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순정 (3)
어색한 적막만이 맴도는 숲 속.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 복잡한 심경을 속내에 묻어둔 채 그저 가만히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다.
“······.”
“······.”
참고로 방금 전 있었던 대화의 끝은 결국 남궁설아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항상 차가운 표정만 지어 보였던 남궁설아의 뒷모습이 그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기에, 그녀를 마주 보고 있던 이하린은 덩달아 풀이 죽어 지금까지 계속 몸을 수그리고 있었을 따름.
그렇기에 아리엘은 이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이하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시간이 꽤 흘렀을 때.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하린으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있었고,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천하씨가 말씀하신 거니까 그게 맞는 거겠죠? 그게 더······ 좋은 방법이겠죠?”
다소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분명 남궁세가의 검형은 원래 패검을 지향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내 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다소 붉게, 그리고 젖어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무학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의념도 천하씨가 가르쳐주셨고, 신검합일도, 온전한 검강도, 검의에 대한 것도··· 모두 천하씨 덕분에 얻게 된 거니까요.”
“······.”
“그러니까··· 믿어도 되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슬퍼 보였고,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그녀에게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예. 믿으세요.”
단호히 되돌아간 내 말에 이하린이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믿을게요. 그러면.”
그렇게 떨리는 눈빛으로도 나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 또한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을 따름.
“······.”
“······.”
그렇게 우리의 대화가 끝나고 다시 적막이 맴돌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고 있기 힘들었는지 아리엘이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하린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하린이는 왜 설아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설아의 과거를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모르고 그런 거야···?”
“······아니요. 알고 있었어요.”
“그럼 왜 그랬어?”
이하린의 대답에 아리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이하린은 더 쪼그라든 채 양손으로 무릎을 껴안고는 고개 숙인 채 힘없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서요.”
“······?”
“······사실 저는 아리엘씨도, 설아씨도, 그리고 다른 분들도 그렇고. 오래전부터 여러분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나는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설마 빙의한 사실을 고백하려는 건 아닐 테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말실수를 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어··· 우리가 유망주라서?”
마찬가지로 그 말에 담긴 내용에 아리엘 또한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하린을 바라보았지만, 이하린은 그런 아리엘의 얼굴을 마주 보며 힘없는 목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유망주. 네. 그래서 알고 있었어요. 여러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해왔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떤 공략자가 되고자 하는지······ 저는 글 줄기 너머로나마 여러분을 좋아했고, 또 이해하고 싶었거든요.”
“······왜?”
“······그냥 슬퍼서요. 제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상처를 받고, 그리고 노력해오는 모습들이 제게는 정말 마음 깊이 다가왔으니까요.”
“······.”
“특히 그중에서도 설아씨의 과거는 더욱더 그랬고요······”
아리엘은 지금 이하린이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글 줄기 너머라는 말은 그저 화면 너머의 기사라고 이해했을까. 그리고 이런 말을 할 자격이라는 게 단순히 오지랖을 걱정하는 거라 받아들였을까.
적어도 이 세계에서 이하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소설 속 글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소설을 써내려간 그녀 자신의 죄책감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런 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오직-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사탕이 떠올랐다. 이 순간 이하린에게 필요한 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주연인물들에 대한 죄책감도 아닌 일말의 여유처럼 느껴졌기에.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빙의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설아씨의 목표··· 타천자 위타극은 연맹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마인 이에요. 비록 알려진 바가 많지는 않지만요.”
“······.”
“무력은 최소 하이랭커. 활동 시기가 뜸하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몇 년 전의 일이지만, 10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괴물이에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위타극과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하이랭커는 설아씨의 아버지였고 말이에요.”
이하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있었고, 그런 이하린의 눈빛 속에는 밤하늘의 별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테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온 아버지가. 다시 울고 있는 아이 몇 명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7살짜리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그리고 가문의 원수에게 다시 한 번 가족이 살해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아이에게 그 날은 대체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광저우 대학살.”
