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86화 (86/205)

등천의 업 (3)

등천자 타샨 피아르- 아니 본명은 그게 아니겠지만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 우선은 타샨이라 칭하겠다.

지난 훈장수여식때는 위장을 하고 찾아왔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본래의 모습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만상의 눈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의 내부에 일렁거리는 살벌한 기세를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어쩐지 순간 방안의 온도가 조금 내려간 기분이 들었을 정도.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세계에 존재하는 승천자는 총 몇 명일까요?”

“······? 11명?”

게다가 말투 또한 그때와 정반대의 어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때의 능글맞던 성격이 연기 같지는 않았으니 아무래도 이쪽의 성격이야말로 공적인 용도로 꾸며낸 성격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하이랭커급으로 취급되는 각성자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 것 같나요?”

“보통은 150명 정도로 가정하는 편이죠. 실력에 비해 공략활동을 거의 안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근데 누구신가요?”

어쨌든 난데없는 그녀의 등장에 아리엘은 조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이하린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흥미와 긴장이 섞인 눈빛으로 타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물음에 타샨을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을 소개하였는데, 정작 정작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만큼은 나를 향해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 저는 트리난 라피냐라고 합니다. 연맹에서 나왔고, 잠시 유천하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선객이 있었네요.”

타샨, 아니 라피냐는 그 말과 함께 품에서 직사각형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력은 손위의 카드와 반응해 허공에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과 두 개의 심볼을 투사하기 시작했고, 그중 한 개의 형상- 펼쳐진 하얀 날개의 문양은 세계연맹을 상징하는 심볼이었기에 등천 회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상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 수면에 비친 초승달의 형상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심볼이었는데, 아무래도 아리엘은 그게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연맹? 그 문양은··· 설마?”

“예. 집행기관에서 나왔습니다.”

“······!!”

라피냐의 말에 아리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여졌고, 그녀는 이내 아연한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

“아, 아니야.”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아리엘의 반응이 순간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라피냐를 바라보았고, 라피냐 또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그러니··· 유천하씨? 혹시 바쁜 게 아니라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날 테러와 관련되어 사건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이하린 생도와 남궁설아 생도가 있던 현장에는 저희 쪽 인원들도 있었기에 얼추 정리가 끝났는데··· 아무래도 당신이 있었던 곳은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어서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건 이야기를 나눠봐야 알 것 같네요. 그날의 행적과 관련되어 물어볼 사항이 적진 않고, 조금은 사적인 관심도 있으니까요.”

라피냐의 말에 나는 이하린과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이하린은 어차피 같이 입원해있는 중이니 괜찮았지만, 기껏 회랑에서 여기까지 찾아와준 사람을 두고 자리를 비우기가 조금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리엘은 그 즉시 자신은 괜찮다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을 따름이었다.

“갔다와 갔다와! 난 하린이랑 있을게!”

“······넵! 다녀오세요!”

이하린 또한 묘한 표정과 함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들의 대답을 들은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건조사에 협조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닌 데다, 라피냐는 이면순례자에 속해 있는 인물일 테니 조금 흥미가 가는 구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그렇게 나는 그녀를 따라 방문을 나섰다.

***

옥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불어오는 바람결.

휘이잉-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흘러간다.

원래라면 봄치고는 조금 더운 날씨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라피냐의 몸을 스치고 지나온 바람은 분명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날씨가 좋네요.”

그렇게 라피냐의 머리카락 또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내게 말을 걸어왔을 뿐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해봐도 될까요?”

“예.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 순간- 그녀의 손등에서부터 퍼져 나와 한순간에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한 마력.

우웅-!

지금 라피냐가 한 건 업륜의 응용이었는데 특별한 운용이라기보다는 그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마력의 벽을 쳤다는 느낌이었고, 이건 굳이 업륜의 마력이 아니더라도 마력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내 머릿속으로는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마력 자체에 특이점이 있는 건가?’

아무리 일상적인 순간이라지만 굳이 이런 일에 소모하기엔 업륜은 분명 희소한 자원. 솔직히 마력의 형상변환이나 성질변환처럼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시도하기 힘든 일을 할 때는 나도 업륜을 거리낌 없이 쓰는 편이었지만··· 이건 그런 경우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만큼 마력으로도 행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업륜으로 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녀의 마력에 무언가 특이점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함도 어느정도 그 추측의 단서였고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라피냐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냈고,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유천하씨는 그 날 테러를 일으켰던 조직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나요?”

“적원회라 들었습니다.”

“예. 적원회입니다. 그리고 그날 당신은 적원회 소속의 테러리스트 89명을 죽였고, 그중 6명은 침식의 마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타천자였지요.”

