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89화 (89/205)

스터디 (2)

창문을 타고 손을 흔들어오는 따스한 빛.

아이보리빛 색채를 뒤집어 쓴 아리엘의 머리카락은 다시 백색의 빛을 산란시키며 반짝거렸고, 그렇게 고요한 방안에 스며든 새하얀 빛의 도화지는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까지 그 속에 담아내는 중이었다.

따스하게 가라앉은 적막 속에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시 한 번 시작된 문답.

“각성자 특례법 3조의 예외 대상자.”

“만 15세 이하의 각성자, 연맹 산하 정식 육성기관의 소속 생도, 등천자 이상 등급의 각성자, 마지막으로 신체적/정신적 결손으로 인한 비전투인원.”

그렇게 나는 거침없이 대답을 돌려주었고, 아리엘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각 세계침식 발생연도. 월일까지.”

“1931년 5월 31일, 1959년 12월 25일.”

“그럼 여명급의 심층 마력량 기준값은?”

“3,000 AC부터 10,000 AC까지.”

“대상 등급은 황혼, 속성은 부정형 단일. 수호자급 마수의 표층 마력 출력값이 대략 4,281 AC라 가정할 때 마력방벽의 농도, 심층 마력의 추산치와 재생한계치는?”

“정황 조건을 자세히 말해줘야지.”

“침식역류 바로 직후로 가정하고 말해봐.”

“마력방벽 6,421 AC. 심층 마력의 추산치는 12,843 AC부터 대략 18,408 AC까지. 그럼 당연히 재생한계치는 20,000 AC까지는 가정해야겠지.”

그리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아리엘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하린 또한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경악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내 호흡을 가다듬은 아리엘은 다시 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마법에 대한 개념을 서술하시오.”

“원론개념, 아니면 이상개념.”

“원론.”

“머나먼 고대서부터 쌓인 신비한 업. 선대로부터 모여온 신비와 역사의 기록. 세계에 각인된 만상의 현상을 염원과 기원으로서 불러오는 것.”

“스펠마법과 언령마법의 차이점은?”

“스펠마법은 방금 설명한 기원의식이 일정한 형식과 체계를 갖추고 계속해서 굳혀진 정형화된 형식이고, 언령마법은 염원만으로 마법의 본질을 조금 더 직접 체현시키는 비정형의 기원의식을 말하는 거지.”

“······스펠마법이라고 꼭 정형화된 형식은 아니야. 시험이었으면 감점당했을걸? 그래도 일단은 정답.”

참고로 아리엘과 이렇게 문답으로 모의시험을 시작한 지도 벌써 10분이 지난 상황.

그렇게 그동안 아리엘이 제출한 문제는 대략 48개에 달했고, 나는 그중 2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맞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리엘과 이하린이 저렇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었다.

뭐······ 물론 그렇다고 내가 뭐 엄청 대단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껏 나온 문제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고, 따로 복잡한 계산이라던가 여러 정보를 조합해 풀이해야 하는 게 아니었기에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못 푸는 게 더 이상하다 볼 수 있었을 정도.

하지만 그녀들이 내게 기대하고 있던 기준치는 그것보다도 더 심각할 정도로 낮았던 모양인지, 그녀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뭔가 생각할수록 조금 어이가 없는 기분.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아, 아니야! 아··· 아직 조금 더 할 거야!”

“그럼 빨리 내.”

그래서일까?

아리엘은 이제 내게 어떤 수준의 문제를 내줘야 하나 매우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잘 풀고 있으니 어려운걸 내줘야 하긴 할 텐데, 그렇다고 아예 어려운 걸 내기에는 여전히 내 필기점수가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진지해진 눈빛으로 내 시선을 마주하였다.

“이번에는 조금 어렵게 낸다? 괜찮지?”

“상관없어.”

“좋아. 그럼 다차원 복합굴절이론을 기반으로 이면세계 마력 동기화에 따른 분화현상 트리거값을 산출해봐. 이면세계는 당연히 잿빛탑의 내부. 등급은 여명급. 근원석의 심층마력 값은 8,281 AC. 입장 인원은 8명. 공략대 마력 값의 총합은 다시 18,549 AC로 시작해서 쐐기점의 개수는 3개로 가정······”

······어렵게 낸다더니 정말 어렵게 내네.

이제까지의 문제들이 1차원적인 풀이만 하면 되는 거였다면 이건 계산해야 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았고, 계산 값을 기반으로 다시 몇 번의 역산을 거쳐 평균값으로 치환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하는 문제였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평균값은 사전에 범위 값을 미리 암기하고 있어야 했고 말이다.

한마디로 중급과정에서 난데없이 대학과정으로 넘어왔다 해도 무방한 수준.

그래서인지 문제를 읊어대고 있는 아리엘의 표정은 이번만큼은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절대 못 풀겠지 바보야?- 라는 자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으로 진입 경과 시각은 3시간 11분! 그럼 5분 줄게 시작! 그렇게 어렵진···”

“단일 트리거 13,417 AC.”

“······엥?”

