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역류 (2)
만상의 눈으로 탑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내 감각을 간지럽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언가가 자꾸만 꿈틀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
일반적으로 침식역류는 침식현상이 특정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발생한다. 다만 그 분기점은 제각각 달랐기에 인류는 최대한 마수를 토벌하며 침식을 저지해왔을 뿐이었고, 그걸로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인류는 침식역류의 임계점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원작에서도, 실제 이 세계의 관점에서도 그러했다. 분명 원작의 설정상 침식역류의 임계점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근데 왜 자꾸 위화감이 느껴지는 거지···?’
서걱-!
간단히 마수를 베어 넘기면서도 내 시선은 계속 저 멀리 보이는 잿빛의 탑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만상의 눈에도 딱히 비치는 건 없었다. 그저 단순히 육안의 한계를 넘어, 본질적인 감각의 영역에서 자꾸만 위화감이 느껴졌을 뿐.
‘설마 침식역류를 감지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건 이상했다. 분명 원작의 설정대로라면 침식역류의 임계점을 알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감각을 확신할 수 없었다.
‘설마 침식역류가 일어날 거라 생각하고 있어서 착각하는 건가···?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감각이 또렷해.’
내가 느끼고 있는 게 침식역류의 위화감이 맞는지를 알 수 없었고, 만상의 눈이 아무리 뛰어난 특성이라 한들 그걸 볼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아아!!
서걱-! 그렇기에 마수를 베어 넘기면서도 나는 계속 감각을 점검했다.
혹여나 내 추측이 맞는 거라면 이건 중요한 경험이었다. 침식역류의 임계점을 느낄 수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에서도 큰 이점이 될 테니 말이다.
그 순간- 우리가 가던 방향에서 검은 마력이 꾸물거리며 허공에서 잿빛의 마수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형체.
꿈틀거리는 마력. 부정형 마수였다.
“부정형! 한 마리 더 떴습니다.”
“이번엔 제가 갈게···!”
계속 구경만 하고 있기 뭐했는지 이하린은 그걸 발견하자마자 검을 빼 들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서걱-!! 그 순간 순식간에 가속된 남궁설아의 검이 마수를 가르고 지나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카륵- 퍼엉-!!
“······요오오···.”
다시 검을 내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이하린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진지했던 집중력이 흐트러질 뻔했다.
“하하하! 저분은 정말 빠르군요.”
“역시 유망주는 다르긴 한가 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네요 속도가.”
“무련의 검화라더니 정말 대단합니다.”
연맹군의 대화 소리가 들릴 텐데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기세를 유지하는 남궁설아. 실습이 시작된 후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전력으로 마수를 사냥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수의 분포도가 높진 않았는데, 그 와중에 특성으로 가속한 남궁설아가 공격적으로 토벌을 자행하니 나나 이하린으로선 할 일이 거의 없어졌을 정도.
물론 나로서야 어차피 침식역류가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힘을 써야 하니 대충 그 전까지 몸이나 푼다 생각하면 되었다만 조금 의아한 부분이었다.
“······.”
쉬익-!
그렇게 연맹군의 대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침묵 속에 토벌을 이어나가던 중.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슬슬 주변에 있던 마수들의 토벌이 끝나가서일까? 조금씩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
“···.”
역시 어제의 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점점 곤두서는 신경 속에서 자꾸만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
“······.”
마침 주변이 다소 한적해진 상황.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그런 내 행동에 남궁설아의 얼굴 위로 잠시 고민이 스쳐 지나가는 게 엿보였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는 나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어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예.”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나름대로 깨닫게 된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두 분?”
어느새 멈춰 선 그녀가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저는 제대로 된 일념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 조급함에 쫒기고 있는 것도 맞았습니다.”
“예.”
“하지만 그건 깨달았다 한들 쉽게 고칠 수는 있는 문제가 아니더군요···. 그것도 당신이 말한 대로입니다. 시간을 들여 조금씩 정진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
우리의 대화에 다른 이들- 특히 이하린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건 지금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계속 감각을 자극하는 이 꺼림칙한 기분만 아니었어도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거슬리는 건 조금 짚고 넘어가고 싶었을 뿐. 안 그래도 의념이 불안정한 남궁설아였는데 괜히 실전에서 무리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조급함을 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버리셔야 합니다.”
