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이 빙의를 숨김-56화 (56/205)

침식역류 (5)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도시- 밀라노.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만 해도 물경 200만 명에 달하는 그곳에는 수많은 인적・산업 자원들이 곳곳에 산재 되어있었다. 그런 만큼 도심 한가운데에 잿빛탑이 좀 솟아났다 해서 도시 자체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잿빛탑이 솟아났을 당시 밀라노가 실시한 대처는 간단했다.

영역 내의 시민들만 임시 거주지로 대피시켰고, 그 외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게 했을 뿐.

물론 그게 딱히 이상한 대처는 아니었다.

세계침식이 일어난 지도 벌써 1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이제 사람들에게 침식이란 현상은 무척이나 두려우면서도 익숙한- 일상에 자리 잡은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콰과과과과과-!!!!

그렇기에.

[긴급상황입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잿빛탑 두 개에서 침식역류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대상 등급은 각각 황혼급, 여명급으로 총 두 곳이며 이에 연맹에선 긴급히 사람들을······]

갑자기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뉴스의 내용도.

도시의 시민들은 그 상황을 모두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시민분들께선 신속히 정해진 구역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이며······]

물론 ‘비교적’ 침착하게 말이다.

“······신이시여!”

“아니! 저게 왜 벌써 터져?!”

“하필 바로 옆이야!! 미친!”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나마 역류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은 그저 인상을 굳힌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뉴스를 시청하는게 다였지만, 침식영역과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들마저 그러기는 힘든 노릇.

고오오오오-

----------------------------------!!!

위잉-! 위이잉-!!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와 포효소리만 해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한 수준이었고, 창밖으로 고개만 내밀어도 목격할 수 있는 무채색의 하늘은 일반인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풍경이었을 따름이었다.

“빠, 빨리 대피해!!!”

“아, 자, 잠깐 일단 저장··· 저장···!”

“그러다 뒤질려고!! 차라리 일을 다시 해 병신새끼야!!”

“오 시발!!”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오늘 등천회랑의 생도들이 현장에 실습을 나와 있었다는 게 시민들로선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대피하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테지만 그들을 위해 생도들이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재 침식역류를 저지하고 있는 건 등천회랑의 현역 생도들이며, 총 93명의 각성자와 연맹군 1개 대대가 분투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연맹에 등천자를 요청했고 공략자들이 당도하기까진 아직 시간이······]

“아······ 하필 생도들이.”

“···쯧!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대피부터 해! 괜히 뭉그적거리다가 짐 되지 말고!”

“빨리 움직입시다! 어서!!”

---------------------------------!!!

콰아앙-!!!

하지만 잿빛으로 뒤덮여가는 전장을 바라보며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침식과 맞서 싸우기 위해 자라온 이들이라 할지언정, 그들이 대피하는 동안 저 흉악한 마수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건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시민들은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립니다······”

“제발 신이시여.”

가까운 대피소로 향하며, 그리고 대피소에 모여들어 계속해서 들려오는 현장 상황을 들으며 현장에서 마수들과 싸우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이들이 전장에서 무사할 수 있기를.

어서 빨리 침식이 토벌되기를.

이 상황이 무사히 지나 기기를···.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덕분일까.

얼마 안 가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황혼급 마수 토벌이 확인되었습니다! 침식역류 소멸현상이 관측되고 있으며 마수들의 활동이······]

갑자기 들려온 토벌 소식.

침식역류가 발생한 지 고작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뭐···? 벌써?”

대피소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들려온 뉴스에 사람들은 일제히 벽면에 놓인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카메라에 포착되고 있는 현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산이 조각나는 거대한 마수.

허공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파동.

그리고.

다시 색채가 돌아오기 시작한 세계까지!

잿빛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이 시간이 되감기듯 다시 푸르게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빛을 집어삼키던 흉악한 그림자가 모두 허공으로 스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오, 오!!!”

“지, 진짜잖아?!”

그렇기에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대피소 내부엔 광적인 환호성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질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아아!!!”

“와아아악-!! 와아아악-!!!!”

