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검무 (3)
불쾌하다.
그것이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뒤에 쓰러져있는 아리엘의 모습도, 그녀를 지키려다 쓰러지는 이하린의 모습도, 다시 또 온몸에 피를 뒤짚어 쓴 채 분투했다는 상황도.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판단이 빗나갔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의념을 각성한 이하린과 아리엘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충분히 버티긴 했지만 너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등천도시의 일을 마무리 짓고 전력을 다해 달려왔지만 이 상황에 변명은 필요 없었다. 하마터면 이하린이 죽을 뻔했다는 건 명확한 사실.
그렇기에 나는 복합적인 불쾌감을 느꼈다.
“크··· 크윽···! 넌 또 뭐하는 녀석이냐!!”
말없이 이하린을 향해 남아있던 업륜의 마력을 전부 쏟아 넣고 있자니, 그 순간 튕겨 나갔던 타천자로부터 강렬한 적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흉흉한 살기.
하지만 우스웠다.
“그런 게 중요한가.”
“······하?”
왜 원작보다도 훨씬 이른 이 시점에 저 녀석이 쳐들어온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것도 왜 하필 내가 자리를 비운 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중요한 건 등천도시의 테러는 실패했다는 것이었고, 그 시점에서 이미 녀석이 무사히 탈출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진 셈. 아마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흘렀다면 녀석의 침입을 눈치챈 회랑측에서 등천자가 뛰쳐나와 녀석을 제압했겠지.
설령 내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도 등천도시의 테러를 막아낸 시점에서 녀석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지금 중요한 건.
“······.”
내가 화가 났다는 것.
그저 그것뿐이었다.
“뭔 헛소리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너도 같이 죽여주마-!!”
그 순간 타천자가 발을 박찼다. 살의와 악의를 그 눈에 담고, 끈적한 어둠을 팔에 휘감은 채 그는 나를 향해 달려왔다.
분명 그의 기세는 강렬했다.
방금 전 처리했던 마인보다도 강렬했고, 황색탑에서 마주한 수호자급 마수보다도 강렬했다. 그렇게 타천자의 심장 어림에서부터 터져 나온 강대한 마력은 흉흉한 기세를 토해내며 내게 쏘아지고 있었다.
이게 바로 타천자의 힘일 테지.
침식된 등천자, 타락한 등천자.
‘하지만 겨우 이 정도야.’
그 순간 내면의 매듭이 풀어져 나왔다.
꿈틀거리는 기운이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흑색의 색채를 뿜어냈고, 내 의지는 기둥이 되어 패도의 형상을 자아냈다.
그림자를 향해 가볍게 그어지는 검.
천마신공 天魔神功
일천검결 一天劍結
제마검형 際魔劍形
파력 罷力
콰아앙-!!! 허나 검극에 집중된 거력은 파괴적이었고, 일순간 잿빛이 갈라지며 타천자의 몸이 거세게 튕겨져 나갔다.
그렇게 타천자의 팔이 검은 핏물을 뿜어냈다. 한순간에 베여나간 육편이 너덜거리며 그림자를 토해내고 있었다.
“크, 크아아악-!!”
우습게도 먹물이 떠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한 번에 내 강체화를!!”
“특성 하나에 자신감이 너무 과하군.”
“······뭐?”
특성은 분명 신비로운 힘이었지만 한계는 존재했다. 내 만상의 눈 또한 말도 안 되는 권능을 품고 있었지만 전투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성은 아니었고, 이 눈 하나만 갖고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종류에 따라 특성 하나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보기에 특성은 분명 다른 어떤 이능보다도 더 재능과 상황을 타는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베고자 했으니 베인 거지. 네 특성보다 내 의지가 더 강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
무학의 경지에 의념이 존재하듯이, 마법의 구사에 염원이 필요하듯이, 특성에도 사용자의 ‘의지’는 중요한 요소.
불굴의 의지를 갖춘 이가 저런 특성을 가졌다면 정말 베이지도, 죽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권능을 선보였을 것이다. 티르유만 해도 후반부에 가선 비슷한 특성 하나만으로도 멸화급 마수와 일기토를 벌였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저 저 녀석은 그러지 못했을 뿐이었고, 그렇기에 내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을 따름이었다.
