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의 봄 (1)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금요일이 다가왔는데, 확실히 봄은 봄이어서 그런지 날씨가 점점 따스하게 풀려가는 게 확연히 체감될 정도.
그래서인지 이하린은 오늘따라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4월에 들어오고 나서부턴 항상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천하씨 옷 흐트러지셨어요···!”
그 말과 함께 평소와는 다른 복장- 생도들에게 지급되는 예식복을 입은 이하린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내 내 옷깃을 정리해주기 시작했는데 원래라면 부끄러워했을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걸 보니 확실히 평소보다 조금 들떠있다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뭘.”
미세하지만 흥얼거리는 콧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봐선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
그렇게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리저리 잡아당기고 집어넣고 하면서 내 복장을 정돈해주기 시작했고, 키 차이 때문인지 이 순간의 내 시야는 그녀의 정수리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자세로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저번처럼 익숙한 색채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걸 빼내었다.
그녀의 머리 사이에 끼어있던 것.
그건 역시나 벚꽃잎이었다.
“오늘도 기원관을 지나쳐 오셨나 보군요.”
“···!”
그 희고 붉은 꽃잎을 그녀의 눈앞에 가져다주었더니, 동시에 새하얗던 그녀의 얼굴도 조금씩 벚꽃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 그······ 네. 그. 요즘 기원관 쪽 거리가 되게 예쁘더라고요······”
이하린은 그런 대답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내게서 멀어졌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표정을 보아하니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 모양. 우리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는걸 이제서야 깨달은 모습이었고, 방금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더니 갑자기 그러는 모습이 내게는 조금 재밌게 다가왔을 따름이었다.
어쨌든, 한순간에 평소처럼 소심한 상태가 된 그녀는 잠시 입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분위기가 민망하게 느껴졌는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그것보다 이제 슬슬 다른 아이들도 오나 봐요···! 사, 사람이 많이 보이네요!”
본인 딴에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고 한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고개 돌린 그녀의 옆모습으로는 붉어진 귓가만 드러나고 있었을 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조금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딸칵- 거리며 한 사람이 대기실 내부로 들어왔다.
“갔다 왔··· 너희 모해?”
참고로 우리가 있는 곳은 수여식 대상자들이 대기하는 곳이었는데, 아리엘은 기원학회에서 온 사람을 만나고 오겠다며 잠시 나갔다가 이제 다시 돌아온 상태.
“···아, 아리엘씨! 잘 만나고 오셨어요?”
“······?”
그렇게 뒤늦게 대기실로 입장한 그녀는 이하린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나를 한번 쳐다보았고, 그리고는 다시 붉어진 이하린의 귓가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리엘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혹시 조금 더 나갔다 와야 해?”
“······네?”
“아니~ 그냥 내가 방해한 건가 싶어서.”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들어와.”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은 허공에 마력을 투사하였는데 그러자 역시나 내 앞으로는 비가시의 마력문자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나 없을 때 둘이서 뭐한 거야? {*≧∀≦}]
물론 그건 대꾸할 가치가 없는 소리였기에 나는 가볍게 그걸 무시했지만, 그 순간 이하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지금도 그거 하신 거에요?”
“······응? 그거?”
“마력으로 문자 쓰는 거요.”
“어?”
그녀의 말에 아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 또한 조금 신기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마력의 형상을 느끼신 겁니까?”
“······어 자세히는 아닌데 이제 어렴풋하게는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 못 챘었는데···? 혹시 내가 실수한 건가?”
“아니. 평소랑 똑같았어. 마법이 발현된 것도 아니고 마력이 새어 나온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하린씨의 기감이 좋아진 거야.”
“······!”
우리의 반응에 이하린의 귓가가 다시 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칭찬에는 취약했던 그녀는 다소 민망한 듯 우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와···! 여태까지 이거 알아챈 사람은 몇 명 없었는데··· 하린이 대단하구나?”
