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1)
우리가 회랑으로 복귀한 건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나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 빨리 복귀하고 싶었지만 특례법 규정상 멘탈케어까지 받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던 탓.
부상에 따른 PTSD 예방 차원이라던가?
물론 매일같이 위험 속에 놓여져 있는 공략자들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무림에서 살다 온 내게는 다소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절차였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아리엘의 언령을 받은 상황에서 치료까지 더 받았더니 이제는 정말 심신 모두 온전하게 회복된 상태. 그렇기에 나는 잠시 7성의 내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하지만.
쿠구구구구-!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 갈무리 되지 않은 내력이 사방을 향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한동안은 가다듬어야겠어.’
이건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런 상태로 실전에서 7성의 내력을 사용했다간 순식간에 내공이 바닥을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건 6성에 막 올랐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이 상황의 해결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깨달음을 온전히 갈무리하는 것.
그렇기에 나는 어서 수련을 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업륜이 늘어난 만큼 이제 슬슬 공격적인 용도로도 활용을 연구해보고 싶었고, 가호의 사용 또한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수련해야 할 게 많다는 생각만 들었을 따름.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늘은 금요일이었기에 시간표상 들어야 할 강의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주말까지 쭉 거리낌 없이 수련에 몰두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고, 안 그래도 이젠 남궁설아의 일도 해결된 상황인 만큼 이하린도 알아서 잘 성장하고 있겠다 당분간은 온전히 내 일에만 집중해도 되지 않겠는가?
원작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여름방학 때까진 어느 정도 사건의 여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수련을 하러 가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고, 그건 모두 다짜고짜 아리엘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기원관 스터디실로 2시까지!
정말이지 난데없는 요구.
마음 같아서는 그냥 아리엘의 말을 무시하고 수련이나 하러 가고 싶었지만, 병문안을 와준 게 떠올라 차마 그러기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말없이 숙소를 나와 기원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자니 그 순간 저 앞에서부터 익숙한 실루엣들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아씨···! 그래서 어쩌자고?”
“좀 효율적으로 틀을 짜자고 임마.”
“맞는 말이다. 제대로 팀워크만 짜면······”
분명 모르는 얼굴도 섞여 있긴 했지만 적어도 최소 4명은 아는 얼굴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다소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저 녀석들이 저렇게 단체로 모여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같은 유망주들이니 당연히 서로 안면이야 당연히 있긴 할 터. 저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본적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서 그렇지.
어쨌든 굳이 아는 척을 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그들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어? 어······? 어!!”
“뭐야 갑······ 음?”
“오! 천하쓰?”
객관적으로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그러기는 힘들었나보다.
“야 뭐냐? 너 언제 돌아왔냐?”
초록색의 말총머리를 나부끼며 달려온 마르네가 반갑다는 듯 말을 걸어왔고,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그녀와 같이 있던 아이들도 이내 순식간에 내게 다가왔다.
“크···! 등천자 유천하!! 크···!!”
“유난 좀 떨지 마라 리베르테. 제발.”
“근데 얘 많이 다쳤다 하지 않았나?”
“아 맞다. 너 타천자 조지다 존나 뒤질뻔했다며? 이젠 괜찮아진 거야?”
다가오자마자 소란을 떨기 시작한 리베르테부터 웬일로 안부부터 물어오는 마르네에 사카타나 이솔라, 그리고 모르는 얼굴 몇 명까지.
“괜찮아. 원래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고.”
“그으래?”
그녀에게 간단히 대답을 건네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역시 이 조합은 되게 안 어울린다는 생각만 들었을 따름이었다. 솔직히 조금 신기한 구성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건 그렇고··· 존나 신기하네.”
“그러게······ 신기하네.”
“야. 너 진짜 등 천자 된 거야?”
“그럼 만상세계가 구라를 쳤겠니?”
“아 넌 좀 닥치고 있어라.”
“으 는 즘 득츠그 있··· 읔”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은 나를 바라보며 다소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시선 속에는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게 엿보이고 있었다.
“등천자가 되긴 했지.”
내 대답과 동시에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내 입을 향해 모여들었다. 물론 깐죽거리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리베르테와 여전히 멍한 상태인 이솔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
“······.”
그렇게 그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이내 이어진 그들의 행동에 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등천을 축하드리며, 앞으로의 싸움 속에서도 축복이 자리하기를 기원합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앞으로도 빛나는 위업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등천의 업에 도달한 걸 진심으로······”
녀석들이 난데없이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여오며 이상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이 녀석들이 갑자기 미친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차라리 모르는 얼굴의 애들이 이러는 거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사카타 같은 애는 그렇다 쳐도, 리베르테나 마르네 같은 애들까지 이러니 정말 못 볼걸 봤다는 느낌이었다.
“······뭐 하는 건데 갑자기.”
그렇기에 내가 이런 반응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볼 수 있었고, 다행히 그런 내 반응에 녀석- 마르네는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다시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응? 뭐긴 뭐야 멍청아. 축하인사지.”
“······.”
설마 축하인사라는 걸 몰라서 그랬을까.