“어린애들 상대로 힘자랑하는 게 그렇게 즐거웠더냐?”
“······어처구니가 없군. 네 녀석은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추하군.”
나는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난 너 같은 녀석들을 혐오하지.”
사실 내 상태도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테러를 막기 위해 뛰어다녔고, 늦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이곳으로 뛰어왔다. 그건 오직 이하린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원작의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 결과- 내 내력은 겨우 3할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업륜 또한 이하린에게 사용해버렸다. 그나마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얻게 된 게 많아서 그렇지 한 달 전의 나였다면 이미 내력이 바닥을 보였을 상황.
그런 만큼 나 또한 온전한 전력을 내긴 힘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삼 할이면 충분하겠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눈앞의 마인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저 몸뚱이가 단단할 뿐이라면 그게 이지 없는 마수와 뭐가 다를까. 심지어 사람의 형체와 크기를 갖추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소교주 유천하가 거쳐온 순간들은 언제나 내게 불리한 전장들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너의 한심함에 감사하마.”
내 눈이 만상과 동화됨과 동시에 여섯 갈래의 매듭이 모조리 풀려나왔고, 그렇게 나는 칠흑의 운무에 휩싸였다.
***
시작을 알리는건 붉은 불씨였다.
쾅-!! 카룬드의 팔과 부딪힌 유천하의 검극이 불씨를 터트리며 어둠을 밝혔고, 연이어 휘둘러진 검격에 다시 한 번 카룬드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큭!!”
동시에 유천하의 몸이 그를 따라 대지를 박찼다. 그 후 이어진 건 가속의 발현 없이, 오로지 일신의 육체만으로 이어지는 공세의 폭격.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들이고 호흡을 꿰뚫어 자아내는 극한의 쾌검!
순식간에 그어진 빛의 선율이 타천자의 몸을 한순간에 두드렸다. 첫 일격이 몸에서 튕겨 나가는 걸 보고 카룬드가 방심하는 순간, 그대로 이어진 이격이 그의 피부를 뚫어냈고, 그다음으로 찔러진 검극이 그의 살을 파내었다.
큉-! 카각-! 서걱-!!! 쾅-!!
“큭···! 크으··· 크아아악-!!”
한순간에 이어진 연격. 처음 두 번을 막아 낸 이후 순식간에 난도질당한 카룬드가 다급히 침식 파동을 터트렸다.
우우웅-!!
콰과광-!!!
허나 유천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자를 베어냈고, 카룬드는 그 모습을 확인함과 동시에 허공을 박차고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뭐, 뭐냐 네 녀석은-!! 어떻게 이 몸을 그렇게 쉽게-!!”
“지능마저 한심하군.”
“!!”
단 한 순간. 카룬드가 당혹스런 외침을 토해냈을 때는 이미 유천하는 그의 앞으로 다가온 뒤. 그와 동시에 유천하의 몸을 타고 칠흑의 기세가 휘몰아쳤고, 유형화된 살기가 일렁거리며 흑색의 파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크윽···!”
카가각- 카가각-! 최대로 경화된 타천자의 팔이 교차하며 유천하의 검신을 막아냈다. 동시에 그의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네놈의 특성이 그리도 자신 있었으면 승천자를 찾아갈 것이지 뭣 하러 이런 곳에 기어들어 왔더냐.”
“······개자식이!”
감히 그 얘기를!- 카룬드가 흉성을 토해냈다. 눈빛마저 검게 물든 채 카룬드의 팔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한순간 몇 배로 두꺼워진 팔이 유천하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에 유천하는 가볍게 검을 맞찔렀다.
흔들리지 않는 검극, 극명한 무게 중점.
공추파성 攻錐破城
한순간에 쾌검에서 중검으로 변화된 일격.
중심을 뒤흔든 둔중한 타격은 그대로 타천자의 팔을 튕겨냈고, 그대로 목표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콰앙-!! 그 순간 굉음이 울려 퍼지며 카룬드의 몸이 그대로 중간에 놓인 나무마저 박살 내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우지끈-! 나무와 함께 갈비뼈까지 부러졌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카룬드는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야말로 단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큭! 이게··· 무슨···!”
