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천의 업 (1)
만상세계란 무엇인가?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만상세계를 규정하는 관점 또한 각 집단 혹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편이었다.
혹자는 세계의 인과가 모여든 초월적인 시스템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었고, 또 누군가는 차원의 본질에서 벗어난 신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었으며, 그것도 아니면 침식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여든 기원의식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허나 그 누구도 정답을 자신하진 못했다.
만상세계도, 침식도, 탑도 모두 인류의 지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불가해 한 요소들이었고, 그렇기에 인류가 이제껏 쌓아온 수많은 지식과 신비로도 만상세계는 규정하기 힘든 언외언의 무언가였을 뿐.
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선,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인류는 만상세계가 내려주는 힘에 순응하면서도 그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세계침식을 겪으며 무수한 희생을 강요받아온 인류는 침식이란 현상 자체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렇기에 세계를 구원할 방법은 바로 그곳- 만상세계의 본질에 닿아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만상세계가 어느 순간에 목소리를 들려주는지, 어떤 위업을 달성해야 만상세계가 반응하는지, 어떤 자격을 증명해야 세계의 의지가 울려 퍼지는지- 인류는 무수한 사례 속에 대략적이나마 그 기준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예외도 존재했다.
특별한 업적을 쌓지 않더라도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었는데 만상세계는 누군가에겐 마수 하나를 잡을 때마다 계속해서 기록을 읊어주기도 하였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업을 들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다시 궁리할 수밖에 없었고, 이내 만상세계가 목소리를 들려주는 기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간단했다.
[만상세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바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만상의 업을 쌓는 일도.
인과 속에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는 일도.
다시 세계의 의지를 새겨듣는 것도.
특성의 개화. 업륜의 각인. 가호의 부여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 다시 만상세계에 기록되는 무수한 위업- 그 모든 것은 스스로가 만상세계를 향해 귀를 기울일수록 더 자세히,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등천자의 탄생을 축복합니다.]
유천하의 업이 하늘에 새겨진 순간.
바로 그 순간- 유천하의 이름은 한순간에 전 세계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각성자들의 귓가를 향해 울려 퍼졌을 뿐이었다.
[등천자 유천하의 이름이 세계에 울려 퍼집니다.]
비록 만상세계의 안내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했던 이들은 듣지 못했지만, 반대로 만상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그렇게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등천자 한 명 더 생겼나 보네.”
“부럽다. 나도 등천자 할래···”
“그러면 노오력을 하라고. 노력을.”
대부분은 그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참고로- 현재 전 세계에 존재하는 등천자의 숫자는 대략 3,000명 남짓. 그건 세계를 기준으로 하자면 무척이나 적은 숫자였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수천 명에 가까운 등천자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등천자의 탄생 정도는 생각보다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
매일 같이 사지로 뛰어들어가는 공략자들이 있는 만큼 등천자가 공략 중 사망하는 경우는 충분히 많았고, 반대로 새롭게 위업을 달성해 등천의 업에 도달한 이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였으니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음?”
“어···? 근데 잠깐만.”
왜냐하면 머릿속에 울려 퍼진 이름이 꽤나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 천하?”
“누구였더라? 뭔가 들어본 것 같은데···”
“어? 잠깐만. 유천하? 걔 그거 아니야?”
그렇기에 사람들은 곧 깨달았다.
“······유천하? 생도 유천하? 등천회랑!!”
“타천자 토벌자? 설마···? 아니 맞네 시발! 카룬드 조지고 황혼급까지 토벌했던 녀석!!”
“아니 잠깐. 그러면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야. 미친! 17살짜리 등천자라고······?”
새롭게 등천의 업에 도달한 이가 이제야 등천회랑에 갓 입학한 1학년 생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것도 타천자를 토벌하고 황혼급 마수를 토벌해 근래 떠들썩했던 소식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
“······.”
이렇듯 갑작스레 들려온 충격적인 소리는 각성자들을 아연하게 만들기 충분했을 뿐이었고, 그런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새로운 등천자- 유천하를 향해 쏠리기 시작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각종 매체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 사람들은 그제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화면을 도배시키며 떠오르는 수많은 뉴스들. 그것이 이야기하고 있는 건 단 하나의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중국 합비시 테러 발생! 테러 규모는 근 이십 년 만에 일어난 대규모 테러!]
[도심 속에 날뛰는 타천자? 그림자 마수?]
.
.
.
[드디어 토벌된 타천자 위타극. 광저우의 악몽이 생도의 손에 공략되다.]
[등천회랑의 생도! 범죄조직의 테러저지 및 타천자 토벌달성! 새로운 등천자의 탄생!]
[아시아의 대규모 범죄조직 적원회 섬멸.]