우웅-!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의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치며 이런저런 형상의 문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해 대단해 (≧∇≦*)]
[우리 애가 벌써 이렇게 크다니 (T▽T)]
“······?”
물론 그 내용까지는 단순히 기감이 좋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이하린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아예 마력문자의 발현을 느끼지도 못했던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던가?
그간 의념을 수련해온 결과, 기감이 상당히 개방된 모양인데 아리엘의 말대로 이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당장 생도들 앞에다 아리엘의 마력문자를 들이민다 한들 구체화되지 않은 마력의 발현을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힐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업륜의 마력을 허공으로 흩뿌려 보았다.
아리엘의 마력운용을 참고해 대기 중에서 미세하게 조율하며, 그녀가 하는 것처럼 무형의 형상을 만들어보았다. 물론 최대한 간단한 형상으로.
“지금 이게 어떤 형상인지 느껴지십니까?”
내 말에 이하린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도, 동그라미?”
“그럼 지금은요?”
“네모······?”
“그럼 이건?”
그 순간 우리 사이로 끼어든 아리엘은 한순간에 마력을 조율해내더니 이하린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다만 그녀의 마력은 이번에는 문자의 형상이 아닌 은폐에 초점을 맞춘 채 흩어지는 중이었다.
“······어? 형상이 있는 건가요?”
“아니! 그냥 숨긴 거야. 위치를 말해줘.”
“아··· 오른손이요!”
“지금은?”
“왼쪽 어깨 위?”
“그럼 지금은?”
“그······ 심장!”
아리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지만, 이하린은 조금 느리게나마 그걸 모두 간파해냈다. 입학식 때의 이하린이 아리엘의 마력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한 달이란 시간 만에 순식간에 성장했다는 느낌.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아리엘도 감탄이 서린 눈빛과 함께 해맑게 웃어 보이며 이하린을 바라보았다.
“한 달 동안 진짜 노력 많이 했구나?”
“······이, 이제야 겨우 느끼는 건데요 뭘.”
“아니요. 충분히 대단하신 겁니다. 아리엘의 마력운용은 어지간한 기감으로는 눈치채기 힘든 수준이니까요. 그리고 원래는 느끼지도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그간 열심히 수련하신 모양입니다.”
“······아. 그··· 가, 감사합니다!”
“대단해 대단해!”
“······.”
갑작스러운 칭찬공세에 이하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는 벚꽃잎 수준으로 물들어가던 색채가 이제는 점점 완연한 붉은색이 되어간다 봐야 할 수준이었다.
물론 그 반응에 아리엘은 더 신이나서 그녀의 성취를 축하해주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점점 빨갛게 익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내 이곳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게 기감을 통해 느껴졌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우리한테 볼일이 있던 걸까?
갑자기 문 쪽에서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수여식이 시작할 시간이 아니었기에 우리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고, 그 순간 대기실 문이 열리며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러자 시야로 들어오는 건 익숙한 얼굴.
선홍빛이 감도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을 그 얼굴에 띄운 채 들어오는 익숙한 여인- 티르유 아르파냐.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걸어들어오는 흑색 단발의 여인.
그렇게 그녀들이 방안에 들어옴과 동시에 나는 처음 보는 이- 흑색 단발의 여인과 자연스레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오온에 접어들었다.
***
시간이 급속도로 느려지기 시작한다.
온몸의 감각이 한순간에 곤두서며, 내 눈은 본능적으로 만상의 눈으로 화했다. 그와 동시에 내력이 활성화되며 오온에 접어들었고, 그렇게 느려진 세계 속에서 나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짙은 흑색의 단발, 청록색으로 빛나는 눈.
그리고 활발하게 퍼져나오는 마력.
하지만 그건 그녀의 본질이 아니었다.
