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의 봄 (2)
가까워지는 타샨의 얼굴. 그 순간 만상의 눈 속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위장과 실제의 모습이 겹쳐졌다.
도대체 저건 무슨 능력인 걸까?
마법? 아니면 특성?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의 이능력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타샨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룬드녀석이 타천하기 전의 랭킹을 생각하면······ 너 지금도 어지간한 등천자보단 강하겠구나? 나는 상대도 안 되겠어.”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에이~ 타천자를 잡았을 정도면 말 다 한 건데 뭘. 생각보다 겸손하네.”
내 말이 생도로서의 겸양으로 들린 모양.
하긴 그녀로선 내가 자신의 본질을 파악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만상의 눈이 아니었다면 알아채기도 힘들었을 만큼 상당한 수준의 위장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타샨의 무력은 최소 하이랭커가 아닐까 싶었고, 안 그래도 하이랭커와의 간극에 대해 고민하던 와중이었는데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이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게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이 사람은 무인으로 치자면 절정의 극의를 넘어 초절정의 벽을 두드리는 자.
그녀의 정확한 정체도, 특성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이 세계 와서 만나본 이중에선 가장 강한 기세를 품고 있는 이였다. 옆에 있는 티르유도 분명 추후 하이랭커가 될 사람이었고, 지금도 상위권 랭커쯤의 역량은 갖추고 있었지만 분명 타샨과는 다소 차이가 엿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곤란하게 하지 말고 나와요 선배.”
“······자기 소속이라고 아끼기는. 참나.”
“시끄러워요.”
다만 타샨을 대하는 티르유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지금 보여주고 있는 성격은 아무래도 그녀의 원래 성격이 맞는 모양. 잠시 싸늘한 눈빛으로 타샨을 쳐다본 티르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그러면서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은 여기까지. 이제 곧 수여식이 시작될 시간이니까. 우리도 이제 그만 가볼게.”
“아 벌써 가시게요?”
“응. 수여식 전에 잠깐 들린 거야. 나도 준비는 해야 하니까. 그럼 이따 보자.”
“네! 잠시 후에 다시 봬요.”
“수여식 때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무래도 정말 인사만 나누러 왔던 모양.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그녀들은 뒤로 돌아섰다. 정확히는 아직도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타샨을 티르유가 잡아끌며 문밖을 향해 걸어갔는데, 그 순간 문고리를 잡던 티르유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왔다.
“아. 맞다.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네.”
“···?”
“하린이랑 천하. 너희한테는 등천의 구도자 차원에서도 포상이 주어질 예정이야. 내부적으로 확정된 건 아니지만, 사실상 거의 확정이라 봐도 될 거야.”
다소 아리송한 말. 그에 이하린도 조금 의아함을 느꼈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티르유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어······ 정기회의에서 나온 말인가요?”
“아니. 그렇다면 확정이라 말했겠지. 근데 이번 일도 그렇고, 침식역류 해결도 그렇고 상부에서 너희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거든. 그 정도면 회의는 의미 없는 셈이니까.”
“아! 혹시 상부라면······?”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이하린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 물음에 티르유는 그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펼쳐지는 손가락.
그 상태에서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크샤님이 너희한테 관심을 갖고있어.”
***
[······분명 노력의 가치는 평화로 되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불미스런 사건에도 당황하지 않고 각자의 의무와 기량을 선보인 귀 수훈자들의 앞날에 다시 한 번 축복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사회자에 입에서 마무리 멘트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몰려들었다.
강당에 몰아치는 소리가 우리를 향해 쏟아졌고, 우리는 그 모습을 단상 위에 우두커니 서서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그런 우리의 예복 위로는 각자 금색의 훈장이 하나씩 달려있었다. 그렇게 수여식이 끝남과 동시에 옆에 있던 이하린이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는 모양.
이하린은 영결식이 시작될 때만 해도 한없이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다시 훈장수여식이 시작될 때는 뻣뻣한 나무토막이 되었었는데, 그래도 이제 행사가 끝나서 그런지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행사내용은 별거 없었다.
영결식에선 다 같이 그날 카룬드에게 살해당한 게이트 담당 각성자를 추모하였고, 뒤이어 시행된 수여식에선 그냥 차례대로 단상 위로 올라와 치하를 받고, 훈장을 수여받은 뒤 대표로 아리엘이 몇 마디 소감을 이야기하고······ 그게 전부였다.
솔직히 말해서 시간이 아까울 수준.