“차원 단면의 쐐기점 공략 시 3,214 AC로도 대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너무 멍청이로만 봤다는 느낌이었을 뿐.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나는 배운 적이 없었기에 그런 점수를 받았을 뿐이지 절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솔직히 말해서 내 머리는 보편적인 사람들보다는 어느 정도 똑똑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물론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세기의 천재라던가 그런 건 절대 아니었고, 솔직히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쪽으로 더 재능이 편중되어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 암기와 계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 정도로도 충분했을 뿐이었다.

“······.”

“······.”

어쨌든 내가 이렇게까지 바로 풀어버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인지 아리엘은 넋을 잃은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표정 속에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는 게 한눈에 엿보이고 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되었을 수준.

······아니, 자세히 확인해보니 아리엘은 지금 진짜 호흡마저 멈추고 동공을 떨어대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정말.

“정신 차려.”

“······?!”

“도대체 커트라인을 얼마나 낮게 보고 있었으면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거야?”

“······아, 아니이··· 이, 이건···!”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아리엘의 모습이 꽤나 유쾌하게 다가왔기에 지켜보는 재미가 영 없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옆에 있던 이하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

그러자 마찬가지로 아연해진 얼굴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이하린의 모습이 엿보였다.

새하얀 얼굴로 작게나마 입까지 벌린 채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그녀. 볼이라도 찌르면 제정신으로 돌아올까? 순간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랐을 정도로 이하린은 당황이 역력한 표정 속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그렇게 그녀들은 시간이라도 멈춘 것 마냥 모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런 그녀들의 상태에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순간- 지금 내 머릿속에선 중간고사를 제대로 치러야겠다는 생각만 무럭무럭 커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

적막이 내려앉은 스터디룸.

그곳에서 나는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대체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보고 있던 거야?”

“······미, 미안. 그치만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네가 너무 잘 맞췄단 말이야!”

“그 생각 보다가 거슬려. 그리고 아리엘은 그렇다 치고 하린씨까지 왜 그러십니까.”

“아··· 그, 죄, 죄송합니다아······”

움츠린 채 사과를 건네오는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진정이 된 모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얼굴 속엔 아직도 조금 얼떨떨한 기색이 남아있었고, 나로서는 그런 그녀들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내가 정답을 계속해서 맞춘 게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내가 맞춘 문제들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인 것도 아니잖아.”

“······.”

“지금 맞춘 대로 시험을 본다 쳐도, 배치고사 때를 기준으로 하면 600점? 그 정도나 간신히 나올 텐데 왜 그렇게까지 놀라는 거야.”

“······600점? 너무 낮게 잡은 거 아니야? 마지막 문제를 그렇게 빨리 풀었는데?”

“그거야 계산의 영역이니까 그렇지. 말했듯이 2달 동안 배운 걸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지 안 배운 건 지금도 전혀 못 풀어. 기본적인 정보는 혼자서도 얼추 이해할 수 있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이론이나 정보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어. 차원이론학은 특히.”

“아······”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아리엘은 이어진 내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렇긴 하겠네. 응. 맞는 말이야.”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배운 걸 모두 제대로 풀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걸요? 그냥 배운 대로 푼 게 아니라 아예 제로에서 시작한 거였으니까요! 정말 대단한 거에요!”

“어? 그건 아니지 하린아.”

“······네?”

“제로가 아니라 4점이야. 무시하면 안 돼!”

“······.”

“······.”

아리엘은 이하린을 향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 말해왔고, 솔직히 말해서 이쯤 되니 아리엘이 장난을 치는 건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나조차도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작게나마 고개를 내젓고는 아리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시끄러워.”

“······너무해!”

아리엘이 볼멘소리를 해왔지만 나는 가뿐히 그녀의 말을 무시했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끝에 그녀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쨌든 간에 간단하게나마 모의시험을 통과한 건 맞았으니 이제는 그녀들도 내 의견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젠 스터디 안 해도 된다는 거 알아들었지? 나 혼자 해도 충분해.”

“······충분하다의 기준이 뭔데?”

“화이트라인의 합격점.”

“고작 600점으로 그렇게 자신한다는 거에서 먼저 태클을 걸고 싶은데, 천하 너라면 실기는 무조건 만점을 받을 거 같긴 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어쨌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그으건··· 그렇긴 한데에······ 그래도 이왕 만난 김에 같이 하면 더 좋을텐데에······ 나는 꼭 했으면 좋겠는 데에······ 하린이는 어떻게 생각해?”

“네? 아··· 저··· 저도 같이 하는 게 더······”

아리엘은 뭔가 안타깝다는 듯 내게 시선을 보내왔고, 그 옆에 있던 이하린 또한 조금 아쉬워 보이는 듯 눈을 힐끗거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이하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문득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리엘은 그렇다 치고 하린씨는 갑자기 왜 스터디를 하자고 하신 건가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네? 그거야···! 그······ 그러니까아······”

생각해보면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하린은 나처럼 중간고사 날짜마저 모르고 있었지 않았는가?