마율령을 죽이고 바로 위타극과 싸움에 돌입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많이 죽이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 일어난 테러규모만 보면 배는 더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라피냐는 내가 몇 명을 죽였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담담히 다음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또한 당신이 상대했던 타천자의 정체는 적원회주 마율령이었고, 그날 당신은 위타극까지 총 2명의 타천자를 죽인 셈입니다.”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의아한점이 있다면······”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는데, 그 입가에 떠올라있는 부드러운 미소와는 달리 라피냐의 눈빛은 서늘한 기색을 품은채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이 토벌한 타천자. 적원회주는 도대체 뭐였던 건가요?”

“······정확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부요. 그날 있었던 일. 적원회주 마율령과 조우하고 이후 토벌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 말과 동시에 자신의 워치를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허공에 몇 가지 화면을 띄어 보였다. 그러자 그곳에 나타난 건 적원회와 마율령에 관한 상세한 정보들.

“저희가 사전에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적원회주는 혈마공을 익힌 범죄자일지언정 침식된 마인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반파된 CCTV를 모두 이어본 결과 당신과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하는 짓은 사람이 아니었지만요- 라피냐는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며 워치를 조작해 다시 몇 가지 장면을 화면 위에 올려다 놓았다.

그러자 내 눈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한 건 모두 꽤 익숙한 장면들이었을 뿐.

“그런데 당신과 조우하기 전의 모습, 당신과 전투를 시작할때의 모습, 그리고 골목에서 뛰쳐나오던 마율령의 모습. 그 모든 걸 이어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더군요. 혹시 적원회주는······”

“타천을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녀석은 싸우는 도중에 타천의 마인이 되었습니다.”

“······역시 본 그대로였네요.”

“예. 사건의 흐름은 지금 화면에 정리된 내용과 동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른 화면-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잿빛의 형상을 바라보며 그리 대답했고, 라피냐는 그런 내 대답을 듣고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그렇다면 그자는 도대체 어떻게 타천을 한 건가요? 그것도 그런 상황에요.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역시나- 나는 그녀가 마율령의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이 부분을 물어올 거라 예상했었다.

애초에 그날 마율령이 타천한 과정은 분명 이질적인 방식이었고 그건 원작에서도, 그리고 이 세계의 상식에서도 설명되지 않은 방식의 타천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타천이란 그림자에 침식된 사람이 그 마력을 받아들여 사람의 본질을 벗어던지는 행위를 일컫는 말.

그런 만큼 침식마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림자의 침식이라는 현상이 필요했고, 그건 침식역류가 터졌을 때나 침식영역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야 일어나는 일이었지 결코 이곳처럼 침식영역과 한참을 떨어진, 그리고 침식역류조차 일어나지 않은 곳에서 벌어질 만한 일은 아니었던 탓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내게 만상의 눈이 없었다면 나 또한 마율령이 타천한 이유를 알 수 없었을 터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는 분명 녀석이 타천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근원석에서 그림자가 새어 나왔습니다.”

“근원석이요? 이미 한번 뽑혀 나와 정지된 근원석에서 그림자가 나왔다는 말인가요?”

“예. 저도 그걸 예상치 못했기에 타천하는 걸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이 소지하고 있던 근원석에서 마력이 흘러나온 순간, 녀석은 순식간에 그림자로 화하더군요.”

나는 그날의 기억- 본질을 잃어가던 마율령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 특성으로 지켜본걸 설명해 드리자면 멈춰있던 근원석이 갑자기 활성화됨과 동시에 타천이 일어났고, 그 즉시 마율령은 특성을 통해 근원석 자체를 흡수하며 변이를 끝마쳤습니다.”

“흡수? 아. 융합특성.”

“예. 물론 저도 처음의 원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이후의 변이과정은 녀석의 특성이 관여한 부분이 컸다 생각합니다.”

“······.”

나는 그렇게 설명을 해주었고, 그런 내 말에 라피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하더니 다시 내게 질문을 건네왔다.

“혹시 그 밖에 무슨 특이사항 같은 건 없었나요? CCTV로는 알 수 없는··· 그러니까 녀석이 따로 한 말이라던가?”

“특이사항이라 하면······ 근원석을 직접 흡수해서 그런지 타천자도 마수도 아닌 어정쩡한 형상으로 변화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공격을 받을수록 본능이 강해짐과 동시에 이성을 빠르게 상실하더군요. 목소리 또한 점점 기이한 울림으로 토해냈습니다.”

“마치 수호자급 마수처럼요?”

“아. 예. 수호자급 마수처럼요.”