“타천자, 타천자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갑자기··· 큭. 무슨 말을···”
“한심할 정도야.”
“······뭐라?”
카룬드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의아했다. 이 상황이 자신에게 그리 유리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등천자가 되었던 이후로 이런 취급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얼빠진 얼굴로 유천하를 바라보았다.
“이런 쓰레기라 그림자에 침식된 것인지, 아니면 침식이 돼서 이런 쓰레기가 된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
“······.”
“힘만 센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느낌이야. 아니, 딱히 힘이 센 것도 아니니 스스로를 강하다 착각하는 짐승과도 같구나.”
“······어처구니가 없···!”
그 순간 유천하가 다시 발을 박찼다. 동시에 온전히 풀려나온 6성의 공력이 그의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쾅-!! 다시 한 번 부딪히는 둘의 신형. 카룬드의 팔이 움찔거리며 그의 발이 바닥으로 파고 들어간다. 카각- 거리며 파고드는 검신을 양손으로 막고 있던 카룬드의 무릎이 서서히 땅을 향해 굽혀졌다.
“닥치거라.”
“···큭!”
쿠구구구-!!
일순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며 날카로운 기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감히···! 감히!! 그딴 식으로!!”
대치된 상황에서 마주한 유천하의 눈빛. 그 속에 담긴 조소와 경멸을 느낀 카룬드가 이를 갈며 그림자를 꿀렁거렸다. 침식된 마인답게 그 몸의 일부가 부정형으로 일그러지며 안개가 일듯 형상이 뒤틀렸다.
“죽여주마-!!”
천둥 같은 목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의 몸이 검은 파동이 되어 터져나갔다.
쿠우웅-!! 유천하가 그 파동을 베어 넘기는 순간 그림자로 화한 마력은 하늘 위에서 카룬드의 형상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유천하를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밤을 가로지는 검은 유성! 거대하게 변화된 주먹이 막대한 마력을 품고 벼락처럼 내리쳤다.
콰아앙-!!!
하지만 만상의 눈을 개화한 유천하에겐 그건 너무나도 뻔한 공격이었을 뿐.
“···하. 쥐새끼 같은 녀석이로구나-!!”
그렇게 바닥을 때림과 동시에 카룬드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유천하에게 달려들었다. 낙하로 인한 흙먼지가 제대로 떠오르기도 전, 초속의 세계에 접어든 그의 팔이 흉악한 몰골로 뒤틀리며 유천하의 얼굴을 향해 그어졌다.
슈욱-!! 콰아앙-!!
유천하의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타점을 중심으로 마력의 파동이 휘몰아친다. 부드럽게 변화하는 검의 움직임은 마치 흔들리는 꽃잎과도 같았다.
그렇게 카룬드의 거력을 그대로 흘려낸 것인지 유천하의 등 뒤로 부채꼴의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퓨슉-!! 맞부딪힌 카룬드의 손이 그대로 떨어져 나가며 그림자를 토해냈다. 공격을 흘린 걸로도 모자라 한순간에 그대로 역공을 가해버린 것!
“크··· 크으윽-!!”
카룬드는 팔을 부여잡으면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물러섰다. 이 순간 카룬드는 소름 끼치는 오한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율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도대체 저 녀석은 누구란 말인가?!
“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강체화를 뚫은 걸 떠나 왜 내 공격은 한 번도 제대로 들어가질 않는 거냐···! 힘도, 속도도 큰 차이가 없을 텐데···! 도대체 왜-!!!”
“그게 무공이니까.”
물론 그 말은 유천하의 입장에선 참으로 멍청한 소리였을 뿐.
애초에 무공이란 육체에 내포된 본래의 가능성을 넘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쌓아온 사람의 업이었다.
힘도 속도도 무의 본질은 아니었다. 주어진 힘을 그대로 휘두를 뿐이라면 그게 짐승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유천하는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만상세계에 부여받은 힘으로, 그림자를 받아들여 얻어낸 힘으로, 주어진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뿐인 자가 무학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여태껏 카룬드가 마주했던 무인들 중에선 그의 특성을 꿰뚫어낸 사람이 없었고, 그렇기에 카룬드는 이 순간에 와서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무인’과 생사결을 맞닥뜨린 셈이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최악의 상황으로 말이다.
