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의미 (1)
흐릿한 구름 아래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
투둑- 차가운 빗방울이 새빨간 지면에 맞닿아 그 몸을 튕겨냈을 때, 그곳에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치덕 거리는 땅을 즈려밟으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자가 있었다.
“······괴물··· 새···”
그리고 다시.
쾅-!!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올리며 검격을 막아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백색의 검신을 찍어내린 낡아빠진 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거력만큼은 너무나도 또렷했기에 이를 악물다 못해 터져버린 소녀의 입가에선 피가 흘러내릴 정도였지만, 그녀- 이하린은 온 힘을 다해 위타극의 검격을 버텨냈다.
흔들리는 검신. 일렁거리는 검강.
그리고 손등에서 토해지는 마력까지.
“수신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뛰어나군.”
“······.”
카가가각-!! 그렇게 위타극의 도를 마주한 이하린의 팔은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떨려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고, 그렇기에 위타극의 검격이 다시 흐릿한 잔상을 그려내는 순간.
그곳을 향해 군청색의 섬광이 쏘아졌다.
큉-! 배후에서 쏘아져 한순간에 거리를 격하고 휘둘러진 초속의 검격!
대기를 베어 가르는 쾌검- 그 검신에 맞닿은 빗방울이 튕겨 나가, 다시 지면에 떨어지기 전까지 위타극을 향해 휘둘러진 검의 횟수는 총 여섯 번. 그건 위타극이 이하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해진 기습이었고 소리를 뒤에 두고 순식간에 아음속의 연격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마주한 위타극은 그저 그에 맞춰 자신의 도를 흔들었을 뿐.
그러자 대치하고 있던 힘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도를 받아내고 있던 이하린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고, 한순간에 남궁설아의 검이 위타극의 앞에 도달했으며, 다시 위타극의 손이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기습을 가하던 남궁설아의 신형도, 위타극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이하린의 신형도 모두 한순간에 피를 흩뿌리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큭!”
“······.”
그렇게 그녀들이 허공을 부유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녹··· 야. 섬주!”
헐떡거리는 목소리. 그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위타극이 서 있던 자리, 순식간에 그 바닥 위로 마법진이 새겨졌고 그 즉시 그곳에서부터 파괴적인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요동치는 파동. 터져 나오는 마력.
----------------!
그리고 솟구치는 빛! 그렇게 녹색의 광휘는 기둥과도 같은 형상으로 위타극을 휘감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위타극이 그 자리를 벗어난 뒤.
위이잉-!
“······!!”
늦었다- 그게 이 순간 집행자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고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자신의 주변으로 마법진을 그려낸 집행자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앞으로 다가온 도격은 막대한 패력을 품고 집행자의 몸을 베어 갈랐을 따름이었다.
어쩌면 전위를 잃어버린 마법사가 도달하게 될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서걱-
비산하는 마력. 터져 나오는 핏줄기.
그리고 허공에 부유하는 팔.
“······시발.”
푸슉-!! 그렇게 전신을 가르고 지나간 검격에 집행자의 몸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고, 허탈한 욕설을 내뱉은 그의 몸은 서서히 지면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집행자를 바라보며 위타극은 그대로 다시 한 번 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위타극의 신형이 흐릿해진 시점에서 이미 이하린은 한순간에 발을 박차고 그곳으로 달려든 뒤였고, 그렇기에 마무리를 하려는 위타극의 도를 다시 한 번 가로막으며 검강을 뿜어낼 수 있었다.
콰아앙-!!
이하린의 검이 위타극의 도와 맞부딪힌 순간. 그들의 공세가 교차한 극점에서부터 터져 나온 기의 파랑은 한순간에 사방을 향해 휘몰아쳤다.
쿠구구구-!!
1초, 아니 그에 반쯤 되는 시간 동안 버텨낸 이하린의 검이 한순간에 밀려나갔고, 그곳을 향해 다시 남궁설아가 검을 뻗어냈다.
이번에는 쾌검이 아닌, 패검.