공동을 강타하기 시작한 거대한 함성.

그 외침 때문에 대피소 내부가 웅웅- 울려댈 정도였지만 사람들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일제히 환희를 내질렀다. 침식이 공략되는 장면은 언제 보더라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들뜬 열기가 가라앉아 갈 때쯤,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다시 속보입니다!! 연이어서 여명급 수호자 토벌이 확인되었습니다! 침식역류 소멸현상이 관측되고 있으며··· 예!! 사건 발생 52분 만에 침식역류가 모두 종결되었습니다! 오··· 신이시여!!]

“맙소사! 뭐가 이렇게 빨라?!”

“예스!! 예스!!!”

“하하하! 망할 그림자새끼들!! 이게 바로 인류다!! 하하하하!!!”

그렇게 상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식에 사람들은 모두 주변에 있던 사람을 끌어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운이 나빴다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대피소에 틀어박혀 있을 뻔한 상황이었는데 어찌 소리를 안지를 수 있겠는가?

물론 수호자급이 토벌되었어도 잔류 마수는 남아있었기에 사람들은 환호를 터트리면서도 얌전히 대피소 내부에서 주변이 정리될 때까지 대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들떴던 심정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이내 사람들은 다소 의아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상황이 끝난 거야?”

“지나가던 등천자라도 있었던 건가? 아니 황혼급이면 베테랑분들도 버거워하는 수준 아니었나?”

“하하하!! 그런 걸 신경 써서 뭐하게? 공략자분들이 알아서 잘하셨겠지!!”

사실 이렇게 난데없이 잿빛탑이 솟아난 것도, 난데없이 침식역류가 터져 나온 것도 사람들에겐 꽤 익숙한 일. 조금씩 침식에 잠식되어가고 있는 세계인 만큼 이런 상황쯤은 몇 번씩 겪어보지 않았겠는가?

허나 그렇기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겪어온 수많은 침식현상 중에서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침식역류가 종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이 정도면 사실상 상황이 시작되자마자 종결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뉴스를 통해 사람들은 뒤늦게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속보입니다! 침식역류의 공략주관은 실습 중이던 등천회랑 생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황혼급과 여명급. 각 탑의 수호자급 마수를 토벌한 것 또한 생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뭐?”

“···자, 잠깐 뭐라고 지금?”

“생도···? 생도가 잡았다고?!”

세계의 20%가 그림자에 잠식된 시대. 그렇기에 이 세계의 교육과정에는 당연히 침식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차원이론학이나 마력역학 같은 이능과 관련된 요소는 일반인으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잿빛탑의 등급, 그리고 마수의 등급 정도는 누구나 다 인지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설령 교육을 받지 못했더라도 매일매일 수없이 반복되는 침식사태의 뉴스를 접하다 보면 그런 정보쯤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잿빛탑이 뱉어대는 마수들의 강함.

특히- 그중에서 수호자급 마수가 갖는 위상은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과 전사한 공략자의 소식을 통해서라도 흔히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순간 멍하니 화면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흥분했던 것도 잊어버린 채 그저 멍하니 뉴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상식을 뒤엎은 이들. 이 믿기지 않는 사건의 주역. 그들의 이름을 듣기 위해서.

그렇게 사람들은 멍하니 귀를 기울였고, 이내 그들은 들을 수 있었다.

[연맹군의 기록과 증언. 그리고 생도들의 사후 보고를 종합한 결과 대상 생도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중. 황혼급 마수를 마무리한 생도는 얼마 전 등천도시의 테러를 해결한 이와 동일인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생도는 등천의 구도자에 소속된 이로써······]

그렇게.

[예. 이제는 명확히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유망주의 이름! 순례자 유천하. 그의 앞날에 축복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그 세 글자의 단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희망의 등불로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

게이트를 넘어오자마자 이하린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몸을 휘청거렸다.

“으으윽···! 삭신이야······.”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검을 지팡이 삼아 골골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내력은 바닥나있을지언정 부상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수호자급은 힘드셨나 보군요.”