“큭···!!”
쿠루룩-! 쿠룩-!
유천하의 눈빛- 그 속에 담긴 경멸의 기색을 마주한 카룬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결사의 각오로 마력을 그러모았다.
우우웅-!!
이제 더 이상 아리엘이고 루타텔이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하린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소비했던 그로서는 더 이상 전투가 길어지는 건 위험했다. 하물며 새로 나타난 저 남자- 유천하는 지금의 카룬드로서는 너무나 위험한 사내였으니 말이다.
도망가야 한다. 그게 카룬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지만 그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마당에 도망친다는 건 타천자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모멸을 받고도 그냥 물러선다면 자신의 삶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니 한방은 먹여주마···!!’
카룬드의 심장에 박혀있던 근원석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거친 마력을 토해냈다. 동시에 그의 몸이 기괴할 정도로 꾸드득- 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언제까지! 그··· 렇게! 여유··· 부··· 릴···”
사람의 형상에서 벗어난 꿈틀거리는 암운. 그림자와 섞여들며 녹아들어 짐승이 뒤섞인 형상. 그렇게 변화하는 카룬드의 모습을 유천하는 그저 담담히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단 몇 번의 호흡. 상식을 초월한 현상이었지만 그 변형에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 동안 기괴한 형상으로 변형된 잿빛의 괴인은 온몸의 마력을 터트리며 주먹을 뻗어왔고, 그렇게 잿빛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죽어라-!!!!]
그 손에 실린 어마어마한 마력.
피하는 순간 뒤에 쓰러져 있는 이하린과 아리엘이 산산조각이 날 만한 거력에 유천하는 그저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부드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 순간.
유천하의 세계는 오온에 접어들었다.
***
천마신공은 깨달음의 무학.
먼 옛날 불가에서 시작된 깨달음은 한 사람을 통해 하나의 결과를 낳았고, 천마신공은 마음속의 마를 마주함으로써 ‘나’를 깨달아 세상의 공空을 깨우치는 무학이 되었다.
그 모든 건 오로지 하늘에 닿기 위한 천도의 업. 스스로의 번뇌를 통해 무아에 도달하고자 했던 비틀린 결과물.
그렇게 천마신공의 모든 건 ‘앎’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를 마주하고, 세상을 마주하고, 나아가 만상을 직시함으로써 ‘무’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구체화의 과정.
[주우우우우우거어어어어어어······]
그 첫걸음이 바로 오온五蘊이었다.
생멸 변화의 모든 것이자 마음의 작용.
눈으로 색色을 보면 마음眼識이 생겨났고, 보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무엇인가를 인지할 수 있었다. 지각함으로써 느낌受이 일어나고, 생각想이 일어나고, 그것을 어떻게 하려는 생각行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만물을 관측함으로써 세계를 지각해 무無를 깨닫는다- 그것이 천마신공 6성의 경지가 내포하고 있는 깨달음이었고, 그렇게 오온을 통해 수련자는 세상을 지각할 수 있었다.
[······어어어라아아아아······]
비록 유천하의 깨달음은 아직 온전하지 않았으나, 만상의 눈은 소년으로 하여금 오온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시선의 이동, 형체의 유동성, 근육의 움직임, 마력의 흐름. 나아가 적의를 인지하고, 살의마저 깨달아 만상을 직시하는 눈!
그렇기에 이 순간.
‘만상의 눈’으로 지각되는 모든 요소는 유천하의 인지 속에 하나의 흐름으로 정립되어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결처럼 세상을 뒤덮은 마음의 파동을 바라보며, 유천하는 이 순간 무아無我에 접어들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상대의 의意를 받아들여 예지에 가까운 예측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그는 추악하게 일그러진 형상으로 쏘아져 오는 카룬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검을 내리그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아?]