창궁무애검법 蒼穹無碍劍法
제왕검형 帝王劍形
훙-! 분노를 담아 쏘아진 검격이 패도의 기세를 품고 하늘을 가로질렀고, 어설프게나마 이하린과 합을 마주쳐 온 힘을 다해 공격을 쏟아내기 시작. 칵- 한 번의 부딪힘. 그리고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전에 이어지는 연격. 두 번, 세 번, 여섯 번째 공세가 펼쳐지고 있을 때 뒤늦게.
콰아잉-!! 금속의 파열음이 울려 퍼진다.
“···흡!”
하지만 부족했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호흡을 멈췄다. 숨을 쉴 시간조차 없었다. 전신의 활력을 끌어모아 팔을 휘두른다.
빠르게, 더 빠르게.
그러면서도 더 강하게!
빗방울이 검신에 닿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검격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위타극을 향해 몰아치는 초속의 검격속에서 청백의 별빛이 흩날렸고, 그 가운데에 있는 위타극은 마치 폭풍의 눈이 된 것 마냥 고요히 손을 까딱거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격전이 시작되고 벌써 몇 번이나 본 광경이었기에 그 잔상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고, 이하린과 남궁설아는 저마다 내력을 끌어올리며 이어질 공세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
“···!”
콰앙-!! 순식간에 변화한 도의 움직임 속에 그녀들의 몸에서 작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몸은 다시 한 번 뒤로 밀려났을 뿐.
그그그극- 둘 다 최대한 공격을 막아내 보았지만 실력의 차이가 차이였던 만큼 온전히 막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타격을 흘려내 급소는 막아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 부분일까.
“······큭!”
그렇기에 허공을 부유하는 이 순간.
남궁설아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 속에서도 위타극을 향한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조금씩 엄습해오는 절망감을 느끼며 위타극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교전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난 거지?
6분? 아니 5분? 그쯤 되었을까?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남궁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위타극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었던 만큼 분명 이 싸움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 정돈 진작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더 가혹했을 뿐.
단 3분- 그게 그들이 온전하게 위타극의 공세를 버텨냈던 시간이었다.
3분이 지난 순간, 선두에서 위타극의 도를 막아내던 집행자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눕혔고, 그렇게 최우선으로 위타극의 접근을 막아내던 자가 쓰러진 순간 그 뒤에서 지원을 퍼부어주던 집행자마저 순식간에 베여나갔다.
그렇게 해서 4분을 넘긴 시점에서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사람은 마법진을 그려내던 집행자와 남궁설아, 이하린 단 3명만이 남게 되었을 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제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집행자마저 쓰러져버렸고, 이곳에는 고작 생도밖에 안 되는 그녀들과 위타극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서라도 현실적인 요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솔직히 말해서 다섯 명이 함께 상대했을 때도 고작 5분을 버티는 게 전부였는데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남궁설아는 눈앞이 암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애초에 그녀들이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별게 아니었다.
남궁설아가 속도 만큼은 위타극을 앞지를 수 있었다는 것도, 이하린이 방어하는 것 하나 만큼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것도. 그 두 이유도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건 집행자들이 그녀들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었다.
같은 공략자이면서도 그들은 그녀들을 보호해야 할 존재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위타극이라는 위험 앞에 같이 힘을 합쳤어도 그들에게 이하린과 남궁설아는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아이에 불과했던 모양. 그들은 위타극의 공격을 최대한 자신들이 받아내려 하였고, 그 결과 이하린과 남궁설아는 무사했을지언정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그 행동이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들이 평범한 생도였다면 위타극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내지도 못하고 죽을 게 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하린도, 남궁설아도 평범한 생도의 실력에선 진작에 벗어난 뒤였고, 그녀들은 제한적이라지만 등천자하고 맞설 수 있는 유망주들이었을 뿐.
그렇기에 그녀들은 그들의 배려에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궁설아는 분노와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고, 이하린 또한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의무감을 되새기며 위타극의 검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어느새 점점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 아래. 그녀들은 위타극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다시.
쾅-!! 위타극을 향해 쏘아져 나간 청백의 궤적은 그대로 하나로 얽혀들어 그림자를 꿰뚫기 위해 별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손을 향해. 목을 향해. 심장을 향해. 순식간에 뻗어 나간 궤적은 수갈래의 잔향을 남기며 그어졌고, 그 순간 다시 이하린이 위타극의 도를 내리눌렀다.
