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천의 업 (4)
고급스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백색의 명함.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시면 여기로 연락해주세요. 조기졸업이든, 자퇴든, 뭐든 문은 항상 열려있으니까요. 조기졸업을 원하시면 따로 과외라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그것과 함께 내게 다시 한 번 제안을 건네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그곳에는 아까 봤던 문양과 일련의 전화번호만이 기재되어 있었을 뿐.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그녀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명함을 받았다면 이쪽이 더 적당한 반응일 테니 말이다.
“만약 그쪽의 제안을 승낙한다면 저는 무엇을 하게 되는 겁니까?”
“저희랑 함께 일하게 될 거에요. 마인을 토벌하고, 접경지를 돌아다니고··· 뭐 그런 일?”
“······이건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저는 이미 등천의 구도자에 소속되어있는데도 상관 없는 건가요?”
“예. 애초에 등천의 구도자는 여타 기관과 설립배경 자체가 다른 편이잖아요? 다른 곳과 중복 소속된 이들도 꽤 많은 편이니까요.”
“······.”
“그러니 졸업이 힘들다면 적어도 간간이 현장에서 뛰어보는 것까진 생각해보세요. 당신 정도의 실력이면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반대일 리는 없을 테니까요.”
라피냐의 말에 나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고, 그녀 또한 내 눈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내비쳤을 따름이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졸업이면 모를까 그 정도는 크게 상관없긴 했다.
애초에 진시우 녀석도 그렇게 활동하고 있었고, 이면순례자에 소속된다면 마인 사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점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미 카룬드와 위타극을 토벌한 이상 앞으로 신경 써야 할 마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이제 막 7성에 도달한 만큼 멸화급탑에 대응할 역량을 기르는 게 더 우선처럼 느껴졌을 뿐.
그리고 물론- 그녀 정도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내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조금 신경 쓰였고 말이다.
당연히 위타극까지 잡은 마당이니 객관적으로 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라피냐도 분명 하이랭커의 강자였고, 그런 그녀가 이렇게 직접 스카우트에 나서고 있다는 게 나로서는 조금 의아한 부분이었다. 심지어 나는 이곳 기준으로는 아직 미성년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왜 제가 이런 제안을 건네는지 이해가 잘 안 가시나 보군요.”
그 순간- 그런 의문이 얼굴 위로 드러났는지 라피냐는 이내 내게 질문을 건네왔다.
“······조금 뜬금없겠지만 유천하씨는 본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 생각하고 계신가요?”
“실력 말입니까?”
“예. 실력, 무력, 강함. 총체적으로요.”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참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면서도 다소 어려운 질문이었다.
7성에 도달한 내 경지는 무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절정의 초극. 초절정의 경계에 서 있는 중이었고, 이건 중원의 기준으로 치자면 아마··· 천하삼십대고수 즘에는 들어갈 만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기준은 정확히 실력을 구분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었고, ‘업’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정립이 되는 만큼 특성과 가호 등의 요소에 따라 실력의 변동 폭이 크게 발생할 수도 있었기에 뭐라 말하기엔 조금 미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내가 잠시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니 이내 라피냐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0명.”
그 말과 함께 교차하는 서로의 시선.
“전 세계를 뒤져봐도 당신보다 강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절대 100명을 못 넘길 것입니다.”
“······100명 말입니까?”
“예. 물론 어디까지나 위타극과의 싸움에서 보여주신 대인전 역량을 기준으로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고, 무인인 이상 공략활동에서의 상황을 가정해보자면 마수의 유형에 따라 100명 정도는 더 앞에 들어설 수도 있겠지만요.”
그녀의 말에 잠시 판단을 해보았으나 어느 정도 적절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조금 더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긴 했다만, 이곳의 전투는 단순히 육탄전으로만 치러지는 게 아니었기에 납득이 안가는 건 아니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대인전과 마수를 대상으로 한 공략활동을 구분한 것도 나름대로 타당해 보였고, 아직 내가 정진해야 할 구석이 많았기에 그저 그러려니 싶었을 따름.
애초에 기량의 격차는 원래 위로 갈수록 극명히 드러나는 법이었으니 아직 8성에도 도달 못 한 내가 그 이상을 바라보는 건 현재로써는 조금 과욕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고 말이다.
물론······ 실전이라 가정한다면 누가 상대되었든 질 생각은 없긴 했다.
그렇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니, 이내 라피냐가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내게 다시 질문을 건네왔다.