어쩌면 이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모든 게 설계된 이야기인 것 마냥 둘의 신형은 서로를 교차해 지나쳤고, 그 순간 주변에 퍼져나가던 마력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움직이지 않는 몸, 사라져버린 마력.
그렇게 얼어붙은 카룬드가 다시 그의 모습을 시야에 담게 되었을 땐, 유천하는 어느새 그의 옆에서 검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 상황을 인지한 카룬드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돌려 유천하를 바라보았다.
“······서, 설마!!”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고요히 가라앉아있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카룬드의 얼굴위로는 부정과 분노. 그리고 공포가 스쳐 지나갔으니-
“하하하! 말도 안 되는군··· 말도 안 돼···.”
“······.”
마침내 그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담담한 얼굴 속에 소름 끼치는 살의를 담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카룬드는 그저 공허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저주한다 만상이여-!!”
파직-!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
유천하의 귀로 들려오는 세계의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
[만상세계에 업적이 기록됩니다.]
카륵- 콰아앙-!!!
카룬드의 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막간 - 화이트데이
광란의 밤이 지나가고 찾아온 주말. 본래라면 평온하게 맞이했을 아침이었지만 생도들은 저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끊임없이 웅웅- 거리는 스마트워치가 몹시 시끄러웠듯 탓이었다.
도대체 이른 아침부터 뭔 알림이 이렇게 울려댄단 말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눈을 뜬 생도들은 이내 워치속에서 오가고 있는 내용을 확인한 순간 모두 쩍- 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지난 13일 밤. 등천회랑에 침투한 타천자는 이전 각성자 협회 소속의 카룬드 아르파놈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마인은 생도납치를 목적으로 침입한 걸로 추정되며 다행히 회랑 생도들의 손에 토벌되었고 그에 관련하여······>
흘러나오는 뉴스, 도배된 SNS.
그리고 폭발적으로 오가는 메시지까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소식을 접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전부 한가지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등천회랑에 마인이 침입했다.
그리고 그걸··· 생도가 토벌했다!
그렇게 등천회랑의 주말은 마인의 침입소식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 소식은 다시 수많은 파란을 일으키며 들썩거렸다.
[아니; 시발 뭐야? 뉴스 뭔데 지금???]
[미친 뭔일 있었던거임? 누구 아는 사람?]
[타천자가 여길 왜 쳐들어와? 미쳤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었던 아이들도.
[새벽에 뭔 일 있었어요?]
[ㄴㄴ 밤이래 밤. 새벽에는 뒤처리.]
[미친; 어쩐지 새벽에 뭔가 시끄럽더라.]
[솔직히 뭔데 이거 ㅋㅋㅋㅋ 몰카냐?]
지난밤부터 새벽까지 기묘한 소란스러움을 감지했던 아이들도.
[아 잠깐만; 회랑에 쳐들어왔다는데 왜 우리한테는 안 알려준 건데;]
[타천잔데 알려줘서 뭐하게 ㅋㅋ]
[아니 근데 진짜 타천자라고? 진짜로? 이거 존나 위험했던 거 아니에요? 미친;;]
[진짜 구라아니지 이거? ㄹㅇ임?]
그 내용을 알게 된 순간- 생도들은 모두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타천자를 생도가 잡았다고···? 진짜로?]
타천자- 그건 심연을 받아들여 타락한 존재. 그 단어는 등천의 업을 쌓은 강대한 초인의 변절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등천자의 위상만큼이나 타천자란 이름이 갖는 무게는 분명했다.
애초에 등천회랑이 왜 등천회랑이겠는가?
차세대의 선두 공략자를 기르기 위해, 새로운 등천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타천자를 생도가 토벌했다?
그 소식을 접한 생도들은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충격적인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각 등천도시에서 자행된 마인들의 테러공작은 마찬가지로 당시 현장에 있던 등천회랑의 생도의 손에 발각, 저지 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두 사건의 연계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타천자의 침입과 동시에 들려온 등천도시의 테러소식! 이미 희망의 상징이 되어버린 백색도시에서 일어났다는 테러소식은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선사했다.
[시발 솔직히 뭔데 지금 이거 ㅋㅋㅋㅋ]
[어젯밤에 SNS에서도 아무 말 없었는데? 정보통제 있었던거임?]