카가각-!! 이하린이 떨려오는 손으로 위타극의 도를 막아내면, 그 즉시 남궁설아의 검이 무수한 흔들림속에 위타극을 향해 그어진다.
교차하는 움직임.
검신을 타고 흘러가는 검격!
발을 내디딘다. 몸을 뒤틀고, 팔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그대로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게 될 것이기에. 그렇기에- 그녀들의 정신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극명하게 달아올라 위타극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을 보기 위해.
꿈틀거리는 근육을 간파하기 위해.
흘러나오는 기세. 시선의 방향.
그 모든 것을 주시하며 본능에 가까워진 직감 속에 검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만한 연격이었고, 만약 쓰러진 집행자들이 그녀들의 실력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녀들의 실력은 분명 생도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이 순간 위타극과 교전을 이어나가는 건 단 둘뿐이었고, 위타극은 이하린이 내다볼 수 있는 호흡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남궁설아가 자아내는 공세의 흐름 또한 자신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뒤틀어낼 수 있었다.
남들보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자.
그렇기에 위타극은 고수高手였다.
그런 만큼 단순히 우연과 요행에 기대 넘어서기에는 그들 사이엔 수많은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고, 격전은 다시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단 30초- 그녀들이 공방을 이어나간 시각.
객관적으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을지언정 그 잠깐동안 교차한 공세만 해도 벌써 수십 합이 넘어가는 상황. 제 몸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하린은 <검의 반려>의 백업 속에 생사의 간극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디고 있었고, 그런 이하린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남궁설아는 최대속도로 발현된 <변속제어>의 권능 속에서 위타극을 향해 수십 개의 검격을 쏘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었을 뿐.
10초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하린의 한쪽 팔에 자상이 새겨졌고, 15초를 넘어가는 순간 남궁설아의 어깨에 구멍이 뚫렸으며, 30초가 되는 이 순간 그녀들의 전신에는 자잘할지언정 상처가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남궁설아는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위타극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네게 무림은 무엇이냐.”
“······큭!”
뻗어져 나가는 검극. 동시에 그걸 뒤받쳐주듯 교차하는 검은 서로 얽혀들어 위타극의 검을 받아낸다.
그리고 다시 터져 나오는 파랑!
콰가가가-!!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두려웠다.
위타극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는 만큼,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 또한 같이 쌓여갔다. 그녀의 지난 10년은 복수를 위해 벼려진 세월이었으며, 동시에 두려웠던 그 날로부터 도망치던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지난 며칠간 유천하와의 수련을 통해 의념을 바로 세우지 않았다면 남궁설아 또한 지금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겠지. 남궁설아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또한 그렇기에 한심했다.
이렇게 녀석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 그리고 복수조차 하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다시 두려웠다.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죽게 될 상황이라는 게 두려웠고, 원수의 손에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기에 두려웠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작스레 그녀의 귓가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흡. 끅.”
어렴풋이 들려온 작은 흐느낌.
억눌린 소리는 분명 작았지만 초인들의 감각마저 속여낼 정도는 아니었고, 그렇기에 교전을 이어나가면서도 그들의 감각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먼 곳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겐 익숙한 위치. 흐느낌이 들려온 곳은 교전이 시작되기 직전. 그녀가 기절했던 아이를 전장에서 떨어트리기 위해 눕혀놓았던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위타극과 조우한 시점이었기에 남궁설아에겐 아이를 그리 멀리 떨어트려 놓을 시간은 없었다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어찌 보면 이건 당연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아이는 위타극의 살기에 잠시 정신을 잃은 것 뿐이었고,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굉음은 그 정신을 다시 되돌려놓기에 충분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남궁설아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이의 눈에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바로 그것뿐.
눈을 감았다가 뜨니 사방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과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일 자신들의 모습이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예상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미 비슷한 경험을 겪어본 적 있었기에 남궁설아는 더 또렷이 그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
그렇기에 위타극을 향해 검을 뻗어내면서도 남궁설아의 눈빛은 잠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 숨죽인 채 흐느끼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어린 날의 자신처럼 느껴졌기에. 그리고 그 아이의 눈앞에서 다시 그 날의 광경이 재현될 것 같았기에.
그렇게 겁먹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순간 남궁설아의 검극 또한 흔들렸고, 그런 그녀의 표정을 바라본 위타극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도를 허공에 그려냈을 뿐이었다.