그나마 직접 훈장을 달아주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티르유를 봐서 그걸 티 내지는 않았지만 행사내용에 비해 너무 소요되는 시간이 많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연맹에서 주관하는 거라 그런지 생도들은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참석 자체는 많이 참석한 모양.
아까부터 여기저기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오는 게 조금 거슬렸다.
안 그래도 저번에 이하린이 이야기하기를 황혼탑 토벌 건으로 기사가 많이 풀렸던지라 웹상에 조금만 검색해도 내 얼굴이 뜰 정도라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찍힌 사진까지 풀리게 되면 앞으로는 마인 사냥을 나설 때마다 복면이라도 뒤집어써야 하는 게 아닌가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게 전원인가.’
아무튼 이렇게 전 생도들이 모이는 경우도 드문 만큼 나는 수여식이 진행되는 동안 이 기회에 등천회랑의 생도들을 살펴보았다. 정확히는 1학년 생도들이 아닌, 타 학년의 유망주로 추정되는 아이들을 말이다.
하지만- 역시 눈에 띄는 이들은 없었다.
이하린이 주연인물들을 기적의 세대라 칭했던가? 확실히 원작의 주연들이 괜히 주연은 아니었는지 타 학년의 유망주들과 비교해보아도 조금 전력 차가 난다는 느낌. 당연히 1학년인 주연들의 전력이 더 높은 편이었다.
물론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아직 4월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1~2년의 차이를 생각하면 확실히 주역들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저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그나마 당장 전력으로서 가용할 수 있는 건 진시우 뿐이려나? 상황에 따라선 아리엘이나 이하린까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아. 물론 갑자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존재했다.
아까 들었던 이름- 아크샤.
‘승천자 아크샤.’
그건 1세대 승천자이자 등천의 구도자를 건립한 이의 이름이었고, 현재까지도 멀쩡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명실상부 이 세계관의 최강자에 가까운 이를 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기한 점은 그가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한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원작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등천회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에,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승천자들의 이야기는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긴 했지만 아크샤라는 인물은 작중 명성과 비교하면 그 정도가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오죽하면 연재가 중단되기 전까지 고작 3번만 모습을 비쳤을 정도.
그래서일까?
나는 그런 인물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 다소 신기하게 들려왔다. 마인들의 조직도 그러했고, 위타극의 배경이 그러했듯이 원작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조금 흥미로웠을 따름.
물론 그저 흥미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마도련과 위타극의 일로 조금 신경이 쏠려있는 판국에, 그녀- 타샨 피아르와의 조우도 그렇고 승천자의 이름까지 듣게 되니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었다.
이 세계가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였다면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겠지만, 위타극도, 승천자도, 다른 인물들도 모두 변수라 볼 수 있었다. 하물며 원작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 만큼. 그리고 원작에서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많은 요소가 존재하는 만큼 내가 올바르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평온함에 취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을 뿐.
물론 내 목표를 생각해보자면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이하린만 무사히 지켜낼 수 있다면야 원작이 어떻게 비틀리더라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안전하게 가려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을 뿐이지.
애초에 모든 사건을 내 손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잠시 원작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고민을 잠시 하고 있자니 어느새 단상 위가 몰려든 생도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오 이게 4급 훈장이냐? 캬··· 나도 갖고 싶다. 우리도 타천자나 잡으러 가볼까?”
“······마르네 이상한 소리하지 마.”
“오? 마인 토벌하러 가게? 훈장수여식 정도는 얼마든지 축하해줄 수 있어도 장례식은 가기 싫은데······ 조의금은 안 내도 되지?”
“······뭐 이 새끼야? 뒤지고싶냐?”
“아~ 뒤지는 건 타천자를 만난 너였구요.”
“둘 다 시끄러우니까 저리 좀 가라.”
물론 나는 지금 머릿속이 조금 복잡한 상태였기에 자연스레 그 현장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렇게 한적한 구석에서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그러자 이내 내 곁으로 타샨이 다가왔다.
당연히 장소도 장소였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그녀의 접근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지만 역시 이 정도 수준의 초인과 가까이 있는 건 신경에 썩 좋지 못한 느낌.
어쨌든 옆으로 다가온 타샨이 작은 목소리로 갑자기 내게 뭐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서 말해주는 건데 접경지에 갈 일이 있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만 그 내용이 조금 의외였다.
“······조심 말입니까?”
“응. 이번에는 타천자가 쳐들어온 거라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등천도시의 테러 건도 그렇고, 카룬드 건도 그렇고 적어도 마인들만큼은 근래의 일로 천하 네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게 됐을 테니까.”
