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66화 (66/205)

청백순정 (1)

남궁설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난 주말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수많은 생각들. 그날 밤 유천하와의 일도 그렇고, 그때 나누었던 대화도, 마인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무력함에 대해서도. 남궁설아는 끊임없이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어린 날의 기억까지도.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성적으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게, 그러면서도 다시 그의 방법도 틀리지 않다 여겼던 자신의 모습이. 그녀는 그 모든 게 그저 부끄러웠다.

그날 테러로 죽은 72명의 사람은,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유천하의 말을 납득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더 많은 마인들을 없앤다면 다시 더 큰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사람의 목숨은 단순히 효율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억눌린 괴로움 속에 주말을 지새웠다. 아버지였다면 그 순간에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셨을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기에. 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신념은 그렇게나 초라하다는 걸 느꼈기에.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부족해 그 말에 명확히 반박하지 못한 것도, 실력이 부족해 그의 말에 혹해버린 것도, 모든 게 부족해 아직도 자신의 검 하나를 제대로 못 휘두르고 있는 것도. 그 상황에서 유천하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마저도.

그녀에겐 그 모든 게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게 만들기 충분했을 뿐이니까.

그래서일까.

[실전 전투 분석개론 생도 관찰보고서]

[No.2644328 남궁설아 - 보고서 취합]

보고서를 읽게 된 남궁설아는 그 속에서 발견한 한 장의 내용. 그 마지막 내용을 읽은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대상자 남궁설아 / 작성자 이하린]

[훌륭한 쾌속의 검격. 빠른 속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공세의 전환은 분명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냈고, 마수들을 상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선보였습니다.]

아침에 보고서를 전달받았을 때만 해도 남궁설아는 이게 그저 평범한 보고서라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만약 이하린이 이전의 타천자 토벌 멤버에 포함된 이가 아니었다면, 유천하와 그 누구보다 밀접한 이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 보고서를 끝까지 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하린의 이름은 유천하와 얽혀들어 남궁설아의 기억 속에도 분명히 남아있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그 보고서의 뒷내용까지 모두 읽게 되었다.

그리고.

[하지만 한계는 분명합니다. 속도가 통하지 않는 적을 상대하게 된다면, 혹은 움직임을 읽히게 된다면 빠른 속도는 힘을 잃을 것입니다. 쾌검에만 의지하는 공격은 분명 빠르지만 공격의 경로가 단조로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생도가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건 오직, 이지 없는 마수들을 상대로 시험이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남궁설아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만약 상대가 지능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리고 해당 생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면 결과는 분명 극명하게 달라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빠름에만 치중하기에 움직임이 단조롭습니다. 공격의 경로가 일정하기에 방어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수준 차이가 나는 상대라면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대응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해당 생도는 빠른 속도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을 개선해야 합니다. 또한 속도의 변화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움직임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이자면.]

그것도 매우 강렬하게 말이다.

[쾌검으로서의 발전은 한계가 엿보이니 다른 방향성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둔검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

그녀의 관찰 보고서를 모두 읽어내린 남궁설아는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당히 갑작스러운 의견이었기에 그녀의 뇌는 일순간 삐거덕거리고 말았다.

······그래. 분명 이하린이 말한 내용에는 옳은 내용도 들어 있었다. 아니 대부분은 객관적인 기준에서 작성된 내용이었다.

남궁설아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애초에 그 내용은 모두, 당장 유천하와의 대련을 통해서, 그리고 지난 경험들을 통해서, 그녀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문제점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 한들 저 내용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 솔직히 다른 내용은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말.

-쾌검으로서의 발전은 한계가 엿보이니 다른 방향성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둔검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저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저게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의견을 적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분명 무인에게 건네기에는 정말로 무례한 말이었고, 또 부적절한 참견이었다.

검식에 우위나 한계가 존재하는가?

