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69화 (69/205)

마주하는 법 (1)

“요새 분위기가 이상하다고요?”

인적없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물론 지금 라피냐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에 따른 대답은 손목의 워치에서 들려왔을 뿐이었다.

[예. 근래 아시아 쪽 마인들의 분위기가 조금 미묘해지고 있습니다. 행적을 파악하고 있던 녀석들도 하루아침에 실종이 되질 않나, 토벌을 하러 갔더니 깡그리 죽어있는 경우만 해도 벌써 수차례에 마인들의 경계태세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합니다. 그······ 이상한 제보가 지속적으로 들어오기도 했고요.]

“······흐음.”

상대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현재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정보상으로는 남미면 모를까 아시아 쪽에선 소란이 벌어질 만한 일이 전혀 없었다. 아시아라면 당연히 적원회쪽이 대다수일 테고, 적원회를 이루는 구성원의 대부분은 혈마공을 익힌 범죄자 새끼들일지언정 침식된 마인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끽해야 밀거래나 하는 쥐방울 녀석들이 무슨 배짱으로 사고를 치겠는가?

물론 새롭게 회주로 올라선 녀석이 급진적이라는 소문 정돈 들었지만, 그래 봤자 연맹의 눈치나 보는 범죄자에 불과한 수준.

저들끼리 항쟁이라도 발생한 걸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라피냐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녀석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우선적으로 한 가지를 확인해보았다.

“마킹해놓은 녀석들은 어떻게 됐나요?”

안 그래도 꽁꽁 숨어다니는 녀석들인 만큼 녀석들의 행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긴 어려운 일. 그렇기에 이면순례자나 여타의 집행기관들은 범죄조직을 토벌할시 구성원 중 일부를 마킹을 한 뒤 실수인 척 풀어주는 짓을 꽤 주기적으로 행하는 편이었다.

[아. 녀석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트래비스 말로는 마킹이 풀린 느낌이 모두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합니다.]

“다 죽었다라······ 느낌이 안 좋네요.”

[······.]

물론 그러는 이유는 분명 존재했다.

타천의 마인은 이 세계가 이 모양인 이상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침식의 가능성은 접경지에 숨어 살며 제 삶과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 범죄자들에게서 일어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실질적인 통계와 결과로 증명된 일.

침식이 일어나는 이상,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접경지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상 마인들의 증가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국가의 시스템이 마비된 곳에서 태어난 이들이 양지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방향성은 결국 처음부터 제한되어있었을 따름.

그렇기에 접경지에서 태어난 난민들의 대부분 삶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접경지에서의 삶을 받아들여 하루하루 살아가다 어느 날 침식에 휘말려 죽던지,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능력을 쌓던지.

그리고 후자의 방법은 주로 백색탑에 뛰어들어 각성자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애초에 언제 침식역류가 터질지, 언제 그림자 마수가 눈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결국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은 이들이 그곳을 탈출할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각성자가 되어 공략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뒤꽁무니나 쫒아다니며 마석을 주워다 팔던지. 어찌 됐든 ‘힘’을 손에 넣어 초인의 길에 접어드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길은 갈라졌다.

똑같이 초인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스스로의 의지와 열망에 따라 나아가는 걸 선택한 자는 공략자로, 양지에서 안주하는 걸 선택하는 자는 헌터가, 그리고 다시 음지에서 안주하고자 한다면 결국 범죄자가 되어 끝내 마인으로 타천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듯 공략자도, 헌터도, 마인도, 타천자도 결국 모두 침식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뿐.

“이래서야 균형이 흔들릴 것 같은데······”

[그래서 아시아에 투입되는 집행자를 조금 더 늘렸습니다. 손이 부족하긴 하지만 부단장님께서 그쪽을 케어해주고 계시니 어떻게든 나오긴 하더군요.]

“예.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후속조치면 모를까 예방조치라기엔 조금 불안하네요.”

