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법 (3)
기나긴 밤이 지나간 끝에 다시금 태양이 고개를 내밀어오는 여명의 시각.
휘광이 뒤섞인 달빛 아래에서 그녀- 남궁설아는 2학구에 있는 자신의 수련실에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쌓아왔던 경험.
그리고 아버지가 보여주던 모습들.
그리고 다시- 그날 이후 외면해왔던 검의 원형과 더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버렸던 시작의 기억을.
그녀는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
분명 그녀가 처음의 검을 버린 뒤로도 많은 세월이 지나갔기에 그 원형은 이미 많은 부분이 잊혀진 상태였지만, 그녀의 몸에는 그 순간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존경스러웠던 아버지를 따라 검을 휘둘렀던 기억이, 훌륭한 공략자가 되기 위해 다시 검을 휘둘렀던 기억이.
그렇기에 그녀는 검을 들어 올렸다.
‘두려움을 마주하세요.’
아까 전 유천하가 했던 말.
그녀는 그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쾌검을 선택한 까닭은.
그리고 원형을 외면했던 까닭은.
정말 순수히 강해지기 위해서였는가?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스스로의 과오를 마주할 시간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되물어 보았다.
자신은 그 날의 기억이 두려웠는가?
그리고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무서워.”
아직 7살밖에 안 되었던 어린 날의 기억.
불타오르는 도심 속으로 뛰어들어오던 아버지의 모습.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들의 앞을 지키기 위해 지친 몸으로 타천자의 앞을 막아서던 아비의 뒷모습.
분명 그때의 기억은 낙인이 되어 남궁설아의 인생에 큰 족적을 남겼고, 그 잔흔은 이제껏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날 마주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스스로의 안위조차 뒤로한 채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사지를 향해 나아가던 아버지의 모습은 고결했고, 또한 명예로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또한 경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사지란 걸 알면서도 걸어 들어갔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가족을 두고 떠나버린 아버지의 마지막이, 그리고 다시 타천자에게 패배했던 아버지의 마지막이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또한 슬플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도망치고 있던 거구나.”
자신이 새로운 검을 익혔던 것도, 그리고 빠르게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게 됐던 것도, 항상 타천자에 대한 원망을 쌓아가던 것도 모두 그 기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신은 두려웠던 것이다.
그 검을 가르쳐준 게 아버지였기에, 그 검을 펼치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기에. 그 검으론 타천자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녀는 어찌 보면 이제껏 과거에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서야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
물론 그 사실을 깨달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사실을 받아들였기에 그녀는 더욱 두려웠다.
쾌검이 아닌 패검.
자신의 검이 아닌 원형의 검.
새로운 검이 아닌 그 날의 검.
그 검을 들고 맞섰던 아버지의 마지막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아버지의 강함만큼 그런 아버지를 살해한 타천자의 강함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은 문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 마음에 눌려 주저앉을 생각은 없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지언정, 그녀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유천하로부터 들었던 말.
그리고 이제껏 들어왔던 말.
그 모든 기억이 이 순간 그녀를 지탱하는 부목이 되어주고 있었으니까.
‘무인의 삶은 투쟁이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린 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창궁대연신공 대신 다시 천뢰제왕신공을.
그리고 억지로 비틀어낸 천검뢰형이 아닌 시작의 검. 남궁의 검. 제왕검형을.
그렇게 그녀는 그 검을 펼쳐보았다.
창궁무애검법 蒼穹無涯劍法
제왕검형 帝王劍形
허공을 가로지르는 창천의 패검.
손목에 들어간 힘은 하늘을 떠받치고 그렇게 궤적을 그려냈다.
퀴이잉-!!
일식이 펼쳐지고, 연이어 이식이. 그리고 다시 삼식이 이어지며 계속해서 그녀의 몸은 창궁의 검을 그려내었다. 분명 10여 년의 시간 만에 펼쳐진 검이었지만 그녀의 몸은 신기할 정도로 그 검의 형식을 또렷이 재현해내고 있었다.
그건 분명 어린 시절 그녀가 그만큼 노력했다는 증거였고, 이 검을 수 없이 펼쳤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달라.’
그녀는 달라진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펼쳤던 검법은 긴 시간 끝에 다시금 그녀에게 되돌아왔고, 그렇기에 7살의 남궁설아는 느낄 수 없었던 부분을 17살의 남궁설아는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무거웠다. 그리고 고고했다.
마치 하늘 아래 존재하는 게 저 혼자인 것처럼, 그리고 세상의 모든 걸 내려다보겠다는 것처럼 그 검은 패도를 그 속에 품고서 대기를 찢어발기는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
그렇기에 그녀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검법의 이름이 창궁무애일까.
그리고 왜 검형은 제왕을 자처하는 걸까.