“네? 아··· 역시 아직 수호자급은 조금 벅차긴 한 것 같아요. 그래도 천하씨한테 열심히 배운 덕분에 간신히 버텼지··· 정말 큰일 날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맞아. 수호자급이 괜히 수호자급은 아니었지. 오늘도 그렇고 저번도 그렇고 너무 사건에 자주 휘말리는 기분이야. 으음···.”

옆에서 마찬가지로 상당한 몰골의, 그렇지만 이하린보단 깔끔한 모습의 아리엘이 그녀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지난번이라면 카룬드를 말하는 거겠지.

확실히 아리엘의 처지에선 그렇게 느껴질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타천자의 침입도, 침식역류도 난데없이 벌어진 일이었을테니 말이다.

나는 적당히 말을 덧붙여주었다.

“요새 좀 그러긴 했지. 그냥 앞으로 겪을 일을 몰아서 겪었다 생각하면 편할 거야.”

“정말? 진짜 그런 거면 좋겠다······”

그 말이 아리엘에겐 그냥 하는 소리로 들렸던 걸까? 그녀는 내 말에 그저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이내 옆에서 골골거리던 이하린을 부축해주었다.

물론 나는 사실을 말해준 것 뿐이었다.

당연히 앞으로 1학기 내에 맞닥트릴 사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녀가 신경 쓸만한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나는 주변을 휘감싸고 흘러가는 바람의 결을 느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흙먼지와 크고 작은 부상으로 뒤덮여 엉망이 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면 선방한 건가.’

다행히 생도 중에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부상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수호자급 마수를 각각 역량이 맞는 이들이 떠맡은 덕분에 대부분은 비교적 여유롭게 마수를 상대한 모양.

물론 교수도 꽤 노력한듯싶었다.

어쩐지 수호자 마수를 상대할 때 코빼기도 안 비친다 했더니, 실습의 책임자였던 만큼 그는 침식역류가 터지자마자 생도들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나?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었지.’

그리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오늘의 일들은 모두 최적의 결과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이하린은 무사히 실전 경험을 쌓았고, 생도들 중에서도 죽은 이는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는 수호자급 마수를 토벌하고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나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결을 체감하며 조금씩 손을 휘저어 보았다. 후우우웅- 그러자 내 움직임에 따라 주변의 대기가 일렁거리는 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세계가 내게 발을 맞춰주는 느낌.

‘나쁘지 않아. 아니, 마음에 들어.’

새삼스럽게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지난 깨달음도 조금씩 갈무리 되어가는 중이었고, 내력도 차근차근 늘어나는 마당에 새로운 무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을 체감했다. 그런데 그게 조금 티가 났던 걸까.

“······천하씨 혹시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이하린이 내게 그런 말을 건네왔다. 분명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옆에 있던 아리엘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걸로 봐선 내가 실수했다기보다는 이하린의 감각이 예민했던 모양.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대꾸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인데······”

하지만 이하린은 내 대답에도 조금 신기한 걸 목격했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두 눈을 깜박거렸고, 나로서는 오히려 내 기분을 알아차린 그녀가 신기했을 따름.

그 반응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되었던 나는 이왕 기분도 좋은 김에 방향도 돌릴 겸 이하린을 칭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아마 하린씨가 수호자급을 토벌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덕분에 가르친 보람을 느끼던 중이었으니까요. ”

“···!!”

내 말에 이하린이 순간 흠칫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민망하단 표정과 함께 빠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고, 그런 그녀의 귓가는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그녀에겐 직설적인 말이 효과가 좋았다.

“물론 혼자 토벌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위는 하린씨가 혼자 맡으셨다는 소리를 들었더니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 그··· 저, 저 보다는 다른 분들이 더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

“또또 그런다! 하린이 너가 전위를 안 맡아줬으면 나나 걔가 어떻게 화력을 퍼부었겠어? 잘한 건 잘한 거야.”