“병실에서 오갔던 말. 기억나시나요?”
“······승천자와 하이랭커 말입니까?”
“예. 바로 그거요.”
그녀는 그 대답과 함께 손을 펼쳐 보였다.
오른손의 손가락 네개와 왼손의 두 개.
“42억-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인구 중에서 각성자는 대략 400만 명 정도쯤 됩니다. 그 중 헌터생활이든 공략이든 전장에 발을 담근 건 다시 30만 명 정도지요. 거기서 공략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량을 갖췄다 여겨지는 건 다시 끽해야 3만 명. 그중에서도 업을 쌓아 등천자가 된 이들이 다시 3천 명. 하이랭커는 100명. 거기서 마지막으로······ 승천의 업에 도달한 이는 11명.”
“······.”
“그렇기에 42억분의 100.”
그녀는 손을 내리며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았고, 그런 그녀의 눈빛 속에는 무언가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게 지금 말한 100명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무게에요. 동시에 당신의 재능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숫자기도 하고요.”
“······.”
“하지만 저는 이걸 단순히 재능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당신의 경지는 재능, 사연, 노력, 인과······ 그 모든 상황과 조건에 다시 기적 같은 운이 깃들어서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일 테니까요.”
그 순간- 라피냐의 말에 무언가 어렴풋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통틀어 정리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존재합니다. 그게 바로······”
“업. 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예. 저희는 그것을 업이라 칭하지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세계에서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는 딱히 큰 관심이 없었다.
검혈마제에게 올바른 대가를 돌려주기 위해선 천마신공이 최소 9성에 도달해야 할 테고, 이제야 막 7성에 도달한 내게 그건 아직까진 까마득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보편적인 사람들에 비해 별격의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내가 이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필요로 했던 조건은 분명 단순히 재능이라는 말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는 생각도 확실히 들었다.
환생이라는 일을 겪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과 달랐을 테고, 다시 신교의 소교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어리숙했을 것이며, 또한 내 ‘눈’도, 재능도, 마음을 비워내며 살아왔건 세월도, 마지막으로 소교주로서 발버둥 치던 시간까지- 그 모든 일을 거쳐왔기에 나는 지금 이곳에 도달한 것 아니겠는가?
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분명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리파냐가 말하는 업이란 개념에 대해 잘 모르겠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고,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라피냐의 입에서는 이내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저희는 당신에게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굳이 저희와 함께 활약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공략자로서도요.”
“······.”
“등천자 유천하. 그게 당신이에요.”
“······예.”
“17살이라는 나이에. 공략자로서의 활동을, 아니 세상에 나오고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인 당신이 벌써 등천의 업에 도달했어요.”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동시에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과연 시간이 흐른 뒤, 미래의 당신은 어디까지 올라설 수 있을까요. 두 달의 시간 동안 등천자가 되었다면 1년이 지난 뒤에는? 3년이 지난 뒤에는? 다시 10년이 지난 뒤에는?”
“······.”
“당신은 분명 승천자가 될만한 업을 등에 짊어지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건 인과 속에 이어져 있고, 당신 같은 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타난 건 아닐 테니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라피냐의 말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흐름에 나는 그리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내 물음에 라피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당신의 인과가 회랑에 있을지, 아니면 그 바깥에 있을지는 앞으로 조금 더 깊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는 거에요.”
“······.”
“위타극이 나타나 토벌된 것도, 근래 계속해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걸 해결한 게 바로 당신이라는 것도, 만상세계가 당신에게 등천자의 자격을 인정한 것도 분명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합니다. 예. 분명 그럴 거예요.”
그러니- 그녀는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것도 모두 인과에 걸맞은 결말에 도달하는 것이겠지만······ 저로서는 이왕이면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이걸 건네준 이유입니까?”
나는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들어 올렸다.
한가지 심볼과 번호만이 적혀있는 종이.
하지만 그 순간.
“예. 그러니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우웅- 라피냐의 손등에서 흘러나온 업륜의 마력은 그대로 기이한 흐름 속에 휘몰아치며 명함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색의 종이 위에 그려져 있던 상징- 그 심볼의 형상은 이내 한가지 단어로 그 모습을 변화시켰고, 그 단어는 내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글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저희 이면순례자는 언제든지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이면순례자- 은색의 빛으로 빛나는 마력의 글씨는 은은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
그 뒤로도 우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누었다. 간단하게는 등천자에 관한 이야기부터 다시 마인들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렇게 밤이 찾아오고 나서야 라피냐는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라며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밤이 돼서야 다시 병실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텅 빈 복도를 걷고 있자니 다소 미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
분명 갑작스러운 조기졸업 제안도, 영입제안도, 그러면서 듣게 된 말도 모두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말은 따로 있었을 따름.