“네. 벌써 10년 전의 일이에요. 위타극을 놓쳤기에 연맹에선 쉬쉬하는 사건이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아까 이하린이 글 줄기 너머의 이해라 말했던가? 그건 내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는 소설 속 글 몇 줄기로 묘사되었던 일이 흘러나오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는 설아씨가 안쓰러웠어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실례가 되겠지만···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을 구하러 온 아버지가 죽는 걸 봐야 했다는 것도, 원수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격차를 좁히기엔 힘들다는 것도요··· 하이랭커. 솔직히 그건 저희에겐 너무나 까마득한 말이잖아요.”
“······.”
“저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고, 그래서 설아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이 순간- 왠지 모르게 나는 그녀의 말이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는 이하린의 목소리가 조금 신경 쓰였기에.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4월은 평화롭게.’
나도 그녀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랬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하린씨는 혹시 위타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마도련도 위타극도, 그리고 무림도. 언젠가는 위타극과 직접 마주하게 될 테니까. 그러자 내 말에 고개를 들어올린 이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이전에 등천도시 테러 때. 저는 테러를 기획한 마인을 심문했습니다. 이전에 말해서 알고 계시겠지요?”
“네··· 그런데 그 이야긴 갑자기 왜?”
“······?”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 날의 사건에 그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부분을 자연스럽게 물어보려면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그것도 어찌 보면 지금 이야기와 관련된 일인듯합니다.”
“······네? 그게 무슨?”
이하린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이 말하기를 그날 테러를 일으켰던 마인들은 적원회란 곳에서 갈라져 나온 녀석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아보니 적원회란 곳은 다시 마도련이라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단체더군요.”
“마도련··· 이요?”
“어···? 그거 엄청 예전에 몰락했다는 범죄집단 아니야?”
“어. 그럴 거야. 1차 세계침식 때 침식에 휩쓸렸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알아보니까 마도련과 관련된 이중 아직 멀쩡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리고 그게 바로···”
“······설마 위타극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역시 무림과 관련된 설정은 부실했던 모양인지 이하린의 눈동자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렇기에 이전부터 궁금했습니다. 1세기 전의 일이라 단순히 검색만으로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남궁세가를 몰살시켰다는 것도 그렇고, 10년 전의 학살도 그렇고, 그리고 근래 있었던 테러까지 어찌 보면 모두 마도련이란곳과 관련돼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
“그래서 그런데··· 마도련에 대해서도, 위타극에 대해서도 혹시 알고 계시는 내용이 있으십니까?”
물론 직접 설정한 내용이 아닐 테니 이하린 또한 모르는 부분이겠지만, 그렇다 한들 정보의 측면에선 이하린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녀가 직접 설정한 내용은 아닐지언정 남아있는 기록과 그녀의 가호를 짜 맞춘다면 분명 이하린이 알아낼 수 있는 게 나보다는 더 많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내 생각과는 다르게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을 따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이하린을 바라보고 있던 아리엘이 마주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고,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왜 하린이한테 물어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설명해줄게. 적원회··· 라는 곳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옛날 이야기 정도는 아빠한테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루타텔씨한테요?”
“응. 어찌 보면 심연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고, 1세대 승천자하고 관련된 이야기니까. 뭐···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아리엘은 기억을 되짚어 보는 중인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고,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에선 천천히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천망회회 소이불루 天網恢恢 昭而不漏.
하늘이라는 그물은 엉성한 것 같아도 넓고 넓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으로 그만큼 세상의 흐름은 인과가 없는 것 같아도 모든 건 하나의 이치 속에 흘러간다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 말처럼 무림이 변화한 것도 어찌 보면 모두 하늘의 이치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20세기 초- 시대의 과도기를 맞이한 무림은 조금씩 변질되어가는 중이었고, 시대의 흐름은 새로운 문물과 맞닿았다. 그렇기에 무림이 자리하고 있던 중원 또한 새롭게 변할 수밖에 없었으니, 수차례의 전쟁과 문화개혁은 민초들뿐만이 아니라 무림마저 좀먹어갔을 뿐이었다.