[특례법 또 열일 했네;]
[아니 ㅋㅋㅋㅋ 정작 여기 사는 우리는 왜 모르고 있던 건데 뭔데 진짜 ㅋㅋ]
[13일의 금요일 저주 미쳐버렸네;]
[와. 와. 와 이거 진짜. 와.]
등천회랑과 등천도시.
그렇게 두 곳에서 터져 나온 소식에 아이들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소란의 중심지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생도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등천도시와 등천회랑의 정보통제가 강력히 이루어진 데는 다 이유가 존재했다.
그 원인은 바로 유천하.
등천도시의 테러건을 처음 제보한 이도, 타천자를 토벌한 이도 모두 한 사람의 생도로 밝혀졌기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연맹은 새벽 내내 두 사건의 관계성과 추가 테러의 위험성. 그리고 유천하에 대한 신원 조사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당사자인 유천하 또한 거리낌 없이 조사에 협조해주었기에 지난 밤 동안 각 기관 사이로 무수한 이야기가 오갔고···
유천하가 모녀를 향해 건네줬던 학생증.
등천도시에 설치돼있던 CCTV의 기록.
카룬드가 사전에 흘렸던 정보.
그리고 유천하가 ‘순례자’의 칭호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 정보들을 조합해냄으로써 기관들은 사건의 진실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 만큼 확실히 하기 위해 연맹 측은 아침이 되어서야 조사를 끝마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건 또 다른 당사자- 이하린의 긴급치료가 아침이 되어서야 끝났기 때문이었고, 그렇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의 증언까지 모두 종합한 결과 연맹은 이제서야 사건을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 생도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정말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저거 해결한 것도 생도고, 타천자건 해결한 것도 생도라는거임???]
[말이 되는 거에요? 이게? 진짜로?]
[아니 타천자를 어떻게 토벌했다는 거야?]
등천회랑에 침입한 타천자.
등천도시에서 일어난 마인들의 테러.
그리고 그 사건들을 해결했다는 생도들.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누가 그런 건데?!]
그게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생도들은 모두 각종 기사와 뉴스를 탐색하며 사건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관심을 쏟아부었고, 다행히 이미 정보통제가 풀려난 시점이었기에 그들은 손쉽게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회랑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었고, 따로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이미 온 매체에서 그들의 이름을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등천도시의 영웅! 생도 유천하의 사건 당시 모습을 파헤치다!]
[타천자를 저지한 세 명의 생도.]
[21기 등천회랑 특례 합격자에 대하여 -1]
[등천의 구도자에서 배출한 두 명의 신인.]
[테러저지 및 타천자 토벌의 주역! 새로운 유망주? 생도 유천하 그는 누구인가!]
사건의 주역- 그들의 이름이 등천회랑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그렇게 세 명의 이름이 세계 곳곳에서 주목받고 있는 순간. 정작 그 사건의 당사자들은 회랑의 치료시설에서 기이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물론 그들 중 치료시설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그 사람- 이하린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 그게······.”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한 수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최악입니다.”
“그, 그치만 훌륭했다면서요!”
“검격은 좋았지요. 상황판단이 최악이라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
세차게 혼나는 중이었다.
“왜 거기서 서로 맞찌르기를 하고 있습니까. 제가 안 왔으면 딱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혹시 하린씨 특성에 재생능력이라도 달려있습니까···?”
“······.”
“저번부터 느낀 바지만 하린씨는 매사에 조심성이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그치만··· 그치만!”
“조용히 하세요.”
“······으앙.”
그 이유는 간단했다.
타천자와의 실력 차이를 알면서도 무모하게 공격에 나서서 서로 피해를 교환했다는 것. 마인의 특성과 서로의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됐다는 게 유천하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하린으로선 나름대로 결사항전의 각오와 여러 생각 끝에 내린 선택이었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유천하의 말에 그녀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다치신 것도 그렇게 무리하시다 다치신 겁니까?”
“그건 아닌데······ 그게···”
“뭐가 아닙니까. 걱정 좀 시키지 마세요.”
“······넵.”