물론.
“!”
그 대상은 남궁설아가 아니었을 따름.
쾅-!! 순식간에 가속한 남궁설아의 신형이 수십 미터를 박차고 달려나가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곳을 향해 쏘아진 핏빛의 검강은 그대로 굉음과 함께 청적의 산란을 자아냈다.
퀴이잉-!!
공간을 격하고 쏘아진 적색의 반월.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청색의 검신!
콰아앙-!!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거리가 멀었던이하린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고, 남궁설아만이 대응할 수 있었을 뿐.
푸슉-
하지만. 위타극의 검을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 받아내는 건 그녀에게도 무리였을 따름이었다. 이하린이었다면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녀에게는 속도가 부족했고, 남궁설아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언정 그걸 막아낼 수 없었던 것.
“······.”
“······아··· 아···”
그런 만큼 다급하게 막아선 그녀의 검격을 꿰뚫고 쏘아진 적색의 강기는 그대로 그녀의 상반신에 긴 궤적을 새겨놓았고, 그건 이제까지처럼 가벼운 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의복을 내려다보며, 남궁설아의 신형은 서서히 휘청거리기며 바닥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들려온 목소리.
“아이를 구한 이유가 무엇이냐.”
난데없이 물음.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내용에 남궁설아는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도 그자를 노려보았다.
아이를 구한 이유가 무엇이냐니.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지 않은가.
콰아앙-!!
그리고 그런 남궁설아의 앞을 이하린이 막아섰고, 그렇게 쓰러지기 직전인 남궁설아를 보호하듯 이하린은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내겠다는 것 마냥. 이하린의 의념은 점점 예리하게 정련되며 그 검신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하린의 손에서 펼쳐지는 백색의 검무가 빗줄기를 가로지르며 흐드러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궁설아의 세계는 점점 뿌옇게 물들어가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허공에서 새겨지는 백색의 선율. 그리고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이하린을 바라보며 남궁설아는 생각했다.
자신은 이대로 죽는 걸까?
그리고 이하린도 이렇게 죽게 되는 걸까?
이하린의 검무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남궁설아는 그녀의 손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가는 걸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교전을 이어나가는 이하린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집행자들도, 그리고 다시 뒤에서 울음을 찾아내고 있는 어린아이도 이제 곧 죽게 될 터.
“······거슬리는군.”
카가가각-!!
이하린은 기이할 정도로 위타극의 검세를 계속해서 막아내고 있었지만, 일격 일격이 이어질 때마다 그녀로부터 풍기는 혈향은 짙어져 갈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남궁설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흑··· 흐윽···”
참아내는 것 조차 힘들었던 걸까. 이제는 조금씩 입 밖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들려왔다.
남궁설아는 이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불타오르는 도시와 울고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서고 있는 사람. 그리고 다시 아이의 앞에서 마인의 손에 죽게 될 상황이.
모든 게 어린 날의 그날처럼 느껴졌기에.
뒤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어린 날의 자신처럼 느껴졌기에 남궁설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검을 들 생각이더냐.”
“한눈··· 팔지 마!”
전력을 쏟아부은 이하린의 검과 위타극의 도가 맞닿은 순간. 터져 나온 기파는 막대한 거력을 품고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콰가가가-!!
그렇기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남궁설아의 몸은 이 순간 다시금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고, 쏟아지는 비와 흘러나온 빗속에 이미 그녀는 온몸이 축축이 젖어드는 것을 체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순간 자신의 몸을 적셔오는 게 과연 빗줄기인지, 아니면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윙윙거리는 소음과 먹먹해져 가는 감각 속에 남궁설아의 체온은 삽시간에 떨어져 갔고, 오한이 들었으며 머리는 어지러웠고 호흡은 가빠지기 시작했을 따름.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위타극은 개의치 않고 남궁설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답하거라. 아이를 구한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에게 무림은 무엇이더냐.”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하린은 신경도 안 쓰인다는 것처럼. 마치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것 마냥.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남궁설아를 향해 있었을 뿐이었다.
“······.”
