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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 빙의를 숨김-57화 (57/205)

무림의 검 (1)

어느 이른 겨울의 아침.

새벽 동안 내리던 눈이 서서히 그쳐가며 안개의 층이 촘촘히 쌓여갈 때쯤. 희미하게 떠오른 온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흩날리던 눈송이가 검극에 내려앉았고, 마음속의 번잡함이 물감처럼 번져감과 동시에- 허공을 향해 겨누어진 검.

그 칼끝이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흐트러지는구나.”

“······.”

옆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칼끝이 흔들린다는 건 마음이 요동치고 있다는 증거. 나는 검병을 바로 잡았다. 다시 의념을 세워 검극을 멈춰 세운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의념을 가라앉히거라.”

“······예.”

다시 한 번 들려온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내 의식은 천천히 바닥으로 침잠되었다. 차가운 공기를 폐부로 밀어 넣으며 정신을 무심 속에 가라앉혔다.

마음을 갈아, 영혼에 날을 세운다.

무념에서 일념으로, 일념에서 의념으로.

그렇게 한가지 일념을 자아내기 위해.

이 순간 내 의식은 날카롭게 벼려졌다.

퀴잉-!

그러자 그저 검을 들고 서 있을 뿐이었지만 검명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시야 속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신검합일이라고 했던가?

이 경지에 도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버지는 내 성취가 나이에 비해 매우 빠른 편이라 하셨지만 솔직히 나로서야 뭐라 말하기 애매한 부분. 아버지가 그렇다니 그냥 그러려니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렇고, 이후에 배울 것도 그렇고, 앞으로 내가 익혀나가야 할 길은 모두 의념으로 나아가야 하는 경지였다. 그런 만큼 마음이 흐트러지면 방금 그러했듯이 바로 검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평소에도 무심을 갈고 닦아야 하는 이유라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일념을 유지하고 있자니 이내 아버지가 작은, 그러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왔다.

“사람을 죽인 게 그리도 불편했더냐?”

“······.”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 말의 맥락을 이해했다.

그렇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을 해하는 게 싫은가 보구나.”

물론 소용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이미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씀하시니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순수히 마음속 번민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버지가 소박하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하하! 죄송할게 뭐라고. 애초에 사람을 죽이고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지.”

“······.”

층층이 쌓여가는 눈밭을 즈려 밟으며 아버지는 내 앞으로 다가오셨다. 검을 들고 있는 나를 마주 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나와 시선을 마주하셨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건 실로 당연한 이야기로구나. 오히려 그 당연한 게 잘못이 되는 세상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세계 아니겠느냐?”

“······.”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의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올려다보았다.

“생명의 가치가 소중하단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느냐. 허나 생명의 덧없음을 모르는 이 또한 어디 있겠느냐.”

“······.”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생명은 하늘의 별처럼 찬란했고, 흩어지는 바람처럼 덧없었다. 어떻게 보면 바닥에 쌓여가는 눈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몰랐다. 아름답고, 현란하며, 그 몸집을 쌓아감으로써 더 깊은 색채를 자아내니 눈과 같았고, 덧없이 녹아내리니 또 눈과 같았으니까.

전생의 죽음과 환생은 내게 그걸 깨닫게 해주었고, 그로 인해 난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는게 매우 꺼려졌을 따름이었다.

그게 내 손으로 자아내는 것이든, 타인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때 습격한 이들을 왜 죽여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 말했다고 들었다. 맞느냐?”

“······예. 그랬습니다.”

그 말과 함께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첫 암행에서 있었던 습격.

갑작스러웠던 격전.

그리고.

죽어 나가던 사람들.

“살인에 이유가 필요하더냐.”

“······예.”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그리 말했었다. 하지만 생명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생각했기에 그 날의 내 검은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건 결국 다른 누군가를 죽일 뻔 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럼 불살에는 이유가 필요하더냐.”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내 안일함이 어떤 결과를 낳을뻔했는지, 그 알량함의 대가가 무엇인지 지난날의 습격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살을 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겐 신념을 고집할 자격이 없었다. 지닌 바의 뜻을 무武로 관철하기에 무림이었고, 그런 만큼 난 아직 의毅를 내세울 자격도 없는 반푼이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채셨는지 이내 아버지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터트리셨다.