내 말을 잠자코 듣던 그녀는 다시 한 번 화면을 조작하더니 마율령의 모습을 크게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면 위에 떠오른 건 마율령이 마수로 변해가던 모습이었고, 거미처럼 8개의 다리를 몸통에 달고 건물의 외벽을 흡수했던 녀석의 모습은 다시 봐도 일반적인 타천자하고는 많이 달라 보였다.

“그렇다면 역시 녀석은 타천하고 단 몇 분 만에 마수화까지 도달했다는 말이네요.”

역시? 라피냐는 그날의 현상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는 걸까?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애매한 대답을 건넨 그녀는 잠시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고민하는듯한 기색을 내비쳤고, 나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라피냐는 그에 관해 이야기 할 생각은 없었는지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곤, 작은 목소리와 함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을 따름이었다.

“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내게 작게 눈인사를 건네는 그녀.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런 라피냐의 마력 속에서 한순간에 살기가 일어났다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내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 모양이었는데 당연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의아했을 뿐.

“······.”

“······.”

그렇게 잠시 미묘한 분위기 속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라피냐는 다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입술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생각을 끝 맞췄는지 그녀는 다시 입을 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럼 이번에는 조금 사적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예.”

라피냐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내게 새로운 질문을 건네왔다.

하지만- 이 순간.

“조금 뜬금없는 말이겠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유천하씨. 당신 혹시 조기졸업 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내게 있어선 정말 말 그대로 뜬금없는 말이었을 뿐이었다.

***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었기에 잠시 눈을 깜빡거렸고, 이내 그녀의 말을 말 그대로 이해한 즉시- 망설임없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전혀 없습니다.”

“······단호하네요.”

애초에 내 목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

결국 내 최종적인 목적지는 다시 무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 전에 달성해야 할 전제조건은 단 두 가지에 불과했다.

최우선 조건은 언제 돌아가도 무방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것. 그다음은 이하린을 통해 차원의 벽을 넘어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 그것들이 내가 목적을 위해 달성해야 할 조건이었으니, 지금의 나는 그 목표를 위해 올바르고 확실한 선택지를 골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로썬 그 두 개 모두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이제껏 파악한 이하린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후자의 경우는 이대로만 가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만약- 전자가 먼저 충족이 된다면 이하린에게 직접 사실을 밝히고 접근해 후자를 충족시키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내가 경계해야 할 건 무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방법을 알아내려다 일을 그르치는 것이었고, 다시 알맞은 시기가 찾아오기 전에 흐름이 틀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전혀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 정도 실력이면 회랑에서 배우는 걸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물론 이제 막 입학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실력만 보면 조기졸업도 문제 없을 테니 실전에서 업을 쌓는 게 좋을 텐데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배워야 할거라······ 등천회랑의 교육이 불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 모든 건 결국 더 효율적인 공략을 위해서 배우는 거에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실력이 이미 그 효율을 뛰어넘었다 생각합니다.”

“······.”

“그러니 회랑의 교육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보단 실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분명히 더 클 거에요.”

조기졸업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느낌이 오긴 했지만 역시 그녀는 나를 현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꽤 적극적으로 말이다.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다른 이유···?”

“예를 들면 뭐······ 학교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긴 한······”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라피냐는 내 선택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바보 같은 소리를 건네었고, 그에 나는 다시 한 번 단호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건 알고 계실 듯 하니 설명해 드리자면 저는 아직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랑은 지금의 제게 가장 적절한 선택지란 생각이 드는군요.”

“······.”

“물론 회랑에 재학하면서도 공략활동은 같이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예 졸업해 현장에서만 생활할 생각은 아직까진 없고, 솔직히 졸업시험을 통과할 자신도 없습니다.”

“······등천자의 자격을 획득한 이상, 필기시험만 통과하면 될 텐데요?”

라피냐가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했을 뿐.

“그 필기가 4점이라 통과 못합니다.”

“필기야 조금만 공······ 음. 예?”

내 대답이 다소 의외였던 걸까? 이런 대답은 예상치 못했는지 라피냐는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내 말을 확인하려는지 자신의 워치를 빠르게 조작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는 조금 얼이 빠진 표정과 함께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을 따름이었다.

“······아.”

“······.”

솔직히 말하자면 중간고사만 지나도 4점의 이미지는 바로 탈피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정말 배운 적 없기에 몰랐던 거지 내가 바보라 그런 점수를 받았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나름대로 꽤 적절한 변명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당당히 라피냐를 바라보았고, 그런 내 태도에 그녀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얼떨떨한 표정과 함께 내게 명함을 하나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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