“······사실 어찌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의 미숙함을 알게 되었더라도, 제 조급함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그렇습니까.”
거기까지 대화를 이어나가자 이내 우리의 대화가 어떤 내용으로 시작된 것인지 이해했는지,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이하린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거겠지.
이하린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슬픈 눈으로 남궁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위치해있던 남궁설아는 굳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한테 한 번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건······”
하지만 그 순간.
고오오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소용돌이. 평범했던 세계의 풍경이 한순간에 시커멓게 물들어가며 소름 끼치는 마력을 토해내는 게 내 시야로 들어왔다.
남궁설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 마력을 제대로 감지하기도 전에. 한순간에 색채를 물들이며, 악의를 그 속에 품고서.
저 멀리서부터.
콰과과과-!!!!
두 개의 잿빛탑에서부터 구역질 나는 마력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
대응은 신속했다.
각성자들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이 저 파동에 휩쓸리는 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 즉시 연맹군 앞을 막아서며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이하린 또한 본능적으로 같이 검을 빼 들어 뒤편의 허공을 베어 갈랐다.
콰아아아-!!!
퀴이이잉-!!
칠흑과 순백. 두 개의 검에서 솟아 나온 검기가 어우러져 시커먼 파동을 막아선다.
콰아앙-!!
“뭐, 뭐야?!”
“!!”
“우··· 우와악!!”
마력의 잔재가 거센 바람과 함께 흩어져 나갔고, 연맹군이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하린이 이제 막 상황을 깨달아가고 있을 때. 남궁설아가 당황하며 마력을 흩어내기 시작했을 때.
내 눈은 잿빛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확실해. 예상이 들어맞았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더니. 계속해서 느껴진 불온함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저 멀리에서 황혼급 탑이, 그리고 저 뒤편에서 여명급 탑이 깨져나간다. 산산이 조각나는 잿빛탑이 세계를 무채색으로 물들이며 마수를 토해내고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퍼져나온 잿빛의 물감이 종이 위로 퍼져나가듯 세계를 뒤덮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
대기와 함께 터져 나온 굉음에 거리에 늘어져 있던 건물들이 그 몸체를 부르르 떨어댔고, 벽면에 붙어있던 창문들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그리고 유리가 파열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나는 그 굉음의 근원. 두 개체의 수호자급 마수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만상의 눈이 세계와 동화되며 그들을 직시한다.
앞쪽에 하나, 그리고 다시 뒤쪽에 하나. 막대한, 그러면서도 흉포한 기운을 전신에서 토해내며 끊임없이 몽글거리는 칠흑의 형상들.
하나는 가시로 뒤덮인 날개를 등에 매단 채 하늘 위에서 광택을 번들거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뿔을 온몸에 박은 채 온몸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포효를 내지르는 중이었다.
하나는 5m, 아니 6m.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약··· 20m?
크기만 봐도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 속에서 나는 녀석들의 마력을 확인해보았다.
여명급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크기는 기껏해야 작은 건물수준. 그 몸체에 내포된 마력의 양은 상당했지만 이지가 없다는 걸 고려하면 위협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허공에 부유한 채로 도시를 내려다보는 저 거대한 비행종- 황혼급 마수만큼은 확실히 달랐다. 그 몸체의 체격부터 토해내는 마력. 그리고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역겨운 부정사념까지. 그 모든 게 더욱 그러했다. 녀석은 원거리에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찌릿해질 만큼 파괴적인 마력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마력의 양으로만 따지자면 그간 만나본 어떤 생물체보다도 많아 보였다. 저 녀석에 대응할 수 있는 건 이곳에서 나와 등천자인 교수 정도밖에 없겠지. 하물며 마수가 비행종인걸 고려하자면 교수의 실력으로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에 상정했던 대로. 그게 최선이었다.
“하린씨는 여명급으로.”
“······네.”
설명은 그걸로 끝. 하지만 부연설명은 필요 없었다. 나도 그녀도,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상황과 전력을 생각하면 이 시점의 최선은 이것이었다.
그렇게 차갑게 가라앉은 이하린이 서늘한 예기를 품은 채로 마력을 일깨우는 게 느껴졌다. 깊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그리고 내밀어 지는 그녀의 손.