“살인에 이유가 필요하다면, 불살에도 이유가 필요하겠지. 그렇다면 불살에 이유를 붙여야 한다는 것부터가 이 세상이 덧없음을 의미하는 셈이로구나.”

그 말과 함께 스르릉- 연무장 한구석에 놓여있던 검이 그대로 뽑혀 나와 아버지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아.”

그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었기에 나는 이 순간의 문답도 잊어버린 채 감탄하고야 말았다.

허나 아버지는 그런 내 얼굴을 인자하게 내려다보더니 그 검을 허공을 향해 곧추 세웠고, 이내 검극을 나를 향해 겨누었다.

“자. 검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더냐.”

“찌르고 베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더냐.”

“······살殺을 의미합니다.”

“그래. 검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하지만 아무것도 해하지 않고 싶다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다.”

아버지의 손이 흩날리는 눈처럼 수려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 손에 들린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허공에 나부끼던 눈을 낚아챘고, 그렇게 흐드러지는 꽃잎처럼 허공을 수 놓은 궤적은 그대로 눈꽃을 검극에 올려놓았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칼끝에 놓인 그 작은 눈송이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검의 극의.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이지 않는 것도 그건 검을 든 자의 선택이지, 검의 선택은 아니니 말이다.”

“······.”

그 말에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하지만.”

퀴이잉-!! 그 순간 실낱처럼 얇은, 그러면서도 칼날보다 예리한 기세가 눈밭을 가로질렀고, 날카로운 살의가 허공을 베고 지나갔다.

정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검신 위에 맺혀져 있던 눈꽃들이 파삭-! 베어져 나가며 허공으로 스며들었고, 주변에 쌓여가던 눈들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증발해버렸다.

“···!”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아버지는 의념만으로 눈을 베어낸 것이었고, 오로지 한순간에 뿜어낸 살기만으로 주변에 흩날리던 눈송이들을 모조리 베어낸 것이었다. 이건 내 눈으로도 온전히 인식하기 힘든 수준의 완벽한 신검합일이었고, 그야말로 완벽한 의념의 제어였다.

하지만 그런 신기를 보여주셨음에도 아버지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검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걸 들고 있는 이상 살업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하물며 우리는 무인이다. 무인과 생사의 간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 어찌 무인이 생로만을 추구할 수 있겠느냐?”

“······.”

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천하야.”

“예.”

하지만 아버지는 내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고, 그렇기에 나는 그저 시선을 내리깐채 가만히 대답을 읊조릴수밖에 없었다.

“망설이지 말거라.”

“예.”

“주저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우린 장애물에 지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우린 그저 마인일 뿐이고, 누군가에게 넌 그저 죽여야 할 적일 뿐이다. 우리의 가치와 뜻은 우리의 사정일 뿐이니 어찌 그걸 다른 이들에게 내세울 수 있겠느냐.”

“······.”

“생명의 가치가 소중하단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느냐? 허나 생명의 덧없음을 모르는 이 또한 어딨겠느냐.”

그 순간 아버지로부터 살벌한 기세가 피어올랐고,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자아낸 의념의 칼날은 소름 끼치는 살의로 벼려져 하늘을 겨누고 있었다.

“베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베어버리거라. 사람도, 고뇌도, 미혹도.”

그 말과 함께 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검을 휘두르셨고······ 그렇게 나는 겨울이 베어져 나가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건 마음의 표상일 뿐이니.”

한순간에 갈라진 하늘.

눈을 쏟아내던 구름들이 모두 흩어져 버림과 동시에 텅 비어 버린 공백 사이로 뒤늦게 고개를 내미는 태양.

하지만 갈라진 겨울의 틈새로 스며드는 태양이 따스했던 만큼 나는 겨울의 추위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나는 멍하니 그 빛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심검에 감탄을 토하면서도, 검의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탁류마저 뚫고 들어오는 그 빛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푸른 궤적 사이로 내비친 그 빛은 분명 찬란하고 또 따스했을 뿐이었다.

