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점 (1)
“천하는 도대체······.”
그날 밤- 유천하의 전투가 시작되던 순간.
아리엘의 정신도 조금씩이지만 회복되어가던 중이었다.
물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의식만 돌아온 수준이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싸움을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소용돌이치던 마력의 격랑.
살을 찌르듯 퍼져 나오던 유천하의 살의.
또한 그녀는 들을 수 있었다.
‘난 너 같은 녀석들을 혐오하지.’
‘한심할 정도야.’
어렴풋이 들려오던 목소리- 비록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유천하가 타천자와의 싸움에서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니면 각고의 노력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천하는 분명 천재였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이였으니까.
하지만 유천하는 상대를 정말 쉽게, 타천자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정도로 농락에 가까운 수준으로 마인을 짓밟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그건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단순히 재능이란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
그렇기에 아리엘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선명히 느껴지던 유천하의 존재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난 그 날의 사건을 되새기며 유천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연맹에서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에도 유천하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고, 회랑에서 공개하는 생도들의 정보에도 유천하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불현듯이 등천의 구도자를 지나 등천회랑에 입학했을 뿐. 그는 정말 하루아침에, 마치 땅에서 솟아나듯 이곳에 나타났다.
그렇기에 아리엘은 의아했다.
도대체 그게 가능한 일인 걸까?
저 정도 수준의 천재가?
그런 생각 속에 그녀의 주말은 빠르게 지나갔고, 오늘의 대련을 보며··· 그리고 유천하가 보여준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 생각을 조금 더 깊은 영역까지 끌어내리게 되었다. 그의 움직임에서는 분명 경지가 아닌 경험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리엘은 지난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간 볼 수 있었던 유천하의 무력.
사람을 상대하는 게 익숙해 보이던 경험.
마인을 향해 뿜어내던 강렬한 살의.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것일까?
왜 입학 이전의 기록이 없는 걸까?
어떻게 그런 살의를 토해낼 수 있던 걸까?
그 의문과 정보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형상으로 무수히 재조립되었고, 이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그 모든 의문을 엮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했고, 그녀는 그런 그런 존재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뭐? 마인이 나타날까봐 무섭다고? 걱정하지 마렴. 세상에는 그런 걸 막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니까 말이야.’
그건 아리엘이 아직 어렸던 시절.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으음··· 그러니까 말이지······. ’
그녀는 부모님을 통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세상의 양지에서 벗어나 활약하는 특별한 초인들의 이야기.
신분을 숨긴 채 세계 곳곳에 스며들어 마인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냥꾼들. 오로지 마인만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특수목적 대인 척살부대이자 세계연맹 직속 특무기관.
그녀는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면순례자.”
그곳은 마인에 대한 강한 살의를 지닌 이들만을 그러모아 비밀리에 설립되었다는 이면 세계의 집행기관이었다.
‘그렇다면 말이 돼.’
유천하의 특이점은 그녀가 알고 있는 이면순례자의 특징과 맞닿아 있었다.
과거가 말소된 알려지지 않은 강자.
대인전에 능숙하고 풍부한 전투경험.
마인을 향해 뿜어내던 날카로운 살의.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생도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강한 것도.
다른 이들에 비해 경험이 풍부한 것도.
마인을 유린하며 살의를 토해낸 것도.
그 모든 게 말이 되었다.
물론 해소되지 않는 의문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럼 유천하는 왜 ‘이곳’에 입한한걸까?
그런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왜 생도의 신분으로 이곳에 오게 된 걸까?
애초에 이곳은 등천회랑이었고, 등천의 업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아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미 그 자격을 갖춘 이가 이곳에 입학할만한 이유는 없었다. 타천자를 토벌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당장 현장에서 선두공략자로 활약할 수 있는 수준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
만약, 아니 그녀가 예상한 그대로 유천하가 이면순례자에 속한 집행자라면 그 의문에 대한 정답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유천하 정도의 실력자가 이곳에 입학할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유천하가 만약. 정말 제 생각대로 이면순례자에 소속된 집행자라면, 그리고 그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임무’를 위해 잠입한 거라면 그 이유는 분명······
“······!”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짜릿한 전류가 되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
세계연맹- 세계인류의 뜻을 모아 건립된 그 단체에는 무수히 많은 국가와 기관이 소속되어 있었다.