그것은 그녀- 남궁설아의 선조들이 쌓아온 무의 업이었고, 동시에 남궁세가가 추구했던 무의 길이었기에 그녀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원하던 목표에 도달하리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검을 펼쳐냈다.
일검, 일검이 이어질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녀는 흔들리는 검극을 부여잡으며 계속해서 검법을 펼쳐보았다. 수면에 물결이 치듯 휘둘러지는 칼. 하늘을 베어 가르듯 선을 그려내는 검극.
그 검은 더 이상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강인했고, 투박했고 또 굳건했다.
그렇기에 그 검을 펼치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기억을 되새겼다. 어린날의 악몽부터, 그간의 노력이 담긴 세월, 그리고 유천하가 했던 말, 이하린이 했던 말, 마지막으로 다시 그녀가 경험했던 순간들을.
그 기억을 되새기면서 그녀는 다짐했다.
찢기고 두들겨 맞더라도 나아가겠다. 그것이 그녀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렇게 칼끝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도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루로 부족한 일이라면, 백날을 걸어가서라도, 백날이 부족하면 천 번을 휘둘러야 할지라도. 칼끝이 천 번을 흔들려야 올곧은 궤적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기어코 만 번을 휘둘러주마.
부족하다면 더. 더 휘둘러주마.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거라’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과거를 마주하고, 그리고 다시 미래로.
[같이 본가에 들러주실 수 있으신가요?]
***
내 말이 다소 뜬금없던 걸까?
이하린이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라구요? 갑자기··· 안휘성에 간다고요? 그것도 결석까지 하시면서요?”
“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며칠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습니다.”
“······그으··· 도대체 왜요오······?”
깜빡거리는 이하린의 눈망울.
분명 평소처럼 초롱초롱한 눈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 밑에 자리한 다크서클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남궁설아와의 일이 있었던 후로 점점 짙어져 가던 검은빛은 이젠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판다 같은 모양새를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요새 무엇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 걱정이 될 정도.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직접 말해주러 온 것이었다. 말없이 다녀와도 상관없는 문제겠지만 괜히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으니 미리 말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하린의 멘탈이 더 이상 흔들렸다간 그녀가 다시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건 그런 역할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 스스로의 바람대로 평화롭게 일상을 구가하는 것. 그녀에겐 그걸로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요새 하린씨가 고민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 투자하더라도 제대로 해결하는 게 좋은 것 같아서요.”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요?”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바라보며 잔잔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설아씨요. 지난번과 관련된 일입니다.”
“······.”
그녀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땐 심히 당황스러웠으니 말이다.
갑작스레 자신의 본가- 안휘성에 위치한 가문의 장원에 들려줄 수 있겠냐는 말로 시작된 그녀의 부탁은 별거 아니면서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운 부탁이었다.
“설아씨가 제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하린씨와의 일도 있고 하니 조금 더 진지하게 신경을 쓸 생각인데, 직접 원형이 된 비급을 보여드리겠다 하시더군요. 이곳에서 볼 수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가문의 비급인지라 함부로 유출하기는 어려웠다 합니다.”
“······아.”
사실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타인에게 비급을 보여준다? 애초에 그건 무림의 상식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삼류의 무공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비급을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주는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건 무림에서도 당연한 일이었고, 이곳이라 할지라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결단. 물론 남궁설아의 가문이 거의 몰락한 상태라는 것과 그녀가 당대의 소가주라는 것이 겹쳐져 이렇게 열람의 허락이나마 받아낸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나는 비급을 보여주겠다는 말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큰 결단을 내렸는지, 그리고 절박해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이 일로 남궁설아도, 이하린도, 그리고 내 심경도 다소 복잡해지고 있었던 만큼 이왕이면 빠르게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였을 뿐이었다.
그런 내 설명에 이하린이 사정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나는 그녀의 표정이 다소 어색하게 굳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이 조금 촉촉해졌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갑자기 뭐가 말입니까?”
“그냥 전부 다요. 제가 괜히 두 분을 심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수업까지 빠지면서 도와주시는 것까지 전부요.”
아까보다 조금 더 촉촉해진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본 채 쪼그라들어있는 그녀의 모습이 다크서클과 어우러져 마치 새끼 판다처럼 느껴졌기에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조금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
물론 그랬다간 이하린이 정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았기에 그 기분을 꾹 참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담담하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설아씨와의 일은 무학담론시간 때부터 조금씩 쌓여왔던 일의 연장선입니다. 하린씨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겁니다.”
“······.”
“그러니 하린씨는 평소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괜히 지난번처럼 무리하다 걱정시키는 일만 만들지 말아 주세요.”
“······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던 날.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이하린이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하린의 머릿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았다. 4월에 들어서고부턴 항상 엿보이던 벚꽃잎도, 여유도 지금의 그녀에게선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 며칠 후에 뵙겠습니다.”
“······예. 다녀오세요.”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주었고, 돌아오는 그녀의 표정을 잠시 바라본 뒤 발걸음을 옮겼을 따름이었다.