그렇기에 인류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찌 보면 모든 원인은 이 세상이 그릇된 까닭이었으니 그 모든 흐름은 하나의 인과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인이 나타나는 게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면, 그 인과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면 차라리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녀석들을 제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이면순례자는 그런 생각 속에 설립되었다.

물론 지금에 와선 이면순례자뿐만이 아니라, 연맹특수군도, 그리고 여타의 비밀기관들도 모두 저들 나름대로 마인의 생태에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지만 분명 시작은 이면순례자로부터 비롯된 일.

테러의 조짐이 적발된다면 소탕한다.

학살을 일으킨다면 즉시 몰살시킨다.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통제하기 어려운 마인 또한 발견 즉시 토벌한다.

하지만 만약.

일반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저 저들끼리 범법을 저지를 뿐이라면, 그렇게 인명을 살해하지 않고 접경지 내에서 저들끼리의 잇속을 챙기는 것 뿐이라면 차라리 가상의 질서를 위해 내버려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런 기관들의 생각과 결정이 구체화된 형태가 바로 작금의 블랙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시아와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방대한 심연접경지속에서 저들끼리의 규율 속에 살아가는 범죄자들.

그렇기에 라피냐는 부하로부터 들려온 보고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인과 범죄자들이 죽어 나가는 것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게 녀석들이 죽어 나가는 원인, 그리고 그 죽음으로부터 찾아올 공백, 그에 따라 녀석들이 취할 행동. 그 모든 것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라피냐는 원인을 고민해보았다.

다시 한 번 워치를 조작한 그녀는 통화를 이어나가면서도 메신저로 전송된 자료를 빠르게 훑어내려갔고, 이내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정황만 놓고 보자면 아시아쪽에서 마인 토벌을 자행하는 녀석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대응을 준비하는 것. 아니면 이 새끼들이 미쳐서 테러를 준비하는 것. 둘 중 하나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예. 일단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테러 쪽은 조금 더 주시해주세요. 그··· 테러 정보를 흘리는 쪽도 파악해보고요.”

[안 그래도 추적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리고 토벌은··· 솔직히 토벌 자체는 상관없지만 조금 과하긴 하네요. 이런 페이스가 몇 달만 더 이어져도 확실히 적원회쪽에서 고삐를 놔버리고 미쳐 날뛸 가능성도 있겠어요. 도대체 누가 이러는 걸까요? 이쪽 업계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위넌트가 보고한 부분이 하나 있긴 합니다.]

“위넌트가요?”

[아까 보내드린 자료 마지막 부분에 사진이 첨부되어있습니다.]

그 말에 라피냐는 파일의 맨 하단, 그곳에 첨부되어있는 한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격전의 흔적이 남아있는 폐허의 모습과 그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물건.

그리고 거기엔 설명이 첨부되어있었다.

“······하. 단추? 등천회랑에서만 사용되는 마법처리라··· 혹시 일부러 흔적을 속이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은, 아니. 굳이 햇병아리들로 위장할 이유는 없겠네요.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 이런 얼토당토 없는 짓을 벌이진 않았을 테고요.”

[예. 그래서 위넌트는 아마 등천회랑의 생도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조사해보는 중이랍니다.]

“이걸 생도가 그랬다기에도 조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라피냐의 머릿속엔 순식간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의도는 둘째치고서라도 일련의 활동을 벌일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극히 제한되어있었고, 하물며 이 정도의 행동력을 갖추고 있을 만한 이도 분명 드물터.

“혹시 그 아이는 아니겠지요?”

[안 그래도 이미 연락해봤습니다. 자기는 아시아 쪽 마인들은 손댄 적 없다던군요. 오히려 본인이 직접 찾아보겠다 했습니다.]

“······아시아 쪽을 손댄 적이 없으면 그럼 다른 곳은 손댔다는 말인가. 가만히 쉬라니까 말을 안 듣네요. 쯧. 어쨌든 보고가 들어오면 바로 전달해주시고 적원회의 활동도 계속 체크해주세요. 상황에 따라선 왠지 저도 그쪽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림자 교단은 어쩌시고요···? 테러정돈 저희 선에서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뭔가 느낌이 별로예요.”