그녀의 반응에 옆에 있던 아리엘도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 참고로- 우리는 수호자급 마수를 토벌하고 나서도 잔류 마수들의 소탕 및 상황 정리를 위해 한참을 도시에 잔류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보고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듣게 된 이야기는 내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나와 헤어진 이하린은 바로 여명급 수호자를 상대하러 달려갔고, 그곳에서 아리엘과 진시우를 만날 수 있었다 한다. 그쪽의 마수는 순수한 강화형이었기에 그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이었다나?

다행히 때마침 도착한 이하린이 전위를 맡으며 마수를 막아섰고, 그런 이하린을 아리엘이 언령으로 서포트.

그렇게 한동안 격전이 이어졌고···.

“셧다운은 진시우 걔가 시켰어도, 하린이 네가 제대로 전위를 맡아주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거야.”

결과적으로 진시우가 쏘아낸 마력포화가 근원석을 날려버림으로써 토벌이 완료되었다 한다.

“······네에···.”

이야기만 들어보자면 서로서로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토벌은 토벌. 침식역류가 시작됐을 때 만상의 눈으로 목격한 마수의 역량을 고려해보자면 녀석을 상대로 혼자 버텨낸 이하린도 충분히 대단했다.

원작과 비교해보자면 원래 이 시기의 이하린보다 지금의 그녀가 2배쯤 더 강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아리엘 말이 맞아요. 수호자급을 상대로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신 겁니다. 업적도 꽤 쌓이지 않았을까요?”

“맞아 맞아.”

“그건 그렇긴 한데에에······.”

말꼬리를 흐린 그녀는 이내 살짝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저보다 더 활약하신 분들한테 듣기엔 제가 조금 민망해서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잘해야 하린이 너랑 같은 수준인데.”

물론- 아리엘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분이시라면 모를까 말이야.”

“······확실히 그건 그렇죠? 왠지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설마 진짜 황혼급까지 그렇게 잡아내실 줄이야. 설아씨랑 마르네씨 이야기만 들으면 사실상 혼자 잡으신 수준이던데······.”

“······.”

“생각해보니 그러면 하린이 칭찬해주는 척하면서 자기 자랑한 셈이네? 하린씨는 여명급을 잡았으니 대단하세요~ 하지만 저는 더더 대단합니다! 하하! 머··· 이런 느낌?”

“또 시작이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게이트를 넘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서 말할 기운도 없다 하더니, 막상 회랑에 돌아오니까 기운이라도 나는 걸까?

그녀들이 뭐라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왔지만 나는 깔끔하게 그녀들을 무시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사건이 종결된 후 남궁설아와 마르네가 한 증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상세계의 업적이면 모를까 세간의 명성은 솔직히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남궁설아.

그녀는 지면으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내 일격을 뚫어져라 관찰했던걸까? 마르네가 밑에서 파동으로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산산조각이 났을 텐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팔렸던 모양. 그녀의 보고내용만 들어서는 마치 나 혼자 마수를 때려잡은 수준이었다.

‘······아니 맞긴 한가.’

실질적인 부분을 생각하자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만 영 거슬리는 기분. 그래도 이번 사건으로 얻은 게 꽤 많았던 만큼 나는 그러려니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회랑내의 인지도는 진작에 폭발한 상태였고, 여기서 더 유명해져 봤자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앞으로 어지간해선 해가 떠 있을 시간에 외부에 나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업적 랭킹도 오르겠네?”

“아···! 그러겠네요? 아리엘씨랑 천하씨는 슬슬 공략자 랭킹에도 등재되지 않을까요? 근래 큰 사건에 얽히셨었으니까요.”

“으음··· 그럴 것 같기도 하구우···. 하린이 너도 저번 사건이랑 오늘까지 더해지면 꽤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으음. 저는 아직 일걸요?”

그렇기에 나는 그녀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이렇듯 비교적 가벼웠던 이벤트는 무사히 지나갔다. 가볍다 하기에는 좀 느낌이 미묘하긴 했다만 결과는 깔끔했으니 뭐 괜찮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음에 일어날 에피소드들, 그중에서도 인과와 동떨어진 일들은 이렇게 쉽게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특히 다음 메인이벤트가 발생하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특히- 그중에서도 죽여야 할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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