[하루 만에 2명의 타천자를 토벌한 영웅. 생도? 순례자? 등천자 유천하! 최연소 승천자 후보의 탄생!]
그리고- 그렇게 올라오는 소식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저마다의 이유로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등천의 업이란 만상이 경외하고 세상이 칭송할 인과의 업을 달성한 것을 일컫는 말. 그런 만큼 일개 생도가 타천자를 토벌해 등천의 업을 달성했다는 것. 그건 그 사실만으로도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 정확히는 각성자들을 놀라게 한 소식은 따로 있었을 뿐.
“······위타극을 혼자서 토벌했다고?”
분명 타천자 위타극의 악명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위타극의 활동범위는 중국 내로 한정되어 있었고, 활동 시기 또한 살아온 세월에 비해선 무척이나 뜸했던 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국, 아니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저 무림이 존재하던 시절. 그 시절부터 1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괴물은 그간 수많은 문파와 무인을 죽여왔고, 다시 초인의 시대가 된 이후로 무수히 많은 공략자를 죽여왔으니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위타극이 쌓아온 악업과 그 악명의 무게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소식이 더욱 크게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하이랭커를 살해했던 마인 위타극.
그리고 다시 그 위타극을 토벌한 유천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고, 새로운 등천자의 소식은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무게를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아?”
뒤늦게 소식을 접한 그녀- 야식으로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던 아리엘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 뿐이었다.
***
고작 이틀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치료가 진행됐다는 느낌이라 해야할까? 우리의 부상은 순조롭게 회복돼가는 중이었다.
애초에 우리가 입원해있는 병원은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치료시설이었고, 치료과정에 마법사까지 동원되는 곳이었기에 우리의 회복이 빠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솔직히 말해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더 본격적인 치료를 받고 빠르게 퇴원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번 테러의 규모가 규모였던 만큼 시민들 중에서도 중상을 입은 이들이 많이 나왔기에 그렇게까지 하기엔 인력이 부족한듯싶었다.
물론 이미 위급한 부상은 모두 치료받은 뒤였기에 간단한 치유마법만으로도 회복이 순조로웠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을 테고 말이다.
특히- 나는 2획의 업륜을 모두 회복에 쏟아부었기에 이제는 거의 멀쩡해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나는 그냥 슬슬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던 걸까? 지금 나는 그로 인해 다소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왜 그러신 거에요.”
“······.”
“진짜··· 온몸에 상처 안 난 곳이 하나도 없네······ 정말 왜 그렇게 무모하게 싸우신 거에요······ 너무 무리하셨잖아요!”
“그야 쉬운 상대가 아니었······”
“그냥 버티기만 하셨으면 됐잖아요!”
“······.”
정확히는- 자기도 온몸에 붕대를 둘둘 두르고 있으면서도 내게 걱정 어린 잔소리를 건네오는 이하린 때문에 말이다.
어제는 막 의식을 회복한 상태라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간 모양이었는지, 이하린은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자마자 다짜고짜 내 병실로 찾아와 두 눈을 글썽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한테는 무리하지 말아라 하셨으면서··· 걱정시키지 말라 하셨으면서 천하씨가 그러시면 어떡해요? 저번에 저한텐 그렇게 뭐라 하셨으면서···!”
“그래도 저는 이겼잖습니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이 인간이 진짜- 이하린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그런 이하린의 시선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기도 했고, 투명해진 이하린의 눈망울 속에 담긴 걱정과 죄책감을 엿볼 수 있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던 이하린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고, 다시 기어가는 목소리로 뭐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내게 손을 갖다 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팔에 휘감겨있는 붕대를 힘없이 매만졌다.
“이게 뭐예요 정말······ 누가 그렇게 무리해달라 했다고··· 왜 그렇게 진짜······”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근데 메시지를 보낸 건 하린씨······ 아.”
“······.”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이하린의 눈동자가 세차게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움츠러트렸다.
분명 굉장히 슬퍼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붕대에 둘둘 말린 채 그러고 있는 이하린의 모습이 조금 하찮게 다가왔기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뻔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뭐라 하더니 말 한마디에 쪼그라드는 게 너무 이하린다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와 다르게 이하린은 진지한 상황이었고, 그녀는 땅바닥을 바라본 채 힘없이 뭐라 웅얼거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저는 그냥 천하씨 실력이면 안 다치고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이에요. 근데······ 저 때문에 이렇게 다치셔서 저는··· 저는 정말 너무 죄송해서 진짜······.”
“······.”
그리고 그런 이하린의 반응에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하린은 내 생각보다 내 부상에 큰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보낸 메시지 때문에 내가 찾아왔고, 그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다쳤다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하린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도 나는 위타극을 찾아갔을 게 분명했다.