***

침식영역의 안쪽에 방치된 오래된 폐허.

그곳에서 허물어져 가는 삭막한 건물 속.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그림자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그와 함께 흩날리는 퀴퀴한 먼지는 암전된 세계 속에서도 선명하게 존재감을 흩뿌렸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튀어 오르는 붉은 불씨.

캉-!! 그 미미한 불씨 사이로 실내의 풍경이 잠시 드러났고, 이내 정적을 살해하는 소음이 선명한 파열음과 함께 새어 나왔다.

서걱-!

그렇게 침묵이 도사리는 어둠 속을 거닐며, 유천하는 익숙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혈전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이 보여준 행동이 유천하에게는 꽤 정겨운 모습이었던 탓.

“···죽!”

퀴이잉-!!

건물에 진입한 자신을 인지하자마자 마인들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처음엔 빛을 제거해 시야를 가렸고, 다음엔 소리를 죽여 청각을 덮었고, 마침내 살의를 죽여 존재를 없앴다.

쉭-! 캉!!

“······.”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는데 참으로 익숙해 보이는 행동이지 않은가? 유천하는 그리 생각했다.

“살의가 새어 나오는구나.”

“이 자···!”

서걱-! 그렇게 어둠 속에서 공격이 시도될 때마다 새어 나오는 살의는 사람을 향해 가다듬어진 것이었고, 그건 살인을 해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찐득한 악의였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느끼는 정겨운 공기에 유천하는 심장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들이마신 호흡이 차갑게 폐를 두드렸다.

“···!”

픽-! 일순간 가볍게 휘둘러진 유천하의 검극이 누군가의 목젖을 베고 지나갔고, 털썩-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이의 기척에 섞여 다수의 인영이 마기를 풍기며 달려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유천하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풀어지는 다섯 갈래의 매듭.

쿠구구구-!!

패도적인 내력이 혈도를 내달리며 유천하의 온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감속된 시계속에서 유천하는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좌로 하나, 우로 둘, 후방에서 셋.

유천하는 움직임을 감지했다.

만상으로 화한 눈이 간극을 간파한다.

마인들의 사이에 놓인 틈새의 실이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섬혼마검 殲魂魔劍’

그 순간 번쩍이는 묵빛의 휘광.

적막을 살해하는 소리가 어둠을 스치고 지나가자 이내 사지가 잘려나간 인영들이 바닥에 몸을 눕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연이어서 쏘아지는 묵직한 소리를 흘려들으며 유천하는 검을 휘둘렀다.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비수. 캉-!! 그것을 빗겨쳐 우측의 마인에게 꽂아버린 뒤 다시 검을 올려친다. 그의 심장을 찔러오던 마인이 조각남과 동시에 그 뒤편에서 다시 철퇴를 내던지는 마인이 엿보였다.

푹-! 하지만 그 병기가 목적을 다하기 전에 섬광처럼 뻗어 나간 검극은 이미 마인의 삶을 꿰뚫은 뒤.

유천하의 검은 자연스레 궤적을 그어냈다.

침참하게, 그리고 냉철하게.

영혼에 벼려진 날을 세워 검에 덧씌운다.

그의 검은 오로지 베기 위해서 벼려지고, 벼려졌으니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 쓰임새가 제 목적을 다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이 목적을 다 하는 만큼 그걸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마인들로썬 그저 속이 타들어 갔을 따름.

“···죽어라!!”

마침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외침은 그대로 퀴잉-! 울려 퍼지는 검명과 함께 어둠 속으로 파묻혀져 버렸고, 콰아앙-!! 그 순간 바닥을 뚫고 핏빛으로 물든 손이 유천하를 향해 튀어나왔다.

하지만 유천하는 가볍게 자리에서 뛰어올라 그대로 땅을 향해 검극을 휘저었다.

서걱-!

한순간에 잘려나가는 바닥. 그리고 추락하는 건물의 잔해와 마인의 시체조각.