만상은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흑색이 아니었고, 눈동자의 색 또한 청록색이 아니었다. 짙은 회색빛. 안개처럼 가라앉은 잿빛 색채의 머리카락이 겉면의 청록색과 겹쳐지며 흔들거렸고, 그녀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마력은 무척이나 날카로운 파장을 띄고 있었다.
은밀히, 그리고 흉악하게.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미약한 살기.
의도적으로 내뿜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내 감각이 본능적으로 임전 태세에 접어들게 만들 정도로 흉포하면서도 강렬한 기세가 그녀의 본능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순간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며 의념을 가다듬었고, 영혼의 날을 세워 아무도 모르게 전투 준비를 끝 맞췄다.
그러자 그 순간.
“다들 여기 있었네.”
다시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둘 다 오랜만이야.”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티르유는 우리를 향해 차가운, 그러면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입가 위로 떠오른 옅은 미소가 그녀의 감정을 나타내는 듯싶었다.
“티르유씨! 안녕하세요···!”
“응. 안녕 하린. 그리고 유천하 너도.”
“······예.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태연하게 티르유와 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내 온몸의 신경은 그녀의 뒤에 있는 잿빛의 여인을 향해있었다.
그녀는 명백한 강자.
최소한 이 세계에 와서 마주쳤던 사람들에 비해선 확연히 구분될 정도의 강자였다. 하지만 내 감각을 자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살해하기 위해 가다듬어진 기량. 순간적으로 마인이 떠올랐을 정도로 그녀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기세는 무척이나 익숙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지?
저런 사람이라면 원작에도 나왔을 텐데?
이 정도면 아마도 최소 하이랭커급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그럼 그중에서도 이렇게 흉악한 낌새가 느껴질 만한 이가 있었던가- 나는 빠르게 원작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티르유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보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아······ 그냥 아는 선배야.”
“무슨 소리에요? 선배는 무슨. 랭킹은 티르유씨가 더 높잖아요. 저는 그냥 평범한 공략자일 뿐인데요 뭘.”
“······.”
순간 티르유의 미간이 조금 꿈틀거렸다.
“안녕 얘들아? 나는 그냥 티르유씨 따라서 온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사실 원래는 올 계획도 없었는데 근처에 온 김에 들른 거거든.”
“···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내 이름? 타샨. 타샨 피아르. 그런데 아직 최하위 랭킹에서 머물고 있어서 검색해도 나오는 건 없을 거야.”
스스로를 타샨이라 소개한 여인은 그리 말하며 민망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저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저런 실력으로 잘도 거짓말을 하는군.
당연히 이름 또한 가명일 게 분명했다.
그럼 도대체 누구인 걸까?
티르유와 아는 사이로 보이고, 이곳까지 같이 온 이상 분명 제대로 된 초인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기억 속에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하린은 아니었던 모양.
“······안녕하세요! 앞으로 타샨··· 씨라 부르면 될까요?”
“그래그래. 안녕안녕. 네가 하린이구나? 타천자 레이드 멤버였지? 벌써부터 대단하네! 그 나잇대의 나였으면 상대도 못했을 텐데.”
“아, 아니에요···! 그래 봤자 아직 생도인데요 뭘. 저는 별로 한 것도 없어요.”
조금은 낯을 가리는 듯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하린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되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조금은 흥미로운, 그러면서도 경계심이 섞인 감정이 담겨 있었고 말이다.
역시 아무래도 원작의 인물은 맞는 모양.
하지만 주연인물까진 아닌 걸까?
이하린의 반응을 보아선 왠지 그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딱히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어느 정도 방향성을 추려볼 수 있었다.
원작에 나오면서도 주연 인물은 아니었고, 저 정도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도 생도를 상대로 정체를 감출만한 사람. 그 정도 단서만으로도 나는 타샨이 적어도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마도 연맹 특수군의 검사관,
혹은 이면순례자의 집행자.
그것도 아니라면 기관의 특작 부대.
나는 일단 그렇게 상정하였다.
솔직히 이렇게만 해도 경우의 수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안타까운 점은 내가 그런 조연들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기는 힘들었다는 것.