그리고 뿌옇게 변해가는 시야 속으로 그런 위타극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남궁설아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저자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도대체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마인의 사정 따윈 관심 없었지만 한 세기가 지나갈 동안 계속된 녀석의 집착은 남궁설아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선조들도, 아버지도, 그리고 자신도.
녀석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 모든 게.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심장 위로 수많은 감정이 덧씌워진다.
그녀는 두려웠고, 무서웠다. 그리고 화가 났고, 다시 조급함을 느꼈다.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분노했고, 이하린의 죽음을 걱정했고, 다시 뒤에서 흐느끼는 아이의 미래에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흥분과 분노. 두려움과 후회. 절망감과 억울함. 수많은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귓가로, 아니 머릿속으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움은 미숙하다는 증거입니다.
왜 갑자기 유천하의 얼굴이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말에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나는 미숙한가.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녀는 미숙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녀의 지난 인생은 어찌 보면 두려움에 쫒긴 세월이라 볼 수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 쾌검을 추구했던 마음 깊은 곳에는 패검에 대한 두려움과 그날에 대한 외면이 숨겨져 있었고, 매일같이 조급해하던 마음속에는 다시 그날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도망치고 싶어하는 7살짜리 아이가 숨어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이 순간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중이었고, 그날의 아버지처럼 바보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은 문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붙잡기 위해 아이의 작은 손이 등에 맞닿은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론 다시 그날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그러니 두려움을 마주하세요.
자신은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아마 이렇게 될 모습이 두려웠던 걸까?
자신의 실력으로는 아무리 수련해도 위타극의 몸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강해 보였던 아버지가 결국 위타극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봤기에 그녀는 두려워 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과거의 그녀는 쾌검을 선택했다.
남궁설아가 쌓아온 세월에는 다시 위타극의 악의가 스며들어 있었고, 가문의 패검은 위타극과 마주하게 될 때마다 죽어 나갔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선택한 쾌검은 분명 도피처에 불과했다.
무학담론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또래의 손에 맞이한 압도적인 패배.
그 날 자신의 검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가속되는 속도를 육체가 따라가지 못했다. 그전까진 어렴풋이 느꼈던 부분이었지만 유천하의 말을 통해 남궁설아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환몽의 숲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유천하의 일검.
감탄스러울 만큼 예리하게 정련된 그의 검은 단 한 순간에 타천자의 몸을 베어 갈랐다. 자신의 검으로는 수십 번을 내리쳐도 뚫어내지 못했던 방벽을 그는 아주 손쉽게, 그리고 여유롭게 베어낸 것이었다.
그때 유천하는 자신을 향해 잡념이 많다 이야기하였다. 원형의 검이 아니라 쾌검으로 바꿔낸 검이기에 검이 흔들리고, 다시 잡념이 많기에 흔들리는 것이라고. 자신이 눈앞의 상대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기에 검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어딘가- 자신이 1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상대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의 악몽처럼 압도적인 실력을 내비치며, 다시금 끔찍한 절망을 선보이면서.
‘······.’
그날의 밤- 마인들을 토벌했던 침식지의 폐허 속에서 유천하는 말했었다. 침착하게 판단하라고, 한순간의 판단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당장의 신념과 판단을 감당할 실력이 없다면 그건 결국 만용에 불과하다고. 스스로의 역량을 과신하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 있었던 일을 다시 한 번 겪게 될 거라고.
하지만 남궁설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순간 자신은 만용을 부린 것이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 날의 일은 그녀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었기에 남궁설아는 위타극을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침착함을 유지해왔다. 분노 속에서도 머리를 차갑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느끼면서도 호흡을 부여잡아 검을 휘둘렀다.
유천하와의 일을 겪은 뒤로 남궁설아는 계속해서 정진해왔다. 일념을 세우기 위해 조급함을 버렸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고, 다시 두려움을 배웠고, 다시 두려움을 버려내고 있었다.
남궁설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려 떨리고 있는 손. 그리고 손과 검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핏자국. 이건 만용의 대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순간 남궁설아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몸을 붙잡기 위해 갖다 댄 아이의 손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기에. 기우뚱거리던 그녀의 몸은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지면에 바로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로 선 그녀의 몸.
그 등뒤에 맞닿아 있는 아이의 작은 손.
그건 분명 작고, 미약한 온기였지만······ 그와 동시에 이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