[······예?]

혹여나 정말 생도가 마인 토벌을 하는 거라면 상관없었다. 활발해진 마인들의 움직임은 결국 그 녀석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파놓은 것뿐이라는 말이니까. 물론 치기 어린 생도 한 명이 죽게 된다면 안타깝긴 하겠지만 일반인들에게 피해가 가는 게 아니라면 솔직히 큰 상관이 없는 부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만약 마인들이 테러를 준비하고 있는 거라면 그 테러의 이유는 무엇일까. 라피냐는 그 의구심을 간과할 수 없었다. 특히나 준비되고 있다는 테러의 규모를 생각하면 말이다.

테러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렇게 시선을 돌린 다음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걸까?

그리고 다시.

테러가 사실이라면 정보를 제공하는 건 적원회의 인물일 터. 그렇다면 테러의 정보를 제공해서 얻을 수 있는 목적은 무엇일까.

“들어왔다는 제보··· 아무래도 이게 좀 거슬리네요. 물론 신뢰는 안 가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주의할 필요성은 있어 보여요. 목적이 무엇이든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조금 더 빠르게 알아봐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파악되는 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

“예.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뚝-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피냐의 머릿속엔 많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최선과 최악의 선택지를 오가며 여러 결론에 도달하였을 뿐.

그렇기에 만약 정말로 함정이라면- 속으로 그런 생각을 되뇌며 라피냐는 바스락거리는 소음 속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어나갔고,

“오랜만에 고생 좀 하겠네.”

그런 그녀의 뒤로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세계의 풍경이 엿보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숲 속.

그곳에서 나는 두 눈을 감고 의식을 끌어올렸다. 시각을 닫아둔 뒤 나머지 감각마저 묻어둔 채 그대로 육감을 통해 주변의 대기를 인지한다.

흘러가는 바람. 겹쳐지는 흐름.

만물을 휘감고 돌아가는 미세한 기류.

나는 그 일련의 흐름에 집중하였고, 그렇게 수백 갈래로 갈라져 나가는 바람의 결은 이내 한 점을 통해 흐름을 자아냈다. 그 순간 내 몸을 중심으로부터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순간에 흩날리는 돌풍.

후우웅-!!

살벌한 바람 소리가 숲 속에 울러 퍼지면서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나무들이 일제히 쏴쏴- 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흩날리는 나뭇잎이 나를 휘감싸며 휘몰아쳤다.

그렇게 녹색의 고치 속에서 눈을 뜬 나는, 이내 흩날리던 나뭇잎을 그대로 의념으로 붙잡아 예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쉬익-! 뻣뻣해진 초록빛의 칼날이 그대로 선명한 예기를 품은 채 한곳을 향해 쏘아졌고, 그와 동시에 내 몸을 휘감고 돌던 바람결이 그대로 녹색의 섬광을 따라 휘몰아치며 바람의 포화를 내뱉었다.

콰과과과-!!

순식간에 뻗어 나간 녹색의 궤적.

그렇게 쏘아져 나간 바람이 가라앉자 옆구리가 뜯겨나간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스르륵- 쿵!!

마치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거칠게 난도질당한 나무는 그 속살을 드러내며 한순간에 바닥에 몸을 눕혔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바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한순간에 적막이 찾아온 숲 속.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괜찮네.”

확실히 가호와 의념. 거기에 기공까지 더해지니 상당히 쓸만한 효율성을 선보였다.

물론 가호 자체의 위력은 높지 않았고, 바람의 결을 움직이는 게 조금 낯선 감각이었던 만큼 아직은 다소 투박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역시 연습은 필요하겠어.’

아. 참고로 지금껏 파악해본 결과 가호는 내가 직접 쌓아올리는 힘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원하는 결과를 세계가 들어준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만큼 가호는 의념이나 내공보다는 효율성의 한계에선 다소 벗어난 힘이었고, 그에 따라 당연히 순수한 출력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날아오는 물체를 튕겨내는 게 고작인 수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튕겨낸다기보단 빗겨내는 수준에 가까웠다. 물론 단일 개체라면 조금 더 세심히 조절함으로써 극점을 빗겨 쳐 튕겨낼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 입장에선 그 정도면 충분했다.