아편에 찌들었던 백도의 무인도, 서양의 상인에게 여아를 내다 팔던 흑도의 잡배도, 과도기를 맞이한 세상 속에서 피를 취하며 낄낄거리던 마도의 괴물들도.
그렇게 모두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것에 불과했을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자연의 정기가 쇠퇴해가고, 본신의 무력마저 미약해진 그들이 화약과 철의 대화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다시 그렇기에- 몰락한 무림이 침식에 집어삼켜 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화약의 대화는 피륙으로 이루어진 것들에게는 효과적이었을지언정 잿빛의 그림자들에겐 부질없는 일이었으니, 그렇다고 사람의 업으로 그림자에 맞서기엔 그들에게 협의란 퀴퀴한 옛말이 된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침식에 저항하기엔 그들에게 신념이란 이미 아편 하나에 팔아먹은 싸구려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의협의 가치를 내걸고 검을 치켜든 자들이 존재했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안위만을 챙기며 서서히 익사해갈 때, 쌓아올린 무학을 통해 세상에 맞선 이들이 있었다.
그게 바로- 천하제일 대남궁세가.
당대의 무림맹주를 배출하고 천하제일 세가로 칭송받았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재앙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렇게 각자 저마다의 검을 들고 전장으로 나섰다.
부족한 힘으로 마수를 베어 넘기고, 그 기운을 체득시켜 다시 마수를 베러 뛰쳐나갔고, 혼란을 틈타 악행을 벌이는 마도의 인물들을 단죄하였으며, 그림자에서 기어 올라온 마수들을 토벌하기 위해 검을 치켜세웠고, 약에 찌든 무인들을 꾸짖어 무림의 중심을 지켜나갔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이 수 세기 동안 쌓아온 신념도, 그리고 명예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건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이었으니.
32대 무림맹주이자 당대의 천하제일인.
창천검황 남궁연월 暢天劍皇 南宮演越
그는 쇠퇴해 가는 무림에서도 확고한 무武를 선보이는 자였고, 그 실력만큼이나 올곧았던 인품은 수많은 강호인들에게 칭송받기에도 충분했을 따름. 그는 침식된 마인들이 세상 곳곳으로 풀려났을 때도 오로지 민초들을 위해 검을 휘둘렀던 사람이었다.
중원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잿빛의 탑이 사람들을 짓밟기 전에 그는 검 한 자루로 침식을 베어냈고, 다시 검 한 자루로 마인들을 베어냈다.
그렇게 남궁연월은 사람들의 선망과 경외 속에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으니 스스로의 협을 무로 증명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리 칭송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 검이 들려있는 한 의협도 같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그가 살아있는 한 무림도 살아있다고.
그리고 마침내 마도련에 솟아났던 심연의 탑이 역류하기 시작함으로써 중원이 잠식당했을 때- 그는 단신으로 심연에 뛰어듦으로써 역류를 정지시켰으니.
새롭게 승천자가 탄생함과 더불어 그날로 무림은 큰 별을 잃게 되었고, 그렇게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의협의 가치를 선보인 남궁연월의 희생은 다시 한번 만민의 입속에 칭송받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협에 돌아오는 대가는 없었으되 치러야 할 대가는 명백했으니.
-남궁연월은 어디 있는가.
심연의 탑이 정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세가의 장원으로 한 사람, 아니 한 마인이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한 세가의 무인들은 경악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심연이 솟아남과 동시에 붕괴한 마도련의 부련주였기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건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였으니 말이다.
살검악귀 위타극.
아니, 타천자 위타극의 방문.
그렇게 침식을 토벌하기 위해 세가의 정예들이 빠져나간 곳. 그 반쪽자리 무인들과 아이들만이 남아있던 그곳은 그날로 협의 가치를 내걸 수 없게 되었고, 뒤늦게 세가로 돌아온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반긴 건 싸늘하게 식은 협의의 대가였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날을 기점으로 죽은 줄 알았던 마도련의 마인들이 일제히 그림자에 침식된 채 무림 곳곳을 휩쓸었고, 되살아난 무림의 가치를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던 무인들은 그 긍지의 대가를 마주하였으니.