애초에 솔직히 말해서 이번 사건의 규모가 규모였던 만큼 테러에 휘말린 것도, 위타극을 토벌한 것도, 등천자가 되었다는 것도 모두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게 뻔했으니 어느 정도의 반응은 나도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뿐.
“······?”
“뭐야······ 너 설마 이거 몰라?”
“이거 어째 반응이 진짜 모르나 본데?”
그렇기에 지금 내 심정은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내 심경이 표정 위에 드러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왜 이러는 건데?”
“허. 진짜 모르네 얘.”
어떻게 이걸 모르는 거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마르네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 속에서 어이가 없다는 감정과 함께 허탈함마저 느껴졌는데, 다만 마르네가 허탈함을 느끼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닌, 바로 그녀 자신처럼 느껴졌다.
“······어휴. 됐다. 축하하고, 수고해라.”
“뭐··· 모를 수도 있지. 그냥 축하인사라 생각해! 별거 아니니까. 등천 축하해!”
“그래 신경 쓰지 마.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다음에 봐! 수고해!”
그렇게 그들은 뭔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 또한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
“뭐? 하하···! 그런 일이 있었다구?”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던 아리엘은 내 얘기를 듣자마자 이런 반응을 내비쳤다. 방긋거리며 웃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리엘의 태도에 이하린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내 나를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려왔다.
“괜찮아요. 천하씨는 모르는 게 당연한 거에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해요···!”
“하하··· 맞아 맞아. 천하는 사회에 나온 지 2달밖에 안 되는 어린이잖아? 당연하지.”
“······.”
참고로- 조금 전 아리엘이 말한 대로 기원관의 스터디실을 찾아온 나는 이내 한쪽 구석에서 떠들고 있는 이하린과 아리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하린까지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내 내가 온 것을 발견한 그녀들은 나를 데리고 안쪽에 있던 스터디룸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그녀들에게 물어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질문이 아리엘로선 그저 재밌게만 느껴졌던 모양.
물론- 처음에는 나도 신경 쓰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지나쳤던 다른 아이들까지도 내게 계속해서 그런 인사를 건네왔기에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한 번쯤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
그렇기에 다소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아리엘은 웃음을 그치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그건 그냥 인사야. 인사.”
“그니까 인사를 왜 그렇게 하는 건데.”
“으음··· 그야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얼굴에 쓰고 있던 안경을 손가락으로 쓱- 밀어 올렸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업적이란 중요한 거야. 하물며 등천의 업은 일반적인 각성자와 선두 공략자를 가르는 기준선이잖아?”
“그렇긴 하지.”
“물론 천하 네 입장에서는 너무 쉽게 도달해서 얼떨떨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정말 몇 년 동안 쉴 새 없이 마수를 토벌하고 나서야 도달하는 게 보통이란 말이야.”
“맞아요···! 그래서 등천자가 되었다는 말은 침식현상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나 다름없고, 그러면서도 몇 년 동안 죽지 않고 무사했다는걸 의미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리엘은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을 펼치더니 허공에 별 모양을 그려보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진지한 마음으로 축하해주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
“······.”
“그래서 새롭게 등천자가 된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해, 격식을 갖춘 축하 인사를 건네주는 게 공략자들 사이에서의 예절이야.”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물론 계속되는 기묘한 인사에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을 해보긴 했지만 역시 직접 듣는 거하곤 체감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참고로 무림에서의 경지는 어지간해선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었고, 그렇기에 무림에선 상대방의 성취를 축하하는 문화 같은 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깨달음을 얻었다 하면 비무나 한번 어울려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업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넓은 영역에 자리하고 있었고, 만상세계가 명확히 구분해주는 공략자의 등급은 어찌 보면 이런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등급의 격차 자체도 어느 정도 이런 문화가 생긴데 큰 이유를 했을테고 말이다.
애초에 전 세계를 뒤져봐도 극소수에 불과한 승천자라는 계급은 대부분의 각성자들에게 별격의 세계나 다름없었을 테고, 다시 보통의 각성자는 백색탑에만 뛰어들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선두 공략자인 등천자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의 이름이 등천회랑이란 것만 생각해봐도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머릿속에선 등천자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고, 원작에선 승천자나 하이랭커급이 아니면 그리 좋은 취급을 못 받았기에 나도 모르게 등천자의 수준을 어느 정도 평범한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조건이라도 있는 거야? 누구한테는 해도 되고, 누구한테는 안 해도 되고 뭐 그런 거?”
물론 배경을 이해함과 동시에 든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을 뿐.
“응? 아··· 왜 우리는 안했냐구?”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예 모르는 사람이거나 정말 친한 사이면 어지간해선 안 하는 편이라서 그래. 나나 하린이가 저러면 너도 어색할 거 아니야.”
“······그건 다른 사람이 해도 마찬가진데?”
“으음··· 그렇긴 한데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굳혀졌다 생각하면 될 거야! 딱히 구분 선이 정확히 그어져 있다기보다는 적당히 눈치껏 하면 되는 거니까.”
