그림자에 침식당해 온전한 심연의 영역으로 변해버린 잿빛의 대지. 그곳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한 백열의 화염은 그대로 어둠마저 밝히며 넘실거리고 있었다.
달빛마저 사라진 밤이었지만 이미 그 하늘에는 또 다른 태양이 떠올라 있었을 뿐.
그렇게 장장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드넓은 삼림은 주홍빛 화염에 휩싸인 채 그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정작 대지에 뿌리박힌 초목들은 마치 세상에서 빗겨나갔던 것 마냥 멀쩡히 그 몸을 곧추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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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한 건 나무들 뿐이었으니 수십 미터에 이르는 잿빛의 마수는 그대로 불길에 휩싸인 채 일그러진 비명을 토해내었고, 그렇게 그림자의 마력마저 불타올라 스러져가는 업화의 가운데- 그곳에 서 있던 남자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손목- 워치 너머에서 들려온 이야기 때문이었다.
“······2주 안에 본부로 복귀하라고?”
[예. 대회의에서 정해진 일입니다.]
남자- 루타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회의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그건 결국 성신께서 동의하셨다는 말. 그렇기에 루타텔은 차마 저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기회의나 다른 승천자의 권유였다면 가뿐히 무시했겠지만, 차마 그로서도 아크샤의 권고만큼은 무시할 수는 없었던 탓.
한 세기의 시간 동안 침식에 맞서 싸운이- 1세대 승천자이자 등천의 구도자의 수장을 맡고 있는 아크샤의 이름은 루타텔에게도 무척이나 숭고한 이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다시 한 번 되물어보았다.
“사유는? 이곳의 상황은 보고가 올라가고 있으니 알 텐데 반드시 필요한 일인가?”
[예. 첫 번째는 루키의 확인, 두 번째는 승천제의 일정 변경 때문입니다. 아마 이번에 복귀하시면 승천제의 마지막 날까지는 계속 휴식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지.”
[우선 첫 번째. 이번에 새롭게 등천자가 된 이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카룬드를 죽였던 아이 말인가?”
그 소식은 그도 이미 들었던바.
물론 루타텔은 만상세계의 소식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아니었지만, 현재 그와 함께 남미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기관에서도 그 이름을 하도 떠들썩하게 떠들어대니 세간의 소식에 별 관심이 없는 그조차도 유천하의 등천소식만큼은 똑똑히 알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유천하라면 지난달 그의 아이에게 일어난 사건과도 관련된 아이였으니 도저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을 뿐.
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이 갑자기 왜 저 자신에게 들려왔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루타텔은 잠자코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그 사건으로 주어질 예정이었던 포상이 이번 일로 인해 다시 변경되었는데, 차세대 승천자 후보로 떠오른 만큼 루타텔님께서 직접 수여 해주면서 겸사겸사 기량을 한번 확인해봐 달라 하셨습니다.]
“아크샤님이 말인가? 그게 나인 이유는?”
[현재 아크샤님께선 루타텔님과 나르화리얀님. 두 분의 오버페이스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십니다. 휴식의 텀이 너무 길어지고 있으니 이 기회에 승천제건까지 처리하면서 조금 여유를 가지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휴식은 지금도 간간이 하고 있다.”
루타텔은 그리 대답하면서 타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상태로 몸을 부풀려 오는 마수를 향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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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타텔의 손짓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솟구친 백열의 폭풍은 그대로 수호자급 마수의 거체를 휘감고 휘몰아쳤고, 그 속에 자리하고 있던 근원석까지 그대로 불 싸질렀다.
콰아아아아아앙-!!!
[······지금 소리만 들어봐도 휴식이랑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간간이 쉬는 것과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건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물며 루타텔님께선 지난 카룬드 사건 때도 그곳에 계셨는데, 이 기회에 딸아이라도 한번 보러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
[피로는 육체의 피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니 조금 더 여유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그 말과 함께 입을 굳게 다문 루타텔의 머릿속으로는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녹색 눈의 소녀.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
“······.”
누군가 루타텔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 물어본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릴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사랑할지언정, 그는 자신이 아이에게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리엘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루타텔은 항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자식이 마인에게 습격당했는데도 얼굴 한번 비추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좋은 아버지를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리엘이 소중한 만큼 그는 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고, 다시 그녀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만큼 사람들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하루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다른 수만 명의 하루보다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었으니······
결국- 루타텔은 이 순간에도 다시 침식을 불태우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보다 승천제의 일정 변경은 무슨 말이지? 마지막 날이라는 조건이 의아하군.”
[아. 아크샤님께선 이번 승천제의 판을 조금 더 키워보실 예정이라 합니다.]
“승천제의 판을?”
그렇기에 루타텔은 대화를 이어나가면서도 다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어나갔고, 그런 그의 발걸음을 따라 주변에 휘몰아치던 화염은 그대로 꼬리를 그리며 이어져갔다.
[예. 아주 화려하게 말입니다.]
워치 속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어두운 밤을 걸어나가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다시 묻어버리며. 승천자는 오늘도 그렇게 자신의 의무를 향해 걸어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