***
중국 안휘성에 위치한 허페이, 아니 합비.
이곳의 중심부에는 수백 년 전에 세워진 듯한 고풍스러운 장원이 존재했다. 고층의 마천루 사이에서도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세월이 담긴 건물.
나는 그곳의 현판- 남궁세가라 적혀져 있는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게이트를 타고 이동한 것이기에 오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다소 신기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신비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도심 사이에 놓인 이 이질적인 풍경이 내 눈엔 실로 익숙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건물의 외관과 글자,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무림의 풍취에 나는 오랜만에 향수를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떠나온 지 이제야 겨우 두 달이 다되어갈 뿐인데 벌써 그곳이 그리운 걸까.
조금 미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자니 옆에 있던 남궁설아가 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내게 깊이 고개를 숙여왔다.
“이곳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가라앉히고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대한 문이 열리며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는 그녀와 함께 장원의 안으로 발을 들여 그곳을 거닐었다.
그리고 얼마나 걸어갔을까.
정말 상당한 규모의 면적.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텅 비어있는 공간.
이곳에 발을 들인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건만 나는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남궁세가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지금의 그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그렇기에 나는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설아씨께서 소가주라 하셨습니까?”
“예. 제가 당대의 소가주입니다.”
“······그렇군요.”
이 말을 건넨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그저 가주가 없는 곳의 소가주나, 교주가 없는 곳의 소교주나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순간 뜬금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심경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남궁설아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내게 사근히 말을 건네었다.
“안이 조금 휑해서 당황스러운 신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세가의 일원인 저조차도 이곳에 올 때면 그런 생각이 드니까요.”
“······.”
조금 허탈한 심경이 담겨있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순간 묘한 사실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전에 한차례 큰 사건을 겪은 뒤부턴 세가의 구성원들도 점점 줄어들어 왔고, 본가의 인물도 이제는 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그나마 선조들께서 옛적에 해놓은 일들이 있기에 장원을 유지할 여력이 있다는 게 다행일 뿐이지요. 지금으로선 세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영락한 현실입니다···”
“······.”
분명 내가 남궁설아를 돕고자 한 까닭은 분명 훗날의 이하린을 위해서이며, 그건 결국 최종적으로 나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선 데에는 어찌 보면 무림의 향수가 큰 영향을 끼친듯싶었다.
시간에 쫒겨 조급함을 느끼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흔들리는 검을 부여잡고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그리고 아비의 뒷모습을 쫒으며 검을 휘둘러왔을 아이의 노력이 모두 한때의 나와 같이 느껴졌기에 나는 그녀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순간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간 좀 이상하긴 했었다. 무학담론 때의 일이나 환몽의 숲에서의 일도 그렇고, 며칠 전 마인 사냥 때의 일도 그렇고. 모두 분명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적당히 그녀에게 좋은 말을 건네주고, 적당히 도움이 될 말을 건네줄 수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을 뿐.
아무래도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연민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분가의 이들은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고, 이걸 익힌 자는 저밖에 없으니까요.”
“···제왕검형이라 하셨습니까?”
“예. 정확히는 본가의 인물들에게 전수되는 창천무애검법. 그중에서도 진수만을 모아 정립된··· 아니 정립되었다고 하는 검형입니다. 이렇게 영락해가는 세가일지언정 함부로 비급을 유출할 순 없을 정도로 저희에겐 중요한 검형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좀 그렇지만, 정말로 제게 그런 걸 보여주셔도 되겠습니까?”
“예. 아니, 오히려 당신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겁니다.”
다소 얼떨떨한 기분 속에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다시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또 무슨 말일까.
“어차피 아버지······ 께서 돌아가신 이상 저 혼자만의 힘으로 비급을 온전히 익혀내는 건 지난한 일입니다. 하물며 그렇다 한들 타 문파의 선배님들께 가문의 비급을 유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평소와 다르게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당신은 다릅니다. 소속된 곳도 없고, 소속된 문파도 없으며, 타인의 비급에 관심을 가지실 경지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식견을 갖추셨지 않습니까?”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사실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점점 내부로 들어갔다.
장원의 깊은 곳. 인적 드문 공간에서도 다시 더더욱 사람이 없는 곳. 그렇게 몇 없는 사람들의 기척마저 점점 사라지고 사라진 뒤에야. 그렇게 우리는 목표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보여드릴 수 있는 겁니다. 비록 몰락해가는 가문의 비급이라지만 그 단출한 서책 하나에는 저희가 지금껏 지켜온 자부심이 담겨있으니까요.”
무림의 세가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삼엄한 마법의 방비마저 쳐져 있는 곳. 기문진식과 마법진으로 뒤덮인 밀폐된 방안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책장.
그곳에서 그녀는 한 서책을 들어 올렸고,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내게 그 책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