“······.”
“나도 들은 얘긴데 마인들은 타천자들의 동향에 꽤 관심이 많은 편이라 하더라고~ 당연히 타천자를 죽인 사람들한테도 관심을 둔다 하고 말이야.”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이런 거였나.
다만 내게는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마인들이 나를 목표로 수작을 부린다면 나로서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녀석들이 이하린을 건드리는 것만 아니라면 오는 족족 내 손으로 죽여버리면 그만일 뿐.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근래 계속 마인 사냥을 하는 중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뭐··· 생도가 마인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네 실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다만 마인들중에서도 괴물 같은 녀석들은 존재하니까 말이야. 괜히 연맹특수군 같은 게 있는 게 아니거든.”
“마인 전담부대 말입니까?”
“응.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마인들끼리도 뒷세계에서 조직활동을 꽤 많이 하는 편이거든? 카룬드처럼 혼자서 뛰는 애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집단이 위험하단 말이지.”
“조직이라 하니 조금 궁금해지는군요. 혹시 알고 계신 내용이 있으십니까?”
안 그래도 마도련과 적원회에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 싶었는데 좋은 주제였다.
“으음··· 나도 잘 몰라! 근데 침식마인들하고 결탁해서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애들은 세계침식 때부터 꾸준히 있었거든.”
“······.”
“유명한 애들만 떠올려보자면 검은여명이나 그림자 교단이나··· 아니면 적원회라든가? 요새야 승천자나 전담부대가 무서워서 다들 사리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꽤 활발했던 모양이야.”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명칭들을 머릿속에 똑똑히 집어넣었다. 그중에서도 그림자 교단은 원작에서도 나왔던 녀석들이었기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가는 느낌.
나는 그녀에게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았다.
“말씀하신 조직들은 지금도 활동하는 중인 겁니까? 그중 적원회는 이름만 봐서는 아시아에서 활동할 것 같은 느낌이군요.”
“아 적원회.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녀석들은 맞을 거야.”
“흥미롭군요.”
“······흥미? 너도 좀 특이하구나? 어쨌든 평범한 공략자가 되고 싶다면 마인들을 상대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그게 아니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야.”
평범함인가. 애초에 그건 나랑은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단순히 환생이나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할 행동에 있어서도 말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타샨이 마치 깜빡하고 있던걸 떠올렸다는 듯 어색한 태도를 취해보이며 그대로 내게 질문을 건넸다.
“아! 그나저나 혹시 너 시우랑 친해?”
“······진시우를 말하는 겁니까?”
“응. 나는 협회 소속이라 친한 편이거든.”
정말이지 뜬금없는 말.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이제서야 그녀의 소속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딱히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 으래? 서로 대화는 해봤니 혹시?”
“대화라기에는 지나가다 몇 마디 정도라 별로 유익한 대화는 나눠본 적 없긴 합니다.”
“······아 그래. 알았어.”
분명 ‘원작’의 주인공답게 진시우는 비밀이 많은 녀석이었고, 그가 소속된 곳만 해도 상당히 여러 군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런 인물과 얽힐만한 곳은 단 한 곳뿐.
진시우랑 친한 사람이 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왜 그곳에 속한 인물이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 마인 사냥의 흔적이라도 드러났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단순히 타천자를 토벌했다고 관심을 두는 걸까 잠시 고민을 하고 있자니 타샨이 이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아. 나도 그만 가봐야겠네. 지나가는 김에 뭐 좀 확인하려고 들렀던 거라서 말이야···”
“···아. 예.”
“앞으로도 그럼 수고하고. 나중에 한번 현장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랄게.”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정말이지 갑작스레 뒤돌아 바깥을 향해 걸어나갔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곳에 찾아왔던 건지 의아할 정도로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방금 그녀가 한 말.
현장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이 다소 미묘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
중국 청두시에 위치한 침식영역 접경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침식영역과 빈민구역이 방대하게 걸쳐져 있는 혼돈의 땅에는 수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얼굴을 감추고 살아가는, 그리고 수많은 장소가 숨겨져 있는 그 땅에선 때때로 마수들의 포효소리와 함께 총탄이 빗발쳤고, 어설픈 각성자들이 자아내는 이능으로 인해 도시는 언제나 시끄러운 화음과 함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그건 지금 이곳- 적원회라 불리는 이들의 안가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렇게 싸구려 불빛 아래에서도 남자의 목소리는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다시 말해봐.”
“······그, 그게 아니라.”