각 초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인 천중무련, 기원학회, 각성자 협회 등을 제외하고서라도 등천의 구도자나 구원의 숨결 등 특정 목적을 위해 설립된 수많은 기관, 혹은 클랜, 집단들은 그렇게 세계연맹의 산하에서 서로 힘을 합쳐 침식에 저항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 이면순례자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관련된 정보를 모두 취합했습니다.”
세계연맹의 본부가 위치한 워싱턴 DC. 그리고 그 도시의 구석 변두리에 마련되어있는 자그마한 빌딩. 그곳 지하 깊은 곳에는 사람들의 상상을 벗어난 특수한 시설이 존재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모르는,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공략자라면, 그리고 뒷세계에서 활약하는 이들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소문을 접하게 되는 특무 집행 기관.
“모두는 아니지 않나요?”
“예. 다만 등천도시의 테러 건은 마인이 아닌 용병이 주도한 거로 파악되었기에 정확한 추적은 어려운 바입니다.”
“마인의 돈을 받아 처먹는 용병이라··· 그걸 사람으로 봐야 하는지 조금 의문인데요.”
지금- 그런 이면순례자의 본부에선 지난 금요일 날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물론 한 명이라도 생포할 수만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모두 사살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확인은요?”
“생도가 증언한 곳으로 조사요원을 파견한 결과. 증언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이면 순례자의 부단장- 트리난 라피냐는 이번 사건을 곰곰이 돌이켜 보았다.
등천도시에서 일어난 마인들의 테러행위.
그리고 겁도 없이 등천회랑에 쳐들어가 뒤져버린 병신같은 타천자의 침입사건.
살아 숨 쉬는 것도 혐오스러운 배덕자들은 그 역겨움만큼 지능 또한 머저리 같았는지, 지난 금요일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 뛰어들었다. 그 죽음으론 갚을 수 없는 선명한 민폐를 끼친 채 말이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이번 테러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들의 수를 떠올려보았고, 그렇기에 잠시 미간을 찡그리던 라피냐는 이내 보고를 하러 왔던 부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원숭이 새끼가 회랑에 쳐들어간 목적은 정말 그게 다였던 건가요?”
“예. 카룬드의 과거 기록과 등천회랑 진입 후의 행동을 교차해보면 정말 생도, 승천자의 자식 납치를 목적으로 침입한 거로 사료됩니다.”
“쯧. 루타텔한테 원한이 있으면 곱게 처박고 뒤질 것이지. 하여튼 머저리 같은 새끼··· 일단 알겠습니다.”
그 한심함에 카룬드를 곱씹은 라피냐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멍청이는 이미 생도의 손에 죽은 뒤였고, 그렇다면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것보다는······.”
그녀는 보고서를 차례차례 넘기며 이번 사건의 관계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타천자의 목표대상이자 승천자의 아이.
세간에 그 이름이 자자한 기원의 유망주.
-아리엘 화이트.
얼떨결에 사건에 휩쓸린 평범한 생도.
등천의 구도자가 보증한 추천입학자.
-이하린.
그리고.
“그 생도에 대한 조사결과는 나왔습니까?”
등천도시의 테러를 단신으로 저지한 자.
그리고 연이어 타천자를 토벌한 자.
-유천하.
“유천하 생도 말입니까?”
“네. 그 아이 말이에요.”
“현재까지 조사된 내용은 보고서 121p에 별도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라피냐는 앞에 있던 종이뭉치를 빠르게 넘겨보았다. 121, 121···. 그러자 이내 유천하의 증명사진과 함께 그에 대한 기록이 펼쳐졌다.
이제껏 조사된 유천하의 세부 내력.
그리고 몇 가지 특이사항.