그로 인해 사람들은 기존의 무림으로는 이 미쳐가는 세상에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다시 말하였다.
남궁연월이 죽은 그 날로 무림이 쓰러졌노라고, 그리고 남궁세가가 불타오른 날. 한 마인이 무림을 살해했노라고.
***
어둠에 잠겨있는 폐허의 사이- 그곳을 걸어가는 중년의 남성은 오랜만에 발을 들인 익숙한 풍경에 잠시 옛 생각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
그가 무공을 익히게 된 이유는 배가 고파 만두를 훔쳐먹다 두들겨 맞은 게 억울해서였고, 마인이 된 이유는 몸담고 있던 곳이 협객을 자처하는 자에게 몰살당했기 때문이었으며, 타천자가 된 이유는 그저 마도련의 한가운데에 심연의 탑이 솟아났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너무 먼 과거가 된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 날의 일이 위타극을 이 시대까지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그가 남궁세가를 방문한 이유는 남궁연월에게 되갚지 못한 빚이 있기 때문이었고, 무림의 은원이란 마인이냐, 무인이냐, 어린아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마인이라 죽였으니, 다시 무인이라 죽였다. 마인이 될 싹이라 죽였으니, 다시 무인이 될 싹이라 죽였다.
그것이 그 시대의 무림이었다.
그렇다면 마공을 익힌 마인이나 그림자에 침식된 마인이나 당최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마인과 무인이 다시 무엇이 다른 걸까.
그렇기에 무림은 스러졌다.
위타극은 지난 세월 동안 무림의 몰락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따름이었다.
무림이 쇠퇴한 것도, 난데없이 괴력난신이 당도한 것도, 모두 하늘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는 백도도, 마도도 덧없는 허상이 되었고, 위타극은 이제 마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스스로를 무인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내면의 충동에 순응하며 사람을 죽이며 살아갈 뿐이었고, 그렇기에 적막한 폐허 사이에서 위타극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말해라.”
낮게 울리듯 퍼져나가는 목소리.
분명 아무도 없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순간 텅 비어있던 골목에서 적원회주가 걸어 나왔다.
“······준비는 5월이 오기 전에 완료될 것 같습니다. 근래 실종된 녀석들이 많기에 더 빠르게 준비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는 적원회주- 마율령은 고개를 숙여 보였지만, 그늘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불쾌하게 뒤틀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 까닭은 별게 아니었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기척을 숨기고 접근한 게 단번에 들통났다는 게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고, 한낱 괴인 한 명에게 휘청거리는 조직이 한심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미친 작자가 갑자기 본분을 깨달아 사람을 죽이겠다며 자신을 죽이려 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스스로가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데없이 찾아와선 한순간에 조직원들을 베어죽인 마인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 건 용기가 아닌 만용에 불과했다. 단 10분 만에 수십 명의 부하가 죽어 나간 건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좆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역시 참 좆같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부터 좆같았던 곳이었기에 마율령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그 생각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직접 죽이신 숫자도 숫자고, 급한 요구였던 만큼 그 정돈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적원회주의 입에선 분노와 자괴감이 뒤섞인 말이 침착하게 이어졌을 뿐이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위타극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
본디 침식마인의 증오는 인과에서 나타나는 것. 그렇기에 침식의 인과는 사람의 손에서 벗어났어도 마인 만큼은 사람의 인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위타극은 얼마 전 적원회의 마인 수십을 죽였기 때문에 한동안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애초에 위타극이 세상에 나온 건 충동이 다가오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
“······.”
하지만 마율령의 입장에선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그의 속에는 점점 분노가 쌓이고 있었고, 그렇기에 위타극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눈빛은 붉은 빛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뒤틀린 인과속에 움직이기 시작한 마인.
억눌린 욕망 속에 내심을 감추는 마인.
그렇게 그들의 거리는 가까웠을지언정 그사이에는 수많은 간극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폐허의 중심에선 다시 또 인과가 쌓여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