그렇기에 잠시 기억을 되새기며 상대의 정체를 추측해보고 있자니, 그러는 사이 그녀들은 자연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시나 대화의 주제는 이번 훈장수여식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보다 둘 다 축하해. 이왕 오게 됐으니 먼저 말해주고 싶어서 찾아왔어. 아, 아리엘이라고 했지? 미안. 신경을 못 썼네. 세 명 다 진심으로 축하해.”
“아니에요. 같은 등천의 구도자 소속이니 당연한 일이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티르유가 건넨 말에 아리엘이 화사한 미소로 대답했다. 역시나 다른 사람들 앞이라고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 모양.
그런 아리엘의 모습에 티르유는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이내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그렇고 너희도 이번에 나오는 훈장은 연맹 측에서 주는 거라는 거 들어서 알고 있지? 조만간 업적랭킹에도 반영이 될 거야. 무려 타천자를 토벌한 거니까.”
“이거 진짜 대단한 거다? 4급 훈장이라 해도 원래대로면 받기 진짜 힘든 거야. 생도가 타천자를 토벌했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만 아니었으면 너희가 최소 등천자는 돼야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타샨··· 선배의 말이 맞아. 너희가 이번에 한 일은 정말 대단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별로 와 닿진 않았다.
그녀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만큼 좋은 거긴 하겠지만, 카룬드를 처치하는데 딱히 애먹었다는 느낌은 없었기에 체감이 미미했던 탓이었다. 애초에 그런 말을 한 티르유나 타샨이나 모두 카룬드 정도는 가볍게 토벌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건 당연히 내 견해일 뿐이었고, 이하린과 아리엘은 훈장에 대해 다소 미묘한 반응을 내비쳤을 따름이었다.
“으음······ 사실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서 이걸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에요. 무려 4급 훈장이잖아요. 4급.”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솔직히 내가 왜 훈장을 받는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이하린과 아리엘이 차례대로 그렇게 기죽은 소리를 내뱉었고, 그 말에 담긴 내용에 자연스레 대기실내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 보고받으셨겠지만 저희는 정말 버틴 게 고작이었거든요. 실질적으로 토벌한 건 천하씨 혼자서 하신 거라··· 솔직히 같이 상을 받는 게 조금 민망할 정도예요.”
“하린이 너는 그 정도면 충분히 받을 만 하지. 나는 기절이나 하고 있었는데 뭘······”
“아, 아니에요···! 처음에 아리엘씨와 같이 싸우지 않았다면 그전에 당했을 거에요.”
“그래도 나는 정말 자격이 없는걸?”
방금 전까지는 잘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갑자기 서로 앓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녀들로선 훈장 수여의 지급 기준이 미묘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생도가 타천자를 상대로 분투를 벌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들은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화 내용이 흥미로웠는지 티르유와 타샨은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향해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을 뿐이었다.
“보고를 받긴 했지만 확실히 당사자들이 느끼기에도 공과가 확연했나 보네.”
“세 명 중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당사자는?”
“아리엘과 하린씨도 충분히 제 몫을 했다 생각합니다. 생도의 실력으로 등천자급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제 몫이란 말이 미묘하네. 타천자를 토벌한 것만 놓고 기여도를 생각해 본다면?”
“······.”
솔직히 말하자면 제로에 가깝긴 했다.
그나마 이하린이 보여준 마지막 수가 카룬드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그때의 상황을 고려하면 의미 없는 수준. 하물며 기절해있던 아리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앞에서 어찌 말하겠는가?
그리고 방금도 말했듯이 그 정도면 그녀들은 충분히 제 몫을 한 셈이었다. 적어도 내가 도착할 때까지 죽지 않고 버텼으니 말이다. 내가 그녀들에게 기대했던 건 딱 그 정도였고, 결과적으론 충분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이내 타샨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빛 속엔 흥미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