이미 비슷한 전적이 있는 데다가, 이렇게 또 목숨을 구해주고 염려까지 해주는 마당에 차마 뭐라 변명을 하겠는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잔소리에 이하린은 그저 입술만 오물거렸을 뿐이었다.
다만 잔소리를 듣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기에 이하린은 온몸에 붕대를 둘둘 두른 몰골로 유천하를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잔뜩 움츠러든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자 그 모습이 웃겼던 건지 옆에서 지켜보던 아리엘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언제까지 그렇게 잔소리할 거야?”
“······.”
“하린이 좀 그만 괴롭혀! 이제 막 깨어난 애한테 그러는 건 너무하지 않아?.”
“괴롭히는 거 아니야.”
“그으래? 누가 봐도 괴롭히는 건데··· 그리고 난 하린이가 아니었으면 여기 있지도 못했을걸? 난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린아.”
그렇게 말한 아리엘은 이하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꼬옥 그러잡았다. 물론 이하린은 양손에 깁스를 한 상태였기에 정확히는 그 위를 감쌌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리엘은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켜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린씨!”
“···!! 아, 아니에요! 처음부터 저 혼자였으면 그렇게 버티지는 못했을 거에요···!”
아리엘의 감사인사에 이하린이 순간 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그녀들이 화목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유천하는 미간을 꿈틀거린 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음번엔 꼭꼭 내가 지켜줄게!”
“······아리엘씨!”
초롱초롱해진 이하린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유천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 정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휙- 돌려오는 이하린의 모습에 유천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올뻔 했다.
그렇게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걸까?
하지만 유천하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하린의 행동이 위태로웠던 건 사실이었고, 그녀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러나 그녀가 이제 막 정신을 차렸다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유천하는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 그저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괴롭히려는 건 아니니까요.”
“···저, 정말요?”
“사실 실력 차이를 생각하면 타천자를 상대로 그렇게 버틴 거만 해도 정말 잘하신 겁니다.”
“······!!”
동그랗게 커진 이하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천하는 작게나마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잔소리할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했으니 그로서는 이 정도 칭찬까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특히 마지막 검로는 정말 좋았습니다. 판단과는 별개로 검격 자체는 훌륭했어요.”
그 말에 이하린이 다소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소리 없이 헤실거렸다. 계속 혼나다가 칭찬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아직 마취 기운이 몸에 남아있어서인지 정신상태가 다소 풀려있는 듯 싶었다.
물론 유천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하린의 부상이 가벼운 건 아니었다만 완치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뼈까지 박살 난 부상이었지만 이곳의 의료진을 생각하면 며칠 안에 완쾌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첫 번째 에피소드는 무사히 넘긴 셈이었다.
다만, 그로서는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이하린의 ‘원작’과도 자신이 기억하는 원작과도 달랐다는 게 다소 신경 쓰였다.
본래대로라면 다음 에피소드까지는 꽤 여유가 있을 테지만 이미 첫 에피소드가 어긋난 이상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일.
‘그렇다면 대비는 해야겠지.’
유천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이 다소 해이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여유에 안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는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행동방침을 조금 바꿀 예정이었고, 이미 그 씨앗은 뿌려놨다. 그가 앞으로 해야 할 건 보다 적극적인 개입. 그리고 눈앞에서 헤실 거리며 웃고 있는 이하린의 전력 강화였다.
그렇기에 유천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수련의 계획을 검토해보았다. 가벼운 단련부터 시작해 상당히 지난한 수련까지.
하지만 이하린은 자신의 앞날에 어떤 고난이 배정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리엘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었고, 그런 이하린을 바라보며 유천하 또한 지금만큼은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을 뿐이었다.
***
늦은 밤- 유천하도, 아리엘도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간 뒤. 병실에 홀로 남아 앉아 있던 이하린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시기가 많이 앞당겨졌지만 첫 번째 위험은 이렇게 넘어갔다. 유천하가 오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테지만 그래도 자신만 다친 채 끝났다는 건 정말 다행인 부분.
물론 유천하가 오지 않았다면··· 이란 부분이 그녀로선 심히 신경 쓰였다. 지켜주진 못할망정 이렇게 다시 또 도움을 받았다는 게 조금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하린은 다짐했다.