아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쾌검도, 둔검도, 패검도, 유검도, 중검도. 어떤 검의 방향성이든 다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했고, 개개인에게 맞는 적합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적합성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오직 스스로가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쾌검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그리고 그녀의 체형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검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어린 시절 익혔던 검을 버리고 패검 속에서 다시 쾌검을 익혀냈다. 그리고 그건 복수를 위해서 수많은 가능성을 검토해보고, 생각해보고, 또 고민한 결과였다.

그런 만큼 쾌검이라는 선택 속에는 그녀의 지난 인생과 고민이 담겨있었다.

한데 갑자기 다른 방향성이라니?

도대체 이하린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고작 10여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재생된 짤막한 영상으로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저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르는 걸까?

그렇기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고민과 자책 속에 어지러웠던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려왔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작스레 날아온 충격에 그녀는 결국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어? 남궁설아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어딜 저렇게···

-오, 오우씨··· 표, 표정 뭐야 방금.

차라리. 차라리 이하린이 말한 내용이 모두 엉터리에 가까운 말이었다면 그냥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하린이 그녀가 기억할 만큼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냥 무시했을지도 몰랐다.

만약 이하린이 유천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타천자와 마주했던 이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지난 주말 유천하와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면.

그저 약간의 불쾌함 속에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쾅-!!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니었기에.

“······어?”

“······.”

그녀는 그 대답을 직접 듣는다는 선택지를 선택하였고, 그렇기에 남궁설아는 이하린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나, 남궁설아?”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 무슨 일이세요?”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벚꽃길을 산책하며 포근한 봄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던 이하린으로선, 난데없이 찾아온 남궁설아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뜨고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이렇게 갑자기 남궁설아가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고, 설령 찾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이 산책로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도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에서 그녀들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허나 한쪽의 시선은 동그랗게 흔들리고 있었고, 다시 한쪽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관찰 보고서. 전부 읽어봤습니다.”

“······아.”

그 말에 그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주신 내용. 분명 옳은 분석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사견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저기 그게···”

“어떤 생각을 거친 끝에 다른 방향을 고려하라 하신 것인지 조금 더 상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둔검이란 말이 나온 이유, 그렇게 생각하신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어어··· 그으···”

아니 분명 직접 개입할 생각으로 그렇게 적은 거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찾아오다니?

물론 이하린은 집필자로서 남궁설아의 목표를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당연히 일부러 남궁설아를 자극해 성장을 유도할 생각으로 보고서를 적은 것이었다.

하지만 남궁설아는 이하린의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그리고 진지한 기색으로 그녀를 찾아왔기에 당혹스러울 뿐.

그렇기에 이하린은 미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뇌가 정지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산책을 하며 기분이 둥실둥실했던 그녀로서는 갑작스레 마주하게 된 차가운 시선에 순식간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갔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움츠린 채 남궁설아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우물거리기 시작한 그녀.

그리고.

“······그냥··· 하신 말씀이셨나 보군요.”

그런 이하린의 태도는 남궁설아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 아니 그··· 그건 아니고오···”

“만약.”

차가운 시선이 이하린에게 맞닿았다.

“모든 내용이 엉터리였다면 무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만큼은 틀리지 않았기에 마지막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어요.”

“······저··· 그게···”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타인의 무공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건 분명 실례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리 적은 것이라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그 말과 함께 남궁설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조금 사그라든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별생각 없이 적으신 모양이군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외침. 갑작스레 높아진 목소리에 그 말을 외친 이하린 스스로도 당황스러웠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남궁설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별생각 없이라니!

그건 결코 가벼운 마음도 아니었고,

결코 아무 생각 없이 쓴 내용도 아니었다.

오로지 남궁설아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녀가 조금 더 빨리 길을 찾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신이었기에, 그런 설정을 써내려간 자신이었기에. 이하린은 수많은 마음을 담아 그렇게 적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

이하린은 마치 자신의 아이한테 외면당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하린은 이 순간 봄날의 기분에서 벗어나 빙의자로서의 정신을 자각했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이 한순간에 올곧은 빛으로 변해 남궁설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요. 제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건 진지하게 적은 거였어요.”

“제 검을. 쾌검을 버리라고 말인가요?”