-만상세계가 당신에게 등천자의 자격을 인정한 것도 분명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근래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걸 해결한 나.
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했던가?
‘······이유는 무슨.’
사실 인과라는 말은 겉보기에나 그럴싸하게 들릴 뿐이지 실상을 생각해보면 별거 없는 개념이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다시 결과가 있기에 새로운 원인이 생겨난다. 세계만물의 변화는 그 속에 자리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인과처럼 당연한 말도, 그리고 허망한 말도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하린을 살리기 위해 카룬드를 죽였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 마인들을 죽였고, 다시 같은 이유로 위타극과 맞서 싸웠다.
그 모든 건 원작을 알고 있기에 내린 선택이었고, 어찌 보면 다시 그 모든 건 내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그러니 그 일련의 사건들에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건 내가 그러고자 했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철컥- 그렇기에 나는 미묘한 감상을 털어내며 병실로 복귀했고, 그러자 그곳에선 역시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오셨어요?”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네? 뭔 얘기를 했길래 이렇게 오래 하고 온 거야? 한참을 기다렸잖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그사이 치료를 받고 온 모양인지 남궁설아까지 더해 세 명이 쭈르륵 앉아있었는데, 나는 그녀들을 본 순간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네? 아···! 천하씨 워치 저희가 찾았어요!”
“잃어버렸다 해서 전투 중에 망가진 줄 알았더니 그냥 베개 밑에 깔려있던데?”
“전원이 나가서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
익숙한 외형의 스마트 워치.
잃어버렸다 생각한 내 스마트 워치가 아리엘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들이 다 같이 내 워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도. 모두 심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찾은 건 그렇다 치고 너는 남의 워치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
잠시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을 건넸더니 그 순간 이하린과 남궁설아는 자연스레 자기들은 모른다는 듯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고, 아리엘은 오히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냥 망가졌나 싶어서 살펴보는 중이었지. 그래도 다행히 멀쩡한 거 같아.”
“······.”
“응!”
그렇게 아리엘은 해맑게 웃어 보이며 내게 워치를 건네주었다.
“그게 끝이야?”
“그럼 끝이지 뭐. 장난이라도 칠까 싶었는데 하린이가 너무 필사적으로 막더라구······”
“당연한 걸 왜 아쉬워하는 건데 넌.”
나는 그녀에게 워치를 받자마자 손목에 착용하며 간단히 내부를 확인해보았다.
물론 워치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만큼 딱히 내 워치를 뒤적거렸더라도 문제는 없었겠지만, 아리엘의 성격상 뭐라도 장난을 쳐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이상한 점은 없었기에 나는 이하린에게 감사를 표했을 따름이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순간 이하린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단 느낌은 들었지만 사실 이하린의 반응이야 평범할 때보단 이상할 때가 더 많았기에 어찌보면 이게 더 자연스럽긴 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밤이 다 돼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엘은 아직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아는 아리엘은 이렇게 시간을 의미 없이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다소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이야기가 꽤 오래 걸려서 당연히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안 가고 있었네?”
“······응? 저기 천하야. 왜 아직도 안가고 뭐했냐는 말로 들리면 내 착각이겠지?”
“아.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야.”
“······.”
내 대답에 아리엘은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따름이었다.
“아직 볼일이 있으니까 남아 있었지.”
“볼일?”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다가왔고, 이내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이걸 피해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만 옆에서 지켜보는 이하린과 남궁설아의 표정이 매우 담담했고, 아리엘 또한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받아들였다.
“······뭐하려고?”
“잠깐만 있어 봐.”
그렇게 내 머리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두 눈을 감았고, 그녀의 작은 손에서부턴 점점 기이할 정도로 방대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걸 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시 한 번 고민이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어서어서 나아라. 얍!”
우웅-!! 장난스런 말이 아리엘의 입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대기 중의 마력이 휘몰아쳤고, 그 속에 담긴 염원은 순식간에 현상으로 화해 내 몸을 향해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마력의 파동.
그곳에 맺혀지는 기원의 언령.