애초에 원작에서의 그녀도 시험성적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고, 필요에 따라 그레이든 화이트든 얼마든지 성적을 바꿔버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하린이 갖고 있는 저작권리의 가호는 어지간한 이론시험쯤은 가뿐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범용성을 띄고 있었고, 그녀가 시험을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그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성적도 관심 없어 하는 그녀가 굳이 내 시험 성적에 신경을 기울이는 게 내게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었고, 그런 내 의문에 대답을 돌려준 건 이하린이 아닌 아리엘이었을 따름이었다.

“그건 아마 나 때문일걸?”

“······? 무슨 말이야.”

“사실 하린이도 그렇게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잖아? 중간고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천하 너 부르는 김에 하린이도 같이 꼬셨지.”

“그걸 하린씨가 응할 이유는 없잖아.”

“이유? 그야 여기 안 오면 내가 천하 너랑 단둘이서 오붓하게 공부할 거라 했······”

“그, 그런 이유 아니었어요···!!”

난데없는 아리엘의 대답에 이하린이 당황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저한테는 천하씨랑 둘이 있으면 어색할 것 같다고 하셨으면서!!”

“응. 그것도 있긴 했지. 안 그래도 다들 우리 등천자씨한테 관심이 많을 텐데 단둘이서 이러고 있으면 괜한 오해만 생겼을 거 아냐? 그건 좀 그렇기도 하고, 둘이서 그랬다간 하린이가 슬퍼할 것 같았단 말이야.”

“······네?! 제, 제가 왜 슬퍼해요!”

“어? 그야 매일 세 명이 보는데 한 사람만 따돌리면 서운한 게 당연하잖아.”

“아. 그, 그건 그렇긴 한데에······”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야.”

“······아, 아니이···!”

“응? 왜 그래 하린아?”

그녀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올 뻔 했다.

모호하게 말의 흐름을 꼬아버리는 아리엘의 화법에 이하린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중이었고, 내게는 그런 이하린의 모습이 그저 유쾌하게만 느껴졌다.

너무 어수룩하다고 해야 할까?

분명 정신적인 나이는 이하린이 더 높을 텐데도 불구하고 매번 저렇게 아리엘의 장난에 휘말려 드는 게 너무 이하린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린씨 좀 그만 좀 괴롭혀.”

“······응?”

하지만 더 이상 놀리게 내버려뒀다가는 이하린이 문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기에 나는 아리엘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그래. 내가 하린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게 아리엘은 내 말에 억울하다는 듯 그리 말해왔지만, 그러면서도 스스로 양심이 찔리긴 했는지 슬금슬금 이하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귓가가 빨개진 상태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하린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치 하린아?”

“······.”

물론 평소의 이하린이라면 그 말에 당황하며 가, 감사합니다- 라도 외쳤겠지만 그녀도 지금만큼은 조금 기분이 토라진 상태였는지, 이하린은 가만히 입술만을 삐죽거렸을 뿐.

하지만 그 모습이 아리엘의 눈에는 마냥 귀엽게만 보였던 걸까?

아리엘은 그런 이하린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냅다 양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 정말! 귀여워서 장난도 못 치겠네.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울지마.”

“······?! 아, 안 울어요!”

“하하···! 다행이네 그러면.”

그렇게 이하린을 꼭 끌어안은 아리엘은 그녀의 등을 양손으로 토닥거리며 몸을 옆으로 흔들거렸고, 그런 아리엘의 태도에 이하린의 표정도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입으로는 계속 뭐라고 웅얼거리긴 했지만 이하린의 기분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건 옆에 있던 내 눈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엿보이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 아니었는데.”

“응. 그런 이유 아니었어!”

“······그냥 스터디하자고 해서 온 건데···”

“응응! 내가 스터디하자고 부른 거야!”

정말 저 모습을 보고 누가 이하린이 더 연상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아리엘이 어린 동생을 달래고 있는 모습으로밖에 안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런 이하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 머릿속으로 다소 뜬금없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의 이하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저 그런, 뜬금없는 생각.

솔직히 성격이야 지금과 그리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 같긴 했지만··· 난데없이 소설 속에 끌려들어 와서 펜 대신 칼을, 가족과 친구 대신 마수와 마인을 마주해야 했던 지금의 그녀와 원래의 성격이 온전히 유사할 순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수한 일을 겪으며 이곳에 도달한 것 처럼, 다시 이하린 또한 많은 사연을 지나쳐 이곳에 도달한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하린의 인과라면 그녀의 시작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원작에서도 생략된 2년의 세월. 저렇게 아리엘의 장난 하나에도 눈시울이 빨개지는 아이가 검을 들고 이곳까지 오게 되는 동안 어떤 마음의 변화를 거쳤을지가 나는 순간적으로 조금 궁금해졌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걸 짐작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얼굴을 붉히는 이하린과, 손에 검을 쥐고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이하린. 그 둘의 간극이야말로 어찌 보면 지나간 시간을 유추하게 만들어주는 증거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하린에게 어울리는 순간은 바로 이런 일상이었지만, 그녀는 온몸이 피에 젖은 채로도 내게 검을 던져주었으니- 내게 이하린은 그저 이하린이었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았을 뿐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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