“예. 설아씨는, 설아씨 당신은 쾌검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해요. 단순히 공략활동만 하실 거면 몰라도 나중을 생각한다면···!”

“······잠시만요. 지금 어떤 의미로 나중을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싸늘하게 토해진 물음- 그 말에 순간 아차 싶었던 이하린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이하린도, 남궁설아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타천자에게 아비가 살해당하는걸 지켜봐야 했던 아이의 과거는 이미 너무나도 유명해진 이야기였기에 이하린의 말에 담긴 맥락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이렇게 타인의 입에서 함부로 언급될만한 내용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남궁설아의 입에서 작은, 하지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도대체··· 당신이. 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까.”

실수했다- 그런 생각이 이하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궁설아의 입장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어린 날의 트라우마를 꺼내며 오지랖을 부린 셈이었으니 말이다.

저도 모르게 감정이 휩쓸렸다는 걸 깨달은 이하린이었지만, 이내 그녀는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하린에게 그녀는 남이 아니었으니까. 남궁설아라는 이름도, 그녀의 검도, 그녀의 과거도 모두 자신의 선택에서 야기된 결과였기에 그녀는 그 모든 것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남궁설아는 더 크게 후회하게 될 테고, 위타극과 마주했을 때 더 큰 장벽에 마주치게 될 것이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그녀가 적어 내려갔던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주연인물들을, 이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였기에 이하린은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남궁설아의 시선을 똑똑히 마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속에 서로의 마음이 비친다.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설아씨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어요.”

저 아이가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쳐다볼지언정, 그녀에게 자신이 한낱 타인에 불과할지언정, 자신의 행동이 남궁설아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언정.

이하린은 더 먼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스스로의 상처 또한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건 그녀에게는 하나의 원죄였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속죄는 이 아이들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하린은 입을 열었다.

“당신이 했을 고민도, 당신이 겪어온 과거도.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도.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

남궁설아의 표정에 혼란이 깃들었다.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의 눈빛 속엔 의아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불쾌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설아씨···”

하지만 이하린은 그런 남궁설아의 시선을 바라보면서도 그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고,

“당신에겐 쾌검보단 둔검이 더 어울려요.”

그런 이하린의 눈빛은 무척이나 애처로웠을 따름이었다.

***

“······.”

머리가 아프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정말로 머리가 조금씩 울리는 느낌.

설마 원작에서의 일이 그대로 벌어지다니,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해버린 듯해 조금 당혹스러웠다. 다른 전개는 잘도 비틀리면서 이런 것만 그대로 진행되는구나, 순간 그런 생각과 함께 어처구니없는 기분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

“······.”

“······.”

어쨌든 그렇게 우리- 그러니까 나와 아리엘에게 간략히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남궁설아는 싸늘한 눈으로 이하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하린은 조금은 슬픈, 하지만 굳은 눈빛으로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의 이야기와 지금의 분위기 속에 나와 아리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데리고 오신 이유가.”

“대련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접 체감시켜드리기 위해서예요.”

내 말이 끝나기도전에 들려오는 말들.

남궁설아야 그렇다 치고 이하린까지 그러는 건 조금 의외였기에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그녀의 손끝이 검병에 맞닿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쩐지. 평소의 소심한 이하린이 아닌, 임전 태세의 이하린이었다.

저게 그녀 나름대로 멘탈을 보호하는 방법이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대련장으로 안 가고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천하씨가 이곳에 있으니까요.”

“당신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천하 인기 많네?”

“······시끄러워.”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찌보면 이하린과 남궁설아. 이제껏 나는 두 사람의 방향성에 대해 어느 정도 깊게 관여해왔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긍정하듯 이하린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가 치를 대련의 결과를 가장 정확하게 관찰해주실 수 있고, 또 분석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는 건 제가 아는 이중에선 천하씨밖에 없었어요.”