“등천의 구도자 소속, 추천 입학자, 순례자, 배치고사는 만점에··· 하 업륜의 소유자라. 근데 과거 기록이 아예 없네요?”
“예. 등천의 구도자에 문의한 결과 침식접경지에서 태어난 낙오자라고 합니다. 물론 사실확인은 어렵습니다만 지역 특성상 숨어있는 초인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은거무맥이나 히든써클을 생각하면 사실일 확률이 높긴 합니다.”
“그걸 믿으라고요? 아니, 뭐 원래 그쪽 지역에선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물론 ‘순례자의 길’을 통과한 이상 유천하가 마인과 연관돼있을 확률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인성이란 부분에선 합격점. 그건 단순히 강하다고 통과할 수 있는 시련은 아니었고, 만상세계의 시스템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허나 검증된 실력에 비해 과거가 너무 텅 비어있다는 건 분명 의아한 요소였고, 그렇기에 그녀는 기록을 훑어보며 의문을 표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타천자는 사실상 유천하란 아이 혼자서 잡은 거 아닌가요?”
“다른 두 생도의 의견은 그렇습니다만, 유천하 본인의 의견으론 앞서 싸웠던 두 사람이 입혀놓은 피해도 있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타천자, 그것도 카룬드의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생도급의 실력으로 그 특성을 뚫고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생도의 수준은 벗어난 거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타천자를 생도가 토벌한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만 그건 지난 금요일에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고, 모든 상황증거는 한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기에 보고를 올리던 남자도, 그 보고를 듣던 라피냐도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게 단순히 천재라는 말로 설명될 수준이던가?
그런 생각 속에 그녀는 옆에 있던 리모컨을 조작해보았고, 그러자 허공에 가상의 스크린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곳에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스크린 속- 칠흑의 운무에 휩싸인 한 소년.
유천하는 기계에 제대로 인식되지도 않을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마인의 목을 베어버리고 있었고, 그의 검극이 그어지는 순간. 그대로 마인의 품속에 있던 폭탄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로 흩날렸고, 바닥으로 동그란 무언가가 떨어져 굴러갔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그림자.
-카륵··· 콰앙!!
정말 몇 번을 봐도 말도 안 되는 기량.
저 속도도, 정밀성도, 그리고 결단력도. 모두 일개 생도가 가질만한 요소는 아니었기에 화면을 지켜보던 그녀의 눈빛은 점점 잔잔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등천도시의 CCTV 영상만 봐도 이 아이··· 생도 수준은 아득히 넘어섰어요.”
“예. 그렇습니다. 실력만 보면 유망주급은 확실히 넘어섰지요. 이 정도 포텐셜은 철혈무희 이후로는 처음입니다.”
“철혈무희는 무슨··· 무슨 별명을 그따위로 짓는지 참. 어쨌든 티르유 그 아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에 라피냐는 손가락으로 톡톡톡- 책상을 두들기며 유천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등천의 구도자와 회랑 측 자료, 거기에 지난 금요일의 증언까지 더해지면 유천하의 수준은 최소 등천자라 보는 게 좋겠군요. 실력만 보면 이미 중상위, 아니 상위권? 나중에는 최소 하이랭커까진 가겠네요.”
“예. 각 기관도 이번 사건을 통해 그렇게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사실상 차세대 승천자로 가장 유력한 수준 아닌가요. 이거?”
“승천의 업을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포텐셜만 놓고 보면 역대급이라는건 분명한 사실이긴 합니다. 성년 때의 검제께서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하니까요.”
“그런데 블랙리스트에도 없고, 순례자의 길도 통과했고··· 과거 기록은 전무한데 포텐셜은 승천자급이라······”
톡- 톡-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진다.
“좋네요. 그럼 공문 하나만 보냅시다.”
“공문이요? 아··· 설마 회랑에 있는 그 아이한테 말입니까?”
“네. 마침 같은 학년이니 알아볼 기회는 많을 거 아니에요?”
이 순간 그들의 머릿속으로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 옛적부터 집행자로서 선별되고, 키워진 이가 등천회랑에 입학해 있는 상태. 물론 그건 아이의 정신상태를 장기적으로 고려한 결과였고, 딱히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입학한 건 아니었다.