그런 만큼 이하린의 메시지와는 별개로 위타극과 싸운 것도, 버티는 게 아닌 죽이기 위한 마음가짐으로 싸운 것도 내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 울상을 지어 보이는 이하린의 모습이 내겐 미묘하게 느껴졌을 따름.
물론 울먹거리는 이하린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썩 편치는 못했기에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어 보았다.
“······분명히 말하자면 이건 하린씨 탓이 아닙니다. 그건 전혀 관계없어요.”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 다치셨는데···”
“이건 그냥 제 선택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린씨말대로 버티기만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저는 싸우는 걸 선택했고······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결과는 이미 저희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등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이중으로 겹쳐진 칠흑의 원형을 드러낸 나는 그대로 붕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이하린의 손등 위로 내 손등을 가져갔고, 이내 툭- 가볍게 손등을 맞대었다.
우웅-! 그러자 일어나는 마력의 공명.
이하린의 손등 위로 떠오른 일륜의 형상이 내 손등의 이륜과 공명하며 마력의 기류를 뿜어냈고, 이렇게 내 손등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업륜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날의 내 선택은 결국 이렇게 내 업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위타극과 만나게 된 것도, 그리고 맞서 싸운 것도, 그리고 이긴 것도. 모두 제가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린씨가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요.”
“······.”
“제 말이 무슨의민지 아시겠습니까?”
“······네.”
내 말에 이하린은 여전히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그런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유와 평온을 버리고, 다시 의무와 조급함마저 버려낸 끝에 나는 마침내 유식에 도달하였다. 그렇기에 ‘나’의 세계는 다시 공에 도달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다시 스스로의 마음을 채워내야 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걸까.
그 부분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제껏 지나온 삶은 비워냄의 연속이었기에 그런 내게 다시 마음을 채우는 건 무척이나 낯선 일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발을 디디고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도, 이 세계를 인지하게 만들어준 사람도, 그리고 다시 그 순간 내게 검을 건네준 사람도 그녀였으니 이하린은 내게도 분명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하린에게 별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항상 호의만을 보내오는 그녀의 마음은 다시 내게 이 세계를 인지하게 해주고 있었으니,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선을 허물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
‘···비웠으면 다시 채우는 게 순리니까.’
하지만 그녀가 보내오는 것처럼 똑같은 호의로 보답해줄 순 없었다. 그녀의 선의는 언제나 따뜻했고 그 호의 또한 고마웠지만, 서로의 목표는 분명 다른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의 사연은 분명 달랐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호의에 보답해주면 되는 거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분명 지금의 내겐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서로의 결말을 위해서는 다시 이하린을 지켜내야 했으니, 어찌 보면 이하린은 지금의 내게 새롭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의무라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을 뿐.
그렇기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저는 조금 감사합니다.”
“······네?”
“그 상황에 제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그만큼 저를 신뢰하셨다는 거겠지요?”
“······.”
“그러니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저희는 어찌 보면 서로 목숨을 빚진 사이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천하씨.”
그런 내 말에 이하린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하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원작에서의 그녀도,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의 그녀도 분명 이 세계와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고 살아가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건 이하린이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사실만 생각해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런 이하린의 방어기제는 원작에서도 묘사되었던 부분이었을 뿐.
애초에 그녀가 주연들에게 갖는 호의도,
그리고 다시 내게 보내오는 호의도,
분명 모두 진심 속에 건네진 마음일지언정 그녀에게도 분명 선은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걸 알고 있기에 그 선을 넘어설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나 또한 선을 그어놓은 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환생자와 빙의자.
우리는 분명 비슷한 길 위를 걷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온전히 같진 못했고 서로가 바라보고 있는 길의 끝은··· 분명 조금 다른 결말로 찾아올 거란 것 정도는 쉽게 예상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이 미묘한 간극이 지금의 우리에겐 적절한 간격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을 규정하는 것 또한 내 마음의 문제일 테고, 세계는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색채가 달라지는 법이었으니 나는 여전히 이런 일상이 낯설게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
“······.”
그렇기에- 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복잡미묘한 심경 속에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 순간.
똑똑-
갑작스레 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나한테 볼일이 있었던 걸까? 그 소리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문으로 향하였고, 나는 그 즉시 만상의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니 얘네는 다쳤다면서 왜 다 자리에 없는거······ 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이었고, 나로서는 대체 왜 그녀가 지금 여기에 나타난 건지 순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하린도 마찬가지였는지 내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녀는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고,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너희 괜찮······ 아··· 보이는것 같기도 하고······ 어··· 나 그냥 이따 다시 와?”
마찬가지로 그녀- 아리엘의 두 눈 또한 천천히 깜빡거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