아래층에서부터 난입하려던 마인은 그대로 토막 난 채 떨어져 나갔지만 유천하의 신형은 마치 중력에서 벗어난 듯 허공을 사뿐히 즈려밟고 그대로 흐드러지듯 검을 흩날렸다.

그러자 그 순간 빛처럼 쏘아진 검신이 파도와도 같이 일렁거렸다.

후우웅-

유천하가 추락할 걸 예상해 달려들었던 마인의 목이 그대로 베어져 나갔고, 그와 동시에 마인은 바람이 자신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쿵-! 물론 그걸 느낀 순간 마인의 얼굴은 이미 바닥에 입을 맞춘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생명을 꺼트린 유천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기를 즈려밟고는 구석에 숨어있던 마인을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하나 더 추가된 시체.

서걱-!!

“······.”

마인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 괴물은 어떻게 이 어둠 속에서 저렇게 움직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이 난전 속에서 모든 걸 들여다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대체 저런 괴물이 왜 이곳에 온 걸까.

“도대체 왜!!!”

참지 못한 한 마인이 울분을 토해내며 핏빛으로 물든 팔을 뻗어냈고, 그 타점을 향해 유천하는 검극을 내밀었다.

퀴이잉-!!

‘일섬 一閃’

벼락처럼 뻗어 나간 찌르기가 마인의 주먹을 꿰뚫고 그대로 심장까지 찢어발긴다. 유천하는 검을 뽑아냈다.

푸슉-!

“이유를 모른다라···”

서걱-! 소름 끼치는 절삭음이 울려 퍼지며 유천하의 발걸음이 시체가 흩뿌려진 바닥을 즈려밟았다.

그렇게 그는 살아있는 마인들을 향해 나아갔고, 마인들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와도 같이 느껴졌다. 마치 저 옛날 혈겁의 인과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천살성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감상을 느낄 이들이 모두 사라져버렸기에.

푹-!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도망가려던 이는 반으로 갈라지고, 맞서 싸우려던 이의 목도 모두 떨어져 나가던 시간이 지난 끝에, 마침내 마지막으로 살아남게 된 마인은 허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면 순례자인가? 아니면 연맹 특수군?”

“······.”

“갑자기 지랄했으면 죽이기 전에 이유라도 알려주라고 이 씨발새끼야··· 어?”

“이유가 필요하더냐.”

유천하의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에 마인은 잠력을 격발시키며 달려들었고, 유천하는 그저 담담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검신을 내리그었다.

부드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서걱- 그렇게 섬전과도 같이 뻗어 나간 검로가 마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동그란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 베인 부위에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다.

허공에 흩날리는 피는 짙은 흑색으로 꾸물거렸다. 그 혈색을 바라보며 유천하는 생각했다.

혈마공의 일종, 색을 보아선 최소 20명.

“······.”

도대체 왜 이유를 물어본 것일까.

저들 자신의 피만으로도 그 이유가 충분할 텐데 말이다. 유천하는 마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천하는 실내 한구석에 눕혀져 있는 시체의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사방에 사지가 흩뿌려진 채 죽어있는 마인들과는 다르게 온전한 모습으로 한구석에 쓰러진 채, 그렇게 물건처럼 놓여있는 작은 시체들.

당연히 그들은 마인이 아니었다.

그저 마공을 수련하기 위해 조달된 재료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그 목적을 다 한 잔해물이지 않을까. 유천하는 그리 판단했다.

“······.”

그렇기에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유천하의 머릿속에는 어느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겨울이 베어지던 날. 아버지와 나눴던 짧은 대화.

분명 불살에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에도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마인들이 저런 일을 벌인 것에도 분명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더 강해지기 위해서, 더 편하게 수련하기 위해서. 딱 그 정도였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자신이 마인들을 죽인 것에도 분명한 이유는 없었을 뿐이다. 이건 어떤 논리에 의해서, 혹은 정의심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그저 내가 불쾌했으니까.

그런 걸로 하면 되는 것이었다.

유천하는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었고, 그렇기에 어둠 속에서 일렁거리던 그는 꺼져가는 생명을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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