아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안경을 쓱- 밀어 올렸고, 그와 동시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그렇게 깔끔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어떤 느낌인지는 이해되었기에 나는 그녀의 설명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까부터 계속해서 신경 쓰였던 부분을 살며시 질문해보았을 따름이었다.
“그것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응? 뭔데?”
나는 손가락으로 아리엘- 정확히는 아리엘이 쓰고 있는 안경을 가리켜보았다.
“너 그건 갑자기 왜 쓰고 있는 거야.”
“응? 아. 안경? 그냥 분위기 좀 맞추려고?”
“무슨 분위기···?”
“당연히 공부하는 분위기지. 어때?”
아리엘은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안경을 쓱- 밀어 올렸다.
“나 막막 지적이고 똑똑해 보이지 않아?”
“······어.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바보 같아 보였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본판이 워낙 미형인지라 예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렇다 한들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맨얼굴만 보다가 안경을 쓴 모습을 봤더니 되게 안 어울린다는 생각만 떠오르는 중이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른 법이었고, 굳이 본인이 좋다는데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어주었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분위기까지 내면서 여기로 부른 이유는 뭔데. 설마 같이 공부라도 하자고 부른 거야?”
스터디실에 갑자기 공부하는 분위기까지 운운하니 그녀가 나를 부른 목적을 짐작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건 물론 내게는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일이었다.
허나- 그녀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
내 말에 아리엘과 이하린은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이내 다시 같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란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어왔다.
“사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원래 천하 네가 바보인 줄 알았거든? 왜 그런 거 있잖아. 칼만 휘둘러서 힘은 센데 멍청한 유형?”
“······저, 저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요!”
“그 정도까진···?”
“앗··· 그, 그게 아니라······”
“어쨌든! 그렇다 보니 나는 4점의 유천하를 케어해줄 자신은 전혀 없었단 말이야.”
“확실히 말할게. 나도 필요 없어.”
어느 정도는 감수한 부분이었지만 대체 이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나는 중원에서는 상당한 기재 취급을 받으며 자라왔고, 무학적인 부분을 제외하고서라도 오성과 재지도 분명 객관적으로 뛰어난 편이었다.
물론 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하기도 조금 그렇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을 따름.
애초에 이번 중간고사만 지나도 어느 정도 회복될 인식이라 생각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데 난데없이 아리엘과 이하린마저 이러고 있으니 나로서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하 너가 공부를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배운 적이 없어서 필기성적이 그렇게 나왔다는 말을 들었더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하지만 그런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엘은 그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어나갔고, 이 순간 그녀의 미소속에선 장난스러움도, 흥미도 아닌 오로지 순수한 배려심만이 엿보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
“그건 바로······”
그렇기에 나는 담담히 되물었고, 그런 내 반응에 되돌아온 답변은 정말 간단했다. 화사하게 웃으며, 해맑은 표정으로 외치는 그녀.
“너한테 공부를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
“······.”
그리고.
“그런고로··· 지금부터 유천하 4점 탈출 스터디를 시작하겠습니다! 자자 박수박수!”
“와, 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어, 어디가?!”
***
그렇게 잠시 소란스러운 순간이 지나갔고, 결국 나는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 기분이야 어쨌든 그녀들이 자신들의 시간을 포기하고 나를 돕고자 했다는 건 분명했고, 병문안까지 와줬던 아리엘과 새빨개진 얼굴로 팔을 붙잡는 이하린의 성의를 그냥 무시하기는 힘들었던 탓이었다.
물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다.
“자만하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아서 그래. 그간 배운 게 있으니까.”
“으음··· 미안한데 그게 자만 아닐까?”
“그······ 무, 물론 천하씨도 혼자 공부하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혼자 배우기에는 두 달은 너무 짧았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기에 차분히 내 의견을 피력해보았지만 그녀들로선 영 신뢰가 가지 않는 모양.
“······.”
솔직히 말해서, 당연히 이번 중간고사에서 만점을 받거나 그럴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수업에서 듣고 배웠던 내용만큼은 전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간 두 달 동안 생활하면서 알게 된 상식들까지 있었으니 배치고사 때의 시험을 다시 봐도 최소 500점 정도는 넘길 자신은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실기는 만점을 받을 테니 화이트 라인에 가기에는 충분한 점수였고, 내게 그 이상의 점수는 불필요했을 따름.
“안 그래도 이번 사건 때문에 천하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인데 여기서 한 번 더 이론 바보 이미지가 굳혀지면 정말 평생을 따라다닐지도 모른다구.”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천하씨가 바보 소리 듣는걸 보고 싶진 않아요······”
“맞아··· 안 그래도 이제 곧 5월이니 승천제도 있을 텐데 같이 다닐 때마다 바보라 수군거리면 어떡해? 세상에는 무례한 사람들이 정말 많단 말이야.”
“······.”
“아무리 바보여도 바보 소리는 심하잖아.”
그렇기에 나는 우선 잠자코 그녀들의 말을 들어보았고, 가만히 아리엘의 말을 들어본 결과- 내가 그녀에게 돌려줄 만한 대답은 단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지금 가장 무례한 건 너야.”
정말, 진실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