“······또한 실수로 위급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면 말려줄 사람도 당신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하린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만상의 눈까진 모르더라도 내 눈이 특별하단 건 그녀들도 알고 있을 테고, 그걸 떠나서 경지의 측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드러나니 어지간한 교수보다는 내가 더 정확히 말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남궁설아의 말과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이하린의 모습에 조금 골치가 아픈 느낌이었다. 단순히 대련장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검을 주고받기엔 서로의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던 모양.

그 순간 내 앞에서 마력이 휘몰아쳤다.

당연히 그걸 행한 건 아리엘이었고, 그녀는 평소보다도 더 은밀히, 그리고 조용하게 마력의 문자를 주조해 쏘아냈다.

[근데 이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얘네 표정이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그녀의 입장에선 이 상황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이는 모양. 아니, 위험한 건 맞았지만 그것보다는 그녀들이 저렇게 진지해진 까닭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이해할 수 없을 테지.

원작의 집필자로서 이하린이 가진 부채감과 책임감과, 그리고 오로지 타천자를 죽이기 위해 벼려진 남궁설아의 검. 그녀가 최근 한 달 동안 겪었던 일들. 그 모든 걸 알지 못한다면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힘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궁설아의 과거와 그녀가 겪을 미래를 알고 있는 이하린은 어떻게든 그녀의 방향성을 틀어주고 싶을 테고,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남궁설아의 입장에선 생판 모르던 이에게 평생의 노력을 부정당한 기분일 터.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을지라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테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기에, 그녀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따름.

그러자 아리엘이 눈을 깜빡거렸고, 이하린과 남궁설아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녀들의 시선을 응시하면서도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말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봐 드리겠습니다. 마음껏 해보세요.”

그렇게 두 사람의 대련은 시작되었다.

***

벼락처럼 쏘아지는 검극이 교차하며,

큉-! 청백의 섬광이 얽혀 들어간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리고 점차 빠르게 가속화되는 남궁설아의 신형은 이젠 그 움직임만으로도 수많은 돌풍을 일으킬 정도로 쾌속의 연격을 쏘아내는 중이었다.

노을빛 아래 흩날리는 쾌속의 섬광.

비록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하린의 실력을 알지 못했던 남궁설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배려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지만, 이내 한 호흡 동안 이루어진 네 차례의 공격이 모두 틀어막히자 본격적으로 특성을 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교차하는 강철의 대화.

그렇게 소리가 미처 울려 퍼지기도 전에 쌓여가는 검명의 중첩은 하나의 화음을 이루듯 그 목소리를 쌓아가고 있었다.

카가각-!!

실로 신속에 가까운 연격이었고, 어지간한 각성자라면 제대로 인지하기도 힘들 속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하린은 그 모든 공격을 자연스레 막아내었다. 아니 오히려 검세를 끊기 위해 휘둘러진 그녀의 검기는 한순가에 공격으로 전환되어 남궁설아를 향해 쏘아졌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검로에 남궁설아 또한 특성을 발현하며 공세를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속도의 차이는 극명했다.

2배, 아니 3배에 가까운 차이.

이하린이 한번 검을 휘둘러낼때,

남궁설아는 세 번의 검격을 내리쳤고.

이하린이 한 번의 공격을 쏘아낼 때,

남궁설아는 다시 두번의 검로를 그려냈다.

하지만- 남궁설아의 검은 이하린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이하린을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최속으로 뻗어진 그녀의 검은 소리마저 뒤에 둔 채 섬전처럼 그어졌지만 이하린의 특성 ‘검의 반려’는 이하린의 몸을 최적의 경로로 움직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 이하린의 이성과 본능, 경험과 직감은 서로 어우러지며 특성을 통해 한 가닥의 실타래로 매듭지어졌고, 이하린의 몸은 이 순간 무아에 가까운 상태로 백색의 마음을 흩날린 채 춤추고 있었을 뿐.

카가각-!! 서로의 검신이 겹쳐지며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각색의 검기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광경.

분명 대련에 임하는 이들의 마음은 날카롭게 극을 세우고 있었지만, 그 마음의 교차가 빚어내는 광경만큼은 노을빛과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자아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