말만 들어서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만상의 눈으로 그 현상을 지켜본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우우우웅-!!!
왜냐하면 아리엘이 사용한 언령에서 느껴지는 힘의 규모가 평소보다도 훨씬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너 생각해서 열심히 축언築言해온거니까 괜히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 바보야.”
순간 의념으로 마력을 떨쳐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본 듯 아리엘은 그렇게 말을 건네왔고, 그녀의 말에 나는 가만히 그 마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염려가 담긴 그녀의 말은 그대로 마력을 생명력으로 변화시켰고, 그 방대한 생명의 빛은 그대로 내 몸에 스며들어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 기운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마치 업륜의 마력을 생명력으로 전환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아니, 마력의 본질에 더해 무언가의 현상마저 깃들어있었으니 이게 그것보다 더 본격적인 치유행위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아.”
그렇기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리엘의 마력운용이 뛰어나단 것도, 그녀의 특성이 언령에 특화되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내 예상보다 더 신기한 현상이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륜의 마력 같은걸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으니, 확실히 아리엘의 능력과 적성은 사기적인 범용성을 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연맹에서 답변 오는 거 기다리는 동안 정말 하루종일 준비해온 거야. 그러니까 빨리 나아서 회랑으로 돌아와··· 나 심심하니까.”
그렇게 치유마법을 받은, 아니 치유마법보다 더 뚜렷한 현상을 부여받은 내 몸은 한순간에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육안으로도 엿보일 만큼 확연하게 말이다.
원래도 거의 다 회복돼가던 상황이었는데 이젠 정말 완치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
“······.”
그렇기에 나는 한순간에 재생된 육체를 관조하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이하린과 남궁설아는 내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신기하죠? 저희도 그랬어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적응될 거에요.”
나는 그녀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고개를 돌려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평소 그녀의 언령에 담겨있던 마력의 양을 생각해보면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정말 하루종일 마력을 모으려고 노력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생했겠네. 고마워.”
그렇기에 나는 감사를 표했고, 그러자 아리엘은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돌렸을 따름이었다.
고개 돌린 그녀의 옆모습에선 평소답지 않게 쑥스럽다는 표정이 엿보였다.
“고, 고생은 뭘··· 너희한테 진 빚이 얼만데. 목숨값에 비하면 별거 아니잖아.”
“그건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아니, 정말 또 그러네?”
하지만 카룬드때의 일을 언급하는 그녀에게 그리 대답했더니, 아리엘은 그 즉시 다시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건 아니야.”
“······?”
“이런 건 가볍게 넘기면 안 돼.”
그 목소리 속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고, 그 말과 함께 서서히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까 둘다 너무 괘씸해.”
그리고는 갑자기 애꿏은 이하린의 볼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아까 하린이 너도 그렇고 천하도 그렇고 왜 그렇게 맨날 겸양을 떠는 거야?”
“······?!”
“아까 뭐? 이럴 필요는 없다고?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너 너무 괘씸했어. 정말 너무해.”
“아, 아니이······”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이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거야. 물론 그걸 칼같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정도 일을 해줬으면 이 정도는 당연히 받을 줄도 알아야지 바보들아!”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이하린이 또 선을 긋기라도 했던 걸까?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아리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이하린의 볼을 계속해서 쿡쿡 찔러댔고, 그런 아리엘의 행동에 이하린은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아니이··· 지금 말을 꺼낸건 분명······”
“조용히 해.”
“······?!”
분명 지금 말을 꺼낸 건 난데 왜 자신이 혼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렇게 이하린은 내게 억울하다는 듯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을 뿐이었다.
“······!!”
“······.”
물론- 그런 내 태도에 이하린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세차게 떨려왔지만, 나 또한 지난 사건때 이하린의 선긋기에 곤란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만큼 차마 이 상황에서 아리엘의 불만을 대신 받아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시간이 시간인 만큼 아리엘은 곧 회랑으로 돌아갈 테니 조금만 버티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없잖아 있었고 말이다.
“평소에 그렇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했는데 회랑에 있던애가 홀라당 혼자 테러가 일어난 곳으로 뛰어들어가고, 말 좀 편하게 하라해도 죽어도 존칭만 쓰고,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는건데도 불편해하고······ 정말 혼나야해. 하린이 너는 그러······”
“······.”
물론 그녀가 갈때까진 아직 시간이 더 남아있는것 같았기에 나는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이하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