화기의 사격이나 암기 같은 경우 세세한 조정 없이 내가 바라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결이 궤도를 빗겨내 주니 기본적인 방호에 있어선 꽤 쓸만한 수준. 비록 내 실력이 화기에 애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한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초당 몇십 발의 총탄세례를 쏟아붓는 다는 건 충분히 부담스러운 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풍결의 가호는 그런 부담을 상당히 덜어주는 이능이었다.

지난번 시가지에서 벌였던 전투에서도 마인들은 적극적으로 화기를 쏟아부으며 공격을 해왔지만, 무공과 업륜 그리고 가호가 조합되니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마인들을 도륙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

나는 만상의 눈으로 현상을 직시했다.

흘러가는 세계의 흐름. 삼라만상에 자리하고 있는 마력과 파동. 그리고 물질과 표상. 내 눈은 그 모든 걸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건 대기의 흐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후우웅-

풍결의 가호를 통해 내 감각은 자연스레 바람의 결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만상의 눈을 통해 내 눈은 자연스레 바람의 결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틈새를 볼 수 있었다.

흘러가는 대기의 간극. 바람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실낱같은 틈새. 스르릉- 그 순간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은 그대로 허공을 겨누었고, 그러자 그곳에는 바람의 결이 깃들기 시작했다.

물론 가호 자체의 출력이 출력인 만큼 극적인 변화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응용하기에 따라선 분명 공격에서도 유효한 수단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제대로 된 의념이 실리고, 내력을 실어 공백 속에 바람을 쏘아낸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바람 자체는 미약할지라도 대기의 틈새 사이로 의념과 내력이 조합된 검격을 쏘아 보내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 속에 나는 바람에 휩싸인 검을 들어 올려, 그대로 숲을 향해 휘둘렀다.

아니.

부스럭-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숲 속으로 걸어오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휘둘렀을 것이다.

“······.”

“······.”

갑작스레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나를 찾아온 그녀- 남궁설아의 안색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초췌해져 있었고, 그녀의 눈 밑은 초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짙은 색채를 띠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만큼은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괴로웠습니다. 두 분이 하신 말씀이 제게는 이제껏 지나온 길을 모두 부정하는 것 처럼만 느껴졌으니까요.”

“······”

“또한 저는 당신이 두려웠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두려웠고, 제가 나아가지 못한 곳에 도달한 모습이 저를 한심하게 만드는 것 같아 무서웠으며, 그 모든 게 제 지난 기억들을 뒤흔드는 것처럼만 느껴졌기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쓰라렸습니다.”

“······.”

“하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괴로움과 두려움은 모두 제 마음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요.”

그렇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러니 자존심 따윈 모두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 또한 조급함이라 볼 수 있겠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검의도, 검형도, 검로도 모두 부정당했으니 어찌 그대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하물며 그게 틀린 말이 아니라면 더더욱이요.”

“······그렇습니까.”

굳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내뱉어지는 말.

하지만 저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가 지나갔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란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의지가 강한 아이인 만큼 언젠가는 내 말을 이해하고 가르침을 청할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무인으로서 자신의 무학이 부정당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빨리 나를 찾아온 그녀가 사뭇 대단하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한 무인으로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진통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고 말이다.

“그러니까··· 염치없지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가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분명 이제껏 나는 그녀에게 여러 조언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간접적인 도움이었고, 내 스스로 그녀를 이끌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패검에 대한 조언마저도 괜히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끼어들었을 뿐이니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림 속에 길을 찾은 그녀의 눈동자가 어린 날의 내 검을 떠오르게 하였기에, 두려움을 마주하고 나아가겠다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지난날의 나와 같이 느껴졌기에.

“제 검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초췌해진 안색으로 허리를 숙여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이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고아하게 느껴졌고, 마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피어나려고 애를 쓰는 어린잎처럼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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