“다 죽어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하하! 그래. 다 죽어있었다. 지금······ 그걸 보고라고 들고왔냐 이 새끼야!!”
콰앙-!! 남자가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밀실 속에서 분노를 토해내는 남자의 눈빛 속에선 기이한 혈광이 번뜩거렸고,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자들은 몽글거리는 안갯속에서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었을 뿐이었다.
“회주. 진정하시게.”
“이미 뒤진 걸 추궁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차피 대체할 녀석들은 차고 넘치니 그만하지. 이 장사가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뭐? 하. 이 태평한 양반들 같으니.”
회주로 불린 남자- 몇 년 전 적원회의 당대 회주로 올라선 마율령은 원로들을 향해 헛바람을 토해냈다.
“차고 넘친다는 건 20세기의 일인가? 지금은 21세기야 이 노인네들아. 이면기관 새끼들이 지랄할 때마다 손발이 잘려나가는 시대라고··· 어? 내가 연맹의 미친개들하고 싸우자고는 안 하겠는데. 뭔 애새끼들 뒤질 때마다 다 수긍하고 넘어갈 거면 왜 여기 죽치고 앉아있는 거지?”
“······으음.”
“애초에 당장 거래가 다가오는데 물건은 또 어디서 공수해올까? 이 바닥에서 신용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러신가···? 거래 한번 틀어지면 꽝이라고··· 꽝!! 이 답답한 노인네들 같으니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대며 을러대는 마율령의 말에 주변에 앉아있던 이들이 일제히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나, 비록 말투는 불손했을지언정 그 내용만큼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담담히 마율령을 쳐다보았을 따름이었다.
“이보게. 그래서 어쩌란 건가? 뒤진 놈들을 살려서 데려올 것도 아니고, 왜 뒤졌는지 찾아다 복수해줄 것도 아니고, 대체할 물건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아니. 애초에 놈들이 뒤진 이유가 괜히 깝죽거리다 꼬리를 밟힌거라면, 오히려 우리가 조심해야 할 판국이지. 하이랭커라도 뜨면 다 죽은 목숨이니 말이야.”
“······그건 좀 비약적이군. 우리가 뭘 했다고 조심을 하나? 얌전히 접경지에서 사업이나 벌이고 있을 뿐이구만.”
“허허! 거 그렇게 당당하면 저기 연맹에 가서 자수나 하시게나. 참 간단하겠군.”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나 싶더니 다시 또 헛소리로 이어지는 노친네들의 대화에 마율령은 이가 갈리는 기분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리 지금이 초인의 시대라지만 1세기 동안 이어져 온 조직이 고작 연맹의 눈초리나 보며 뒷세계에서 깨작거리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던 탓이었다.
하이랭커가 뜨면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아니, 뭐 공략자는 총알도 안 박히나?
연맹의 특수군한테는 폭탄이 안 먹히나?
그럼 뭐 이면순례자는 뒤지지도 않나?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인이든, 마법사든, 각성자든 다 배때기에 구멍 좀 뚫리고, 목에 칼침이 박히면 뒤지는 건 모두 똑같았다. 근데 자신들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리스크를 겁낼 거였으면 얌전히 연맹에 자수해서 특례법에 따라 공략이나 하러 다닐 것이지 왜 여기서 이 지랄을 하고 있겠는가.
마율령은 그게 항상 불만스러웠다.
어린애의 마력폭주 하나로 도시가 날아가는 세상이라지만, 사람을 잡아다 내다 파는 녀석들끼리 규율이랍시고 케케묵은 규칙에 얽매여 연맹의 눈치나 보는 것도 웃기는 모습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마율령의 속내에는 점점 답답함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가 고아로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부터 쌓여온 답답함은 차라리 도시라도 테러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헤집고 있었다.
물론 바로 몇 주 전에 그러다 뒤진 녀석이 있다는 걸 알기에 꾹꾹 눌러 담았을 뿐.
그렇게 짜증과 분노, 거래에 대한 생각 속에 마율령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순간.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 연락이 왔습니다!!”
다급함 외침 속에 자신들을 향해 경악성을 토해내는 부하의 모습에 마율령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되물었다.
“누구한테 시발아.”
“그, 그게······!”
감히 회의 중인데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별거 아닌 이야기라면 손가락을 뜯어내 주마- 마율령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부하의 입에서 이어진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방 안에 있던 이들의 표정은 모두 한순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위타극!”
부하의 입에서 내뱉어진 세 글자의 단어.
그 말이 의미하는 건 간단했으니까.
“타천자 위타극이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