그녀의 눈빛이 다소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해.’
그런 생각속에 그녀는 아직 손대지 않았던 이스터에그들- 그러니까 꿍쳐둔 각종 설정목록을 떠올리며 어떤 기연 요소를 얻으러 갈까 고민해보았다.
그러던 중 한쪽에 놓여있는 작은 상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응?’
아리엘이 갖고 온 병문안 선물 뒤에 가려져 있어서 못 봤던 걸까? 그녀는 이제서야 그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하씨가 들고 온 건가?’
다만 오늘 이곳에 방문했던 사람이래봤자 학교 측의 인물과 연맹 관계자, 그리고 아리엘과 유천하뿐.
당연히 전자는 사건과 관련된 증언을 들으러 온 것이었고, 순순히 병문안을 와준 것은 유천하와 아리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병문안 선물로 뭔가를 두고 갔을 만한 사람은 아무리 떠올려도 그 둘밖에 없었고, 아리엘이 준건 다른 거였으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유천하가 떠올랐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상자를 향했다. 아무런 꾸밈없이 단색으로 포장된 작은 상자. 그곳에는 작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저번의 답례입니다.]
이하린은 살며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만 봐도 누가 주고 간 것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참. 뭘 이런 걸 다······.”
말과는 다르게 이하린은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로 조심스레 포장을 뜯어보았다. 아직은 팔을 움직이는 게 불편했기에 포장지를 벗겨내는 게 다소 힘들었지만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심히 포장을 벗겨내 보았다.
도대체 뭘 주고 간 걸까?
그렇게 포장을 뜯자 나타난 건 알록달록한 사탕. 그것도 제법 고급스럽게 포장되어있는 사탕 세트였다.
“······사탕?”
이하린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마 회랑 내에서 구매한 모양이었는데 이 상황과 조금 매치가 안된다고 해야 할까? 뭔가 병문안 선물로 주기에는 다소 뜬금없는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
순간적으로 이하린의 머릿속에 오늘의 날짜가 떠올랐다. 3월에 시작된 등천회랑의 1학기는 이제야 겨우 2주가 지나갔을 뿐. 그런 만큼 오늘의 날짜는 3월 14일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화이트 데이?”
그 순간 이하린의 얼굴이 잠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난번 유천하의 방에 놓고 왔던 선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털어냈다.
아니 별 의미 없는 거야.
초콜릿을 줬으니 사탕을 준 거겠지!
마침 날짜도 날짜니까 가게에 제일 많이 진열된 것도 사탕일 테고······.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그녀는 점점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과는 반대로 그녀의 얼굴위론 점점 미소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상자를 품에 꼭 안고선 조심스레. 그리곤 해맑게 웃어 보였을 따름이었다.
“······헤헤.”
아무도 없는 병실이었지만 이 순간 이하린은 왠지 모르게 이곳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물이 담고 있는 의미보다는,
선물을 준 사람이 중요했기에.
그리고 유천하도 아리엘도 모두 무사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모를 것이다.
유천하가 어떤 의미로 사탕을 건넸는지.
그 선물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녀로선 알 수 없는 부분이었을 테니 말이다.
등천도시에서 건네받은 여유. 그 속에 담긴 여유가, 평온한 일상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기에 유천하는 이하린에게 사탕을 선물했다.
그로서는 알사탕 하나에서 느낄 수 있었던 마음을 그대로 그녀에게 넘겨준 것 뿐이었고, 그렇게 그녀가 건네준 초콜릿에서 시작된 마음은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간 셈이었다.
유천하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그렇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담은 선물은 그렇게 이하린에게 건네어졌다.
하지만 그 의미와는 별개로.
아니 어쩌면 그 의미에 맞게, 사탕에 담겨있던 마음은 이 순간 이하린에게 평온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적없는 어두운 밤거리로 홀로 뛰쳐나갔던 그녀의 마음속으로도 어느새 달빛이 스며드는 중이었고, 소녀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백색의 마음을 품고, 밝은 밤하늘 아래.
빙의자는 이 순간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