당장 실무에서 뛰게 하는 것보다는 등천회랑에서 생활하게 두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속에 이루어진 일.
그렇기에 그 아이의 생도생활은 일종의 휴가나 다름없었지만, 아무래도 회랑에서 일이 터졌던 만큼 가벼운 임무 정도는 시켜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라피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례자라는 점에서 조건은 충분하지만, 과거의 내력 정도는 조금 더 제대로 파악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무력은 충분하니까 다른 쪽 위주로 검토해보라 전하세요. 심성, 인성, 적성. 사상과 성향까지······ 적합한지 말이에요.”
자리를 벗어난 그녀는 벽 한쪽으로 걸어갔고, 그곳에 놓여있던 리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생각하기에 유천하의 자질이 충분하다 판단된다면······.”
“판단된다면······?”
“빈자리.”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사내를 향해 리스트를 내밀었고, 그 말을 이해한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을 때.
“하나 더 채워도 되잖아요?”
그 순간 그녀의 입술 위로는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을 뿐이었다.
***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대부분 숙소에 들어가 있을 시간이었고, 평소의 나였다면 3학구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달랐다.
3학구의 넓은 구역을 지나, 등천도시로 이어지는 광활한 숲 속. 나는 그 어두컴컴한 수해의 한군데를 지나쳤다.
당연히 이곳은 회랑의 바깥이었고, 나는 그렇게 등천회랑을 빠져나왔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그런 이유였다.
그러고 얼마나 걸었을까?
등천도시로도, 등천회랑으로도 통하지 않는 인적 드문 숲 속까지 이동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은 달빛마저 가린 채 수해를 어둡게 감싸 안고 있었고, 그렇게 그림자의 숲 한가운데서 나는 입을 열었다.
“나오너라.”
낮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말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내력이 실린 말은 숲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부스럭- 순식간에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저 멀리서부터 나를 향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는게 시야에 들어왔다.
칙칙한 후드를 꾹 뒤집어쓴 채,
탁한 마기를 풍겨오는 한 사람.
“···오, 오셨습니까!!”
등천도시를 테러했던 마인이었다.
“늦지 않게 왔구나.”
“예, 예···! 하,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녀석의 이마 위론 식은땀이 줄기차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동시에 그 몸은 어둠 속에서도 확실하게 인지될 정도로 벌벌 떨려오고 있었다.
“괴롭더냐.”
“······예, 예!! 너, 너무, 너무 괴롭습니다. 제, 제발 금제를 풀어주십시오. 그, 그 날 이후 한순가, 간도 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습니, 니다···!!!”
절규 어린 외침을 토해내며 남자- 하오란은 벌벌 떨리는 무릎을 꿇고 내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중원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가에 실소가 지어졌을 뿐이었다.
그러자 내 미소를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아, 아!!”
하오란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그러면서도 걱정과 불안이 담긴 표정으로 내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있는 힘껏 구겨놓은 종이처럼 일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말 그대로 기괴할 정도로 구겨진 얼굴.
“제, 제발···! 제발···!! 풀어주십시오···!!”
“조용.”
“흡!”
내 말에 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다가오던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 푹 숙인 그의 머리 위로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조금씩 내력을 일깨워 천마신공의 기운을 그에게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통천通天에서 후정後頂.
그리고 다시 뇌호腦戶에서 풍부風府.
규음竅陰을 지나 청궁聽宮까지.
순식간에 수십 개의 혈을 지나친 내력은 각각의 영역 속에 꼬인 채 녹아들었고, 그 순간 지난번에 박아두었던 내력의 정이 풀려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아아···!!”
그렇게 패도적인 기운이 하오란의 혈을 순서대로 자극하자 금제가 점차 완화되어갔고, 그와 동시의 하오란의 얼굴이 꾸드득- 거리면서 꿈틀거렸다. 그러자 자신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느낀 것인지 하오란은 억척같은 눈물을 흘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