“······.”
우리는 서로 손등을 맞대었다.
툭- 인사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상황은 침식역류. 저희는 바로 수호자 토벌을 하러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전을 위해 본대와 합류하시기 바랍니다.”
“···예? 자, 잠깐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발을 박찼다.
“이게 갑자기 무슨?!”
“알파, 알파! 응답하라!!”
“침식역류··· 씨발!”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뛰쳐나갔고, 그 뒤로 연맹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저들을 탑의 중심까지 데려가는 건 너무 위험했고, 그렇다고 본대로 합류하는 것까지 도와줬다간 수호자급 마수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겠는가? 허공에 체류하며 도시를 내려다보는 저 마수는 빠르게 해치워야 할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수호자를 토벌하는 게 중요했다.
‘황혼급이면··· 카룬드보단 확실히 강해.’
처음 맞닥트린 적이지만 원작의 묘사를 통해, 그간의 수업에서 배운 지식을 통해. 그리고 눈으로 느껴지는 기세를 통해 나는 마수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멸화급정도의 격차는 나지 않겠지만, 적어도 여명급보다는 확연한 강함을 품고 있을 테니 말이다.
“······!”
그렇게 삽시간에 바뀌어나가는 풍경 속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도 이쪽에 합류하겠습니다!”
“수호자급 마수한테 가는 겁니다.”
“예! 알고 있어요!”
가속이 부여된 남궁설아가 내 옆에서 빠르게 다가온 것이었다. 아마도 저 굉음과 방금 이하린과 나눴던 대화. 그것만으로도 그녀 또한 상황을 이해한 듯싶었다.
“황혼급입니다. 위험할 거에요.”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출발할 때 여명급 쪽으로 진시우와 아리엘의 조가 가는 걸 봤습니다. 그러니 여명급은 괜찮아요. 지금 중요한 건 황혼급입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마침 여명급 쪽엔 진시우가 가있는 모양.
이하린을 그쪽으로 보냈으니 그 둘이면 충분히 여명급 수호자 정도는 토벌할 터.
그렇다면 황혼급만 토벌해낼 수 있다면 빠르게 침식역류를 종결시킬 수 있겠지.
바람이 거세게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전력으로 경공을 밟고 있는 만큼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고 있었지만 탑과의 거리는 아직도 꽤 남아있었다. 하지만 황혼탑의 수호자는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며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기에 보통의 육안으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궁설아는 빠르게 발을 박차면서도, 그곳에 시선을 유지한 채 내게 물어왔다.
“혹시 계획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하긴 당신 정도라면.”
“그건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군요. 저 또한 황혼급을 만나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예.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 순간.
----------------------------------!!!!!!
하늘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귀로 인식되지도 않는 일그러진 포효소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지상으로 돌진하는 마수. 낙하라기보다는 추락에 가까운 형태로 쏟아지는 마수의 모습을 목격한 즉시. 나, 그리고 남궁설아는 거의 동시에 가속을 발동하였다.
우우웅-!
콰아앙-!!!
-으아아아!!!
그렇게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를 체감하며, 우리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그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
소규모 침식 영역에서 이루어진 실습.
그것도 연맹군의 백업하에 진행되는 실습은 생도들이 현장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총탄소리와 울음소리에 긴장했던 생도들도, 막상 실습이 시작되자 군대의 백업을 통해 안전하게 마수를 토벌해 나가는 과정에서 대부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평소였다면 문제없었을 상황.
하지만 안타까웠던 점은 지금은 평소와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발!! 이게 무슨 상황이야 갑자기!!”
“큭! 마수가 너무 많아!!”
“침식역류···! 그것도 이중첩이야!! 침착해 얘들아! 마력 농도는··· 미친! 3000?”
“보고드립니다! 현 위치는 포인트 감마. 포인트 감마 침식역류 확인되었습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씨발! 벌써 전파가···!!”
“좆 까고!! 빨리 쏴 재껴 개새끼들아!!!”
투두두두두!!
콰-앙!!
그것은 천중무련 출신의 생도.
등천회랑 1학년 랭킹 244위에 위치한 황찬룡이 속한 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